근대사 (조선)

영화 '남한 산성'의 배경이 되는 병자호란

마도러스 2018. 1. 28. 11:00



■ 영화 '남한 산성'의 배경이 되는 병자호란


임진왜란(壬辰倭亂) 전란 중에 선조(宣祖)에 의해 세자로 책봉된 광해군(光海君)은 임진왜란 이후, 후금(後金)과 명(明)에 균형 외교를 유지하며 개혁적인 정책을 펴 나갔다. 그러나, 적자가 아니었던 광해군은 형제들을 죽이고, 대비를 유폐하였고, 오랑캐라고 할 수 있는 여진족이 세운 후금(後金)과 외교 관계를 유지하여 서인들의 불만이 커져갔다. 1623년 서인 세력은 광해군을 몰아내고, 선조(宣祖)의 손자 능양군(인조)을 왕으로 내세운 정변을 일으켰다.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새로 집권한 서인 정권은 명(明)과 화친하고, 후금(後金)을 배척하는 친명배금(親明背金) 정책을 내세웠다. 이에 후금(後金)의 태종은 1627년(정묘년) 01월 3만 명의 병력으로 조선을 침공했다. 후금의 군사는 파죽지세로 남하하여 황해도 황주까지 침범했다. ‘정묘호란’(丁卯胡亂)이다.

다급했던 조선은 급히 화친 의사를 표시했다. 후금(後金)은 명(明)을 정벌할 군사를 조선에 오랫동안 묶어둘 수 없는 약점을 갖고 있었다. 결국 후금(後金)과 조선은 형제 관계를 유지하는 조건으로 화친이 이뤄졌다. 그러나,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 때에 조선은 이미 청나라의 군사력과 국제 정세에 대한 인식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전쟁을 준비 하지 않는 과오를 범했다. 결국, 10년 후 병자호란(丙子胡亂)을 자초했다.

1636년 후금(後金)은 국호를 '청'(淸)이라 고치고, 조선에게 ‘군신’(君臣) 관계를 요구하였다. 하지만, 조선은 이를 거부하였다. 그러자, 1636년(병자년) 12월 청(淸) 태종이 2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조선(朝鮮)을 침략한 사건이 바로 ‘병자호란’(丙子胡亂)이다.

명(明)을 공격하기 전에 조선(朝鮮)을 군사적으로 복종시키는 것이 청(淸)의 목적이었다. 인조는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피하여 적의 포위 속에서 혹한과 싸우며 버텼으나 식량마저 끊어져 청에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1637년 1월 30일 인조가 한강 나루터인 삼전도(三田渡)에서 청(淸)에 항복하는 의식을 치르며 전쟁이 끝났다. 비교적 짧은 전쟁 기간에도 불구하고 항복 후, 수많은 전쟁 포로가 발생하면서 조선은 막대한 피해를 받았다. 삼전도(三田渡)는 서울시 송파구 삼전동에 있었던 옛날 한강 나루터이다. 남한산성(南漢山城)은 경기도 광주시, 성남시, 하남시에 걸쳐 있는 남한산을 중심으로 하는 산성이다.

청(清)의 전략은 자신의 강점인 기마병을 이용하여 얼어붙은 겨울에 한양을 급습하는 것이었으며, 조선이 강화도로 피신하여 항전할 것을 예상하고 강화도로 가는 길목을 막아 버렸다. 조선은 아무런 준비 없이 남한산성에서 전투를 할 수밖에 없었다.

남한산성에 고립된 인조 임금을 구원하러 남쪽에서 군사 4만 명이 달려왔다. 경기도 광주시 초월읍 대쌍령리 일대에서 이들은 청나라 군사와 마주쳤다. 조선군은 임진왜란 때 보다 훨씬 개량된 조총을 보유하고 있었다. 4만명의 조총수와 기병 300명의 대결이었다. 어찌보면, 승패는 뻔한 것이었다. 하지만, 300명의 청나라 기병한테 조선군 4만명이 완패를 당했다.

조선군은 2만씩 나누어 경상우병사 민영은 오른편 산등성이에, 경상좌병사 허완은 왼편 낮은 곳에 진을 치고 목책으로 둘렀다. 당시 상황을 기록한 조선 후기의 역사서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 따르면, 이때 조선군에 지급된 화약은 2냥이라고 되어 있다. 2냥이면 대략 10발의 탄환을 발사할 수 있다. 아직 조총에 대한 훈련이 제대로 되지 못한 군사들에게 많은 양의 화약을 지급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조선군이 진을 친 뒤엔 오히려 청군이 압도적인 수적 우위를 가진 조선군에 먼저 공격을 가했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기록에는 “청군 선봉 33명이 목 방패를 들고 남산 상봉에서부터 물고기를 꿴 것처럼 줄줄이 공격해 왔다”고 묘사했다. 상대적으로 높은 곳에 있었던 청군이 낮은 곳에 있던 조선군을 내리 덮쳤던 것이다. 조선군은 몹시 당황하고 놀랐다. 조총을 제대로 쏘기 위해서는 사거리를 감안해 적들을 충분히 근접시킨 뒤에 사격을 해야 했다. 하지만, 너무 당황한 나머지 적을 보자마자 마구 쏘아댔다.

설상가상으로 장수들 역시 경험이 없어 화약 배분을 잘하지 못해 금방 화약이 동이 나고 말았다. 선봉 33명에 의해 조선군의 화약이 모두 떨어진 것이다. 화약이 떨어져 막대기 같은 조총을 들고 우왕좌왕하는 조선 병사들 머리 위로 나머지 청나라 기병들이 뛰어올랐다. 대혼란에 빠진 조선군들은 서로 도망치기 바빴다. 이 와중에 4만 병사 중 절반이 넘는 병사가 청나라 기병들의 칼에 맞아 죽은 게 아니라 먼저 도망치려는 아군에 깔리고 밟혀 죽었다. 병자남한일기(丙子南漢日記)에 보면 “도망가다 계곡에 사람이 쓰러져서 쌓이면서 깔려 죽었는데 시체가 구릉처럼 쌓였다”고 묘사하고 있다. 사상 초유의 압사사건(壓死事件)이다. 이 과정에서 경상좌병사 허완도 깔려 죽었다.

오른편 산등성이에 있던 경상우병군은 화약을 나눠주는 과정에서 불똥이 떨어져 대폭발이 일어났는데 장수 2명이 죽고 진영이 크게 동요되었다. 호기를 만난 청나라 기병들이 덮쳤고 이 과정에서 경상우병사 민영이 전사했다.

결과적으로 청나라 기병 300명에게 조선군 4만명이 몰살당한 것이다. 조선군의 패인은 단지 화약이 떨어졌다는 것만이 아니다. 쌍령의 지형을 적절히 이용하지 못하고 밀접 대형으로 배치하는 등 전략적 안목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허완이나 민영은 그동안 특별한 능력이 없어 변방을 돌다가 인조반정에 편승해 이른바 낙하산으로 진급한 사람들이었다. 연려실기술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허완은 나이가 많고 겁에 질려서 사람을 대하면 눈물을 흘리니 사람들이 그가 반드시 패할 것을 알았다.” 무능한 인물이 중책에 임명되면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낳는지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가 바로 쌍령전투이다.

또한, 각 지역에서 올라온 조선군은 계속 패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청나라 태종 홍타이지가 30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으로 들어왔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인조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음을 깨닫고 임금의 옷을 벗고 푸른색 옷으로 갈아입고 남한산성 밖으로 나온다. 수많은 전쟁이 있었지만 우리나라 왕이 다른 나라 왕에게 머리를 조아린 일은 처음이었다.

결국, 조선은 45일만에 청나라에 항복을 하였다. 인조는 세자와 신하 500여 명을 이끌고 한강 삼전도(三田渡) 나루터에서 청나라의 황제 앞에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렸다.

청나라 황제는 인조의 항복을 받고 자신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조선에 삼전도 비석을 세우게 하였다. 이때, 굴욕적인 비문을 쓰고자 하는 신하가 없었다. 인조의 간곡한 부탁에 의해 오준이 글씨를 썼다. 오준은 치욕을 참지 못해 자신의 오른손을 돌로 짓이겨 못 쓰게 만들고 다시는 글을 쓰지 않았다 한다.

전쟁이란 어느 특정 이념에 갇혀서 보다 큰 차원의 전략을 만들 수 없을 때 승리하기 어려운 것 같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 서인이 조선 정치를 독점하게 되었고, 성리학(性理學)만을 고집하여 다른 학문을 배격하게 되었다. 청(清) 나라를 오랑케라 하여 끝까지 무시하여 새로운 서양의 실용적 과학 문명을 놓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