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거(飛車), 조선이 만든 세계 최초 비행기
● 서양의 라이트 형제 보다 무려 300년이나 앞선다.
전라도 호북(湖北) 김제 사람 정평구(鄭平九)에 의해 1592년에 세계 최초로 발명된 하늘을 나는 비행기 비거(飛車)가 제작되었다. 서양의 라이트 형제 보다 무려 300년이나 앞선다. 그리고, 임진왜란(1592-1598) 당시 실전에 사용되었음이 일본사서 왜사기(倭史記)에도 기록되어 있다. 자료에 의하면, 2-4명 이상이 탑승할 수 있고, 12km이상을 비행할 수 있는 추진체를 가지고 있었으며, 진주성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비거(飛車)에 대한 최초의 기록으로는 19세기 중엽, 조선 철종(1831-1863) 시대에 편집된 실학자 이규경(李圭景 1788-?)이 백과 사전류의 책으로 저술한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60권 60책으로 현재 규장각 소장)에 소개되어 있다. 그런데, 최초 비거를 발명했을 당시 기록이 없는 점은 설계자, 제작자 등이 임진왜란 때에 사망했거나, 유실되었거나, 또는 왜구들이 기록을 훔쳐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는 “4인승으로 규모가 컸으며, 생김새는 따오기의 모습과 비슷하며, 가죽으로 만든 주머니를 두드려서 이 안에 들어 있는 바람을 일으켜 떠오르게 한다” 라고 했다. 이 저서를 보면, 정평구(鄭平九)뿐 아니라 윤달규(尹達圭)란 사람도 비행기 만드는 비법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강원도 원주 사람을 만났는데, 그는 비거(飛車)에 관한 책을 소장하고 있거니와 이 비거는 4명을 태울 수 있으며 모양은 따오기와 같은 모양으로 배를 두드리면 바람이 일어서 공중에 떠올라 능히 백장(百丈)을 날 수 있되 양각풍(羊角風)이 불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고, 광풍이 불면 추락한다 하더라” 라는 구절도 볼 수 있다. 이규경은 또한 “전라도 호서(湖西) 노성(魯城) 지방에 사는 윤달규(尹達圭)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은 명제의 후손이다. 이 사람이 정밀하고 교묘한 기구를 만드는 재간이 있어 비거를 창안하여 기록하여 두었다...이러한 비거는 날개를 떨치고 먼지를 내면서 하늘로 올라가 뜰 안에서 산보하듯이 상하 사방을 여기저기 마음대로 거침없이 날아다니니, 상쾌한 감은 비길 바 없다. 비거(飛車)는 우선 수리개와 같이 만들고 거기에 날개를 붙이고 그 안에 틀을 설치하여 사람이 앉게 하였다. 물에서 목욕하는 사람이 헤엄치는 것처럼 또한 자벌레 나비처럼 굽혔다 폈다 하는 것처럼 하여 바람을 내면서 날개가 저절로 떠올라가니 잠깐 동안에 천리를 날아다니는 기세를 발휘하여 십여 일의 시간을 단축하게 된다. 이것은 큰 붕새가 단숨에 삼천리를 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 그렇다면 비거(飛車)는 어떻게 제작되어 졌을까?
조선왕조실록, 일본의 왜사기(倭史記), 조선책략(朝鮮策略), 임진왜란 야사, 각종 사서 등에 그 기록이 남아있다. 정평구(鄭平九)는 어렸을 때부터 총명하여 7-8세 때에 논어. 맹자를 줄줄 읽었다고 전한다. 청년이 되어 문과에 응시했으나 낙방하여 다시 무과에 응시하여 15등급으로 합격했다. 무관 말직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게 된 정평구에게 새로운 길이 열리게 되는데, 바로 훗날 이순신 장군과 함께 이름을 날리던 명장 이억기가 전라우수사로 부임해오면서 부터이다. 정평구의 사람됨을 알아본 이억기 장군이 정평구를 중용하게 된 것이다. 이억기는 선조와 종친 관계로 해군 사령관 이여송 제독과 함께 황제 군대를 이끈 육군 사령관으로서 종횡무진 전공을 세웠다.
전라우수사 이억기는 정평구(鄭平九)를 진주 병영 별군관(대위 계급)으로 발령을 낸다. 정평구가 부임지로 온지 얼마 안돼서 왜구들이 전란을 일으킨 임진왜란(1592-1598)이 발발한다. 적군은 선발대로 무려 군함 4천척의 100만 대군을 투입하여 조선을 유린하기 시작해 한양을 점령해 버린다. 이에, 정평구는 반란군을 물리치기 위해 연구 끝에 비거(飛車 오늘날의 비행기)를 발명하게 된다. 비거를 발명한 정평구는 이를 이용하여 식량을 나르고, 지포(종이 폭탄)도 발명하여 전투에 사용했다. 이렇게 약 15일간을 진주성에서 적군과 치열한 공방전을 펼쳤다. 그러나, 결국 정평구(鄭平九)는 일본의 적탄에 맞아 추락하는 비차(飛車)와 함께 장렬하게 전사하고 만다. 이때에 정평구의 나이 불과 39세였다. 정평구의 전사 사흘 후, 마침내 진주성도 함락이 되고 말았다. 육당 최남선은 정평구를 한국을 빛낸 100인의 위인으로 선정하기도 하였다.
● 진주성 전투에서 비거(飛車)는 금쪽같은 희망이었다.
원래, 정평구(鄭平九)는 한양에서 불쌍한 사람들을 많이 도와주었고, 가난한 사람을 먹여 주었으며, 의학적 지식도 있어서 몸이 다친 사람들을 치료해 주기도 하는 등 열심히 살았다. 장년이 되어서야 겨우 무과에 15등으로 급제했고, 화약을 다루는 군관이었다. 그 후, 그는 한양에서 발령지인 진주로 내려오게 되었다. 그렇게 진주로 내려와서 생활하던 도중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그는 열심히 화약을 많이 만들어 조선군이 이기도록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 공을 김시민 장군에게서 인정받아 남해 권관으로 2등급이나 승진했다. 1년이 지난 1593년, 진주성이 왜군에 의해 포위당했다. 이때부터 비거가 활약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진주성을 왜군 3만명이 포위하자 유능한 김시민 장군은 수십차례 적군의 공격에서 진주성을 지켜냈다. 그러는 와중에 김시민 장군은 전사했다. 일단 왜군은 물러났으나 2개월 후에 다시금 진주성을 대대적으로 쳐들어왔다. 진주성으로 피난온 백성들은 똘똘뭉쳐 조선군과 함께 필사적으로 싸웠다. 진주성을 포위한 왜군은 진주성을 쉽게 함락할 수가 없게 되자, 성 안에 있는 식량이 떨어지도록 몇십겹으로 성을 포위해 버린다. 이에 백성들은 굶는 자가 허다하게 속출했고, 왜군이 처들어오면 기운을 내서 하루하루 겨우 버티는 실정이었다. 이 때, 동쪽 경상남도 합천에 조선군이 주둔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곤양 군수 이종직이 달려가 진주성의 사정을 알리자, 정승 이원익은 진주성이 보름만 버틴다면 지원 부대를 이끌고 구해준다고 통보했다.
그래서, 진주성 김시민 장군은 성안의 군사와 성민들에게 15일을 버티자며 호소했다. 권관 정평구(鄭平九)는 15일 동안 버티면서 진주성 하늘로 날아올라 왜구들에게 폭격을 하는 방책을 세웠다. 정평구는 그때부터 음식에 손도 대지 않고 아프다는 핑계로 집에 문을 걸어 잠그고 혼자 생각에 골몰하였다. 밖에 무슨 일이 있어도 나와 보지 않고 방 안에만 있었다. 이렇게 3일이 지났을까? 3일 동안, 방 안에서 골똘히 생각에만 열중하던 그는 3일 후에야 밖으로 뛰쳐나와 펄쩍펄쩍 뛰면서 좋아했다. 그걸 백성들이 이상하게 여겼으나, 그는 신경 쓰지 않았고 곧바로 진주성 성주를 만나 자신이 설계한 비거(飛車) 설계도를 보여주자, 김시민은 곧바로 진주성 방위 대장에게 명령하여 정평구를 돕게 했다. 감영에서 공인 수십명(100명 정도)을 제공받고는 자기 설계도 대로 비행기 제작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때 진주 감영의 재산이 별로 없었으므로 양반과 백성들에게 일정한 기부금을 얻어 재료를 겨우 구해, 5일 뒤에야 심혈을 기울여 만들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또 2일 후, 드디어 세계 최초 비행기가 제작되었다. 정평구가 만든 비행기는 곧바로 시험 비행을 하기 시작했고, 진주성 주민들은 경탄과 감탄을 자아냈다. 정평구는 홀로 시험 배행을 시행했다. 하늘을 날아올라 성민들이 그를 볼 수 없을 정도로 높이 날았다가 갑자기 빠른 속도로 진주성 북문에 착륙하였다. 그런데, 정평구는 어느 한 군데 다친 곳이 없었다.
● 진주성의 '공중 폭격전'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친 비거(飛車)
그때부터 정평구(鄭平九)가 발명한 비거(飛車)를 이용해 적군 진영에 대대적인 '공중 폭격전'이 펼쳐졌다. 전군들의 비거를 보고 놀라면서도 조총과 화살을 쏘아 댔으나, 비거 근처에 오지도 못하였다. 비거에 탑승한 2-4명은 폭약으로 만든 폭탄을 적군 진영에 퍼부었다. 비거가 출전한 첫날, 왜군들은 공중 폭격 공습에 무려 수백명이 죽고 수천명이 다쳤다고 한다. 둘째날, 두번째 출전했다. 적군은 이번에는 하늘로 총도 쏘고 방패로 막고 시도도 해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비거(飛車)는 하늘을 날며 적진을 마음껏 유린했다. 적군은 이런 비거의 공격에 겁을 집어 먹고 땅굴을 파기 시작했다. 적장들은 땅굴 속에 숨어 나오지 못했다.
셋째날, 적군들은 지레 겁을 먹어 아예 땅굴 속에서 나오지 못했다. 정평구는 이런 와중에서도 비행사 25명을 훈련시켜 각각 비거 한대씩을 조종하도록 했다. 25대의 비행기는 합천에 있는 아군 부대로 날아가 진주성 성민들이 하루동안 먹을 양식을 가득 싣고 돌아왔다. 정평구의 비거는 그때 공군으로서 편대를 이루었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진주성 주민들도 양곡을 얻고, 전투에 전력을 다하자 오히려 적군들이 초조해졌다. 이제 3일 후면 이원익이 이끄는 아군 부대가 진주성에 들이닥친다. 왜군의 입장에서는 그 전에 어떻게든 진주성을 함락시켜야 했다. 넷째날, 비행기 편대장 정평구(鄭平九)는 자신의 운세를 점을 치다가 불길함을 느꼈다. 그래서, 아프다는 핑계로 공습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틈을 타서 적군들은 진주성 동문으로 곧바로 쳐들어왔다. 진주성 주민들은 결사항전했다.
다섯째날, 정평구는 자신의 흉이 다한 줄 알고 밖으로 나오다가 깃대가 부러져 그의 발 앞에 떨어졌다. 그걸 보고 많은 사람들이 불길하다고 수근거렸다. 하지만, 그는 무시하고 그냥 비차(飛車)를 타고 공습에 나섰다. 그가 공습에 나서 적군 수백명이 다시 죽었으나 그가 당당하게 진주성으로 돌아올 즈음, 왜군 조총 부대의 집단 사격이 이어졌다. 왜군들은 계속 그를 향해 조총을 퍼부어댔다. 정평구는 한동안 요리조리 잘 피하였다. 그러나, 종국에는 빗발치는 총탄을 피하지 못하고 흉탄에 맞고 피를 흘렸다. 비거는 엄청난 속력과 함께 진주성 안으로 떨어졌다.
백성들이 모두 그쪽으로 달려갔고, 그곳에는 정평구가 거의 죽은 채로 신음하고 있었다. 그리고, 의원이 달려와 맥을 짚어봤으나, 이미 세상을 떠난 후였다. 이윽고, 진주성은 함락되었다. 진주성 군사들과 성민들은 최후를 맞았으며, 비행기 25대도 폭파되고 말았다. 이후, 조선 군부에서는 비거(飛車)를 만들고자 설계도를 찾았으나 설계도가 찾을 수 없어 만들지를 못하였다. 그 이유는 왜구들이 진주성을 함락한 후, 모조리 불태워 버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평구가 설계했던 비행기 설계도가 탔는지, 아니면 왜구들이 훔쳐가서 자기들이 연구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 TV 방송에 소개된 조선시대 비행기 영상
→ http://science.ytn.co.kr/program/program_view.php?key=201606281613488890&s_mcd=0082
★ 현재, 공군 사관 학교에는 한국. 러시아 항공 학자들이 복원한 비거(飛車)를 보관 중이다. 국립 과천 과학관에도 비거(飛車)를 전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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