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봉오동 전투, 일본군 격파 영화로 개봉
● 2019년 08월 07일 개봉한 ‘봉오동 전투’는 일본군을 상대로 거둔 독립군의 첫 대규모 승리를 다루었다. 홍범도 장군을 주축으로 독립군들은 봉오동을 근거지로 삼고 활동했고,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해 만주 일대에 집결한 일본군 월강 추격 대대를 ‘죽음의 골짜기’까지 유인해 궤멸시키는 전투에 1920년 06월 04일 돌입했다. 영화는 각자의 생업을 내려놓고 나라를 지키기 위해 뛰어든 이름 모를 영웅들에 초점을 맞췄다. 연기파 배우들이 합류해서 사실감을 높였다. ‘봉오동 전투’를 연출한 원신연 감독은 “이 영화는 인간의 저항과 숭고함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들은 목숨을 걸고 싸웠고, 우리는 그들이 지켜낸 땅에서 발을 딛고 살고 있다. 우리는 끊임없이 그들의 삶을 이야기해야 한다. 이야기를 함으로써 그들을 기억해야 한다”고 전했다.
● 1919년 3.1 운동 이후, 만주 지역에서 무장 독립 운동이 활발해졌다. 사실, 무장 단체들의 한반도 진공 시도는 여러 번 있었다. 1919년 06월 파리 강화 회의가 종료되는 시점과 1919년 09월 23일 열렸던 국제 연맹 회의 개최 시점이었다. 그러나, 당시 무장 단체들은 군사력이 형편없어서 시간이 필요했다. 무기와 탄약, 군수 물자 공급이 부족했다. 산간 벽지에 기지를 건립했기 때문에 식량도 부족한 상황이었다. 시기적으로는 괜찮았으나 내실을 다지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겨울을 버티고 1920년 봄부터 국내 진공을 준비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상하이 임시 정부 간부들이 무력이 아닌 외교로 풀려고 했기 때문에 시기상조라 생각했다. 1920년 06월 홍범도가 봉오동 전투를 할 때에도 시기상조라 생각했다. 1919년 4월 11일 출범한 상하이 임시 정부는 친미 성향의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이었고, 안창호가 사무를 주도했다. 무장 투쟁을 외쳤던 이동휘는 이승만 밑에서 국무총리를 안 하려고 했다. 우여곡절 끝에 이동휘는 1919년 11월초에야 국무총리로 취임했다. 이를 계기로 상하이 임시 정부 내에 독립 전쟁론이 불붙게 됐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국내 진공 작전에 힘을 쏟았다. 중국과 러시아의 국경 일대에서 독립군을 모집하고 훈련했다.
● 1920년 06월 홍범도 장군의 봉오동 전투가 봉오동 전투를 승리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네 가지가 있다. 첫째, 북간도 지역은 중국이 표면상으로는 단속했으나 속으로는 지지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일본이 함부로 못했다. 둘째, 북간도에 1914년 광복군 정부가 들어서면서 평민 출신의 청장년들이 다수 무장 독립 운동에 참여하게 됐다. 의병장이 양반 출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보수주의에서 탈피할 수 있었다. 셋째, 북간도 지역 독립군은 러시아의 반일 단체와 밀접한 연계를 유지했다. 무기 공급이 나름 원활했다. 넷째, 이미 봉오동은 독립군의 전초 기지였다. 1908년부터 독립군 연합 부대의 지휘관이었던 최진동이 개척한 곳이었다. 한인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으며 지리적으로도 요충지였다.
★ 1919년 3.1 만세 운동이 일어난 후, 만주 지역에서 조선 독립군의 무장 활동이 활발해지게 되자, 일제(日帝)는 1920년 05월 독자적인 조선 독립군 및 독립 투쟁 세력을 소탕 및 토벌을 하기 위한 작전을 펴게 되었고, 이 때부터 만주 지역에서도 조선 독립군의 무장 활동을 방해하고 소탕하기 위한 작전이 시작되었다. 이에 맞서 홍범도가 이끌었던 대한 독립군은 북간도 지역 독립군과 연합하여 대한 북로 독군부(800-900명)를 결성하고, 만주 지린성 봉오동으로 집결하여 한반도 진공 작전에 돌입하게 된다. 그 당시, 제1차 세계대전 전쟁이 끝나자, 러시아군 산하 체코 군단이 블라디보스토크를 경유하여 귀국하면서 우수한 유럽제 무기를 독립군에게 넘겼기 때문에 독립군의 화력은 이전 보다 크게 배가된 상태였다. 그러나, 일본군은 평소에 독립군을 크게 얕잡아 보았기 때문에 독립군이 매복 습격을 해와도 금방 제압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자신감은 산산이 부서졌다.
★ 봉오동은 분지 형태였고, 입구에서 안쪽까지는 골짜기가 25리 정도 형성되어있다. 홍범도 부대가 대기하고 있던 장소는 일본군이 기관총을 쏘기 어려운 장소이다. 또한, 매복을 할 경우, 일제군이 포병을 동원하여 대포를 쏘기 힘들다. 홍범도는 의병 시절 부족한 화력을 극복했던 방법들을 봉오동 전투에 그대로 적용했다. 일본군 추격대는 1920년 06월 07일 08시 30분경부터 독립군의 무장 활동을 토벌하기 위해 봉오동 하촌에서 집집마다 수색하였다. 조선인 민간인은 미리 피난을 갔기 때문에 많은 집들은 비어 있었다. 하지만, 일본군들은 그들이 보기에 의심되는 민간인이 있으면, 곧바로 사살했다. 일본군 추격대는 홍범도 부대가 매복했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매복 성공 여부가 아니다. 병사들이 훈련을 제대로 받았고, 홍범도의 사격 통제를 그대로 따랐다는 것이다. 일본군 추격대가 매복 장소로 다가왔다. 홍범도가 하늘을 향해 총을 쐈다. 동서남북에 매복하던 항일군이 사격을 퍼부었다. 일본 군인들은 화력은 우세했으나 지형 문제 때문에 그 화력을 제대로 쓰지 못 해고 제대로 반격도 못했다. 독립군은 도주하는 일본 군인들을 계속 추격하며 사격했다.
■ 박정희(朴正熙)는 독립군(獨立軍)을 무참히 토벌했었다. 1939년 08월 24일 일본군(日本軍)으로서 동북 항일 연군(독립군)을 토벌하는 대사하 전투에 참여했다. 이 후에도 만주 일대에서 독립군(獨立軍) 토벌에 나섰다. 군관 학교 졸업 후, 5개월 정도 현장 실습을 마치고, 1942년 10월 일본 육군 사관 학교 57기에 3학년으로 편입했으며, 1944년 04월 육군 사관 학교를 졸업했다. 1944년 12월 만주군 보병 제8단 육군 소위(少尉)로 임관하였다. 1945년 07월 10일에 만주군 중위(中尉)로 승진함과 동시에 만주(滿洲) 동북부 열하성(熱河省)의 만주군 보병 제8사단에 배속되었으며, 그들의 토벌 대상은 팔로군(八路軍)이었다. 독립군 투사들이 주로 팔로군(八路軍)에 가담했는데, 박정희가 팔로군(八路軍) 토벌에 참여한 것이다. 독립군(獨立軍)을 토벌한 것이다. 1960년, 장준하(張俊河) 선생은 ‘농촌 부흥 운동’ 및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추진을 위한 ‘국토 개발 기획단’ 사업을 발족시켰는데, 박정희(朴正熙)는 장준하(張俊河) 선생의 기획을 빼앗고, 그를 암살한 후, 1970년 “새마을 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은근슬쩍 간판을 바꾸어서 내걸었다.
■ 1965년 한일(韓日) 수교 이후, 박정희 경제는 결국 카드 돌려 막기 경제였고, 만성적인 적자 구조 경제였다. 마이너스 카드 뽑아다가 계속 써 대고 나서 그걸 다시 돌려막기 하다가 망하는 그런 경제였다. 결국, 미국과 유럽 및 일본의 차관(借款)을 끌어다가 돌려 막기에 급급했다. 1962년도 무역 적자 규모가 5천 5백만 달러였는데, 1971년에는 5억8천2백만 달러, 1974년에는 20억 달러, 1979년에는 30억 달러로 상승했다. 결국 외국 차관(借款)으로 무역 적자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1980년대 특히 1986년부터 1988년 사이에 3저 호황(저금리. 저달러. 저유가)이 없었으면 한국은 아마 총체적 국가 부도를 맞이했을 것이다.
■ 역대 대통령 재임 기간의 무역 수지를 살펴보면, 박정희 233억 달러 적자, 전두환 8억 달러 흑자, 노태우 132억 달러 적자, 김영삼 366억 달러 적자, 김대중 846억 달러 흑자, 노무현 980억 달러 흑자 등이다. 1986년부터 1988년 사이에 3저 호황(저금리. 저달러. 저유가)이라는 천혜의 외부 환경 때문에 대한민국 건국 이래 최초로 무역 흑자를 기록했다. 박정희(朴正熙) 임기 내에 국가 부도 위기가 10번 정도 있었다. 외국에서 빌려온 차관 금액의 40% 가까이를 부채 해결에 쓰게 됨으로써 부채 돌려 막기 경제가 계속 반복되었다. 다행히도 1980년대 이후 민주화(民主化) 운동을 거치면서 정치 경제가 새로운 패러다임을 재구성하는 단계를 밟으면서 경제 체질이 개선되었다.
★ 1950년대까지만 해도 독일(Germany)에서 여론 조사를 하면, 히틀러(Adolf Hitler)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꼽혔다. 하지만, 복지 국가의 기틀을 잡아간 이후부터는 일부 파시즘(fascism) 추종 세력에게서만 추앙받는 꼴이 되었다. 이와같이, '더 좋은 세상'을 살아보지 못한 사람들이 겪을 수밖에 없는 한시적 한계이다. 우리 현대사(現代史)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으니, 흑백(黑白)을 구분하지 못하고 독재 정권의 해악(害惡)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군사 정권을 미화(美化)하거나 찬양하는 나라는 문명 사회의 일원이 될 수 없다.
★ 일본(日本)은 일제(日帝) 시대에 매국노였던 박정희(朴正熙)에게 1961년 05월 16일 군사 쿠데타를 지원했다. 그 결과, 일본의 아들이 되어버린 박정희를 통해 일제(日帝) 강제 징용 및 위안부에 대한 배상과 사과도 안 하고, 일제 만행의 수백만분의 일도 안 되는 용돈을 주고 1965년 한일(韓日) 수교한 것으로 배상은 모두 다 끝났다고 말한다. 도대체 어이가 없고, 어불성설이다.
★ 일본은 그동안 일제(日帝) 강점기(1910-1945)의 강제 징용 및 위안부에 대한 배상과 사과를 단 한번도 하지 않았다. 일제(日帝)의 오랑캐 만행(蠻行)을 아무런 반성 없이 승계한 일본 아베 정권의 후안무치(厚顔無恥)한 책동에 적극 대처해야 한다. 2019년 08월 02일, 일본은 문제 해결을 위한 한국의 외교적 노력을 끝내 거부하고, 한국에 대해 백색 국가(우방국) 명단에서 제외시키는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양국의 우호 관계를 매우 악화시키는 대단히 무모한 결정이다. 일본이 G20 회의에서 강조한 자유 무역 질서를 스스로 부정하는 행위이다.
★ ‘강제 노동 금지’와 ‘3권 분립에 기초한 민주주의’라는 인류 보편적 가치와 국제법의 대원칙을 일본 정부는 위반했다. 우리의 가장 가까운 이웃이며 우방으로 여겨왔던 일본이 한국에 대해 경제 침략 행위를 하는 일련의 조치는 참으로 실망스럽고 개탄스러운 일이다. 세계 경제에 민폐를 끼치는 행위이므로 국제 사회의 지탄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 우리는 수많은 역경을 이겨내고 오늘에 이르렀다. 적지 않은 어려움이 예상되지만, 우리 기업들과 국민들에겐 그 어려움을 극복할 역량이 있다. 과거에도 그래왔듯이 우리는 역경을 오히려 도약하는 기회로 만들어낼 것이다. 정부는 소재 부품 산업의 경쟁력을 높여서 다시는 국제 기술 패권에 휘둘리지 않게 하고, 제조업 강국의 위상을 높이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 2019년, 우리는 특별히 3.1 독립 운동과 임시 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하였고, 새로운 미래 100년을 다짐했다. 한국 국민의 민주 역량은 세계 최고 수준이며, 경제 역량도 예전에 비할 바 없이 성장하였다. 어떠한 어려움도 충분히 극복할 저력을 가지고 있다. 지금의 도전을 오히려 기회로 여기고, 새로운 경제 도약의 계기로 삼는다면, 우리는 충분히 일본의 경제 침략 망동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 2019년 08월 02일, 일본 아베 정부는 한국에 대해 백색 국가(우방국) 명단에서 제외시키는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화이트 리스트(white list)에서 제외됨으로써 사실상 거의 모든 산업에 걸쳐 새로운 수출 규제를 적용하고, 자유 무역 질서를 차단 봉쇄하는 조치를 취한 셈이다. 일본 정부의 화이트 리스트(white list) 배제는 세계 자유 무역 질서를 교란하는 동시에 정경(正經) 분리의 원칙을 훼손하는 부당한 결정이다. 화이트 리스트 배제는 2018년 한국 대법원의 일제(日帝) 강제 징용 배상 판결에서 비롯됐다는 점에서 안보상의 이유라는 일본 정부의 허위 주장은 명백한 기만 행위이다.
★ 2019년 07월 02일, 일본 정부는 일제(日帝) 강제 징용에 대한 한국 대법원의 배상 판결(2018.10.30)을 이유로 한국으로 수출되는 반도체 핵심 소재의 수출 규제 조치를 전격 단행했었다. 2018년 한국 대법원의 강제 징용 배상 판결은 천추만대(千秋萬代)를 두고도 씻을 수 없는 일본의 과거 죄악(罪惡)에 대한 대가(代價)를 기어이 받아내려는 한국 민심의 반영이었다. 또한, 우리 민족은 물론 국제 사회는 일본이 과거에 저지른 죄악(罪惡)에 대해 성실히 사죄(謝罪)할 것을 한결같이 요구하고 있다. 일본의 경제 보복 조치는 과거 강제 징용의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파렴치하고 후안무치(厚顔無恥)한 본성을 보여주는 망동(妄動)이다.
★ 일본 정부는 일제(日帝) 시대의 가해자로서 과거사에 대한 반성과 사과를 거부하는 것도 부족해서 삼권 분립에 기초한 한국 사법부의 판결에 대해 경제 보복을 자행하는데 대해 분노할 수 밖에 없다. 작금의 일본 정부 행태는 과거 임진 왜란(1592-1598)과 일제 강점기(1910-1945) 침략의 역사를 떠올리게 한다. 그 당시, 우리 선조들은 들불처럼 일어나서 나라와 겨레를 위해 초개(草芥)와 같이 목숨을 던졌다. 우리는 그 후손으로서 우리나라의 역사와 경제를 수호하기 위해 일본 정부의 경제 침략에 단호하게 맞서 싸울 것이다.
★ 일본은 1941년 12월 07일 태평양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해서 제2차 세계 대전을 발발시켰다. 그리고, 일본은 2019년 08월 02일 한국 경제를 침략하기 위해 화이트 리스트(white list)에서 한국을 제외하는 만행(蠻行)을 저질렀다. 일본 아베 정부의 경제 침략 행위에 맞서서 우리는 제2의 독립 운동, 기술 독립 운동의 정신으로 비상하게 임해야 할 때이다. 일본 정부의 부당한 경제 침략 행위는 우리 경제를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으려는 음흉한 계략이므로 결코 용납할 수 없다. 우리는 ‘제2의 독립 운동’을 한다는 비상한 각오로 일본의 경제 침략에 단호하게 대응해나갈 것이다. 일본 정부는 과거 군국주의의 망상에서 하루빨리 벗어나 세계 자유 무역 질서에 따라 경제 침략 행위를 철회해야 한다. 일본 정부는 과거사에 대해 책임 있는 자세로 사과하고, 일본 기업들은 피해자들에게 정당한 배상을 지급해야 한다.
★ WTO(세계 무역 기구)의 세계 자유 무역 질서 속에서 백색 국가(우방국)는 포괄 허가 혜택을 받기 때문에 모든 수출 건에 대해 한번 종합 허가를 받으면 되지만, 일반 국가는 수출 건별로 허가를 받아야 한다. 허가의 유효 기간은 통상 3년에서 6개월로 대폭 축소된다. 반대로 처리 기간은 1주일 이내에서 90일 이내로 확 길어진다. 허가를 받기 위해 제출해야 하는 서류도 2종에서 품목별 최대 9종으로 늘어난다.
★ 일본은 이번에 우습고도 황당한 일을 저질렀다. 무역 흑자국 일본(日本)이 무역 적자국 한국(韓國)을 상대로 무역 보복으로 선제 공격을 했다. 물건 팔아서 이득을 보는 쪽이 물건 사가는 쪽에 공격을 해서 일시적으로 혼란에 빠지게 됐다. 하지만, 사가는 쪽이 공격할 무기는 더 많다. 일본한테 물건 못 사면 큰 일 나고 넙죽 엎드리리라 생각했나 보다.
■ 독립 운동하면, 3대 가난 옛말되도록 한다.
서울시가 2,020년 01월부터 서울에 사는 저소득 독립 유공자 후손 3,300여 가구에 월 20만원의 생활 지원 수당을 지급한다. 서울시 내에 있는 대학에 다니는 독립 유공자 후손에게는 매년 300만원의 장학금도 준다. 서울시는 광복절을 앞둔 2019년 08월 12일 이 같은 내용의 ‘독립 유공자 후손 예우 및 지원 강화 계획’을 발표했다. 이번 지원 계획은 2012년과 2018년에 이미 발표했던 보훈 종합 계획을 확대·강화한 것이다.
생활 지원 수당 지급 대상자는 독립 유공자 후손 (자녀. 손자녀) 중 기초 생활 수급자 및 중위 소득 70% 이하인 가정이다. 대학생 장학금은 독립 유공자의 후손으로 서울 소재 대학을 다니는 학생들이다. 2,020년 03월부터 총 100명에게 지급된다. 독립 유공자와 유족 단체인 광복회 서울시 지부는 취업 특강·멘토링 등도 함께 제공하기로 했다. 유공자 후손에 대한 국민 임대 주택 특별 공급도 확대한다. 2,020년부터 입주 예정인 고덕강일. 마곡 지구 등 국민 임대 주택 사업 지구 중 총 15% (544호)를 독립 유공자 후손에게 특별 공급한다.
매월 10㎥의 상하수도 요금과 서울 시내 공영 주차장 요금 80% 감면도 새롭게 추진한다. 독립 유공자 본인과 선순위 유족 1인이 대상이며, 약 1,900명이 이 혜택을 받을 것으로 전망된다.
독립 유공자 후손에게 집중된 이번 지원책은 기존 독립 유공자 본인에게 집중했던 보훈 정책 보다 나아간 것이다. 서울시에 따르면, 독립 유공자 후손의 74.2%가 월 소득 200만원에 못 미칠 정도로 생활고를 겪고 있다. 서울시 관계자는 “2019년에는 3·1운동 100주년과 임시 정부 100주년 등 뜻 깊은 해인데다 한일 관계 경색으로 그 어느 때 보다 의미 있는 시기”라며, “독립 유공자 후손들에게 현실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는 지원책을 내놓은 이유”라고 설명했다.
서울시는 그동안 애국 지사 본인에게만 매월 20만원의 수당을 지원해왔다. 2019년 서울에 거주하는 생존 독립 유공자는 10명에 불과하지만, 독립 유공자 후손은 3대손까지 1만 7,000여명으로 추산된다. 독립 유공자 장준하 선생의 아들인 장호건 광복회 서울시 지부장은 “독립 유공자 후손의 대부분이 쪽방에서 생활하는 등 생활고가 심각하다. 물질적 지원을 넘어 독립 운동한 분들을 조상으로 모신 우리의 자부심과 명예를 예우해주는 것이 고맙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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