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사 (조선)

비거(飛車), 조선이 만든 세계 최초 비행기

마도러스 2018. 3. 23. 00:45


■ 비거(飛車), 조선이 만든 세계 최초 비행기

 

● 서양의 라이트 형제 보다 무려 300년이나 앞선다.

 

전라도 호북(湖北김제 사람 정평구(鄭平九)에 의해 1592년에 세계 최초로 발명된 하늘을 나는 비행기 비거(飛車)가 제작되었다서양의 라이트 형제 보다 무려 300년이나 앞선다그리고임진왜란(1592-1598) 당시 실전에 사용되었음이 일본사서 왜사기(倭史記)에도 기록되어 있다자료에 의하면, 2-4명 이상이 탑승할 수 있고, 12km이상을 비행할 수 있는 추진체를 가지고 있었으며진주성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비거(飛車)에 대한 최초의 기록으로는 19세기 중엽조선 철종(1831-1863) 시대에 편집된 실학자 이규경(李圭景 1788-?)이 백과 사전류의 책으로 저술한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60권 60책으로 현재 규장각 소장)에 소개되어 있다그런데최초 비거를 발명했을 당시 기록이 없는 점은 설계자제작자 등이 임진왜란 때에 사망했거나유실되었거나또는 왜구들이 기록을 훔쳐갔을 것으로 추정된다'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는 “4인승으로 규모가 컸으며생김새는 따오기의 모습과 비슷하며가죽으로 만든 주머니를 두드려서 이 안에 들어 있는 바람을 일으켜 떠오르게 한다” 라고 했다이 저서를 보면정평구(鄭平九)뿐 아니라 윤달규(尹達圭)란 사람도 비행기 만드는 비법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강원도 원주 사람을 만났는데그는 비거(飛車)에 관한 책을 소장하고 있거니와 이 비거는 4명을 태울 수 있으며 모양은 따오기와 같은 모양으로 배를 두드리면 바람이 일어서 공중에 떠올라 능히 백장(百丈)을 날 수 있되 양각풍(羊角風)이 불면앞으로 나아갈 수 없고광풍이 불면 추락한다 하더라” 라는 구절도 볼 수 있다이규경은 또한 전라도 호서(湖西노성(魯城지방에 사는 윤달규(尹達圭)라는 사람이 있는데그 사람은 명제의 후손이다이 사람이 정밀하고 교묘한 기구를 만드는 재간이 있어 비거를 창안하여 기록하여 두었다...이러한 비거는 날개를 떨치고 먼지를 내면서 하늘로 올라가 뜰 안에서 산보하듯이 상하 사방을 여기저기 마음대로 거침없이 날아다니니상쾌한 감은 비길 바 없다비거(飛車)는 우선 수리개와 같이 만들고 거기에 날개를 붙이고 그 안에 틀을 설치하여 사람이 앉게 하였다물에서 목욕하는 사람이 헤엄치는 것처럼 또한 자벌레 나비처럼 굽혔다 폈다 하는 것처럼 하여 바람을 내면서 날개가 저절로 떠올라가니 잠깐 동안에 천리를 날아다니는 기세를 발휘하여 십여 일의 시간을 단축하게 된다이것은 큰 붕새가 단숨에 삼천리를 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 그렇다면 비거(飛車)는 어떻게 제작되어 졌을까?

 

조선왕조실록일본의 왜사기(倭史記), 조선책략(朝鮮策略), 임진왜란 야사각종 사서 등에 그 기록이 남아있다정평구(鄭平九)는 어렸을 때부터 총명하여 7-8세 때에 논어맹자를 줄줄 읽었다고 전한다청년이 되어 문과에 응시했으나 낙방하여 다시 무과에 응시하여 15등급으로 합격했다무관 말직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게 된 정평구에게 새로운 길이 열리게 되는데바로 훗날 이순신 장군과 함께 이름을 날리던 명장 이억기가 전라우수사로 부임해오면서 부터이다정평구의 사람됨을 알아본 이억기 장군이 정평구를 중용하게 된 것이다이억기는 선조와 종친 관계로 해군 사령관 이여송 제독과 함께 황제 군대를 이끈 육군 사령관으로서 종횡무진 전공을 세웠다.

 

전라우수사 이억기는 정평구(鄭平九)를 진주 병영 별군관(대위 계급)으로 발령을 낸다정평구가 부임지로 온지 얼마 안돼서 왜구들이 전란을 일으킨 임진왜란(1592-1598)이 발발한다적군은 선발대로 무려 군함 4천척의 100만 대군을 투입하여 조선을 유린하기 시작해 한양을 점령해 버린다이에정평구는 반란군을 물리치기 위해 연구 끝에 비거(飛車 오늘날의 비행기)를 발명하게 된다비거를 발명한 정평구는 이를 이용하여 식량을 나르고지포(종이 폭탄)도 발명하여 전투에 사용했다이렇게 약 15일간을 진주성에서 적군과 치열한 공방전을 펼쳤다그러나결국 정평구(鄭平九)는 일본의 적탄에 맞아 추락하는 비차(飛車)와 함께 장렬하게 전사하고 만다이때에 정평구의 나이 불과 39세였다정평구의 전사 사흘 후마침내 진주성도 함락이 되고 말았다육당 최남선은 정평구를 한국을 빛낸 100인의 위인으로 선정하기도 하였다.

 

● 진주성 전투에서 비거(飛車)는 금쪽같은 희망이었다.

 

원래정평구(鄭平九)는 한양에서 불쌍한 사람들을 많이 도와주었고가난한 사람을 먹여 주었으며의학적 지식도 있어서 몸이 다친 사람들을 치료해 주기도 하는 등 열심히 살았다장년이 되어서야 겨우 무과에 15등으로 급제했고화약을 다루는 군관이었다그 후그는 한양에서 발령지인 진주로 내려오게 되었다그렇게 진주로 내려와서 생활하던 도중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그는 열심히 화약을 많이 만들어 조선군이 이기도록 많은 도움을 주었다그 공을 김시민 장군에게서 인정받아 남해 권관으로 2등급이나 승진했다. 1년이 지난 1593진주성이 왜군에 의해 포위당했다이때부터 비거가 활약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진주성을 왜군 3만명이 포위하자 유능한 김시민 장군은 수십차례 적군의 공격에서 진주성을 지켜냈다그러는 와중에 김시민 장군은 전사했다일단 왜군은 물러났으나 2개월 후에 다시금 진주성을 대대적으로 쳐들어왔다진주성으로 피난온 백성들은 똘똘뭉쳐 조선군과 함께 필사적으로 싸웠다진주성을 포위한 왜군은 진주성을 쉽게 함락할 수가 없게 되자성 안에 있는 식량이 떨어지도록 몇십겹으로 성을 포위해 버린다이에 백성들은 굶는 자가 허다하게 속출했고왜군이 처들어오면 기운을 내서 하루하루 겨우 버티는 실정이었다이 때동쪽 경상남도 합천에 조선군이 주둔해 있다는 소식을 듣고곤양 군수 이종직이 달려가 진주성의 사정을 알리자정승 이원익은 진주성이 보름만 버틴다면 지원 부대를 이끌고 구해준다고 통보했다.

 

그래서진주성 김시민 장군은 성안의 군사와 성민들에게 15일을 버티자며 호소했다권관 정평구(鄭平九)는 15일 동안 버티면서 진주성 하늘로 날아올라 왜구들에게 폭격을 하는 방책을 세웠다정평구는 그때부터 음식에 손도 대지 않고 아프다는 핑계로 집에 문을 걸어 잠그고 혼자 생각에 골몰하였다밖에 무슨 일이 있어도 나와 보지 않고 방 안에만 있었다이렇게 3일이 지났을까? 3일 동안방 안에서 골똘히 생각에만 열중하던 그는 3일 후에야 밖으로 뛰쳐나와 펄쩍펄쩍 뛰면서 좋아했다그걸 백성들이 이상하게 여겼으나그는 신경 쓰지 않았고 곧바로 진주성 성주를 만나 자신이 설계한 비거(飛車설계도를 보여주자김시민은 곧바로 진주성 방위 대장에게 명령하여 정평구를 돕게 했다감영에서 공인 수십명(100명 정도)을 제공받고는 자기 설계도 대로 비행기 제작에 들어갔다.

 

그러나그때 진주 감영의 재산이 별로 없었으므로 양반과 백성들에게 일정한 기부금을 얻어 재료를 겨우 구해, 5일 뒤에야 심혈을 기울여 만들기 시작했다그로부터 또 2일 후드디어 세계 최초 비행기가 제작되었다정평구가 만든 비행기는 곧바로 시험 비행을 하기 시작했고진주성 주민들은 경탄과 감탄을 자아냈다정평구는 홀로 시험 배행을 시행했다하늘을 날아올라 성민들이 그를 볼 수 없을 정도로 높이 날았다가 갑자기 빠른 속도로 진주성 북문에 착륙하였다그런데정평구는 어느 한 군데 다친 곳이 없었다.

 

● 진주성의 '공중 폭격전'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친 비거(飛車)

 

그때부터 정평구(鄭平九)가 발명한 비거(飛車)를 이용해 적군 진영에 대대적인 '공중 폭격전'이 펼쳐졌다전군들의 비거를 보고 놀라면서도 조총과 화살을 쏘아 댔으나비거 근처에 오지도 못하였다비거에 탑승한 2-4명은 폭약으로 만든 폭탄을 적군 진영에 퍼부었다비거가 출전한 첫날왜군들은 공중 폭격 공습에 무려 수백명이 죽고 수천명이 다쳤다고 한다둘째날두번째 출전했다적군은 이번에는 하늘로 총도 쏘고 방패로 막고 시도도 해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비거(飛車)는 하늘을 날며 적진을 마음껏 유린했다적군은 이런 비거의 공격에 겁을 집어 먹고 땅굴을 파기 시작했다적장들은 땅굴 속에 숨어 나오지 못했다.

 

셋째날적군들은 지레 겁을 먹어 아예 땅굴 속에서 나오지 못했다정평구는 이런 와중에서도 비행사 25명을 훈련시켜 각각 비거 한대씩을 조종하도록 했다. 25대의 비행기는 합천에 있는 아군 부대로 날아가 진주성 성민들이 하루동안 먹을 양식을 가득 싣고 돌아왔다정평구의 비거는 그때 공군으로서 편대를 이루었다는 사실이다그리하여 진주성 주민들도 양곡을 얻고전투에 전력을 다하자 오히려 적군들이 초조해졌다이제 3일 후면 이원익이 이끄는 아군 부대가 진주성에 들이닥친다왜군의 입장에서는 그 전에 어떻게든 진주성을 함락시켜야 했다넷째날비행기 편대장 정평구(鄭平九)는 자신의 운세를 점을 치다가 불길함을 느꼈다그래서아프다는 핑계로 공습을 하지 않았다그리고이틈을 타서 적군들은 진주성 동문으로 곧바로 쳐들어왔다진주성 주민들은 결사항전했다.

 

다섯째날정평구는 자신의 흉이 다한 줄 알고 밖으로 나오다가 깃대가 부러져 그의 발 앞에 떨어졌다그걸 보고 많은 사람들이 불길하다고 수근거렸다하지만그는 무시하고 그냥 비차(飛車)를 타고 공습에 나섰다그가 공습에 나서 적군 수백명이 다시 죽었으나 그가 당당하게 진주성으로 돌아올 즈음왜군 조총 부대의 집단 사격이 이어졌다왜군들은 계속 그를 향해 조총을 퍼부어댔다정평구는 한동안 요리조리 잘 피하였다그러나종국에는 빗발치는 총탄을 피하지 못하고 흉탄에 맞고 피를 흘렸다비거는 엄청난 속력과 함께 진주성 안으로 떨어졌다.

 

백성들이 모두 그쪽으로 달려갔고그곳에는 정평구가 거의 죽은 채로 신음하고 있었다그리고의원이 달려와 맥을 짚어봤으나이미 세상을 떠난 후였다이윽고진주성은 함락되었다진주성 군사들과 성민들은 최후를 맞았으며비행기 25대도 폭파되고 말았다이후조선 군부에서는 비거(飛車)를 만들고자 설계도를 찾았으나 설계도가 찾을 수 없어 만들지를 못하였다그 이유는 왜구들이 진주성을 함락한 후모조리 불태워 버렸기 때문이다그런데평구가 설계했던 비행기 설계도가 탔는지아니면 왜구들이 훔쳐가서 자기들이 연구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TV 방송에 소개된 조선시대 비행기 영상

→ http://science.ytn.co.kr/program/program_view.php?key=201606281613488890&s_mcd=0082

 

★ 현재공군 사관 학교에는 한국러시아 항공 학자들이 복원한 비거(飛車)를 보관 중이다국립 과천 과학관에도 비거(飛車)를 전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