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사 (조선)

봉오동 전투, 일본군 격파 영화로 개봉

마도러스 2019. 8. 12. 00:52






■ 봉오동 전투, 일본군 격파 영화로 개봉

 

● 2019년 08월 07일 개봉한 봉오동 전투는 일본군을 상대로 거둔 독립군의 첫 대규모 승리를 다루었다홍범도 장군을 주축으로 독립군들은 봉오동을 근거지로 삼고 활동했고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해 만주 일대에 집결한 일본군 월강 추격 대대를 죽음의 골짜기까지 유인해 궤멸시키는 전투에 1920년 06월 04일 돌입했다영화는 각자의 생업을 내려놓고 나라를 지키기 위해 뛰어든 이름 모를 영웅들에 초점을 맞췄다연기파 배우들이 합류해서 사실감을 높였다. ‘봉오동 전투를 연출한 원신연 감독은 이 영화는 인간의 저항과 숭고함에 대한 이야기이다그들은 목숨을 걸고 싸웠고우리는 그들이 지켜낸 땅에서 발을 딛고 살고 있다우리는 끊임없이 그들의 삶을 이야기해야 한다이야기를 함으로써 그들을 기억해야 한다고 전했다.

 

● 1919년 3.1 운동 이후만주 지역에서 무장 독립 운동이 활발해졌다사실무장 단체들의 한반도 진공 시도는 여러 번 있었다. 1919년 06월 파리 강화 회의가 종료되는 시점과 1919년 09월 23일 열렸던 국제 연맹 회의 개최 시점이었다그러나당시 무장 단체들은 군사력이 형편없어서 시간이 필요했다무기와 탄약군수 물자 공급이 부족했다산간 벽지에 기지를 건립했기 때문에 식량도 부족한 상황이었다시기적으로는 괜찮았으나 내실을 다지지 못한 상황이었다그래서겨울을 버티고 1920년 봄부터 국내 진공을 준비했다그러나근본적으로 상하이 임시 정부 간부들이 무력이 아닌 외교로 풀려고 했기 때문에 시기상조라 생각했다. 1920년 06월 홍범도가 봉오동 전투를 할 때에도 시기상조라 생각했다. 1919년 4월 11일 출범한 상하이 임시 정부는 친미 성향의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이었고안창호가 사무를 주도했다무장 투쟁을 외쳤던 이동휘는 이승만 밑에서 국무총리를 안 하려고 했다우여곡절 끝에 이동휘는 1919년 11월초에야 국무총리로 취임했다이를 계기로 상하이 임시 정부 내에 독립 전쟁론이 불붙게 됐다그리고본격적으로 국내 진공 작전에 힘을 쏟았다중국과 러시아의 국경 일대에서 독립군을 모집하고 훈련했다.


● 1920년 06월 홍범도 장군의 봉오동 전투가 봉오동 전투를 승리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네 가지가 있다첫째북간도 지역은 중국이 표면상으로는 단속했으나 속으로는 지지하는 상황이었다그래서일본이 함부로 못했다둘째북간도에 1914년 광복군 정부가 들어서면서 평민 출신의 청장년들이 다수 무장 독립 운동에 참여하게 됐다의병장이 양반 출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보수주의에서 탈피할 수 있었다셋째북간도 지역 독립군은 러시아의 반일 단체와 밀접한 연계를 유지했다무기 공급이 나름 원활했다넷째이미 봉오동은 독립군의 전초 기지였다. 1908년부터 독립군 연합 부대의 지휘관이었던 최진동이 개척한 곳이었다한인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으며 지리적으로도 요충지였다.

 

★ 1919년 3.1 만세 운동이 일어난 후만주 지역에서 조선 독립군의 무장 활동이 활발해지게 되자일제(日帝)는 1920년 05월 독자적인 조선 독립군 및 독립 투쟁 세력을 소탕 및 토벌을 하기 위한 작전을 펴게 되었고이 때부터 만주 지역에서도 조선 독립군의 무장 활동을 방해하고 소탕하기 위한 작전이 시작되었다이에 맞서 홍범도가 이끌었던 대한 독립군은 북간도 지역 독립군과 연합하여 대한 북로 독군부(800-900)를 결성하고만주 지린성 봉오동으로 집결하여 한반도 진공 작전에 돌입하게 된다그 당시1차 세계대전 전쟁이 끝나자러시아군 산하 체코 군단이 블라디보스토크를 경유하여 귀국하면서 우수한 유럽제 무기를 독립군에게 넘겼기 때문에 독립군의 화력은 이전 보다 크게 배가된 상태였다그러나일본군은 평소에 독립군을 크게 얕잡아 보았기 때문에 독립군이 매복 습격을 해와도 금방 제압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그러나그들의 자신감은 산산이 부서졌다.

 

★ 봉오동은 분지 형태였고입구에서 안쪽까지는 골짜기가 25리 정도 형성되어있다홍범도 부대가 대기하고 있던 장소는 일본군이 기관총을 쏘기 어려운 장소이다또한매복을 할 경우일제군이 포병을 동원하여 대포를 쏘기 힘들다홍범도는 의병 시절 부족한 화력을 극복했던 방법들을 봉오동 전투에 그대로 적용했다일본군 추격대는 1920년 06월 07일 08시 30분경부터 독립군의 무장 활동을 토벌하기 위해 봉오동 하촌에서 집집마다 수색하였다조선인 민간인은 미리 피난을 갔기 때문에 많은 집들은 비어 있었다하지만일본군들은 그들이 보기에 의심되는 민간인이 있으면곧바로 사살했다일본군 추격대는 홍범도 부대가 매복했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여기서 중요한 것은 매복 성공 여부가 아니다병사들이 훈련을 제대로 받았고홍범도의 사격 통제를 그대로 따랐다는 것이다일본군 추격대가 매복 장소로 다가왔다홍범도가 하늘을 향해 총을 쐈다동서남북에 매복하던 항일군이 사격을 퍼부었다일본 군인들은 화력은 우세했으나 지형 문제 때문에 그 화력을 제대로 쓰지 못 해고 제대로 반격도 못했다독립군은 도주하는 일본 군인들을 계속 추격하며 사격했다.


■ 박정희(朴正熙)는 독립군(獨立軍)을 무참히 토벌했었다. 1939년 08월 24일 일본군(日本軍)으로서 동북 항일 연군(독립군)을 토벌하는 대사하 전투에 참여했다이 후에도 만주 일대에서 독립군(獨立軍토벌에 나섰다군관 학교 졸업 후, 5개월 정도 현장 실습을 마치고, 1942년 10월 일본 육군 사관 학교 57기에 3학년으로 편입했으며, 1944년 04월 육군 사관 학교를 졸업했다. 1944년 12월 만주군 보병 8단 육군 소위(少尉)로 임관하였다. 1945년 07월 10일에 만주군 중위(中尉)로 승진함과 동시에 만주(滿洲동북부 열하성(熱河省)의 만주군 보병 제8사단에 배속되었으며그들의 토벌 대상은 팔로군(八路軍)이었다독립군 투사들이 주로 팔로군(八路軍)에 가담했는데박정희가 팔로군(八路軍토벌에 참여한 것이다독립군(獨立軍)을 토벌한 것이다1960장준하(張俊河선생은 농촌 부흥 운동’ 및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추진을 위한 국토 개발 기획단’ 사업을 발족시켰는데박정희(朴正熙)는 장준하(張俊河선생의 기획을 빼앗고그를 암살한 후1970 새마을 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은근슬쩍 간판을 바꾸어서 내걸었다.


■ 1965년 한일(韓日수교 이후박정희 경제는 결국 카드 돌려 막기 경제였고만성적인 적자 구조 경제였다마이너스 카드 뽑아다가 계속 써 대고 나서 그걸 다시 돌려막기 하다가 망하는 그런 경제였다결국미국과 유럽 및 일본의 차관(借款)을 끌어다가 돌려 막기에 급급했다. 1962년도 무역 적자 규모가 5천 5백만 달러였는데, 1971년에는 582백만 달러, 1974년에는 20억 달러, 1979년에는 30억 달러로 상승했다결국 외국 차관(借款)으로 무역 적자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1980년대 특히 1986년부터 1988년 사이에 3저 호황(저금리저달러저유가)이 없었으면 한국은 아마 총체적 국가 부도를 맞이했을 것이다.


■ 역대 대통령 재임 기간의 무역 수지를 살펴보면박정희 233억 달러 적자전두환 8억 달러 흑자노태우 132억 달러 적자김영삼 366억 달러 적자김대중 846억 달러 흑자노무현 980억 달러 흑자 등이다. 1986년부터 1988년 사이에 3저 호황(저금리저달러저유가)이라는 천혜의 외부 환경 때문에 대한민국 건국 이래 최초로 무역 흑자를 기록했다박정희(朴正熙임기 내에 국가 부도 위기가 10 정도 있었다외국에서 빌려온 차관 금액의 40% 가까이를 부채 해결에 쓰게 됨으로써 부채 돌려 막기 경제가 계속 반복되었다다행히도 1980년대 이후 민주화(民主化운동을 거치면서 정치 경제가 새로운 패러다임을 재구성하는 단계를 밟으면서 경제 체질이 개선되었.


★ 1950년대까지만 해도 독일(Germany)에서 여론 조사를 하면히틀러(Adolf Hitler)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꼽혔다하지만복지 국가의 기틀을 잡아간 이후부터는 일부 파시즘(fascism) 추종 세력에게서만 추앙받는 꼴이 되었다이와같이, '더 좋은 세상'을 살아보지 못한 사람들이 겪을 수밖에 없는 한시적 한계이다우리 현대사(現代史)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으니흑백(黑白)을 구분하지 못하고 독재 정권의 해악(害惡)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군사 정권을 미화(美化)하거나 찬양하는 나라는 문명 사회의 일원이 될 수 없다.


★ 일본(日本)은 일제(日帝시대에 매국노였던 박정희(朴正熙)에게 1961년 05월 16일 군사 쿠데타를 지원했다그 결과일본의 아들이 되어버린 박정희를 통해 일제(日帝강제 징용 및 위안부에 대한 배상과 사과도 안 하고일제 만행의 수백만분의 일도 안 되는 용돈을 주고 1965년 한일(韓日수교한 것으로 배상은 모두 다 끝났다고 말한다도대체 어이가 없고어불성설이다.


★ 일본은 그동안 일제(日帝강점기(1910-1945)의 강제 징용 및 위안부에 대한 배상과 사과를 단 한번도 하지 않았다일제(日帝)의 오랑캐 만행(蠻行)을 아무런 반성 없이 승계한 일본 아베 정권의 후안무치(厚顔無恥)한 책동에 적극 대처해야 한다. 2019년 08월 02일본은 문제 해결을 위한 한국의 외교적 노력을 끝내 거부하고한국에 대해 백색 국가(우방국명단에서 제외시키는 개정안을 통과시켰다양국의 우호 관계를 매우 악화시키는 대단히 무모한 결정이다일본이 G20 회의에서 강조한 자유 무역 질서를 스스로 부정하는 행위이다.

 

★ 강제 노동 금지와 ‘3권 분립에 기초한 민주주의라는 인류 보편적 가치와 국제법의 대원칙을 일본 정부는 위반했다우리의 가장 가까운 이웃이며 우방으로 여겨왔던 일본이 한국에 대해 경제 침략 행위를 하는 일련의 조치는 참으로 실망스럽고 개탄스러운 일이다세계 경제에 민폐를 끼치는 행위이므로 국제 사회의 지탄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 우리는 수많은 역경을 이겨내고 오늘에 이르렀다적지 않은 어려움이 예상되지만우리 기업들과 국민들에겐 그 어려움을 극복할 역량이 있다과거에도 그래왔듯이 우리는 역경을 오히려 도약하는 기회로 만들어낼 것이다정부는 소재 부품 산업의 경쟁력을 높여서 다시는 국제 기술 패권에 휘둘리지 않게 하고제조업 강국의 위상을 높이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 2019우리는 특별히 3.1 독립 운동과 임시 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하였고새로운 미래 100년을 다짐했다한국 국민의 민주 역량은 세계 최고 수준이며경제 역량도 예전에 비할 바 없이 성장하였다어떠한 어려움도 충분히 극복할 저력을 가지고 있다지금의 도전을 오히려 기회로 여기고새로운 경제 도약의 계기로 삼는다면우리는 충분히 일본의 경제 침략 망동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 2019년 08월 02일본 아베 정부는 한국에 대해 백색 국가(우방국명단에서 제외시키는 개정안을 통과시켰다화이트 리스트(white list)에서 제외됨으로써 사실상 거의 모든 산업에 걸쳐 새로운 수출 규제를 적용하고자유 무역 질서를 차단 봉쇄하는 조치를 취한 셈이다일본 정부의 화이트 리스트(white list) 배제는 세계 자유 무역 질서를 교란하는 동시에 정경(正經분리의 원칙을 훼손하는 부당한 결정이다화이트 리스트 배제는 2018년 한국 대법원의 일제(日帝강제 징용 배상 판결에서 비롯됐다는 점에서 안보상의 이유라는 일본 정부의 허위 주장은 명백한 기만 행위이다.

 

★ 2019년 07월 02일본 정부는 일제(日帝강제 징용에 대한 한국 대법원의 배상 판결(2018.10.30)을 이유로 한국으로 수출되는 반도체 핵심 소재의 수출 규제 조치를 전격 단행했었다. 2018년 한국 대법원의 강제 징용 배상 판결은 천추만대(千秋萬代)를 두고도 씻을 수 없는 일본의 과거 죄악(罪惡)에 대한 대가(代價)를 기어이 받아내려는 한국 민심의 반영이었다또한우리 민족은 물론 국제 사회는 일본이 과거에 저지른 죄악(罪惡)에 대해 성실히 사죄(謝罪)할 것을 한결같이 요구하고 있다일본의 경제 보복 조치는 과거 강제 징용의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파렴치하고 후안무치(厚顔無恥)한 본성을 보여주는 망동(妄動)이다.

 

★ 일본 정부는 일제(日帝시대의 가해자로서 과거사에 대한 반성과 사과를 거부하는 것도 부족해서 삼권 분립에 기초한 한국 사법부의 판결에 대해 경제 보복을 자행하는데 대해 분노할 수 밖에 없다작금의 일본 정부 행태는 과거 임진 왜란(1592-1598)과 일제 강점기(1910-1945) 침략의 역사를 떠올리게 한다그 당시우리 선조들은 들불처럼 일어나서 나라와 겨레를 위해 초개(草芥)와 같이 목숨을 던졌다우리는 그 후손으로서 우리나라의 역사와 경제를 수호하기 위해 일본 정부의 경제 침략에 단호하게 맞서 싸울 것이다.

 

★ 일본은 1941년 12월 07일 태평양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해서 2차 세계 대전을 발발시켰다그리고일본은 2019년 08월 02일 한국 경제를 침략하기 위해 화이트 리스트(white list)에서 한국을 제외하는 만행(蠻行)을 저질렀다일본 아베 정부의 경제 침략 행위에 맞서서 우리는 2의 독립 운동기술 독립 운동의 정신으로 비상하게 임해야 할 때이다일본 정부의 부당한 경제 침략 행위는 우리 경제를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으려는 음흉한 계략이므로 결코 용납할 수 없다우리는 2의 독립 운동을 한다는 비상한 각오로 일본의 경제 침략에 단호하게 대응해나갈 것이다일본 정부는 과거 군국주의의 망상에서 하루빨리 벗어나 세계 자유 무역 질서에 따라 경제 침략 행위를 철회해야 한다일본 정부는 과거사에 대해 책임 있는 자세로 사과하고일본 기업들은 피해자들에게 정당한 배상을 지급해야 한다.

 

★ WTO(세계 무역 기구)의 세계 자유 무역 질서 속에서 백색 국가(우방국)는 포괄 허가 혜택을 받기 때문에 모든 수출 건에 대해 한번 종합 허가를 받으면 되지만일반 국가는 수출 건별로 허가를 받아야 한다허가의 유효 기간은 통상 3년에서 6개월로 대폭 축소된다반대로 처리 기간은 1주일 이내에서 90일 이내로 확 길어진다허가를 받기 위해 제출해야 하는 서류도 2종에서 품목별 최대 9종으로 늘어난다.

 

★ 일본은 이번에 우습고도 황당한 일을 저질렀다무역 흑자국 일본(日本)이 무역 적자국 한국(韓國)을 상대로 무역 보복으로 선제 공격을 했다물건 팔아서 이득을 보는 쪽이 물건 사가는 쪽에 공격을 해서 일시적으로 혼란에 빠지게 됐다하지만사가는 쪽이 공격할 무기는 더 많다일본한테 물건 못 사면 큰 일 나고 넙죽 엎드리리라 생각했나 보다.



■ 독립 운동하면, 3대 가난 옛말되도록 한다.

 

서울시가 2,020년 01월부터 서울에 사는 저소득 독립 유공자 후손 3,300여 가구에 월 20만원의 생활 지원 수당을 지급한다서울시 내에 있는 대학에 다니는 독립 유공자 후손에게는 매년 300만원의 장학금도 준다서울시는 광복절을 앞둔 2019년 08월 12일 이 같은 내용의 독립 유공자 후손 예우 및 지원 강화 계획을 발표했다이번 지원 계획은 2012년과 2018년에 이미 발표했던 보훈 종합 계획을 확대·강화한 것이다.

 

생활 지원 수당 지급 대상자는 독립 유공자 후손 (자녀손자녀중 기초 생활 수급자 및 중위 소득 70% 이하인 가정이다대학생 장학금은 독립 유공자의 후손으로 서울 소재 대학을 다니는 학생들이다. 2,020년 03월부터 총 100명에게 지급된다독립 유공자와 유족 단체인 광복회 서울시 지부는 취업 특강·멘토링 등도 함께 제공하기로 했다유공자 후손에 대한 국민 임대 주택 특별 공급도 확대한다. 2,020년부터 입주 예정인 고덕강일마곡 지구 등 국민 임대 주택 사업 지구 중 총 15% (544)를 독립 유공자 후손에게 특별 공급한다.

 

매월 10의 상하수도 요금과 서울 시내 공영 주차장 요금 80% 감면도 새롭게 추진한다독립 유공자 본인과 선순위 유족 1인이 대상이며약 1,900명이 이 혜택을 받을 것으로 전망된다.

 

독립 유공자 후손에게 집중된 이번 지원책은 기존 독립 유공자 본인에게 집중했던 보훈 정책 보다 나아간 것이다서울시에 따르면독립 유공자 후손의 74.2%가 월 소득 200만원에 못 미칠 정도로 생활고를 겪고 있다서울시 관계자는 “2019년에는 3·1운동 100주년과 임시 정부 100주년 등 뜻 깊은 해인데다 한일 관계 경색으로 그 어느 때 보다 의미 있는 시기라며, “독립 유공자 후손들에게 현실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는 지원책을 내놓은 이유라고 설명했다.

 

서울시는 그동안 애국 지사 본인에게만 매월 20만원의 수당을 지원해왔다. 2019년 서울에 거주하는 생존 독립 유공자는 10명에 불과하지만독립 유공자 후손은 3대손까지 1만 7,000여명으로 추산된다독립 유공자 장준하 선생의 아들인 장호건 광복회 서울시 지부장은 독립 유공자 후손의 대부분이 쪽방에서 생활하는 등 생활고가 심각하다물질적 지원을 넘어 독립 운동한 분들을 조상으로 모신 우리의 자부심과 명예를 예우해주는 것이 고맙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