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사 (조선)

스페인 독감과 1919년 3.1 독립 운동 봉기

마도러스 2020. 3. 10. 08:22



스페인 독감과 19193.1 독립 운동 봉기

 

191803월 갑자기 발생한 것이 바로 스페인 독감이다. 인플루엔자 A형의 변형(H1N1)이다. 인플루엔자 A형은 유아. 노년층 사망률이 높은데, 스페인 독감은 20-40대 사망률이 높았다. 14세기의 흑사병과 함께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인명을 앗아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 당시 세계 인구가 16억명이었는데, 몇 개월 사이에 5억명이 감염되고, 2천만-1억명 가량이 죽었다. 치사율이 4-20%였다. 이는 제1차 세계 대전의 사망자수 900만 보다 5배나 많은 숫자이다. 알래스카에서는 에스키모 인구의 60%가 사망했다. 그 당시, 조선(朝鮮) 사람은 얼마나 죽었을까? 1918년 조선 총독부 통계 연감은 조선(朝鮮)은 총인구 1,670만명 중 44%742만 명의 독감 환자가 발생하여 약 14만명에 달하는 사람이 사망했고, 일본 역시 159,916명의 환자가 발생하여 1,297명이 사망했다고 집계했다. 이것을 토대로 분석해보면, 치사율에서 조선인은 1.88%나 됐고, 일본인은 0.81% 정도였다. 조선인 사망자가 훨씬 많았다. 조선 총독부의 통계보다는 훨씬 더 많은 조선 사람들이 사망했을 것이 분명하고, 일제의 압박 속에서 변변히 치료조차 받지 못하고 죽어간 사람들의 분노는 더해졌을 것이다.

 

스페인 독감으로 미국에서 55만명 가량이 죽었고, 인도에서는 1,25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첫 사례는 미국 시카고에서 처음 보고되었고, 미군 부대 장병들에게서도 발생했는데, 이 군인들이 세계 각 지역으로 돌아다니면서 1918년 가을 전세계적으로 전파되었다. 스페인이 병원체의 발원지는 아니지만, 1차 세계 대전 연합국은 이를 스페인 독감으로 불렀다. 그 이유는 스페인이 제1차 세계 대전의 참전국이 아니었기 때문에 전시 보도 검열이 이뤄지지 않아 스페인 방송에서 이 사태를 매우 깊이 있게 다루었고, 전선의 참호에서 스페인 방송을 들은 군인들이 이 독감을 스페인 독감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1차 세계 대전은 서둘러 매듭지어졌고, 평화 조약이 맺어졌다. 이 일을 계기로 독감 예방 접종 문화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그 당시 일본에게 식량까지 탈탈 털리던 열악한 한국이 일본 보다 왜 생존율이 높았을까? 사실은 통계 집계가 제대로 안 된 것이다. 충청남도에서도 기승을 부렸는데, 서산시 인구의 대부분인 8만명이 독감에 걸렸고, 홍성군. 예산군에서만 수천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참고로 이 통계를 낸 조선 총독부는 혈액형 A형이 많은 일본인이 혈액형 B형이 많은 한국인을 지배하는 것은 정당하다는 매우 황당한 논문도 발표했었다. 식민지 조선에게 무척이나 큰 충격을 준 셈인데, "무오년 독감"이라고 불렸다. 당시 중국에 있던 김구 주석도 이 스페인 독감에 감염되어 20일간 앓았다고 백범일지에까지 기록해 두었다. "병원이란 곳에는 혹을 떼러 제중원에 1개월, 상해에 온 후, 서반아 감기로 20일 동안 치료한 것뿐이다" (백범 일지).

 

감기에 걸린 듯한 증상을 보이다가 폐렴으로 발전하는가 싶더니, 환자의 피부에서 산소가 빠져나가면서 보랏빛으로 변해 죽어가는 병이었다. 사실, 스페인 독감 자체로 사망한 사람 보다 독감이 걸려서 허약해진 몸에 합병증으로 세균성 폐렴이 발병하여 폐에 물이 차 숨을 못 쉬어 죽은 사람이 대다수였다. 1918년 봄, 스페인에는 독감이 대유행했다. 스페인 국왕 알폰소 13세를 비롯하여 수백만의 스페인 국민이 독감에 걸려 관공서가 마비되고 전차가 설 정도였다. 프랑스에서도 그랬고, 영국군 내에서도 인플루엔자 환자가 무더기로 나왔다. 군사 작전에 차질을 줄 정도였다. 미군 각 부대에서도 발병자가 발생했으니, 결국 이 바이러스의 출처를 따지면, 스페인이 아니라 미국이니까 미국 독감으로 불리워졌어야 했다.

 

191803월 초, 미국 시카고에서 최초로 인플루엔자 환자가 발생했다. 그 후, 19180308일 미국 캔사스주 퍽스톤 기지의 병원에서도 인플루엔자 환자가 발생했다. “3일 열병이라 할 정도로 고열과 몸살을 3일 정도 앓은 뒤, 호전되기는 하지만 꽤 오랜 후유증이 있었다. 하지만, 전염성은 대단했다. 0311107명이 넘는 인플루엔자 환자가 보고됐다. 엄청난 고통이 뒤따르긴 해도 죽을 병은 아니어서 웬만하면 툴툴 자리를 털고 일어나 그들이 보내져야 할 곳으로 보내졌다. 그 군인들의 발걸음을 따라서 인류 역사 최고의 전염병이 될 스페인 독감이 그 죽음의 촉수를 뻗어나가고 있었다. 0313, 미국 캔자스 육군 기지에서만 환자는 갑자기 522명으로 증가했고, 48명이 사망했다. 0320, 미국 조지아주의 군 부대에서 28,500명의 군인 가운데 2,900명이 독감 증세를 보였다. 04월 하순에는 필라델피아. 볼티모어까지 퍼져 나갔고, 05월에는 영국. 스칸디나비아. 폴란드까지 덮쳤고, 05월말부터는 인도를 초토화시켰다.06월에는 브라질. 푸에르토리코. 호주. 뉴질랜드가 사정권에 들어갔다. 극지방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스페인 독감은 여름이 되면서 사라지는 듯 했다. 하지만, 이 스페인 독감은 성가신 바이러스에서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괴물로 변신하고 있었다. 19180815일경 아프리카 서해안의 영국 보호령 시에라리온의 수도 프리타운 부근에서 인플루엔자 환자가 재발했을 때, 스페인 독감은 공식적으로 첫 살인자가 된다. 고병원성으로 발전한 것이다. 프리타운은 유럽에서 석탄을 실은 증기선이 기항하는 석탄 보급지였다. 프리타운에서만 1000명 이상이 사망했다. 미국 보스턴은 1개월간 시 전체 인구의 10%가 감염되어 이중 60-70%가 사망했다. 191809월 미국 뉴욕. 필라델피아를 거친 독감이 철로를 따라 미국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그리고 이 소리 없는 살인자는 군대의 이동과 사람들의 여행과 이주에 따라 전 세계로 퍼졌다. 그 뒤의 참상은 가히 지옥이었다. “흑인인지 백인인지 구별 안 될 정도로 얼굴이 시커멓게 된 채죽어간 시신을 둘 곳이 없어 길거리에 쌓아둬야 했고, 동료가 기침을 한다는 신고를 받고, 보건성 직원이 출동해 보니, 룸메이트 4명이 죄다 죽어 있더라는 일화도 있다. 인도에서는 웬만한 나라의 인구에 해당한다 할 사람들이 죽었고, 수많은 마을들이 전멸했다. 태평양의 사모아 섬에서는 90% 인구가 감염되어 그 중 30%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갔으며, 몇몇 마을은 100% 쑥밭이 되었다. 전세계 인구의 약 3-6%가 죽었으며, 일부는 걸린 지 2-3일 만에 사망에 이르는 경우도 있었다.

 

일제(日帝) 강점 하의 조선(朝鮮)도 다르지 않았다. 2018년 무오년 독감이 그것이다. 3.1 운동 2019년 기미년 3.1 독립 선언이 있던 바로 전 해이다. 1918년에 조선 전역은 무오년 독감으로 기록된 독감에 7백만여 명이 감염됐고, 14만 명이 죽어 나갔다. 물론, 조선 총독부의 통계이니, 사망자는 더 많을 것이다. “경성에서 독감(毒感)으로 사망한 사람이 268명인데, 그중에서 조선 사람이 119명이다.” (매일신보 20181112) “서산 1군에만 8만명의 독감 환자가 있고, 예산. 홍성에서도 야단이다. 감기로 사망한 사람이 2000명이나 된다.” (매일신보 20181203). 이 병의 유행으로 들판에 곡식이 여물어도 거둘 사람이 없을 지경이라 했고 쌀값은 폭등했다. 인심은 흉흉해졌고, 가뜩이나 일본인들의 횡포에 배가 아프던 조선인들에게 굶주림까지 이어지면서 일제(日帝)에 대한 분노가 무르익어갔으니, 이 또한 20193.1운동의 또 다른 배경 중 하나이다.

 

19193.1 독립 운동의 직전의 매일 신보에 따르면, 스페인 독감으로 "학교는 일제히 휴교하고, 회사는 휴업했으며, 농촌에서는 들녘의 익은 벼를 거두지 못할 정도로 상여 행렬이 끊이질 않아 조선 팔도의 민심이 흉흉하다" 라고 보도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당시 일본의 식량 위기를 해결하려고 한국 쌀까지 훔쳐가는 상황에서, 무시무시한 스페인 독감까지 조선 땅에 겹쳤고, 그 고통과 분노는 응집되었다. 결국 3.1독립 운동 즉 대한 독립 만세 운동으로 이어진 것이다.

 

스페인 독감으로 인해서 살 사람은 살고, 죽을 사람은 엄청나게 빨리 죽는 바람에 1년 만에 스페인 독감은 지구에서 백신 없이도 그냥 사라졌다. 그리고, 스페인 독감의 독성이 더 심해진 돌연 변이가 출현한다면, 인류에게 큰 위협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과학자들은 매우 긴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스페인 독감이 너무 무식하게 죽을 사람은 엄청나게 빨리 죽이는 바람에 돌연변이라는 것을 확인해줄 세균 표본이 안 남아 있어서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스페인 독감으로 죽은 사람의 시체가 알레스카에 묻혀 있었는데 날씨가 추워서 꽁꽁 어는 바람에 바이러스가 보존되어 있었다. 결국, 알래스카 미이라에서 1998년 과학자들은 스페인 독감을 추출하는 데 성공했다. 그 후, 과학자들은 알래스카 미이라와 매년 새롭게 등장하는 독감과 열심히 비교를 하던 중에 2009년에 스페인 독감과 비슷한 돌연 변이 바이러스가 발견되자 과학자들은 초긴장했다. 그것이 바로 200903월부터 발생했던 신종 플루(pandemic influenza A/H1N1 2009)이다. 인플루엔자 A형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에 감염된 돼지에게서 발생하여 생긴 신종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에 의해 감염되는 호흡기 질환이다. 초기에 '돼지 독감'으로 불린 이 바이러스성 질환은 멕시코에서 등장하여 미국으로 퍼진 후, 전 세계로 확산이 되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독성이 심하지 않았다.

 

심각한 바이러스 독감은 수년, 수십년 주기로 반복한다. 1918년 스페인 독감을 기억하는 사람은 이젠 거의 없지만, 이제는 손씻기와 면역 강화는 상식이 됐다. 2차 감염을 막기 위해 환자를 격리하고, 항생제를 처방할 수 있게 됐다. 영양과 위생, 생활 수준을 개선함으로써 감염병과 잘 싸울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1918년 그 당시 인류는 살인적인 스페인 독감 바이러스의 정체를 밝혀내지 못했다. 전자 현미경이 발견되기 니전이었으므로 콜레라 같은 굵직굵직한 세균들의 멱살은 잡을 수 있었지만, 바이러스는 그 존재조차 알아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1951년 캐나다의 한 의사가 동토의 얼음 위에서 죽어간 한 에스키모 여인의 허파에서 바이러스 조직을 떼 냈다. 냉동 상태로 죽어서 바이러스의 유전자 배열도 굳어버린 조직이었다. 하지만, 그는 바이러스 추출에 실패했다. 그로부터 47년 뒤, 1998, 그는 스페인 독감을 연구하던 미군 병리학 연구소 타우펜버그 박사에게 편지를 썼다. “내가 스페인 독감으로 죽은 여자의 허파 조직을 보관하고 있소!” 타우펜버그 박사는 그 조직을 받아 연구를 거듭한 끝에 200510월 마침내 스페인 독감 바이러스의 정체를 발표했다. 냉동 상태에서 재생된 바이러스의 위력은 여전히 살아있었다. 쥐 정도는 우습게 죽였고, 원숭이도 죽였다. 인수공통(人獸共通) 전염병으로 유행했던 조류 독감 바이러스과 비슷한 형태였다. 이 바이러스의 부활 앞에서 어떤 과학자들은 환호했지만, 어떤 과학자는 이렇게 반대했다. “그렇게 커다란 위험 부담을 안고도 바이러스 부활에 나서는 것은 정말 무책임한 일이다. 어쩔 수 없이 필요하다면, 다른 방법으로도 연구할 수 있다” (리처드 에브라이트). 각고의 노력 끝에 바이러스의 유전자 배열을 재구성하는데 성공한 타우펜버그 박사는 독감 바이러스의 위험성을 다음과 같이 경고 했다. “내가 발견한 바이러스는 조류 독감 바이러스와 아주 비슷합니다. 이제, 인간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방법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는 자연에서 과연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았으며, 이러한 경우, 자연은 아주 무서운 테러리스트입니다.”

 

한 시대 인류의 절반 정도를 감염시키고 억 단위의 인구를 죽인 것으로 추정되는 공포의 바이러스는 21세기에 부활하여 현재 미군이 관할하는 어느 연구소엔가 깊숙이 보관되어 있다. 그 바이러스는 연속적으로 변이하여 인류를 기습하는 변종에 저항하는 항생제나 백신의 원료가 될 수도 있지만, 인류의 생존에 위협을 줄 흉기가 될 가능성도 충분하다. 미국이 그렇게 감추려고 했던 핵 관련 비밀들이 스리슬쩍 소련으로 흘러갔던 일을 떠올리면, 그 바이러스가 언제 어떻게 누구에게 노출될지 모른다. 실제로 한때 우리를 경악시켰던 사스 바이러스도 유출됐음이 공식적으로 확인된 바 있다. 미국 정부조차 요긴하게 그 바이러스를 공격 무기로 써먹는 수법을 개발하고 있는지는 또 누가 알겠는가? 이렇게 두고 보면, 타우펜버그 박사의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다. 자연은 인간을 공격하기는 하지만, 의도한 테러를 저지르는 것은 아니다. 자연은 테러리스트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결국 테러리스트는 인간일 수 밖에 없다. 중국 우한 바이러스 연구소를 포함한 미중(美中) 공동 연구진은 박쥐와 들쥐가 지니고 있는 바이러스를 하이브리드(hybrid)시켰다고 2015Nature Medicine 의학 잡지에 발표했었다. 그렇게 탄생한 바이러스는 그 어떠한 백신으로도 파괴할 수 없었다고 고백했다. 중간 숙주를 거쳐서 변이된 변종 바이러스가 코로나19 바이러스 특징이다.

 

201803월 발생했던 스페인 독감은 미군 병사들이 머물던 캠프에서 기르던 식용 조류에서 발병한 후, 식용 돼지를 통해서 돌연변이 바이러스가 발생하여, 오랜 전쟁으로 면역력이 약해진 병사들에게 쉽게 감염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스페인 독감은 인플루엔자 A형의 변형(H1N1)인데, 조류 독감(HA. NA)의 돌연변이 형태이다. 조류 독감은 1878년 최초로 닭의 질병 중 하나로 기록된 이래, 1900년 이탈리아에서 조류 인플루엔자로 보고되었으며,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는 추세이다. 감염된 조류의 콧물이나 호흡기 분비물, 대변 등에 접촉한 조류들이 다시 감염되는 형태로 전파되며, 특히 철새들에 의해 많이 전파된다. 닭은 특히 감수성이 커서 감염되면 80이상이 호흡곤란으로 폐사한다. 조류에서 조류 인플루엔자를 잘 일으키는 H5형이나 H7형은 원칙적으로는 사람에게 감염을 잘 일으키지 않는다. 하지만, H5N1, H7N9형 인플루엔자 등은 드물게 사람에게 감염을 일으키기도 한다. H7N9형은 조류에서 저병원성이나, 2013년 중국에서 발생한 H7N9은 인간에게 감염을 유발하여 중증 폐렴을 일으킬 수 있는 것으로 보고되었다. 주로 태국. 베트남 등에서 발생했다.

 

전 세계를 휩쓸었던 1918년 독감 인플루엔자는 조선(朝鮮)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191809월부터 한반도 조선 북쪽 지역에서 발생되기 시작한 스페인 독감은 철도선을 타고 남하해서 09월 하순 서울에 도달했다. 201810월 중순부터는 조선 지역 전국에 유행하게 되었다. 매일 신보 기사는 '0923일부터 평북 강계군에 유행성 감기로 300명의 환자가 발생했고, 특징은 머리와 밑 관절 등이 몹시 아프다더라!' 라고 했다. “경성(서울)에서도 09월에 이미 환자가 나왔고, 11월에는 평양 인구 절반이 감기로 고생하고 있다. 경성(서울)에서는 개도 돌림 감기로 전염되어 죽으니, 조심하라!” 라는 기사도 있다. “감기 사망자가 2,000명이다. 온 가족이 앓아 누워 죽은 사람을 묻을 사람이 없는 형편이다. 경찰서와 군청에서 감기에 대한 강의를 하려 했으나, 사람들이 모두 앓아 들을 사람이 없다. 예산, 홍성서도 지금껏 추수를 못해 품삯이 이원 오십전까지 올랐다.” 191812월 조선 총독부 기관지 매일 신보에 '충남 서산 한 개 군에만 8만명의 환자' 라는 제목으로 실린 기사이다. 교사와 학생들에서 높은 발생률을 보여 대부분 학교가 휴교했으며, 우체국 직원이 모두 사망해서 우편 업무가 마비되는가 하면, 가을철 마을 사람들이 희생돼 벼를 추수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스페인 독감 치사율에서 한국인은 1.88%나 됐고, 일본인은 0.81%이다. 같은 독감이지만 치사율에서 보면 큰 차이가 나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조선 총독부의 통계보다는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사망했을 것이 분명하고, 일제의 압박 속에서 변변히 치료조차 받지 못하고 죽어간 사람들의 분노는 더해졌을 것이다. 1919년 기미년 3.1 운동 직전에 각급 학교는 일제히 휴교하고, 회사는 휴업했다. 농촌에서는 들녘의 익은 벼를 해가 지나도 거두지 못할 정도로 상여 행렬이 끊이질 않았다. 조선 팔도의 민심은 흉흉했다. 2018년 스페인 독감이 한반도를 덮은 직후, 20193.1 운동이 일어났다. 우연일까? 조선(朝鮮) 총독부의 독감 방역 실패로 일상적인 죽음을 목격하게 된 한국인들은 일제(日帝)의 무단 정치 10년의 절망감을 분노로 표출할 수밖에 없었다. 19190301일의 전국적인 독립 운동을 전후로 조선(朝鮮) 국민들은 일본의 본격적인 수탈 정책으로 인해 이중 삼중의 고통을 겪고 있었다. 일본 경찰은 위생 청결 상태 점검을 핑계로 민가를 수색하는 일이 잦아졌고, 그것을 핑계로 독립 운동 역시 색출하려고 했다. 일제의 무자비한 압박, 그리고 전염병까지 덮쳤다. 그 고통과 분노는 응집되어 결국 20193.1운동으로 모아졌다. 무시무시한 질병이 당시 국민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게 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스페인 독감 유행으로 인한 인명 피해가 속출했지만, 조선 총독부는 적절한 방역 대책을 마련하지 못했고, 오히려 독감 유행에 따른 피해를 조선인 탓으로 돌렸다. 매일 신보는 19181103조선인에게서 사망자가 많은 이유는 치료를 잘못하는 까닭이다!' 라는 제목의 기사를 썼는데, 경무 총감 부 위생과 관계자 에에서의 발언을 인용해서 독감으로 특히 한국인이 많이 죽는 이유가 무모하고 이치에 맞지 않는 한국인들의 치료 방법에 있다" 라고 지적했다. 조선인들은 분노했다. 일제의 모진 수탈과 압박 가운데 전염병까지 창궐하여 젊은이들까지 죽던 상황에서도 백성들은 독립을 외치며 분연히 일어났다. 1918년의 식민지 조선은 제1차 세계대전의 영향으로 인한 물가 등귀와 쌀값 폭등, 이어진 기근에 의한 민생 도탄과 그 결과인 전국 단위의 소요와 파업, 그리고 이에 더해 신종 독감 창궐로 인한 수많은 사망자까지 발생함으로써 한계 상황을 넘어선 심각한 상태에 처해 있었다. 일본 헌병 경찰을 앞세운 기존의 무단적 대처로 1918년 독감 방역에 실패한 조선 경무 총감부는 이러한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고, 이제 도처에서 죽음의 일상화를 목격하게 된 식민지 조선의 한국인들은 절망감을 넘어 분노까지 느꼈을 것이다. 1918년 스페인 독감은 19193.1 운동의 도화선이 되었고, 식민지 조선에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른 조선 경무 총감부 및 일본 헌병 경찰의 해체까지 초래했다. [글 작성: 진단검사의학과 전문의. 최병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