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사 (조선)

■ 군함도(軍艦島) 석탄 탄광의 조선인 강제 노동자

마도러스 2021. 4. 29. 08:57

 

■ 군함도(軍艦島) 석탄 탄광의 조선인 강제 노동자

 

 군함도(軍艦島) : 군함도(軍艦島) 일본 나가사키(長崎)현 노모 반도 서쪽, 나가사키 항구에서 18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하시마 섬을 말한. 하시마 섬은 처음부터 석탄을 채취하기 위해 개발됐다. 섬이 군함 모양을 닮았다고 해서 군함도(軍艦島)라고도 불린다. 하시마 탄광은 지하 1km가 넘는 해저 탄광이다. 일제(日帝) 강점기 때, 강제 동원된 800여명의 조선인들은 이곳에서 배고픔과 위험 속에서 하루 12시간 동안 채탄 작업에 시달렸다. 이중 질병, 익사, 탄광 사고 등으로 확인된 사망자만 122명에 달한다. 2015 07 05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일본이 신청한 하시마 탄광 등 23개 근대 산업 시설의 세계 유산 등재를 최종 결정했고, 한국 등 주변국들은 반발했다.

 

 하시마 섬은 남북 320m, 동서 120m의 아주 작은 크기의 섬이었지만 1897년부터 여섯차례에 걸쳐 매립·확장 공사를 진행해 현재 하시마의 크기는 남북 약 480m, 동서 약 160m 섬이 되었다. 하시마 섬은 오로지 석탄 산업을 위한 시설과 노동자의 주거·편의시설만 섬 전역에 들어섰다. 하시마에서 석탄이 처음 발견된 때는 하시마에서 약 4.5km 떨어진 섬 다카시마보다 90여년 늦은 1810께로 알려져 있다. 하시마 석탄 개발은 다카시마 탄전 개발의 연장선에서 이뤄졌다. 1920년대 후반부터 하시마에서는 연 20만톤대의 석탄이 생산됐다. 그 후, 시설을 확충하고, 발전을 거듭해 1941년에는 41 1100톤을 생산했다. 하시마 탄광 최고의 생산량이었다. 이후, 차츰 생산량이 저하됐고, 연료를 석유로 바꾸는 이른바 '에너지 혁명'으로 석탄 산업의 불황이 이어지자 결국 1974 01 15일 폐광했다. 폐광 이후, 하시마 출입은 오랫동안 금지됐다가 일본 정부는 '귀중한 해저 탄광 유적', '일본 근대화의 상징' 등 역사적·문화적 가치가 높다고 평가하며, 2009년부터 관광지로 개발해 활용하고 있다.

 

 군함도(軍艦島) 석탄 탄광의 조선인 강제 노동자 : 하시마 탄광은 지하 1km가 넘는 해저 탄광이다. 탄광 안은 좁고 온도가 45도를 넘었고, 유독가스가 수시로 분출되기도 했다. 작업 도중, 해수가 갱내로 쏟아져 들어오기도 했다. 육지 탄광에 비해 채굴 조건이 매우 나빴다. 조선인들은 일제의 석탄 증산 요구에 따라 배고픔 속에서 하루 12시간 동안 채탄 작업에 시달렸다. 이같은 혹독한 자연 환경과 노동 조건 탓에 '감옥섬'으로 불렸다. 하시마 탄광에서 조선인 노동자의 존재가 처음 확인된 것은 1917년이다. 개발사인 미쓰비시는 탄광 노동자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일본 각지는 물론 조선인도 모집했다. 1918년 하시마에서 941명이 갱내부에서 광부로 일했고, 이중 70(7.4%)이 조선인이었다. 1935 03 26일 하시마 탄광의 갱내 가스 폭발로 20명 이상의 광부가 사망한 큰 사고가 발생했다. 출신지가 공개된 사망자 17명 중 조선인 노동자는 절반이 넘는 9명이었다. 일제가 1937년 중일전쟁을 기점으로 총동원 체제를 가동하면서 하시마 탄광의 조선인 노동자의 수도 해마다 늘어 패전 직전인 1944 800여명으로 추정된다. 당시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은 비인간적 환경에서 고통을 겪었으며, 외부와도 철저히 격리된 채 강제 노동과 열악한 환경을 견디지 못하고 122명이 숨졌다. 사망 원인은 악조건 속에서 제대로 먹지 못하며, 장시간 노동을 하여 영양 부족 때문에 생겼을 것으로 보이는 질병, 도망치다 바다에 빠진 것으로 추정되는 익사, 그리고 질식. 탄광 사고 등이었다. 해방 이후, 고향으로 돌아온 생존자들은 갱도 안은 서지 못할 정도로 좁고, 온도가 45도를 넘었다. 노역 중 돌이 떨어져 머리가 찢어지거나 이따금 떨어진 돌에 맞아 사망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루 12시간씩 일하면서 쉴 시간은 몇 분 주지 않고, 심하게 매질을 할 때가 많았다”, “탄광이 무너지는 사고가 잦아 죽는 사람이 많았다. 많은 사람이 도망가려 했지만 대부분 잡혀와서 심한 고문을 당했다 등의 증언을 했다. 하시마 탄광에 동원된 조선인 노동자 중 일부는 원폭 피해를 입은 사례도 있었다. 일본은 하시마 탄광을 근대 문화 유산이라고 주장하지만, 강제 노역과 수탈, 인권 탄압의 현장이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숨기고 있다. 소설가 한수산씨는 나가사키 지역 조선인 원폭 희생자를 소재로 다룬 장편 소설 '까마귀'에 하시마 탄광에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켰다. 소설에서 이들의 눈에 비친 하시마의 풍광과 혹독한 노동 생활에 대해 자세히 묘사됐다.

 

 세계 문화 유산 등재 : 일본은 2009 01 5일 조선인 강제노동 현장인 규슈. 야무구치 지역의 근대화 산업 유산군을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 목록에 등록했다. 2012 07 03일에는 세계유산 등재 준비를 위한 전문가 회의를 설치하고, 도쿄에서 첫 회의를 열었다. 2012 09 20일 세계유산조약과 관련한 정부 기관 연락 회의에서 기타큐슈시의 야하타 제철소 등 메이지 시대 일본 산업 혁명 유산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추천하기로 공식 결정했다. 등재 목표 시기는 2015년이었다. 결국, 2015 07 05 독일 본에서 열린 제39차 세계유산위원회는 일본이 신청한 하시마 탄광 등 23개 근대 산업 시설 세계유산 등재를 최종 결정했다. 한국과 일본은 23개 시설 중 조선인 강제 노역이 있었던 7개 시설에 대해 강제 노동 사실을 반영하는 문제를 놓고 대립했다.  7개 시설은 하시마 탄광을 비롯하여 나가사키 조선소 (대형 크레인 등 3), 다카시마 탄광, 미이케 탄광, 야하타 제철소 등이다. 외교부 자료에 따르면, 이 시설들에 동원된 조선인은 5 7,900명에 이르고, 동원된 조선인 중 사망자는 94, 행방 불명자는 4명이다. 일본은 앞서 하시마 등이 메이지 시대 산업 혁명의 증거물이라고 주장하며, 문화 유산 등재 기간을 1850-1910년으로 한정하여 강제 징용에 대한 별도의 역사적 기술 없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려고 시도했다. 1940년대 조선인 강제 징용 사실을 제외함으로써 자신들의 어두운 역사를 덮으려 한 것이다. 그러나, 한국 정부가 역사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고 이의를 제기했고, 세계문화유산 위원회에서도 전체 역사를 반영하라고 권고했다. 이에 따라 한·일 양국이 조선인 강제 노동이 있었음을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결정문에 명시하기로 하면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국제 무대에서 일본 정부가 강제 노역을 공식적으로 처음 언급하게 된 것이다. 일본 입장에서는 이때 합의를 도출하지 못하면,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어려워질 수 있다는 점이 부담으로 작용했다는 분석이 나왔다. 일본은 세계문화유산 등재 결정이 나온 지 하루만에 말을 바꿨다. 기시다 후미오 외무상과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이 일본 메이지 산업 혁명 시설에서 조선인 강제 노동이 없었다고 밝힌 것이다. 스가 관방장관은 2015 07 06일 기자회견을 열고, 역사적 사실 관계를 따졌을 때, 산업 유산 시설에 조선인 동원 문제가 강제 징용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영화 군함도(軍艦島)” : 하시마 탄광을 소재로 한 영화 군함도’ (감독 류승완) 2017 07월 개봉하였다. “1945, 일제 점령기 우리는 그곳을 지옥도라고 불렀다는 광고 문구로 소개되고 있다. 영화는 일제 강점기에 하시마 탄광에서 강제 노동을 하다 목숨을 걸고 탈출하려는 조선인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배우 황정민, 송중기, 소지섭, 이정현 등이 출연한다. 2017 02 08일 일본의 극우 언론 산케이 신문이 영화가 개봉도 하기 전에, 한국이 관민을 동원하여 하시마 탄광의 유네스코 세계 유산 등재를 저지하려 했다며 이 영화가 그 운동의 일환이라는 비판 보도를 해서 영화가 더욱 유명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