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사 (조선)

■ 이원익(李元翼), 199대 1의 진정한 시대 승리자!

마도러스 2022. 12. 27. 08:11

 

■ 이원익(李元翼), 199대 1의 진정한 시대 승리자!

 이순신(李舜臣), 전라 좌수영 절도사로 부임해서 현지에 도착했다.

1590년 12월, 이순신(李舜臣)은 정읍 현감을 지내다가 1591년 02월 갑자기 전라 좌수영 절도사로 파격적인 진급을 했다. ​대위(大尉) 같은 계급에서 별 두개 소장(小將)으로 파격 진급했던 것이다. 그래서, 전북 정읍을 떠나서 전남 여수로 향했다. 당시 경상 좌수사 박홍, 경상 우수영 원균, 전라 우수사 이억기, 그 울타리에 전라 좌수영 절도사로 부임해서 1591년 02월 전남 여수 도착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군대 조직에서 파격적인 계급장을 달고 내려온 장수를 보고 순순히 인정하고 가만히 있었을 리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순신은 아랑곳하지 않았고, 의연했다. 1592년 03월경 새로 건조한 거북선에서 지자포(地字砲)와 현자포(玄字砲)를 쏘는 것을 시험했다. 바로 그 무렵, 1592년 04월 13일, 임진왜란(壬辰倭亂)이 발생했다. 1592년 07월, 이순신은 한산도(閑山島) 대첩에서 크게 승리했다. 1593년 07월 14일 전라 충청 경상의 삼도(三道) 수군(水軍) 본영을 여수에서 한산도로 옮겼다.

 원균의 모함으로 체포되었고, 서울로 압송되어 투옥되었다.

1597년 01월 21일, “왜장(倭將)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오래지 않아 다시 남해 바다로 건너 올 것이니, 바다로 출동하라!” 라는 조정의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이순신은 그것이 군 간첩의 간계(奸計)임을 확신했기 때문에 출동하지 않았다. 실제로, 왜장(倭將)은 이미 6일전에 이미 육지에 상륙해 있었던 것이었다. 1597년 0​2월 26일, 이순신은 경상 우수영 원균(元均)의 모함으로 한산 통제영에서 체포되었고 03월 04일 서울로 압송되어 투옥되었다. "왜장을 놓아주어서 나라를 저버렸다" 라는 모함이었다. 한양에서 국형장(國刑場)이 열렸다. 선조 임금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문무(文武) 백관(百官) 200명 모두가 "이순신은 역적(逆賊)이오니, 반드시 죽여야 마땅하옵니다!" 라고 외쳤다. 아침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읍조하며 선조 임금을 압박하고 있었다. 선조도 속으로는 동조하고 있었다. 이순신을 발탁해주고 6계급 파격 진급에 힘을 실어준 유성룡(柳成龍)까지도 “공(公)은 공(公), 사(私)는 사(私)” 라고 하며 이순신을 죽여야 한다는 문무백관들의 의견에 반대를 하지 못했다. 당시 이순신의 누명 상황이 어떠한지 미루어 짐작이 간다.

● ​이원익 대감 승낙 없이는 선조 임금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2일이 경과했는데도 이순신 형 집행을 못하고 있었던 이유는 당시 영의정(領議政) 겸 도체찰사(都體察使) 국가 비상 사태 직무 총사령관 이원익(李元翼 1547-1634)이 임금의 어명으로 전시 상태의 모든 권한을 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전시 상태에서는 임금과 문무 백관들이 이순신을 죽여야 한다고 외쳐도 이원익 대감의 승낙 없이는 선조 임금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원익은 거듭되는 선조의 형 집행 재촉에 청사에 길이 남는 그 유명한 명대사로 고한다. “전하께서 전시에 신(臣)을 폐하지 못하시는 것처럼 신(臣) 또한 전쟁 중에 삼도(三道) 수군(水軍) 통제사(統制使)인 이순신을 해임하지 못하옵니다.”

 한사람의 곧고 올바른 판단과 집념으로 199명의 고집을 꺾었다.

이원익의 이 말에 선조도 체념을 했다. 이틀이나 걸린 이순신 "국형장"에서 문무백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도체찰사가 그리 말을 하니, 이순신이 죄가 없는가 보구나!" 오직, 한사람의 곧고 올바른 판단과 집념으로 199명의 고집을 꺾었다. ★ 당시 문무백관 199명 대 1 이원익(李元翼) 한 사람만이 반대를 해서 이순신을 살려 낸 것이다.​ 자신을 낮추고, 오직 나라와 백성만 떠받든 공복(公僕), ​그가 있으면, 온갖 사물이 제 자리를 잡게 되는 것이었다. 그는 항상 소박하고 비범했다. 조선의 대표적인 청백리(淸白吏)였으며, 초가집에서 조용하게 살았던 "조선의 명재상 이원익(李元翼) 대감!"  드디어, 이순신은 사형을 면하게 되었다. ★ 28일간의 옥고 끝에 석방된 이순신은 조선군 총사령관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 진영이 있는 경남 합천 초계로 백의종군의 길을 떠났다. 충남 아산에 이르렀을 때, 어머니의 부고를 받았으나 죄인의 몸으로 잠시 성복(成服)한 후, 곧바로 길을 떠나야만 했다. 한편, 원균(元均)이 이끄는 조선 함대는 1597년 07월 16일 칠천량(漆川梁) 해전에서 일본 수군의 기습을 받아 참패했다. 1597년 08월 03일 삼도(三道) 수군(水軍) 통제사(統制使)로 재임명되었고, 칠천량에서 패하고 돌아온 전선(戰船)들을 거두어 재정비함으로써 출전 태세를 갖추었다. 1597년 09월 16일 명량(鳴梁) 해전에서 조선 수군 함선 13척으로 적선 330여척과 싸워서 일본 수군의 해협 통과를 저지했고, 7년 전쟁에 역사적 전기(轉機)를 마련했다. 1598년 11월 19일 노량(露梁) 해전에서 이순신은 500여척 왜선과 싸웠고, 포위되었던 명(明)나라 장수 진린(陳璘)을 구하고, 도주하는 적을 추격하다가 흉탄을 맞고 전사했다.

● ​영의정 이원익(李元翼) 대감, 만고(萬古) 길이 빛나는 충신(忠臣)

세월은 400년이 지나고, 시대만 수없이 변했을 뿐이다 정치는 변한 것이 없다. 아무리 힘들어도 그 사람의 마음을 알아주는 한사람만 있으면, 외롭지 않은 것이 대장부의 자존심이요. 명예이다. 더구나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전쟁 중에는 더할 것이다. 온갖 시기 질투와 모함으로 사형 직전까지 간 만고(萬古)의 충신(忠臣)을 알아보고, 199대 1로 임금의 불신으로 부터 믿어준 탁월한 선견지명(先見之明)의 굳은 신념이 도탄에 빠진 나라와 백성들의 생명과 조선 사직을 지켜낸 ​영의정 이원익(李元翼) 대감이야 말로 만고(萬古)에 길이 빛나는 충신(忠臣)이며, ​나라의 보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를 위해서 내 사후(死後)에 비석(碑石)도 세우지 마라!

다수의 사람이 나라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단 한 명 이원익(李元翼)이 나라를 구했던 것이다. 한 사람! 올바른 한 사람이 그렇게 중요하다. ​생각해 본다면, 이순신 장군은 행복한 분이셨다. ​자신의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고 불의에 뜻을 굽히지 않았던 이원익(李元翼) 대감과 같은 분이 같은 시대에 함께 있었으니 말이다. 그는 87세로 눈을 감으시면서 모든 자식들을 불러 놓고, "나를 위해 부고(訃告)도 알리지 마라! 내 사후(死後에 어떠한 사당(祠堂)이나 칭송된 일을 꾸미지 말라! 나를 위해서 비석(碑石)도 세우지 마라!" 그렇게 때문에, 영의정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 대감은 우리에게 잊혀져 있었는지도 모른다. 세월이 몇백년이 지났다. 하지만, 오늘의 이 시대에 이원익 대감 같이 정정당당한 청백리(淸白吏)는 어디에 있는지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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