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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기문 유엔총장은 '세계 최고 외교관'

마도러스 2006. 10. 14. 05:38

반기문 유엔총장은 '세계 최고 외교관'


반기문(潘基文) 외교장관이 2006.10.13일 유엔총회에서 차기 유엔사무총장으로서 추인을 받음으로써 2007년 01월1일부터 역사적인 ‘한국인 첫 유엔 사무총장 시대’가 열리게 됐다. 유엔 사무총장직은 한마디로 세계 최고의 외교관이다. 국가원수에 준하는 예우를 받으며 지명도에선 미국 대통령에 버금가고, 도덕적 권위면에서 교황의 권위에 종종 비유되면서도 늘 ’치어 리더’ ’고해 신부’라는 수식어가 붙어다는 것도 그 이유에서다.


반 장관의 사무총장 선출은 건국 이래 최대의 민족적 경사로, 한국외교사의 쾌거로 기록될 것이다. 반기문 유엔 총장은 아시아인으로서도 미얀마의 우탄트 총장이후 무려 35년만에 유엔 사무총장을 맡게돼 그동안 서방국가들이 중심축을 이뤘던 유엔이란 장에서 아시아의 영역이 더 넓어지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기대도 낳고 있다. 유엔 사무총장이란 자리는 ‘세계의 재상’, ‘세계 최고의 외교관’이라는 점에서 한국의 국제위상을 높이고 외교적 지평을 넓힐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적지 않다.


일각에선 지난 1988년 올림픽 개최가 한국의 경제적 도약을 위한 발판을 제공한 사실을 상기시키며 반 차기 총장의 선출은 정치적.외교적으로 한국의 역사적 도약 기회를 제공할 것이라고 비교, 전망하기도 한다. 또 막판에 가서야 유력한 후보가 윤곽을 드러냈던 과거 유엔총장 선출사례와는 달리 반 차기 총장은 일찍부터 유엔 안보리 5개 상임이사국의 지지를 받는 등 선두를 달리며 두각을 나타냈다는 점에서 과거 대미의존적 외교에서 탈피, 균형외교로 중심을 잡은 한국외교의 승리로도 꼽히고 있다.


이로써 건국과정 및 한국전쟁 등 굵직한 역사적 전기마다 유엔의 수혜를 받아왔던 한국은 유엔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될 국가로 탈바꿈, ‘유엔의 가장 성공적인 사례’라는 평가를 받게 됐다. 또 반 차기 총장은 세계 유일의 분단국 출신이어서 세계인으로부터 세계 평화와 안전을 위해 창설된 유엔의 정신을 가장 잘 구현해 나갈 것이라는 소망도 한 몸에 받고 있다.


유엔 사무총장은 유엔의 실질적 수장으로서 전세계 192개 회원국의 복잡한 이해관계를 공평무사하게 풀어내야 하는 고난도 외교력이 요구되는 유엔 외교의 사령탑이다. 이를테면 본인이 직접 권력을 행사하기 보다는 정글 같은 국제사회에서 강대국과 약소국의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각종 국제분쟁을 중재하는 ’심판’ 또는 ’중재자’ 역할을 맡는 자리인 셈이다. 특히 노르웨이 스웨덴 미얀마 오스트리아 이집트 가나 등 강대국과는 거리가 있는 역대 사무총장 배출국의 면면에서 유추할 수 있는 것처럼 사무총장은 강대국 간의 민감한 이해관계를 중립적 위치에서 중재하는 역할을 요구받는다.


평화유지활동, 군비축소활동, 국제협력 증진 등 사무총장의 역할은 유엔의 존재 이유와 맞닿아 있다. 유엔 사무총장을 ’지구촌 재상(宰相)’ 으로 칭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유엔 헌장은 사무총장 신분에 대해 유엔 사무국의 수석행정관으로서 사무국 직원 3000여명을 지휘하며 업무수행에 있어 어떤 정부나 기구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는 국제공무원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사무총장은 유엔 총회를 비롯, 안전보장이사회, 경제사회이사회, 신탁통치이사회 등 모든 회의에 사무국 수장 자격으로 참여하며 국제분쟁 예방을 위한 조정과 중재 역할에 있어 독자적 정치력을 사용할 수 있다. 또 1만여명의 유엔 직원들에 대한 인사권과 막대한 예산을 집행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며, 국제적으로는 국가원수나 총리급 예우를 받는다. 국제평화와 안보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되는 사안에 대해 안보리의 주의를 환기시키고 분쟁을 조정하고 중재하는 것도 그의 몫이다.


연봉은 1997년 이래 22만 7253달러(약 2억원)로 책정돼 있다. 판공비, 관사, 경호 등도 제공받는다. 다만 뉴욕의 총장 관저를 1년에 1달러만 내고 사용하는 특권도 누린다. 이 관저는 미국 유엔협회가 지어 상징적인 임대료만 받고 사실상 무료로 살게 해주는 셈이다. 외교 관례상 세계 각국에서 받는 의전은 당사국 행정부 수반의 수준에 맞춰지고 있다.


대부분의 역대 총장들이 본인이나 해당 국가의 로비의 결과물이었다기 보다는 특수한 정치상황 속에서 미국과 중국. 러시아 등 5개 상임이사국의 정치적 타협의 산물이었다는 점에서 태생적 한계를 가진게 아니냐는 의구심을 받아 왔다. 까다로운 5개 상임이사국들의 입맛을 맞춰 가면서 약소국들의 사정도 두루 살펴 분쟁을 해결해야 하는 자리인 만큼 그만큼 내적 고민과 고통이 수반되는 자리가 아닐 수 없다.


◇ 공부벌레. ’타고난 외교관’ 반기문


반 임명자는 1944년 충북 음성군에서 3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반 임명자와 유엔과의 인연은 헝가리 국민봉기가 일어난 지난 1956년이다. 당시 초등학생이던 그는 학교 대표로 다그 함마슐트 당시 유엔 사무총장에게 보내는 탄원서를 낭독한 ’꿈나무’였다.


고등학교 내내 ’수’만 받은 반 임명자는 대한 적십자사가 주최한 영어 경시대회에서 1등을 차지한 데 이어 주한 미대사관이 주관하는 프로그램에 한국 대표로 뽑혀 미국 땅을 이때 처음 밟고 케네디 대통령을 직접 만나는 특별한 경험을 했다.


반 임명자는 케네디 대통령이 꿈이 뭐냐고 물었을 때 “스스럼없이 ’외교관’이라고 답했다”고 상기했다. 반 임명자는 이때부터 진지하게 외교관의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 ’공부벌레’ 반 임명자는 서울대 외교학과 재학 시절에도 긴장을 늦추지 않아 체육을 제외한 모든 과목에서 A 학점을 받아 우등생으로 선발됐다.


덕분에 반 임명자는 신태환(申泰煥) 당시 서울대 총장이 새로 도입했던 ’우등상 제도’의 혜택을 받아 우등생으로 졸업했다. KBS 프로그램 ’수석 졸업생들과의 대화’에 출연해 대중의 관심을 끌었다. 1984년 미국 하버드대 행정대학원인 케네디 스쿨에서 연수를 받으면서도 반 임명자는 특유의 학습욕을 불태워 졸업식 때 다시 한 번 우수상을 거머쥐었다.


◇ ’복주머니’로 맺어진 인연. 아내의 ’조용한 내조’


반 임명자가 부인 유순택(柳淳澤.62) 여사를 만난 것은 그가 충주고등학교 3학년으로 미국을 방문하던 1963년이었다. 이웃의 충주여고 학생들이 반 임명자에게 미국 체류 중 사용하라며 복주머니를 만들어줬고, 이 주머니를 반 임명자에게 대표로 전달한 것이 당시 충주여고 학생회장이었던 유순택 여사였다. 이렇게 시작된 인연을 계기로 두사람은 결혼에 골인, 43년이라는 세월을 함께 해 온 인생의 동반자가 되었다.


결혼 직전 유순택 여사의 어머니는 반 임명자 부부에게 “남자가 해 지기 전에 집에 오는 것은 직업이 없거나 큰 병을 앓고 있을 때이니, 반 서방이 늦게 들어오는 것에 대해 뭐라 하지 말라”고 유 여사에게 당부했다고 반 임명자는 회고했다. 덕분에 반 임명자는 아내의 조용한 내조 아래 마음 놓고 업무에 매진할 수 있었다. 반 임명자가 사무총장으로 임명된 지금까지도 유 여사는 밖으로 나서지 않고 반 장관 내조에 전념하고 있다.


◇ 딸들의 ’비밀 결혼식’


반 임명자는 유 여사와 슬하에 1남 2녀를 두고 있다. 현재 아시아재단 사업부장으로 근무 중인 맏딸 선용(仙蓉.36)씨와 유엔아동기금(UNICEF) 케냐 사무소에서 국제기구초급전문가(JPO)로 일하고 있는 막내 딸 현희(賢禧.31)씨는 모두 비밀리에 결혼했다.


반 임명자는 차관 및 비서관 이외에는 일체로 비밀로 하고 결혼식이 끝난 후에 공지할 정도로 공과 사를 엄격히 구분했다. 아직 미혼인 맏아들 우현(雨鉉.33)씨는 현재 미 캘리포니아주립대(UCLA)서 MBA 과정을 밟고 있다.


궂은 일 마다 않는 ’우등생’ 외교관


1970년 제 3회 외무고등고시를 차석으로 합격한 반 임명자가 1979년 주 뉴델리 총영사관에 자발적으로 간 일화는 유명하다. 맡는 일마다 정확하게 처리하는 데다 성실함을 ’겸비’해 외무부 안팎으로 ’명성이 자자했던’ 반 임명자가 ’험지’인 인도에 발령이 나자 당시 감사관은 너무나 의아한 나머지 그를 불러 자세한 경위를 파악할 정도였다고 한다. 반 임명자는 외무부 본부에서 이미 인도를 담당했었고 또 생활비가 다른 근무지에 비해 적게 들어 저축이 가능한 곳으로 가야 고향의 형제들을 금전적으로 도울 수 있다며 뉴델리 근무를 지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인도에서 반 임명자는 당시 주 인도대사였던 노신영(盧信永) 전 총리를 만났다.이 때 그의 성실함과 우수성이 노 대사의 눈에 띄어 후에 총리로 임명된 후 총리 의전비서관으로 발탁하는 계기가 마련됐다. 케네디 스쿨 연수 중이던 반 임명자를 부이사관으로 파격 승진시켜 비서관으로 발탁한 노 전 총리는 그를 얼마 지나지 않아 이사관으로 승진시키려 했다. “아직 차례를 기다리는 선배들도 계시는데...”라며 한사코 사양한 반 임명자가 결국 승진하게 되자 외교부 선.후배와 동기 100여 명에게 친필로 “미안하다”는 편지를 보낸 일화 또한 외교부 내에서 지금도 회자되는 이야기다.


불어. 독어도 수준급


1975년 외무부 국제연합과 차석으로 시작해 1979년 유엔대표부 1등 서기관 신분으로 처음 유엔 본부에 ’입성’한 반 임명자가 점심 시간을 이용해 불어를 익힌 일화도 유명하다. 반 임명자는 사무총장 선거 캠페인 중 프랑스와 북서 아프리카의 불어권 국가 정상 및 외교장관들과 만나면 불어로 대화하고 연설도 불어로 해 유엔 회원국들의 이목을 끌었다. 그의 불어 실력은 유엔대표부 1등 서기관 시절 탄탄한 기반을 잡은 것으로 알려졌다.


반 임명자는 불어 뿐만 아니라 독어 또한 연설문을 자연스럽게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실력이 상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1998년 주 오스트리아 대사를 역임할 당시 반 임명자는 짬이 날 때면 독어를 공부해 독어권 대사들과 모인 자리에서 주로 독어로 연설했다고 주변인들은 회고했다.


부친 별세에도 슬픔 참고 협상에 매진


반 임명자는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 협상이 한창이던 1991년 부친상을 당했다. 그러나 그는 이 사실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협상에 매진했고 공동선언이 채택된 후 아버지 빈소가 있는 충주로 직행했다. 이 사연은 많은 이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고 모 방송사의 9시 뉴스에 보도되기도 했다.


장관으로 재직 중이던 2004년 유럽 순방을 마치고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환자가 발생해 반 임명자가 체코에 긴급 기착을 지시하고 체코 주재 대사에게 연락해 응급치료를 받도록 도운 일화도 있다. 환자가 응급조치를 마쳤는지 직접 확인을 한 후에야 다시 서울로 출발했는데 그때 사실 반 임명자 본인은 빙모상을 당한 상태였다.


반 임명자가 자신에게는 무척이나 엄격했던 것은 다른 일화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국제연합과 과장을 맡은 1980년 비동맹권 교섭차 인도로 출장을 갔다 장티푸스에 감염된 반 임명자는 도저히 업무를 정상적으로 수행할 컨디션이 아니었음에도 불구, 수일 간의 격무를 소화한 후에야 병원에 입원했다.


주요 ’공적’과 그에 대한 전 상관들의 평가


1992년 워싱턴 주 미국 대사관에서 공사로 있으면서 반 임명자는 1994년 제네바 합의가 도출되기까지 막후에서 미국을 상대로 상당한 설득작업을 벌였다. 1994년 아시아ㆍ태평양 경제협력체(APEC) 고위대표로 협상에 참여해 우리 농수산물시장 개방과 관련, ’유연성의 원칙’을 도입하는 데 성공해 우리 농산물 시장보호에 큰 역할을 하기도 했다.


특사로서의 활약상도 빼놓을 수 없다. 1996년 황장엽(黃長燁) 전 북한 노동당 비서의 망명사건이 터졌을 때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이었던 반 임명자는 사실상 특사자격으로 극비리에 필리핀을 방문, 타결책을 마련했다. 그는 1998년 주 오스트리아 대사와 주 국제기구대표부 대사를 겸임하면서 핵실험금지조약기구(CTBTO) 준비위원회 의장을 6개월간 맡아 외교 업무에 있어 상당히 전문적인 분야에 속하는 핵실험에 대해서도 경험을 쌓았다.


2001년 한승수(韓昇洙) 당시 외무부 장관이 한국의 유엔 가입 역사 상 처음으로 총회 의장으로 선출됐을 때 최측근에서 그를 보좌한 것도 반 임명자였다. 그는 한 의장 비서실장으로 있으면서 유엔 사무국이 평가한 “가장 활동적인 비서실장”으로서의 평판을 쌓았다. 그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와 이 때 유엔에서 사귄 ’친구’들이 반 임명자가 당선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고 그의 지인들은 평가했다.


한 의장이 총회 의장을 맡은 지 얼마 되지 않아 9.11 테러가 발생했기 때문에 반 임명자가 관여했던 첫 번째 의장성명은 바로 테러 규탄 성명이었다. 2000년 이정빈(李廷彬) 전 장관 밑에서 차관을 맡을 때다. 당시 이 전 장관은 “내가 반 차관을 데리고 일할 수 있다니 참 복이 많은 장관이다”라며 칭찬했다는 후문이다. 차관으로 재직하던 1년 동안 반 임명자는 거의 모든 주말에도 공식 일정을 소화해냈다고 한다.


지치지 않는 ’에너자이저’ㆍ’기록제조기’


 반 임명자는 지치지 않는 열정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장관직을 맡은 2004년 1월 이래 총 105개국을 방문했으며 재직 기간 990일 중 1/3인 330일을 해외에서 보냈다. 각국 외교장관들과 만난 횟수도 만만치 않다. 반 임명자는 총 321 차례의 외교장관회담에 참가했다.


60세를 넘긴 나이에도 2박6일, 24박26일이라는 가히 ’엽기적’인 일정을 거뜬히 소화해 내 그보다 젊은 보좌진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의 ’강철 체력’을 과시하기도 한다. 이렇게 눈코 뜰새 없는 와중에도 반 임명자는 언론간담회 74회, 외신인터뷰 108회, 국내 언론과 인터뷰 100회 등 언론과의 접촉도 활발히 유지했다.


조선일보  입력 : 2006.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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