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사 (조선)

조선 시대에도 ‘닭살 부부’ 있었다.

마도러스 2006. 8. 22. 10:00

조선 시대에도 ‘닭살 부부’ 있었다.

 

梨大 한국학 포럼서 ‘사대부 부부 관계’ 재조명

“1年365日 붙어 지내며 자녀교육하고 술자리도 같이”
아내가 남편에게 인생 조언도, “女必從夫만은 아냐”

 
“지금 나는 홀아비를  면하지 못했으니 배가 고파도 채울 데 없고 추워도 따뜻함을 구할 데 없으며 … 근심이 있어도 함께 하자 할 데 없고 잘못이 있어도 따끔한 소리 들을 데 없소.
 
읽을 때 막히는 곳 있어도 풀어달라 할 데 없으며 어려운 일 만났을 때도 해결해 달라 할 곳 없소. … 내가 느끼는 원통함과 슬픔을 어찌 가히 그칠 수 있으랴, 아아 슬프다.”


18세기 문신(文臣) 신경(申暻·1696~1766)이 64세 되던 해 아내를 여의고 쓴 ‘아내 숙인 윤씨를 제사하는 글(祭內子淑人尹氏文)’ 의 일부다. 흔히 권위적 가부장제의 시대라고 생각하기 쉬운 조선시대에도 여필종부(女必從夫)나 부창부수(夫唱婦隨)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어떤 부부들은 매일 함께 마주앉아 서로의 흉금을 털어놓았고, 같이 할 수 있는 많은 일을 공유하며 상대방을 존중하고 깨우쳤다. 최근 이화여대 한국문학연구원이 주최한 한국학포럼 ‘기억하는 남성, 기억되는 여성: 18세기 문집 자료를 중심으로’에서 ‘슬픔과 탄식 속의 지아비/아버지 되기’를 발표한 김현미 박사(한문산문 전공)는 신경이 남긴 글을 분석하면서 전통시대 사대부 부부가 지녔던 모습의 일단(一端)을 짚어냈다.


신경의 글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것은 ‘남편의 언행과 학업에 믿을 만한 조언을 해 주고 경계(警戒)할 수 있는, 조언자·조력자로서의 아내’다. 신경이 아내를 그리는 글에서 “(당신이) 내 말과 행동을 살펴 때마다 잘못을 구해주고 번번이 선한 일을 하도록 경계하며 공부하도록 권하였으니 … 진실로 평생토록 이 고민을 떠안았었지” 라고 한 데서 그것이 드러난다. 그리고 아내의 죽음은 그런 교유의 상대가 없어졌다는 탄식과 슬픔으로 이어진다.


이들 부부는 함께 했던 일이 무척 많았다. “여름 낮과 겨울 밤, 봄가을 낮 밤으로 매일 마주앉아 어떤 때는 심사를 말하고 어떤 때는 아이를 가르치며, 글을 베끼거나 그림을 보기도 하며, 달 구경과 꽃 감상, 술을 마시거나 투호놀이도 하면서 집에서 지내는 즐거운 낙으로 삼았었지.”


김현미 박사는 “부부 사이에 서로 모르는 게 없고 높은 사귐을 가질 수 있는 것, 아내에게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지아비가 되는 것이 그들 부부가 ‘상경상애(相敬相愛·서로 존경하고 사랑함)’ 하는 모습이었음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이는 예외적인 경우이긴 하나, 18세기 사대부의 여성 인식과 가족 안에서의 자의식을 알 수 있는 사례라는 것이다.


한편 같은 포럼에서 ‘이덕수 집안의 여성들’을 발표한 강성숙 박사(구비문학 전공)는 영조 때의 문인 이덕수(李德壽·1673~1744)가 아내를 위해 쓴 묘지명을 분석했다. 젊어서 죽은 부인 해주 최씨를 기린 묘지명에서 이덕수는 보통 남자들이 선호하는 온순한 아내가 아니라 강직한 성품을 가진 아내의 덕을 칭송했다.


 “성품 또한 강직하고 발라서 내가 잘못하는 것을 보면 반드시 옳은 것으로써 깨우쳐 주었다.” 병상에 누웠을 때에도 남편이 바둑을 둔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당신이 책 읽는 소리를 들으면 문득 마음이 기뻤는데 지금 어째서 이러느냐” 며 잔소리를 그치지 않는 아내의 모습은 ‘나를 바른 길로 인도하는 존재’ 로서 기억됐다는 것이다.


조선일보 유석재 기자 입력: 2006.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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