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사 (조선)

왕의 남자’의 주역 연산군과 장녹수의 스캔들

마도러스 2006. 7. 13. 00:05

왕의 남자’의 주역 연산군과 장녹수의 스캔들

  

장녹수와 짜고 대신의 아내를 간통한 연산군

 

얼마 전 ‘왕의 남자’란 영화가 한국 영화사의 모든 흥행 기록을 갈아치웠다. 전문가들은 이 영화가 최단 시간 내에 관객 1,000만 돌파라는 흥행의 신기록을 작성한 이유는 동성애 코드, 전통에 대한 강한 향수, 사극의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탄탄한 구성과 배우들의 진지한 연기력이 어우러진 결과라고 진단한다.


그런데 이 영화의 핵심 기둥인 연산군과 장녹수란 존재가 흥미롭다. 걸핏하면 고위 대신들을 직접 살해하고, 음탕하게 노는 왕으로 묘사된 연산군, 남성에게 불같은 질투를 뿜어대는 애첩 장녹수.

 

과연 조선시대의 정사(正史)인 왕조실록에는 이들의 모습이 어떻게 그려져 있을까. 후대에까지 소설이나 영화,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등장하여 유명세를 탄 연산군 시절의 요부(妖婦) 장녹수의 미모에 대해 실록은 이런 기록을 남겨놓았다.

<애첩 장녹수는 제안대군(예종의 둘째 아들)의 집안 노비였다. 성품이 영리하여 사람의 뜻을 잘 맞추었는데, 처음에는 집이 매우 가난하여, 몸을 팔아 생활했으므로 시집을 여러 번 갔다. 그러다가 대군 집안 노비의 아내가 되어 아들 하나를 낳은 뒤 노래와 춤을 배워 창기(娼妓)가 되었는데, 노래를 잘해서 입술을 움직이지 않아도 소리가 맑아 들을 만했다. 나이는 30여 세였는데도 얼굴은 16세의 아이와 같았다.


왕(연산군)이 듣고 기뻐하여 궁중으로 맞아들였는데, 총애함이 날로 융성하여 말하는 것은 모두 좇았고, 숙원(淑媛·후궁으로 종4품)으로 봉했다. 얼굴은 보통사람 정도를 넘지 못했으나 남모르는 교사와 요사스런 아양은 견줄 사람이 없어 왕이 혹하여 거만했다.>

장녹수는 연산군의 환심을 사기 위해 뚜쟁이 역할도 서슴지 않았으니, 중종 1년(1506) 9월 2일 실록이 이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대궐 안에서의 연회에 사대부 아내로 들어가 참여하는 자는 모두 그 남편의 성명을 써서 옷깃에 붙이게 하고, 미모가 빼어난 이는 장녹수를 시켜 머리 단장이 잘 안 되었다고 핑계대고 그윽한 방에 끌어들여 간통했는데, 혹 하루를 지난 뒤에 나오기도 하고 혹은 다시 불러 궁에 유숙하는 일도 자주 있었다. 월산대군의 부인은 세자의 양모(養母)라는 핑계로 항상 궁에 머물게 했고, 성종의 후궁 남씨도 대비와 가까운 곳에 있으면서 총애를 입어 추한 소문이 바깥까지 퍼졌다.>

 

마음에 맞는 자는 모두 간통


연산군이 대신의 부인을 간통한 사연은 연산군 11년(1505) 8월 25일 기록에 언급되어 있다.

<사신은 논한다. 모든 궁궐의 잔치 때 왕이 그 이름을 쓴 표찰을 보고 아무개의 아내가 아무개라는 것을 알아두었다가 마음에 맞는 자는 모두 간통하니, 바깥 사람으로서 조금이라도 지식이 있는 자는 아내를 숨기고 병을 핑계하여 들여보내지 않았다. 박승질(좌의정)의 아내 정씨가 젊고 얼굴이 아름다워 왕이 가장 좋아했다. 정씨는 본디 족친(族親)이 아닌데도 자주 궁에 들어가 열흘이 지나서야 나오곤 했다. 왕이 말하기를 “박정승(박승질)이 늙어 쇠약하므로 그 아내가 나를 사모한다”고 했다. 박정승이 이를 알고서 원통해 했으나, 해(害)가 미칠 것이 두렵고 기운이 쇠약해 감히 막지 못했다.>

연산군 11년 4월 12일 실록은 연산군과 장녹수의 결탁에 의한 음행으로 4~5일이 되도록 궁중에 유숙한 사람의 명단을 다음과 같이 기록해 놓았다.

<사신은 논한다. 왕의 음탕이 날로 심해 족친과 선왕(先王)의 후궁을 모아 왕이 친히 잔을 들어서 마시게 했다.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으면 장녹수와 궁인(宮人)을 시켜 누구의 아내인지 비밀히 알아보게 하여 외워두었다가 궁중에 묵게 하여 밤에 강제로 간음하며 낮에도 그랬다. 혹 4~5일이 되도록 나가지 못한 사람으로는 좌의정 박승질의 아내, 남천군 이쟁의 아내, 변성의 아내, 총곡수의 아내, 권인손의 아내, 승지 윤순의 아내, 생원 권필의 아내, 중추 홍백경의 아내 같은 이들이 있었다. 홍백경은 왕에게 고종사촌형이 되는데 홍백경이 죽고 부인이 과부로 살자 왕이 그의 아름다움을 듣고 드디어 간통했다.>

연산군 10년(1504) 6월 5일 임금은 왕후와 대비전, 그리고 왕실 가족의 남녀를 빠짐없이 써서 보고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대해 사관은 ‘내정에서 잔치를 벌여 자색이 아름다운 부녀를 몰래 간음하기 위해서’ 라고 비판하고 있다. 연산군 10년 6월 25일에는 윤은로라는 대신의 아내를 간음한 후 임금이 이렇게 묻는다.

<“윤은로의 아내는 누구의 딸인가”하고 묻자 승지 이계맹이 아뢰기를 “전 금천 현감 김복의 딸입니다” 했다. 사람들의 말로는 왕이 간음하고서 기쁜 까닭에 물은 것이라 한다.>

연산군은 대신의 아내뿐만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마음 내키면 닥치는 대로 음란한 행동을 일삼았던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연산군 9년(1503) 6월 13일 실록.

<장악원(궁중음악을 담당한 관청) 관원이 해금 타는 기생 광한선 등 4인을 적어서 아뢰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요사이 마침 비가 흡족하게 왔으므로 작은 잔치를 하려고 한다. 광한선 등에게 해금을 가지고 들어오게 하라” 했다. 조금 있다가 임금이 다시 말하기를 “가야금과 아쟁 잘 타는 기생을 한 명씩 뽑아 들이라” 했다.
하루는 왕이 술에 취해 임승재에게 말하기를 “내가 광한선을 가까이하고 싶은데 외부에서 알까 두렵다” 하니 임승재가 말하기를 “세조 때도 네 기생이 있어 때없이 궁중에 출입했습니다. 기생을 뽑아 출입시키는 것을 외부에서 어찌 알겠습니까” 하니 왕의 생각이 비로소 결정되어 드디어 광한선을 취하게 됐다.
이에 앞서, 연산군은 내시 5~6인에게 몽둥이를 들려 정업원(동대문에 있던 중들의 거처)으로 달려들어가 늙고 추한 여중을 내쫓고 젊고 아름다운 7~8인만 남겨 음행하니 이것이 왕이 색욕(色慾)을 마음대로 한 시초이다.>

연산군은 재임 2년 6월 1일 궁중에 당나귀와 말을 들여오게 했는데 이에 대해 사신은 다음과 같은 논평을 남겼다.

<왕이 비밀리에 암수 말을 후원으로 끌어들이게 하여 교접을 구경한 것이다.>(계속) 

 

‘흥청’이라는 이름의 기생학교 설립

 

연산군은 조선시대 역대 군주 중 희대의 인물이었다. 조선시대의 정사(正史)인 왕조실록에 “연산군 12년(1506) 7월 18일에는 ‘왕이 두모포에 놀이를 갈 때, 궁녀 1000 여 명이 따랐는데, 왕이 길가에서 간음했다”고 적고 있는 것을 보면, 실록을 기록하는 사관(史官)은 물론 실록 편찬자들에게 단단히 미운 털이 박힌 것이 분명하다.


연산군의 광기 어린 음행의 절정은 ‘흥청’ 이라는 기생학교의 설립에서 절정을 이룬다. 연산군은 자신을 수행하는 궁녀들을 미녀들로 채우기 위해 전국에 미녀 선발단을 보내 여성들을 선발한 다음 ‘운평’ ‘흥청’이라는 이름을 내리고는 기생학교에 소속시켰다.

 

오늘날 ‘흥청거린다’는 말은 바로 흥청과 연산군이 질펀하게 놀아났다는 말에서 파생된 것이다. 연산군 10년(1504) 12월 22일 임금은 친히 기생가무단에 흥청·운평·광희라는 이름을 내리며 이렇게 말한다.

<"소위 흥청이란 사악하고 더러움을 깨끗이 씻으라는 뜻이요, 운평은 태평한 운수를 만났다는 뜻이다. 그 의미가 어떠냐”하고 묻자 승지들이 “칭호가 매우 아름답습니다” 했다.>

이틀 후인 12월 24일에 연산군은 “흥청악은 300명, 운평악은 700명을 정원으로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 사례에서 보듯 연산군 시절 기생학교 운영은 국가의 주요 사업이 되었다. 그런데 무엄하게도 일반인들 가운데서 운평 소속 기생들을 간음하는 자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에 임금은 운평을 간음한 자에게 철퇴를 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때 각도에서 운평으로 뽑혀 서울에 올라온 자가 1000명이나 되었는데, 남의 처첩이 되는 것을 금지하자 의탁할 곳이 없어 간혹 길에서 걸식하는 자도 있었다.

운평과 흥청들이 밥을 얻어먹다 유혹에 넘어가 외간 남자와 사통하는 사건이 잦자 연산군은 재임 12년(1506) 6월 13일 운평과 흥청 소속 기생들에게 “죽을 때까지 임금을 받들고, 죽어서도 궁에 뼈를 묻으라는 지시를 내렸다.

 

신하들에게 ‘말조심’ 표찰 달게 한 연산군

 

연산군이 음행을 일삼기 시작한 재임 초기, 전국 곳곳에서 천재지변이 일어나 백성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 이에 연산군 4년(1498) 7월 8일 홍문관 부제학 이세영 등이 상소를 올려 ‘천재지변은 반드시 그 까닭이 있는 것’이라며 임금이 덕을 쌓으면 천재지변을 방지할 수 있다고 아뢰었다.

<“조화로운 기운은 덕이 있는 곳에 응하고, 궂은 징조는 덕을 잃은 곳에 생기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이후, 아름다운 기운이 아직 엉겨 있어, 음양이 서로 틀리고, 천문이 도수를 잃고, 땅의 도리가 편안하지 못해 서리와 우박, 번개, 천둥의 변이 있었습니다. 또 돌이 떨어지고 큰물이 지는 등 조용한 해가 없는데, 지금 경상도 17개 고을에 사흘 동안 지진이 이어졌고, 하루에 네 번이나 지진이 일어난 곳도 있었습니다.
삼가 과거 기록을 살펴보건대 ‘임금이 약하고 신하가 강하거나 포학하여 함부로 죽이면 지진이 있고, 여알(대궐 안에서 정사를 어지럽히는 여자)이 권력을 휘두르면 지진이 있고, 외척이 날뛰고 내시가 권세를 쓰면 지진이 있고, 형과 벌이 중용을 잃으면 지진이 있고, 옥에 원통한 죄수가 있으면 지진이 있고, 임금이 간언하는 말을 듣지 않거나 안으로 여색에 빠지면 지진이 있고, 오랑캐가 침범하여 사방에 병란의 조짐이 있으면 지진이 있다’ 했습니다.”>

이어 신하들은 임금의 행동을 완곡한 표현으로 비판하면서 공부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역설했다. 연산군은 속으로는 찔끔했지만 그냥 물러설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경연이 비록 중하지만, 내 몸도 중하다. 지금 만약 억지로 경연에 나갔다가 점점 큰 병을 얻으면 일이 도리어 경연보다 중할 것이다.”>

연산군은 학문을 멀리했고 자신의 음탕한 행실을 비판하는 신하들을 죽이고 귀양 보냈다. 조선 개국 이래 유학자들이 부단히 노력하여 쌓아 올렸던 왕도정치의 틀, 즉 간언을 담당하는 사간원을 없애고 왕이 공부하는 경연을 폐지했다. 나아가 학문의 전당이었던 성균관을 음행을 일삼는 유흥장으로 개조했다.


연산군의 음행과 방자한 행동에 대한 소문이 날개를 달고 퍼져 나가자, 왕 입장에서도 소문을 잠재울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궁리 끝에 연산군은 기발한 방법을 연구해 냈다. 연산군 11년(1505) 1월 29일 실록에서 발견된 ‘말조심 표찰사건’ 은 한 편의 코미디를 연상시킨다.

<임금이 이르기를 “환관이 차고 있는 ‘입은 화(禍)의 문(門)이요 혀는 내 몸을 베는 칼이니, 입을 다물고 혀를 깊이 간직하면 몸이 편안하여 곳곳이 안온하리’라고 새긴 것을 관리들에게도 차게 하라”고 했다.>

사정이 이쯤 되면 목숨이 아깝지 않은 신하가 어디 있겠는가. 생존을 위해서는 왕의 행실에 침묵해야 하고, 이런 상황을 이용하여 왕에게 적극 아첨하는 대신들이 득세하는 비극이 연출됐다. 김처선이란 환관의 죽음은 그 절정이 아닌가 한다.


연산군 11년 4월 1일 실록에 의하면 김처선은 연산군이 권하는 술을 받아 마시고 취해서 임금에게 “정사를 바로 펴야 한다”직언(直言)을 했다. 연산군이 노하여 친히 칼을 들어 그의 팔 다리를 자르고 활로 쏘아 죽였다. 분이 덜 풀린 임금은 “김처선의 친족은 7촌까지 죄를 주고 그 부모의 무덤도 다른 죄인의 예에 따르라”고 명했다.

연산군은 패악스런 행동을 일삼다가 신하들의 쿠데타로 쫓겨난 후 사신은 혹독한 비판의 필봉을 휘둘렀으니, 다음은 중종 1년(1506) 9월 2일 실록.

<사신은 논한다. 연산은 성품이 포악하여 정치를 가혹하게 했다. 주색에 빠져 제사를 폐하고 쫓겨난 어미(폐비 윤씨)를 그리면서 대신들을 많이 죽였으며, 간언하는 것을 듣기 싫어해 언관(言官)들을 쫓아냈다. 서모(성종의 후궁이었던 정씨와 엄씨)를 때려죽이고 여러 아우들을 잡아 죽였다. 날마다 창기와 음란한 행동을 하여 법도가 없었고, 남의 첩과 거리낌없이 간통했다. 또 상제(喪制)를 고쳐 달수를 날수로 바꾸었으며, 죄악이 하늘에 넘쳐 귀신과 사람이 분해하고 원망했기 때문에 마침내 반정이 있게 된 것이다.
연산은 후궁 엄씨와 정씨가 일찍이 부왕에게 총애를 얻어 폐비의 일에 참여했다 하여 타살했고, 안양군 이항과 봉안군 이봉(두 사람은 성종의 후궁이었던 귀인 정씨 소생이다) 및 족친을 먼 섬에 유배했다가 얼마 뒤 모두 죽였다. 그리고는 말하기를 ‘이항과 이봉은 이미 의리가 끊겼다’고 변명했다. 그 아내는 다른 사람에게 시집보냈고 이항의 첩은 진성군(성종의 후궁인 귀인 권씨 아들)에게 주고, 이봉의 첩은 영산군(성종의 후궁 숙용 심씨의 아들)에게 주어 모두 아내를 삼게 했다. 옹주들은 곤장을 쳐 먼 곳에 귀양 보냈다.>

여기까지는 가족들에 대한 패륜행위이고 다음 비판은 연산군의 음행에 대한 부분이다.

<당초 연산이 총애했던 여인 애첩 장녹수를 들여놓으면서부터 날이 갈수록 여색에 빠져들었고, 미모가 빼어난 창기를 궁 안으로 뽑아 들인 것이 처음에는 100으로 셀 정도였으나 마침내는 1000을 헤아리기에 이르렀다. 말하기를 “사안(중국 동진의 재상. 성질이 호탕하여 은거하며 놀이 때는 반드시 기생을 데리고 다녔음)은 신하로도 오히려 동산에서 기생을 데리고 있었는데, 하물며 임금이 그만 못하랴” 했다.
기생을 고쳐 운평이라 하고, 대궐 내에 들인 자를 흥청, 혹은 가흥청·계평·속흥이라 했으며 가까이서 모시는 자를 지과흥청, 임금의 사랑을 받은 자를 천과흥청이라 했다. 또 장악원을 연방원이라 고치고 모든 읍에 운평을 설치하여 뽑아 올리게 했다.
대신을 나누어 보내 채흥준 체찰사라 이름하여 서울 인근 사대부의 첩 및 양가의 아내와 딸, 공사천 창기 등을 샅샅이 수색하여 나누어 주었다. 나인이 죽으면 여원묘라 일컫고, 관원을 보내 치제하기를 선왕의 능소에서와 같이 했다. 아이를 밴 운평은 그 남편을 베고, 아이는 생으로 매장했다. 흥청이 있는 아상복과 흥단장에 드는 물건들을 처음에는 옛 남편에게서 징수했는데, 백성들에게도 거둬들여 백성들의 살림이 거의 탕진됐다.>

한 시대를 농락하며 숱한 대신들을 죽이고 음행을 일삼았던 연산군은 쿠데타로 실각한 지 두 달 후에 죽었다. 연산군을 현혹하여 조정에 파탄을 불러일으키고 국가 기강을 뒤흔들었던 장녹수도 중종반정 이후 참수당했고 그녀의 모든 가산은 적몰되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기생에게 미니스커트 입힌 연산군

 

연산군은 색(色)을 좋아했던 만큼 ‘흥청’이란 기생학교 소속의 기생들들 주위에 두고 살았던 것으로 실록은 전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성격이 워낙 날씨에 따라 수시로 변하는 터라 임금의 기분에 따라 기생들은 무시로 수난을 당하기도 했다. 연산군 10년(1504) 5월 6일 실록에 의하면 임금은 “기생들이 공공 연회에 부지런히 나오지 않고, 지아비가 숨기고 보내지 않거나 원망하는 말을 퍼뜨리는 자들이 있으니 엄히 다스리라“고 명했다. 이날 임금은 예조에 “기생들의 지아비 이름을 적어 보고하라“는 명을 내렸는데, 이때의 정황을 실록은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임금이 기생 적선아(謫仙兒)의 이름 아래 지아비가 이세걸(李世傑)이라 써 있는 것을 보고 “이 기생은 내전 잔치 때 비파를 치지 않으려는 기색이 있었으니 곤장 100대를 때려 먼 지방의 작은 고을 관비로 보내라. 또 전에 이세걸을 관청 노비로 삼으라 했는데 참형에 처하라“ 했다. 임금이 기생들에게 마음대로 욕심을 부려 기생 지아비를 모두 죄주었는데, 이세걸이 적선아를 데리고 산 것을 알고 노여움이 심해 죽인 것이다.>

연산군 10년(1504) 5월 26일에는 풍악을 연주하는 기생 중 곱게 단장하지 않은 9명을 의금부에 하옥시켰으며, 같은 해 6월 1일에는 옷과 화장이 단정치 못한 기생에게 곤장 80대를 쳤다. 같은 해 6월 14일에는 잔치에 참석하는 기생은 짧은 옷을 입도록 명했다. 요즘 패션 용어로 설명하면 미니스커트와 배꼽티를 입힌 셈인데, 이를 비판하는 소문이 사방에서 떠돌자 “짧은 옷 입히는 것이 옳지 않다고 말한 자를 조사하여 보고하라“고 지시한다. 8월 17일엔 소홍립(笑紅粒)이란 기생이 잔치에서 수심에 찬 얼굴로 노래했다 하여 벌을 주고 변방으로 내쫓은 일도 있었다.

이러한 미녀 기생들 중 연산군의 총애를 한 몸에 받은 존재가 애첩 장녹수였다. 흔히 여성의 미모를 일컫는 고사성어로 경국지색(傾國之色)이란 말이 있다. 여인의 아름다움이 나라를 기울게 한다는 뜻이니,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탕아 연산군을 미혹으로 빠져들게 한 장녹수(張綠水)는 자신의 미모를 무기로 여러 남자를 출세시키기도 했다. 다음은 연산군 8년(1502) 11월 25일 실록에 나타난 기록이다.

<김효손(金孝孫)을 사정(오위의 정7품 군직)으로 삼았다…. 왕이 몹시 노해도 장녹수만 보면 반드시 기뻐하여 웃었으므로 상주고 벌주는 일이 모두 그의 입에 달렸으니 김효손은 장녹수의 형부이므로 좋은 관직에 오를 수 있었다.>

김효손은 장녹수의 영향력 덕분에 이듬해 11월 13일에는 함경도 전향 별감(나라에서 조사, 감독 등의 일이 있을 때 지방에 파견하던 임시관리)으로 승진했다. 김효손 말고도 제안대군(예종의 둘째 아들) 이현의 장인인 김수말(金守末)이 장녹수 덕에 특별승진했다. 연산군 9년 4월 3일 실록에 의하면 “장녹수는 제안대군 집안의 여종 출신이었는데 임금이 녹수를 사랑하여 그 말이라면 모두 따랐기 때문에 특별 승진시킨 것“이라고 전한다.

장녹수는 집안 사람이나 측근 남자들의 출세 길을 열어주는 은인이었던 반면, 자신의 라이벌에게는 포악한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연산군 10년(1504) 6월 9일 임금은 전향(田香)과 수근비(水斤非)라는 여인을 능지하라고 명했다. 이에 대한 실록의 기록.

<두 여인의 죽음은 장녹수가 일을 꾸몄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모습이 고와서 녹수가 시기하여 밤낮으로 왕을 추어서 두 사람의 부자 형제를 하루아침에 다 죽였다.>  

 

연산군과 전비 및 장녹수의 최후, 연산군 부인 신 씨의 아름다운 사연

 

장녹수는 라이벌을 가차 없이 죽이는 한편으로 권력자에게 애교를 떨어 자신의 입지를 강화해 나갔다.

 

연산군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운명의 그림자를 예감했는지도 모른다. ‘인생은 초로와 같아서…‘ 라는 노래를 읊은 지 열흘이 지나지 않아 박원종(朴元宗)과 성희안(成希顔) 등 신하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연산군은 제왕의 자리에서 쫓겨났다.


연산군 12년(1506) 9월 2일 연산군이 쿠데타로 쫓겨난 날 실록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권력을 휘두르던 전비와 장녹수의 행각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임금이 전비와 장녹수의 말을 따르지 않음이 없고 하려는 것을 해주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이들은 옥사(獄事)를 농간하고 벼슬을 팔며 남의 재물과 집을 빼앗는 등 못하는 짓이 없었다. 조금이라도 자기 뜻에 거슬리면 반드시 화로 갚으므로 왕실 가족이나 사대부중 침해와 모욕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주인을 배반하고 이익을 노리는 무뢰배들이 전비와 장녹수의 일가라 주장하며 못된 짓을 하는 자가 셀 수 없었다. 두 집의 책이나 서찰을 가진 자가 사방에 널려 이르는 곳마다 소란을 피우며 수령을 업신여기고, 백성을 못살게 굴어 기세가 넘쳤으나 아무도 범접하지 못하고 움츠려 피할 뿐이었다. 이들이 부모를 뵈러 출입할 때면 승지와 재상들이 앞에서 인도하고 뒤를 감싸 마치 왕비의 행차와 같았다.>

연산군이 실각한 후 전비와 장녹수에게 찾아온 것은 참혹한 죽음이었다. 실록은 그녀들의 최후를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전비와 장녹수를 병기를 만들던 관청 앞에서 베니, 장안 사람들이 다투어 기왓장과 돌멩이를 그들에게 던지며 “나라의 고혈이 여기서 탕진됐다“고 했는데, 잠깐 사이에 돌무더기를 이루었다.>

 

폐비 신(愼)의 아름다운 사연


연산군을 쥐고 흔들었던 전비장녹수의 그늘에 가려진 한 여인의 아름다운 사연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 주인공은 연산군의 부인이었던 폐비 신(愼)씨이다. 전비와 장녹수의 전횡 속에서 숨죽이며 남편 연산군의 사랑을 갈구하던 신씨에 대해 연산군 12년 9월 2일 실록은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폐비 신씨는 어진 덕이 있어 화평하고 중후하고 온순하여 아랫사람들을 은혜로 어루만졌다. 왕이 총애하는 사람이 있으면 왕비가 더 후하게 대하므로 왕은 비록 미치고 포학했지만 매우 소중한 대접을 받았다. 왕이 무고한 사람을 죽이고 음란 방종함이 한없을 때마다 밤낮으로 근심했다. 때론 울며 간하되 말뜻이 지극히 간곡하고 절실했는데, 왕이 들어주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성을 내지는 않았다. 또 빈번히 대군, 공주, 노복들을 엄하게 타일러 함부로 방자한 짓을 못하게 했는데, 연산군이 쫓겨갈 때 울부짖으며, 기필코 왕을 따라 가려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김용삼 월간조선 전략기획실장 입력 : 2006-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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