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사 (조선)

[스크랩] 이순신과 유성룡의 천거

마도러스 2006. 7. 1. 22:55
이순신과 유성룡의 천거 

‘한서(漢書)’ 무제본기(武帝本紀)의 “현자(賢者)를 추천한 자는 높은 상을 받고 숨긴 자는 사형을 받는다”는 기록은 인재 추천의 어려움을 말해준다. 또‘송사(宋史)’ 선거지(選擧志)에는 잘못 천거한 자도 함께 벌을 받는 거주연좌(擧主連坐)까지 나온다.
 

임진왜란 당시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이 없었다면 나라 보존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임란 발발 당시 이순신이 전라좌수사였던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깝다.

 

31세 때인 선조 5년(1572) 병과(丙科)로 겨우 과거에 급제해서 종9품이 된 이순신의 출발은 늦었다. 게다가 백호(白湖) 윤휴(尹?)가 ‘통제사 이충무공 유사(遺事)’에서 “순신은 본디 성품이 고상하여 귀족들을 찾아가지 않았다”라고 쓴 대로 아부와는 거리가 먼 성격이었다. 전라좌수사가 되기 전 이순신은 파직과 좌천, 백의종군을 거듭했다.

 

이순신이 형산(荊山)의 박옥(璞玉·원석)임을 알아본 이가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이었다. 잠곡(潛谷) 김육(金堉)은 ‘통제사 이충무공의 신도비(神道碑)’에서 “유성룡은 이순신과 젊어서부터 좋아하던 사이로서 매번 대장감이라고 칭찬했다”고 말했다.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조정에서 이순신을 추천해주는 사람이 없어서, 무과에 오른 지 10여 년이 되도록 벼슬이 승진되지 않았다”라며 안타까워했다. 유성룡은 이조판서 이이(李珥)로부터 “이순신을 만나고 싶다”는 언질을 받는데 성공했지만, 이순신은 “율곡은 나와 같은 문중[덕수 이씨]인데, 인사권을 갖고 있으니 만나서는 안 된다”며 거절했다.

 

하지만 ‘징비록’에서 “내가 순신을 천거해 차례를 뛰어넘어 수사(水使·전라좌수사)로 임명되었으므로 사람들은 그가 갑작스레 승진된 것을 의심하였다”라고 쓴 대로 유성룡이 아니었다면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없었다. 이때가 임란 1년 전, 왜적(倭敵)의 동병(動兵) 소식에 추천한 것이었다.

 

충무공 탄신일인 4월 28일을 전후해 그가 태어난 서울과 고향인 충남 아산에서 기념제가 한창이다. 이순신의 사생관(死生觀)과 유성룡의 인재등용관(人才登用觀)이 그리운 시점이다. 이덕일 ·역사평론가  입력 : 2006.04.28

 

스크랩: http://cafe.daum.net/do92 , dosu8888@daum.net

출처 : 세상을 여는 인간 꽃
글쓴이 : 난초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