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三國).고려

[스크랩] 우리나라의 결혼제도와 여자에 대한 존중

마도러스 2006. 6. 17. 13:43
우리나라의 결혼제도와 여자에 대한 존중

 

                            출처: http://cafe.daum.net/do92 , dosu8888@daum.net

 

고려시대 호적은 모계, 처계도 부계와 같이 광범위하게 기록했다. 조선시대 호적과는 달리 여자도 모두 이름을 함께 썼다. 고려시대 호적에는 남녀 구분 없이 출생순서대로 기재하고, 여성이 호주가 될 수도 있었다. 조선 초기까지는 남녀의 권리 및 사회적 지위가 대등했다. 재산도 평등 분할했고, 족보에 까지 올랐다. 그러나 조선 후기로 넘어가면서 여자의 지위가 많이 떨어졌으며, 심한 차별과 함께 순종을 강요 당하게 되었다. 그 이전까지 여자는 남자와 평등한 존재였고, 여자 역시 자신의 할 일과 도리를 잘 했고 평등한 대화를 했다.

 

조선시대의 결혼은 남자 15세, 여자 14세이며 허용되었다. 조선전기 까지는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 즉 남자가 처가에서 결혼하고 일정기간 처가에 사는 방식이 일반적으로 행해졌으나, 임진왜란병자호란 이후인 17세기 조선 후기부터는 가부장적인 가족제도가 확립되면서 중국식인 친영(親迎)제도, 즉 여자가 남자 집에 와서 결혼식을 올리고, 남자 집에서 시집살이하는 방식이 일반화되었다. 조선시대 초기까지는 결혼에 있어서 여성의 입장은 매우 유리하였다. 결혼식은 신부 집에서 치러졌으며 자식을 낳아 한 가정을 이룰 때까지 친정살이를 하는 경우도 많았다. 조선사회의 남녀 관계는 선조 때의 임진왜란(1592-1598)과 인조 때의 병자호란(1636-1637) 이후인 17세기 이후 성리학의 지배이념이 확고하게 성립되면서 반전된다.

 

이후 조선사회는 철저한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질서가 강요되어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점점 열악해진다. 특히 결혼이 시집살이를 강요하는 형태로 변모하자, 여성들의 지위 향상은 물론이고 사회진출은 완전히 차단되게 된다. 결혼에 따른 시댁에 대한 여러 가지의 의무사항은 여성으로 하여금 더 이상 사회활동에 관심을 두지 못하게 하였다. 그렇지만 모든 여성이 집안일에 매몰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19세기가 되면 영남의 일부와 관북지방에서는 여자가 장터에 나가 상인과 상대하며 흥정을 벌였다. 특히 관북의 여성은 목축과 밭일을 남자 이상으로 하였다. 이것은 제주도의 여성이 바다에 나가 일하는 것과 같은 현상으로 삶의 터전이 척박한 곳의 일반적 현상이었다. 

 

글 작성: 최병문 (010-4607-3746)

 

 

 

출처 : 세상을 여는 인간 꽃
글쓴이 : 녹차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