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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문에 핍박당한 여자들

마도러스 2006. 6. 17. 13:42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문에 핍박당한 여자들

 

                                 출처: http://cafe.daum.net/do92 , dosu8888@daum.net


 원시시대 때부터 여자는 ‘승리자의 전리품’이었다는 사실과 함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은 조선 역사와 여자들의 역사에 커다란 오욕을 남기게 되었다. 임진왜란(1592-1598) 7년 전란을 통해서 조선의 거의 모든 국토가 쑥대밭이 되고, 철저히 유린당했다. 요즘은 제네바 협약이니 해서, 서로 전쟁을 해도 군인들끼리만 죽고 죽이는 전쟁을 하지만, 당대에는 비인간적인 행위나, 노략질 같은 짓들을 일삼았다. 여자들을 잡아서 겁탈하고 부려 먹는 것은 일상적이었다.

 

조선시대 인구는 임진왜란 이전에는 416만 명이었데, 임진왜란 이후에는 146만 명이었고 한다. 임진왜란 때 침입한 왜군의 수가 20만명 정도였는데, 그놈들이 전부 노략질을 했다. 수많은 여자들이 자살을 했고, 살아남은 여자들은 정조를 잃었다 해서 문전박대를 당했다. 전란의 노략질과 핍박 속에서 여성들이 당한 치욕은 상상을 초월했다. 임신이란 것이 쉽게 되지도 않지만, 그런 치욕을 겪으면서 원치 않는 아이가 생겼을 때는 어떻게 했을까요? 그대로 키운 집안도 있었고, 갖다 버린 집안도 있었다. 서울 지방에서는 대개 지금의 이태원 지역에 갖다 버렸다고 한다.

 

 병자호란(1636-1637) 때는 청나라 군사가 철수하면서 50만명의 여자를 만주 심양으로 포로로 데려 갔는데, 끌려간 여인 중에는 서울로 돌아오지 못하고 압록강의 국경지대에서 생계를 꾸려 나가는 여인집단도 있었다. 병자호란때 청나라가 철수하면서 포로로 끌고 간 50만 명의 우리나라 여인 중에 젖이 큰 대유녀(大乳女) 3천명을 골라 만주의 청 태종(누루하치의 아들) 고향으로 이주시켜 그들의 자손을 번성케 하려 했다.

 

 병자호란은 1637.01.30일 조선왕이 청 태종 앞에 무릎을 꿇음으로써 끝났고, 청나라 군사들은 철수하면서 50만명의 여자들을 포로로 끌고 갔다. 이후 값을 매겨 돈을 지불하면, 조선으로 돌려 보냈는데, 값을 치르고 돌아온 여자를 “환향녀(還鄕女)”라고 불렀다. 그녀들은 남편과 서로 만나 부둥켜 안고 통곡하였다. 그러나, 비극이 속편처럼 이어졌다. 그녀들은 돌아 왔지만, 사대부집 남편들은 그녀들의 몸이 더럽혔다고 해서  받아주질 않는 경우가 많았고, 그래서 친정 집에 가서 머무는 경우가 많았다. 최명길이 간청해서 인조가 명령과 지시로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잡혀간 부녀들이 모두 몸을 더럽혔다는 증거도 없는데, 사대부집 자제들은 “충신은 두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라는 위신을 내세우며, 다른 여자를 얻어 장가를 다시 들었다. ‘환향녀’라는 말은 세월이 흘러 ‘화냥년’으로 바뀌어 오늘날에 쓰이고 있는 것이다.

 

 임진왜란(1592-1598)과 병자호란(1636-1637)의 커다란 국란과 무수한 수탈을 겪으면서, 여자들의 사회적 입지와 지위는 더욱 약화되었고, 더군다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사회민심이 흐트러지자, 국가적으로 민심 회복 차원에서 유교적 성리학 이념을 민중에까지 퍼트리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여자들은 유교적 틀 속에 속박 당할 수 밖에 없었다. 

 

글 작성: 최병문 (010-4607-3746)

 

 

출처 : 세상을 여는 인간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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