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三國).고려

[스크랩] 주자가례 때문에 제약받아 온 여자들

마도러스 2006. 6. 17. 13:42
주자가례 때문에 제약받아 온 여자들

 

                     출처: http://cafe.daum.net/do92 , dosu8888@daum.net

 

주자가례(朱子家禮)는 주자가 죽은 후, 다른 사람이 주자의 이름을 빌어서 쓰여 졌는데, 한국에 전해진 주자가례(朱子家禮)는 명(明)나라 구준(丘濬)이 위의 주자가례의 원본을 기초로 하여, 여기에 고증(考證)과 잡록(雜錄)을 추가하여 “문공가례의절(文公家禮儀節)”로 만든 것이 고려 말기에 처음 주자학(성리학)과 함께 전래되었다.

 

유교 문화 중에는 4가지 가정의례가 있는데, 관(冠)·혼(婚)·상(喪)·제(祭)가 그것이다. 관(冠)례는 남자 나이 20살(약관.弱冠)이 되면 머리에 갓을 써서 어른이 되는 의식을 행하고, 여자 나이 15살이 되면 머리에 비녀를 꽂는 것을 말한다. 혼(婚)례는 혼인하는 예법, 상(喪)례는 상중(喪中)에 행하는 법, 제(祭)례는 제사지내는 예법을 말한다.

 

 조선 후기에 주자가례(朱子家禮)가 생활 깊숙이 자리 잡으면서, 조상의 제사를 주관한다는 명분으로 장자 중심으로 재산이 상속되었다. 또한 남존 여비, 재가 금지, 서얼 차별 등의 윤리적 조치들이 가부장 체제의 부산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와 같은 부계 친족 중심의 문중은 사회, 경제, 문화 전반을 지배하여 갔다. (생활예절과 국제매너, 인간사랑 출판 참조)

 

 세종대왕(1418-1450)은 딸이든 아들이든, 맏이든 아우든 간에 돌아가며 제사를 모시는 “윤회봉사(輪廻奉祀)”와 친손자만 제사를 지내는 것이 아니라 친손이 없을 경우 외손도 예를 갖추고 제사를 모실 수 있는 “외손 봉사”를 강조하셨다고 한다. 세종대왕은 제례 부분에서도 현명한 생각을 가지고 계셨던 것 같다.

 

 조선 초기 적어도 성종(1457-1494) 때까지만 해도 여자의 재혼을 문제 삼지 않았고, 상속에 있어서 자녀를 구별하지 않았으며, 제사를 딸, 아들 구별 없이 돌아가며 윤회봉사(輪廻奉祀)를 했으며, 제사에 드는 경비도 분담하는 분할제를 택하는 합리적인 방법으로 제사를 지냈다. 조상을 받드는 정신은 딸, 아들이 다를 수 없으며, 맏이나 그 외의 자녀들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제례를 통해 그대로 보여준 것이다. 아들이 없어도 딸이나 사위, 외손이 제사를 지낼 수 있어서 대를 잇기 위해 양자를 들일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명종(1534-1567). 선조(1552-1608) 이후 점차 성리학이 깊이 체계화 되고 토착화 되면서 남성 중심의 주자가례(朱子家禮)가 생활화 되었다. 이러한 잘못된 유교 의식이 정착되면서 제사는 차츰 장손들이 맡게 되었고 따라서 조상을 숭배할 아들이 꼭 있어야 한다는 생각과 제사를 지낼 수 있다는 것은 대가 끊기지 않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래서 제사가 남아선호 사상이 전수되는 기제로 작용했던 것이다. (한국여성교양학회 예절연구회, 2003편)

 

 사대부 집안에서 제사 지내는 풍습을 보면, 여자들은 절할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 웃어른들이 항상 여자들은 보이지 않는 뒷 구석에 앉아 음식이나 준비하면서 그렇게 고생을 하고 정성껏 음식을 장만해도 제사상에 절 한번 못하게 한다. 아주 고리타분한 풍습 말이죠. 정성을 들이는 것은 여자들이고, 고생을 하는 것은 전부 여자들인데, 정작 무대에는 서질 못하게 한다. 고작 상에다 음식이나 올리게 하고, 상치우고 음식 다시 차리는 치다꺼리나 하게 한다. 남자들 먹는 것 수발이나 하게 하고, 남자들 술 먹고 놀고 쉬는 것을 뒤에서 수발하는 것이나 맡아서 하는 것뿐이다. 이것이 조선 시대 후기 및 말기에 고착화된 풍습의 현실이었다. 그러니 나라가 망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여자들의 원과 한이 쌓여서 나라의 경제와 사회가 부흥할 수가 없는 것이다. 

 

글 작성: 최병문 (010-4607-3746)

 

 

 

 

 

출처 : 세상을 여는 인간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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