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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애인들의 영원한 아버지, 양복규 동암학원 이사장

마도러스 2022. 11. 30. 01:21

 

■ 장애인들의 영원한 아버지, 양복규 동암학원 이사장

 장애인들의 영원한 아버지로 불리워지는 분이 있다. 동암(東巖) 학원의 양복규 이사장이다. 그는 시골 마을의 매우 가난한 집안에서 출생했다. 생후 1년이 되기 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5살 때에 소아마비를 앓았다. 하지만, 집안 형편이 너무도 가난하여 약(藥) 한번 제대로 쓰지 못하고, 혼자서 걸음을 걸을 수 없는 중증 장애를 앓았다. 어린 시절을 오롯이 어머니 등에 업히어 생활해야만 했다. 당시에는 휠체어 자체가 없었기에 어린 나이에 온갖 불편함과 설움을 받으며 살아가야 했다. 가고 싶은 곳이 있어도 마음대로 이동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온종일 집에만 앉아서 한문(漢文) 책만 보는 것이 유일한 취미였고 일과였다.

★ 옛날에는 장애인에 대한 혐오와 냉대가 아주 심하였다. 그래서, 동네 어른들은 어머니가 일하는 논과 밭에 등에 업히어 오기라도 하면, "병신 자식 키워서 뭐하냐!" 라며 “산에다가 갖다 버리라!” 라는 수모스런 말을 하면서 어머니 가슴에 대못을 박기도 하였다. 사실, 그 옛날에는 장애 아동을 버리는 일이 비일비재로 많았다고 한다. 양복규 이사장님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였다. 13살의 나이에 "사서오경"(四書五經)과 "명심보감"(明心寶鑑)을 독파 하였고, 모든 한문 서적을 섭렵하였다. 그러한 실력으로 17살의 어린 나이에 동네 서당(書堂)의 훈장이 되어 같은 또래의 친구들을 가르쳤다. 이때부터 훈장 선생님으로 대우와 접대 존경을 받았다.

★ 한문(漢文)을 많이 알다보니, 자연스럽게 한약업(韓藥業)에 대한 공부를 하게 되었다. 낮에는 한약방, 밤에는 "서당의 훈장" 선생님으로 3년 동안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러나, 뜻한 바가 있어서 지금의 전주시 금암동으로 집안 식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혈혈단신 빈방 하나를 얻어 이사를 오게 되었다. 하루는 주인집 어르신이 "자네는 장애인의 몸으로 뭐하는 사람인가?" 하고 물었다. "네, 저는 한약방을 운영하는 사람입니다." 라고 하였다. 그러나, 집 주인은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곧바로 손을 내밀었다. "그럼, 내 손을 진맥 한번 해 보시게!" 라고 요구하였다. 양복규 청년은 차근차근 진맥한 후, 어르신의 건강 증세를 말씀드렸다. 그러자, 갑자기 무릎을 탁 치시며 “아주 용하다!” 라고 신기해 하셨다.

★ 그 후, 집주인은 앞집과 뒷집에 소문을 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한번 다녀간 환자의 입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어서 번졌다. 많은 환자들이 밀려오는 바람에 한약방 앞은 그야말로 문전성시(門前成市)를 이루었다. 어느 순간, 금암동 지역에 한약방 명의로 소문이 났다. 그가 “매우 용하다!” 라는 소문이 자자하다보니, 전주시내 전 지역에서 환자들이 몰려들었다. 수많은 손님들이 몰려들었다. 당시에 얼마나 환자가 많았으면 2명의 환자를 양손으로 동시에 진맥을 했을까? 그는 각각의 환자 증세에 맞게 한약을 정성껏 지어주었다. 그리고, 그 후 3년이란 세월이 정신없이 흘렀다. ‘호사다마(好事多魔)’, 좋은 일(好事)에는 반드시 안 좋은 일이 함께 발생한다. 누군가 그가 무허가 한약방을 운영한다고 관공서에 신고를 하였던 것이다. 약방은 결국 문을 닫고야 말았다. 양복규 청년은 한동안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고, 이내 실의에 빠졌다.

★ 그러나, 양복규 청년은 다시금 정신을 가다듬고 굳은 결심을 하였다. "그래! 도전을 한번 해 보는 거야!" 장애인의 몸을 가지고, 한약사 자격증에 도전하는 것은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반드시 자격증을 따서 정상적으로 한약방 운영을 해 보리라는 결심을 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시험에 응시하였다. 그 당시에는 무허가 한약방이 무척 많았고, 허가된 한약방 보다 오히려 더 많았다. 하지만, 영업이 잘 되는 것을 배 아파했던 누구가의 신고 정신이 차라리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 드디어, 1968년도에 전라북도와 충청남도에서 실시하는 한약 약업사 시험에 응시하였다. 양복규 청년은 걸을 수 없는 소아마비 장애라서 시험장에 업혀서 막 들어가려는 찰나였다. 그런데, 시험 감독관은 그를 매몰차게 제지하였다. "어어! 거기 잠깐만! 그런 몸으로는 시험을 볼 수 없으니 어서 나가세요” "감독관님! 저는 시험을 꼭 치러야 하거든요. 저는 비록 몸은 소아마비 장애를 앓고 있지만, 이 시험을 꼭 볼 수 있도록 부탁 드릴께요!" 양복규 청년은 몸이 불편하여 엎드려 하소연이라도 할 수 없는 처지라 그저 눈물만을 글썽거렸다.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예를 갖추어 연신 고개를 조아리며 싹싹 빌었다. "안 돼! 병신의 몸으로 어떻게 시험을 보고, 일을 할 수 있다는 거야! 그 몸으로는 시험을 볼 수 없으니, 어서 데리고 나가세요!" 라고 매몰차게 대하는 것이었다. 지금 같은 현실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상황이 1968년도에는 장애인 비하 발언과 천대가 아주 심하였다. 장애인이라는 이유하나로 시험 자체도 응시 할 기회조차도 주지 않았던 것이다. 참으로 시험 감독관이 야박하고, 세상이 원망스러웠다.

★ 청년 양복규는 다시 깊은 실의에 빠졌다. 어떻게 하면, 다시 도전 할 수 있을까? 생각하며 다른 지역의 시험 응시 기회를 알아보았다. 그러던 중, 이번에는 경기도 한약 약업사 시험에 응시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동안 공부는 아주 많이 해 두었다. 필기 시험에는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시험 감독관이 문제였다. 시험 당일 날 이번에는 시험 감독관이 오기 전에 미리 가서 지정된 책상에 앉아 있으리라는 지혜를 짜내어 새벽같이 시험장으로 삼촌의 등에 업히어 시험장에 도착하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라 문이 굳게 잠기어 있었다. 몇 시간을 기다린 후, 시험장마다 문을 열고 다니는 당시의 학교 직원의 모습이 보였고, 가장 먼저 책상에 앉았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수험생들이 자신의 자리를 찾아 앉았고, 이윽고 감독관이 들어왔다. 하지만, 이번 시험 감독관은 몸을 한번 살펴보더니 시험을 잘 보라는 듯 등을 한번 토닥여 주시는 것이었다. 참으로 다행이었고, 감독관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양복규 청년은 많은 우려와 걱정했던 염려들이 사라지고, 편안하고 침착하게 시험을 무사히 치를 수 있었다. 드디어, 만점에 가까운 우수한 성적으로 필기 시험에 합격하였다.

 이제, 실기 시험이 문제였다. 실기 시험 시험 감독관의 매서운 눈초리가 문제였다. 그리고, 실기 시험 특성상 걸어 다니며 시험을 치러야 한다는 부담이 있었다. 드디어, 마지막 실기 시험일이 다가왔다. 실기 시험은 온갖 희귀한 한약재와 쓰임새 등 약 효능을 알아 맞히는 시험이었다. 양복규 청년은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장애의 몸인지라 각종 약초를 돌아다니며 맞추어야 하는 시험을 앞두고 큰 어려운 난관을 맞이하였다. 이번에도 "그런 몸으로 시험을 치를 수 없고, 또 합격한다 하여도 환자를 볼 수 없으니, 집에 가라!" 라고 말하는 감독관을 만나지 않을까? 내심 걱정이 되었다. 다행히도 당시 시험 감독관이었던 홍종기 의학 과장님의 따뜻한 배려 덕분에 영광스런 최종 시험에 합격을 할 수 있었다. 홍종기 시험 감독관은 걸어 다닐 수 없음을 미리 알아차리고, 손수 약재를 가져와서 이 약재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약에 대한 효능과 쓰임새 등등 여러 질문들을 장애인의 눈높이에 맞게 배려해 주시었다.

★ 오늘의 영광이 있기까지 그의 어머니와 그의 아내 그리고 홍종기 의학 과장님 등등 몇몇 고마운 분들을 영원히 잊지 못하고, 평생 은인이자 존경하는 분으로 생각하신다 말한다. 평생을 장애인들의 복지 증진을 위해 큰 꿈을 키워왔던 이사장님은 1981년도에 동암(東巖) 고등학교를 설립하셨다. 동암(東巖)의 모든 수험생에게는 첫 졸업생부터 지금까지 모든 졸업생은 이사장님이 직접 제조한 우황청심환을 복용하고, 대입 수능 시험에 임한다는 오랜 전통이 쭉 이어져 오고 있다. 우황청심환을 나눠 주는 것은 그것을 먹은 후, 머리가 맑아지고, 새로운 기운이 생겨서 시험을 잘 치르라는 의미이다. 그동안 배우고 익힌 학문을 정신이 맑고 떨리지 않는 마음으로 수능을 잘 치를 수 있도록 격려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 지금까지 수많은 동암(東巖) 재단 수험생이 이사장님의 정성을 가슴으로 느끼며, 우황청심환을 먹고 대입 수능 시험에 임하였다. 그렇게 수많은 졸업생들이 배출되었다. 졸업생들은 그 지역과 사회 그리고 국가를 위해 전국 각지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활동 봉사했다. 그런 모습을 보면, 그동안의 희노애락(喜怒哀樂)과 아쉬운 회한(悔恨)들이 스쳐지나갔다. 졸업생들이 국회의원이 되고, 판사 검사가 되고, 청와대 비서관이 된 후, 찾아와서 인사할 때에 큰 보람을 느낀다고 한다. 그 당시 1981년에 동암고. 상산고. 덕진고 등이 나란히 함께 개교하였다고 한다.

★ "동암"(東巖)이라는 아호와 법인과 재단명은 고향 순창군 동계면을 생각하면서 고향의 동쪽 산에 있는 바위를 연상하며 "동암"(東巖)이라고 정했다. 평생을 장애인으로 살아오신 이사장님은 전북장애인복지관, 장애인보호작업장, 동암재활원. 동암차돌 초.중.고등학교 등을 설립하시었다. 장애인들도 일반인과 편견 없는 공평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갈 권리가 있음을 강조하시었다. 양복규 동암학원의 이사장님은 일평생을 장애인들의 복지 증진과 나은 삶을 위해 전 재산을 바치신 이 시대의 살아있는 의인(義人)이시다. 장애인들이 일반 목욕탕이나 수영장을 드나들기가 쉽지 않은 것을 감안하여 목욕탕과 수영장을 장애인들의 편의에 맞게 설계하여 신축하였다. 또한, 수영장에서의 재활 치료에 큰 도움을 주시었고, 장애우 500여명이 지금도 자유롭게 이용하고 있다. 의지할 곳 없는 장애우들을 위해 특수 학교인 차돌 초.중.고등학교를 효자동에 설립하여 기숙할 수 있는 편의 시설을 제공하였다.

 겸손과 인성을 중시한 교육 이념의 가르침은 우리 모두의 가슴 속에 영원히 꺼지지 않는 등불이 될 것이다. 많은 분들이 동암학원의 설립자 양복규 이사장님의 불굴의 의지와 철학 그리고 인간 승리의 모습을 무척 궁금해 하신다. 장애인들이 마음껏 공부하고 꿈을 펼칠 수 있는 "동암 복지촌"을 만드시고, 이 시대의 큰 스승으로 남아 장애인의 아버지가 되신 양복규 이사장님을 존경합니다. 합동결혼식. 기능경기대회 등을 통하여 장애우들의 보다 나은 삶을 위한 눈물겨운 헌신은 일반인도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눈부신 공적이 아닐 수 없다. 양복규 이사장님은 지금도 한옥마을 전동성당 근처에서 동아당 한약방을 운영하고 계신다. 한 평생을 장애우들을 위하고 대한민국의 미래를 짊어질 후대 양성을 위해 헌신하신 동암학원 양복규 이사장님의 노고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 전체 인구의 약 10%가 장애인이고, 그중의 또 10%가 휠체어를 이용하는 중증 장애인이라고 한다. 지역 사회에서 이렇게 훌륭한 교육자가 계심은 향토의 자랑이 아닐 수 없다.

★ 양복규 이사장님은 순창군 동계면 관전 마을의 가난한 집안에서 1938년 08월 07일에 출생했다. 혼자 힘으로 걸을 수 없는 장애의 몸으로 태어나서 평생을 남의 등에 얹혀 이동해야 하는 불편함 속에서 숱한 고난과 어려움을 이겨내고, 마침내 가장 존경받는 선생님으로 우뚝 서신 양복규 이사장님을 무척 존경합니다. 동암학원을 반석 위에 올려 놓으시고, 인성과 예절을 중시하며, 부모님께 효도하고, 국가에 충성하는 "인재 양성의 요람"을 위해 한 평생을 바치신 양복규 이사장님을 존경합니다. 동암 학원 법인 내에 속한 모든 교직원과 재학생 및 졸업생들은 설립자이신 양복규 이사장님을 한결같이 존경하고 동암 학원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동암 복지촌은 지역 사회에서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어우러져서 서로 이해하고, 존중하며,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행복한 세상을 추구하는 장애인 복지의 요람이다. 양복규 동암학원 이사장님의 크신 공적은 국민훈장 목련장 수상을 비롯해서 삼성그룹의 호암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기도 하였다. 양복규 이사장님의 한약 처방 비법은 국립민속박물관의 타임 캡슬에 영구 보관되어 역사적인 사료로 후세에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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