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三國).고려

■ 삼천궁녀? 사료에 없는 거짓말! 역사왜곡 바로잡기

마도러스 2022. 1. 19. 00:08

■ 삼천궁녀? 사료에 없는 거짓말! 역사왜곡 바로잡기

 

 삼천궁녀, 조선(朝鮮) 9대 성종(成宗) , 시조에 최초 등장.

 

백제(百濟) 역사에서 유명한 표현 중의 하나는 삼천궁녀’(三天宮女)이다. 그런데, 삼천궁녀(三天宮女)라는 말이 처음 등장한 것은 조선(朝鮮) 9대 왕인 성종(成宗 1469-1494) , 김흔(金訢)의 시조가 최초이다. 그 이전까지, 삼천궁녀(三天宮女)라는 표현이 등장하는 문헌이나 자료는 전혀 없었다. 결국, 궁녀(宮女) 3,000명이라는 말은 역사 사료(史料)에는 전혀 없는 거짓말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그래서, 충남 부여군은 백제(百濟) 역사 바로 잡기 사업에 나섰다. 부여군은 2022 01 18 백제 역사를 다시 쓴 책 3권을 2022 02월 출간할 예정이다 라고 밝혔다. 책은  사비(泗沘) 시대를 연 성왕과 사비 도성(都城)(1)  불국토의 나라와 유려한 백제 문화(2)  백제와 함께한 의자왕(3) 등이다.

 

책 집필에는 성정용 충북대 교수와 권오영 서울대 교수, 정재윤 공주대 교수, 김낙중 전북대 교수, 신희권 서울시립대 교수 등 국내 백제사 전문가 40명이 참여했다. 부여군은 4억 원을 들여 2020 01월부터 집필 작업을 해왔다. 부여군 관계자는 왜곡된 백제사를 바로 세우고, 올바른 역사 인식을 정립하는 데, 이들 책이 도움될 것이다 라고 설명했다. 잘못된 역사의 대표적 사례는 삼천궁녀(三天宮女)이다. 삼천궁녀(三天宮女)는 조선 성종 때 문인(文人)인 김흔(金訢)의 시조에 처음 언급된다. 김흔(金訢)은 시조에서 삼천 궁녀들이 모래에 몸을 맡기니 라고 표현했다.

 

반면, 조선(朝鮮) 시대에 편찬된 각종 지리지(地理志)에는 낙화암, 삼천궁녀 표현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역사학자들은 “‘삼천 많다는 뜻으로 역사적 근거가 없는 단지 수사적 표현에 불과하다. 시적 수사로 표현된 허구임이 드러난 것이다 라고 말했다.

 

 백마강 조룡대 (釣龍臺바위 전설도 사실 근거가 약하다.

 

이와 함께 백마강 (금강) ‘조룡대’(釣龍臺) 바위 관련 전설도 사실에 근거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조룡대(釣龍臺) 당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이 백제를 칠 때, 백마를 미끼로 용을 낚아서 백마강을 건넜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곳이다. 조룡대는 삼국유사에서 용암(龍巖)’으로 표현하고 있다. 부여군 관계자는 백제의 번창과 강력한 수호를 상징하는 용이 패망의 증거물로 잘못 사용된 것 같다. 승자가 자신들의 전과(戰果)를 내세우고, 유민들의 백제 재건에 대한 의지를 꺾기 위한 상징. 조작 측면이 강해 보인다 라고 했다. 백마강 '낙화암(落花巖)'이란 명칭도 삼국시대 이후, 고려 때 역사책인 제왕운기’(帝王韻紀)에만 처음 등장하고 만다. 제왕운기(帝王韻紀)는 고려 충렬왕 때인 1287년에 출간됐다. 조선(朝鮮) 시대에 편찬된 각종 지리지(地理志)에는 낙화암이란 표현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

 

 백제(百濟) 의자왕(義慈王)은 매우 대담하며, 결단력 있었다.

 

방탕하거나 권력 농단을 일삼는 폭군으로 알려진 의자왕(義慈王) 이미지도 상당히 왜곡된 것으로 전해진다. '삼국사기'·'구당서' 등에 따르면, “의자왕은 웅걸한 모습이었고, 대담하며, 결단력 있고, 부모에 효도하며, 형제간 우애가 깊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부여군 관계자는 의자왕이 방탕한 폭군이었다면, 백제 부흥 운동에 3만여명이 호응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라며, “패망한 나라의 군주라는 이유로 부정적 이미지가 덧칠해진 것 같다 라고 말했다. 박정현 부여 군수는 대학교 역사 교재로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정교하고, 탄탄하게 집필했다. 단순히 군민에게 홍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개론서 이상의 가치를 지닐 수 있도록 만든 책인 만큼 역사 학도를 비롯한 많은 이들에게 널리 읽히길 바란다 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