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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최대 국제전쟁, 백촌강 전투

마도러스 2014. 9. 6. 11:50


동아시아 최대 국제전쟁, 백촌강 전투

 

663년 8월, 전북 부안군의 동진강(백촌강 白村江, 일명 백강) 하구, 나당 연합군(신라-당) 13만명 vs 백제 부흥군(백제-왜) 10만여 명이 대전투를 벌였다. 왜(倭)는 왜 전함 1,000척을 백제에 파병했나? 일본 천황은 무려 2년 반 동안의 준비 기간을 거쳐, 전함 1,000척과 병력 2만7천명의 대규모 파병을 강행했다. 왜(倭)의 파병 명분과 목적은 무엇인가? 파병을 직접 지휘한 천황과 백제의 관계는 어떠했나?

 

1. 나당 연합군(신라-당) vs 백제 부흥군(백제-왜)의 백강구 전쟁

→ 동북아시아 모든 세력이 충돌한 최초의 국제 대전!

 

백제 무왕의 딸(의자왕의 여동생)이 바다 건너 왜(倭)나라의 제명(薺明) 여왕이었다. 또한, 백제 무왕의 아들이 백제의 의자왕이었는데, 백제는 660년 13만 나당 연합군(신라.당나라 연합)의 침공으로 황산벌(논산시 연산) 전투를 마지막으로 멸망당했다. 그 후, 661년 9월, 백제 왕자 부여풍에 의해 백제 부흥 운동이 전개되어 전북 부안군 개암사 뒷산의 주류성(周留城, 부안군 상서 위금암(位金巖) 산성(山城)을 수도로 하는 ‘백제 부흥국’이 다시 세워졌다. 주류성을 기반으로 백제 부흥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조선 상고사 등 여러 역사책을 보면, 백제 멸망 이후, 복신. 도침. 흑치 상지 등이 일본에 가 있던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풍왕)을 왕으로 모셨다. 그리고 백제 부흥 운동이 개막하자마자 백제 부흥군은 백제의 200여개 성을 되찾았다. 그리고 풍왕을 왕으로 모시고 법제등 여러 관료 조직을 마련했다. 백제 부흥국은 당시 엄청나게 강력해져서 당과 신라를 쳐서 여러번 승리했다. 그리고 백제 부흥국은 웅진 도독부가 세워진 웅진. 사비 일대를 제외하고 백제 영토의 대부분을 되찾았다. 백제 부흥군은 662년 12월 산세가 험한 주류성에서 농작물 확보가 용이한 피성(避城, 김제 벽골제 부근)으로 천도하였다. 피성(避城)은 서북으로 강물이 띠를 두르고, 동남쪽으로는 깊은 진흙의 큰 제방(동진강 월평천)이 있으며, 꽃이 피고 열매 여는 것이 삼한에서 가장 기름졌다.

 

이에 신라와 당나라는 2차 나-당 연합군을 결성, 백제를 완전히 멸망시킬 준비를 했다. 이에 맞서 663년 3월, 왜(倭) 나라는 전함 1,000척과 병력 2만7천명의 대규모 백제 파병을 강행했다. 그러나, ‘백촌강 전쟁’에서 백제는 승리하지 못하고 결국 패배했다. 백제 왕자 부여풍(풍왕)은 김제 성산 공원(김제 시청 옆)에서 마지막 혈전을 벌이다가 전사했다. 일본서기 등 일본 역사 기록을 보면, 백제의 멸망을 660년이 아닌 백제 부흥 운동이 끝난 663년으로 적고 있다. 백제의 마지막 왕은 의자왕이 아닌 32대 풍왕이었으며, 백제의 멸망은 660년이 아닌 663년이었다. (KBS 역사스페셜 2005.10.14 방송 내용).

 

2. 왜(倭)는 백강구 전쟁에 국가의 명운을 걸었다.

 

1,000척의 전함과 2만7천명의 병력을 파병하였는데, 2년 반의 준비 기간이었다. 왜(倭)의 파병 준비과정이나 규모를 보면 단순한 군사 원조 이상이었다. 게다가 당시 일본은 완전히 통일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천황은 660년 백제가 군사 지원을 요청하자, 즉각적으로 군사를 모집했다. 천황은 파병 준비를 위해 거처를 항구인 난파궁으로 옮기고, 직접 후쿠오카까지 오가며 파병 준비를 독려했다. 사실상의 천도에 가까웠다.

 

이렇게 총력을 다해 준비한 지 2년 5개월 만에 1,000척의 전함과 2만7천 명의 군사가 백제로 출발했다. 당시 일본 총 인구가 500만임을 감안할 때, 역사상 전무후무한 대규모 파병이었다. 이렇게 일본이 국가의 명운을 걸고 백강구 전쟁에 참전한 까닭은 무엇인가?

 

3. 왜(倭)의 백제 파병의 목적은 무엇인가?

 

참전의 주체는 왜(倭)의 백제계 도래인이었다. 일본 오카야마현 길비군에는 ‘제명(薺明) 여왕이 백강구 전쟁 모병시 병사 2만 7천명을 얻었다’ 라고 해서 붙여진 ‘니만향’ 이라는 마을이 있다. 이곳 신사(神社)에는 백제식 유물과 축성술을 엿볼 수 있는 등 백제 도래인의 흔적을 쉽게 찾을 수 있다. 게다가 8세기까지 일본 인구 70-80%가 한반도 도래계라는 논문이 일본인에 의해 발표됐다. 그렇다면, 백제 파병은 백제 도래인들의 조국 구원 전쟁을 의미했던 것이다.

 

4. 백제 파병에 적극적으로 나선 왜(倭)의 천황

 

왜(倭)나라의 제명(薺明) 천황은 친정 오빠인 백제 의자왕을 구원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한 것이다. 백제의 파병 요청을 받을 당시 제명(薺明) 천황은 60대 중반을 훨씬 넘긴 여왕이었다. 당시 국내의 반대 여론이 만만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제명천황’은 강한 의지로 파병을 준비하였다. 그리고, 제명(濟明) 천황은 전쟁 준비를 진두지휘하다가 그만 사망하고 만다. 그러자, 곧바로 제명(濟明)천황의 아들 텐지(天智) 천황이 어머니의 뜻을 이어서 파병을 이루어 냈다. 상(喪)을 치르기 전에 즉위식도 하지 않고, 파병 준비를 계속하며 변함없는 파병을 강행하였다.

 

 바로 이 백제 부흥 세력과 나당 연합군이 한반도 백촌강(부안 동진강)에서 663년 맞붙은 전쟁을 ‘백촌강 전쟁’이라고 한다. 동북 아시아 모든 세력이 충돌한 최초의 국제 대전이었다. 결국, ‘백촌강 전쟁’에서도 백제는 승리하지 못하고 패배하고 만다. 한편 제명 천황의 남편이었던 서명(舒明) 천황은 일본서기에 따르면 백제궁과 백제 대사를 지었고, 고대 일본의 주요 성씨들의 출신을 분석한 <신찬성씨록>에는 서명 천황의 할아버지인 민달 천황이 백제왕이라고 전한다.

 

5. 일본(日本) 왕조와 천황제의 뿌리는 한국

 

리고, 백제가 멸망하는 과정에서 백제의 유민들이 일본으로 건너가서 제명(薺明) 여왕의 아들과 함께 새롭게 건설한 나라가 일본(日本) 왕조이다. 약20만 명의 백제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갔으며 이들은 일본의 건국에 크게 공헌했다.백제인들의 적극적인 협조로 7년 후인 670년 왜(倭)는 나라 이름을 일본(日本)으로 바꾸고, 독립 선언문의 성격을 지닌 ‘고사기(古事記)’를 발간했다. A.D 670년에 시작된 일본(日本) 왕국의 역사는 백제인에 의해서 시작되었고, 지금의 일본 역사의 뿌리이며 실체이다. 그후, 나라(710~784) 왕조 시대에 일본을 음역으로 발음해 ‘니호무’라고 하다가 점차 니혼(Nihon)으로 발음하였고, 1934년 일본 문부성에서는 군국주의 상징으로 닛폰(Nippon)으로 발음하였다.

 

왜(倭)에서 일본(日本) 왕조로 나라 이름을 바꾸면서, 천황제(天皇制)를 시작하게 된다. 말하자면, 그 동안에는 중화(中華) 체제를 인정했었는데, 이제부터는 중국과 한국과는 상관없이 독자적으로 해 보겠다는 식이었다. “우리는 우리 식대로 해 보겠다.” 라고 선언하고 나라 이름을 일본(日本)이라 하였고, 천황제(天皇制)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나라의 껍데기만 바꾸었을 뿐, 왕조의 문화와 역사는 전부 백제의 것이었다. 백제(百濟)의 다름 이름에 불과하였다. 역사적으로, 일본의 대부분의 왕들은 전부 우리 한민족의 국가인 고조선 및 부여, 고구려, 가야, 백제에서 건너간 왕족이라는 사실은 이미 밝혀진 실증적인 사실이다. 요즘 일본 천황가에서 자신들의 뿌리가 백제였다고 밝히는 것을 보면, 백제(百濟)가 일본에 끼친 영향력은 막대한 것이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의 일본 역사 교과서는 그렇게 서술되지 않는다. 철저하게 왜곡되어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뿌리와 역사를 알지 못한다. 정치와 권력에 의한 변질 때문이다.

 

6. 백제의 멸망과 진표 율사의 미륵 신앙 출발

 

660년 백제 멸망과 668년 고구려 멸망 이후부터는 중국의 중화(中華)민족에게 배달(倍達, B.C3,898-2,333)의 선민(選民) 광명 민족은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힘없이 중국을 섬겨야 하는 사대주의(事大主義)가 등장하게 된다. 660년 백제는 나당 연합군에게 패망하였으나, 661년 9월, 백제 왕자 부여풍이 백제 부흥 운동을 전개하여 주류성(周留城, 부안군 상서 위금암 산성)을 수도로 하는 ‘백제 부흥국’을 다시 세웠다. 그런데, 663년 3월, 동북 아시아 최초의 국제 전쟁이었던 백촌강(부안 동진강) 전쟁에서 백제 부흥군은 나.당 연합군에게 패배하였고, 668년에는 고구려마저도 나.당 연합군에게 패망하고 만다. 당나라의 대외 전략이 승리하는 날이었다. 결국 이 때부터, 배달의 광명 민족은 중국 중화(中華)민족의 그늘 속으로 파묻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힘없이 사대주의(事大主義)를 할 수 밖에 없었고, 중국과는 겨뤄 볼 엄두조차 해내지 못했다. 인류 문명의 종주국인 배달(倍達, B.C3,898-2,333) 민족의 문화와 역사는 쇠퇴를 거듭하고 있었다.

 

한편, 백제 부흥국(661-663년)의 주요 거점 지역에서 태어난 진표(眞表) 율사는 부안 하서면 의상봉에 있는 ‘부사의방장(不思議方丈)’에서 3년 수행과 21일의 망신창법(亡身懺法)이라는 역사상 유례가 없는 고행 끝에 763년 대도통하시고, 천안(天眼)이 열리어 미륵 천주(彌勒天主)님을 친견하셨다. 진표율사는 백제 왕자 부여풍(풍왕)이 마지막 혈전을 벌이다가 전사한 성산 공원(김제시 시청 옆) 인근의 김제시 순동에서 백제 유민 정씨(井氏)의 가문에 태어났다. 인류 문명의 장자국인 배달(倍達) 민족이 쇠퇴를 거듭하던 시기에 진표 율사는 12세에 출가하여 불교의 법문에 들어갔지만, 평생 동안 장차 오실 미륵 천주님의 계법을 구하기 위해 수행했었고, 서해 바다가 망망(茫茫)하게 바라다 보이는 부안 하서면 의상봉에서 미륵 천주님을 친견한 것이다. 미륵 천주님의 친견은 종교와 인류 역사를 통틀어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인류 문명의 종주국인 배달(倍達) 민족의 문화와 역사가 쇠퇴해 가던 시기에 진표 율사는 장차 미륵(彌勒) 천주(天主)께서 동방의 조선 땅에 강세하실 것을 약속받고, 새 세상을 동방의 조선 땅에서 개창 해 낼 것을 약속받았다. 그리고, 인류의 새 희망으로써 인류에게 새 문명을 제시하며, 인류 역사의 종주국으로서 배달(倍達) 민족을 다시 부활케 하는 약속을 받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