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학.성공비결

■ 록펠러, 받는 자 보다 주는 자에게 복이 있다.

마도러스 2021. 7. 7. 01:20

■ 록펠러, 받는 자 보다 주는 자에게 복이 있다.

 

 백만장자 록펠러(Rockefeller 1839-1937)의 유년 시절은 무척 가난했다. 젊은 청년 시절에 생활이 여의치 못해서 온갖 근심과 돈 걱정으로 고민하는 시기가 많았다. 미국 주식 시장이 활황일 때, 어느 날, 그는 구두를 닦으려고 길거리에 나섰다가 구두를 닦는 사람마저도 주식을 사기 위하여 자리를 비운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곧바로 주식 폭락을 예감했다. 그는 곧장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대부분의 주식을 팔아치워 주식 폭락의 비참한 결과를 피해 갈 수 있는 지혜(wisdom)를 발휘했다.

 

 록펠러(Rockefeller) 열심히 노력하여 33세에 백만장자가 되었고, 43세에 미국의 최대 부자가 되었으며, 53세에 세계 최대 부자가 되었지만, 행복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55세에 불치병에 걸리고 말았다. 모든 병원의 의사들은 그의 남은 수명이 1년밖에 안된다고 선고하였다. 그의 마음은 모든 희망을 잃었다. 그리고, 최후의 검진을 위해 휄체어를 타고 갈 때, 병원 로비에 걸려있는 액자의 글이 눈 안에 들어왔다. “받는 자 보다 주는 자에게 복()이 있다” (Blessed are the giver rather than the recipient.). 그 글을 보는 순간, 마음 속에 전율이 생기고, 눈물이 났다. “나는 지금까지 돈을 모으기만 했지, 돈을 베풀 줄을 몰랐구나!” 착하고 따뜻한 마음이 온 몸을 감쌌다. 그러는 순간, 그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리고, 그가 살아온 삶에 대하여 깊은 생각에 잠겼다.

 

조금 후, 시끄러운 소리에 정신을 차리게 되었는데, 병원 복도에서 환자 어머니가 딸의 입원비 문제로 애걸하며 다투는 소리였다. 병원 측은, 입원비가 없으면, 입원이 안 된다고 했고, 어머니는 입원시켜 달라고 울면서 사정하는 소리였다. 록펠러는 곧 비서를 시켜서, 소녀의 병원비를 지불하게 했고, 누가 지불했는지 모르게 하였다. 얼마 후, 록펠러가 은밀히 도왔던 소녀가 기적적으로 회복이 되어 퇴원하는 모습을 그는 조용히 지켜보았다. 그는 그것이 얼마나 기뻤던지, 가슴이 뜨겁게 벅차 올랐다. 후일 그의 자서전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저는 인생을 살면서 이렇게 행복한 삶이 있었는지를 모르고 살았습니다. 나누는 삶의 행복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때부터 그는 나누는 삶을 작정합니다.” 그 후, 신기하게도 그의 불치병이 점점 치료되기 시작하였다. 그 뒤, 그는 98세까지 살면서 록펠러 재단(Rockefeller foundation)을 통해 나누는 일에 힘을 썼으며, 착한 일을 하는데, 전체 인생을 바쳤다. 긴 세월이 흐른 후에 그는 회고했다. 인생 전반기 55년은 쫒기면서 불행하게 살았지만, 후반기 43년은 참으로 행복하게 살았다. 인생을 살면서 서로 재물을 나누는 것이 행복이고, 평화이고, 천국이다. 받는 것은 아주 작은 행복(幸福)이고, 주는 것은 매우 큰 행복(幸福)이다.

 

 록펠러는 재물에 집착하지 않고, 재계에서 물러나 자선 사업과 교육 사업에 몰두했다. 노벨상을 많이 배출하기로 유명한 세계 명문 시카고 대학을 설립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수많은 재산을 기부하여, 미래를 꿈꾸는 젊은 대학생들에게 투자했던 것이다. 그는 록펠러 재단(Rockefeller foundation). 일반 교육 재단. 록펠러 의학 연구소 등을 설립하기도 하였다. 미국 뉴욕 맨해튼 중심부에 가면, 지금도 록펠러 센터(Rockefeller Center)가 있는데, 인류 복지 증진을 목적으로 하는 이 재단은 카네기 재단, 포드 재단과 더불어 미국 최대 규모로 손꼽힌다. 설립 이후, 무려 20억 달러 상당의 자금을 전 세계 수천 명의 수혜자에게 제공하였으며, 1 3천여 명에 가까운 록펠러 재단 특별 연구원에게 보조금을 지급했다. 이들 연구원은 그들의 활동을 통해 록펠러 재단을 빛내고 있다. 재단이 내걸고 있는 주요한 과제는 기아 근절, 인구 문제, 대학 발전, 미국 국내의 기회 균등 및 문화적 발전이다. 아시아 아프리카 등 신흥국에 대한 원조를 확대하고 있다.

 

 록펠러(Rockefeller)의 말이다. “절실함이 더욱 애절할수록 성공 가능성도 높다. 따라서, 지금 현 상황이 절실한 사람이면, 어쩌면 앞으로 성공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사람인 것이다.” 록펠러(Rockefeller)는 언젠가 부자가 될 것이라는 야망(ambition)을 항상 잃지 않았다. 그는 부자가 되고 싶은 마음이 언제나 간절했다. 그는 말한다. 젊은이여! 야망을 가져라! young man be ambitous! 록펠러(Rockefeller) 1839년 미국 뉴욕에서 약품 판매업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1853 미국 동북부 오하이오(Ohio)로 이사갔고, 거기에서 성장했다. 그는 집안이 어려워 어렸을 때부터 칠면조를 키워서 팔거나 사탕을 대량으로 사서 팔아 이윤을 남기면서부터 돈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1855 15살때 소년 가장으로서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6개월짜리 비즈니스 학습 과정을 3개월 만에 마치고, 조그만 곡물 위탁 판매회사의 경리 사원 보조로 취직해 돈을 벌었다. 처음 3개월 동안 일하고 받은 급여는 50달러로, 1달에 17달러를 받은 셈이었다. 회사 측은 일 잘하는 그를 정식 사원으로 채용하면서 임금을 1달에 25달러로 올려주었다. 록펠러는 그렇게 해서 번 돈 1천 달러와 아버지한테서 빌린 돈 1천 달러를 합해 친구와 함께 1859 19살때 아예 곡물 중개 회사를 하나 차렸다. 1861 미국 남북 전쟁이 터지면서 회사는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북군에 소금과 돼지고기를 팔아 막대한 이득을 얻었다.

 

 록펠러(Rockefeller)가 사업을 처음 시작할 때는 친구와 함께 상사 회사를 설립하고, 그저 부업으로 미국 동북부 오하이오(Ohio) 클리블랜드(Cleveland)에 정유소를 설립했다. 그것이 번창하면서 오하이오(Ohio) 스탠더드 석유회사로 발전했다. 록펠러가 사장으로 취임하면서 사업은 더욱 급속도로 성장을 지속했고, 창업 9년만에 미국 내 정유소의 95%를 독점적으로 지배하는 스탠더드 오일 트러스트(standard oil trust)를 조직하였다. 록펠러는 석유 산업에 투신한 뒤, 기술 개발은 물론 현장 밀착 경영을 통해 원가 절감 요소를 찾아냈다. 경비를 줄이면서 생산성을 올릴 수 있는 모든 경영 요소를 찾아내어 경쟁력을 키웠다. 석유 업계의 지배를 계속하여 미국 내 뿐만 아니라 해외에도 유전과 정유소를 소유한 거대한 회사로 성장시켰다.

 

 1859년 미국 동부 펜실베이니아(Pennsylvania) 타이터스빌(Titusville)에서 드레이크(Drake)가 개발한 세계 최초 시추 석유가 나왔다. 드레이크(Drake)는 기계 굴착 방법을 개발하여 암반 밑 21m까지 뚫는 방법을 고안하여, 암반 석유를 채취하는 유전 기술 개발에 성공했다. 그가 최초로 유전 개발에 성공한 것은 그 지역이 예전부터 오일 크리크(Oil Creek 석유 흐르는 강)라고 불리는 데서 착안한 것이다. 석유 유정 시추 개발에 성공한 드레이크(Drake)는 펌프를 설치하여 매일 30배럴씩 원유를 퍼 올렸다. 비록 소량이었지만, 당시 시장의 수요로 보아서는 충분한 양이었다. 석유는 배럴당 20달러로 날개 돋친 듯이 팔려 나갔다. 이것이 근대 석유 산업의 시작이다. 이후 석유로 인해 세상의 많은 부분이 변한다. 우선 비싼 양초와 고래 기름에 의존하던 조명이 등유로 바뀌었다. 원유에서 얻어진 등유(lamp oil) 등잔불 등화용(燈火用)으로 우수하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크게 환영을 받아 등유(lamp oil) 램프의 사용이 19세기 말에 전 세계에 크게 보급되었다. 드레이크(Drake)의 성공을 계기로 석유에 대한 관심은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타이터스빌(Titusville)은 노다지판으로 둔갑했고 벼락부자들이 속출했다. 드레이크가 석유를 발견한 지 15개월 뒤인 1860년 말에는 약 75개의 유정이 원유를 뿜어냈다. 원유를 등유(lamp oil)로 바꾸는 정제 시설도 15개나 들어섰다. 19세기 말 미국 중하부 텍사스 유전 지대가 등장하기까지 펜실베이니아 유전지대는 미국은 물론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산유 지역이었다. 이후 록펠러가 살던 미국 동북부 오하이오 지역을 비롯한 인근 지역들이 빠르게 성장하는 석유 산업 지대가 되었다. 록펠러는 남북 전쟁 중에 석유 수요가 급증하는 것을 보고 석유 업계에 관심을 갖게 된다.

 

 록펠러는 당시 열병처럼 번지던 석유 탐사 흥분에 휩싸이는 대신 또 다른 미래를 그렸다. 석유 채취 사업은 유가 변동 폭이 크고, 석유 발견에 실패할 확률도 많아 안정적인 산업이 될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는 진짜 돈은 석유 채굴업이 아니라 석유 운송과 정유를 담당하는 중간상이 돈을 번다는 것을 간파했다. 록펠러는 친구와 함께 차린 곡물 중개 회사를 계속하면서 1863 오하이오(Ohio) 클리블랜드(Cleveland) 정유소(精油所)를 설립했다. 당시의 정제 시설이란 뒷마당에 설치된 과학 실험실 정도 규모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것이 돈이 되었고, 주업이 되었다. 그 무렵, 클리블랜드에만 20개의 정유회사들이 있었는데, 모두 대박을 쳤다. 석유가 산업용으로 다양하게 쓰일 가능성을 보이자, 유전 개발에 뛰어들기보다 한 수 앞을 내다보고 재빨리 부가가치가 훨씬 더 높은 정제 공장을 차린 것이 적중한 것이다. 솟구쳐 오르는 검은 액체도 정제하지 않으면, 끈적끈적한 구정물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석유 정제업에 손을 댄 후, 검은 액체들이 그의 정유 공장을 거쳐 전국으로 팔려 나갔다. 그의 사업은 승승장구(乘勝長驅)했다. 등유는 미국뿐 아니라 세계로 퍼져 나갔다. 석유가 미국의 중요한 수출품이 된 것이다. 1861년 석유 수출이 시작된 이후, 1880년대에는 세계적인 수요 증가에 힘입어 미국의 석유 수출량이 국내 생산량의 60%를 웃돌았다. 내수용보다 수출량이 앞선 것이다.

 

 석유는 미국인들의 생활 양식까지 바꾸었다. 해가 지면, 잠자리에 들던 사람들이 등유(lamp oil) 램프 덕에 밤늦게까지 책을 읽거나 다른 일을 할 수 있었다. 한편, 초기의 사업자들은 원유에서 등유만 추출하고, 부산물로 생산된 휘발유(Gasoline)는 거의 쓸모가 없어서 찌꺼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청소 업체에게 돈을 주고 치우거나 몰래 내다버렸다. 특히, 야간에 몰래 강에 버려지기도 했다. 때문에 당시에 석유라고 하면 등유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휘발유(Gasoline). 중유(heavy oil)의 가치를 깨닫게 된 것은 19세기 후반 이후이다. 한편, 석유가 돈이 되자, 유럽과 러시아도 석유 사업에 뛰어들었다. 1879 러시아(Russia)는 카스피해 부근 바쿠 유전을 개발했다. 1880년대에는 유럽의 유대인들이 러시아 바쿠 지역 유전을 개발하기 위한 회사들을 앞다투어 설립했다. 러시아(Russia) 석유 생산이 1888년에는 미국의 생산량을 앞질렀다. 러시아는 1873년 이후로 외국 자본에 대해서 카스피해 인근 코카서스 지방의 석유 탐사를 인정하고 있었다. 당시에 이미 미국 펜실베이니아보다 훨씬 많은 매장량이 있다고 여겨졌던 이 지역에는 스웨덴의 다이너마이트 발명가 노벨(Novel)의 두 아들이 이권을 획득했다. 1890년대 네덜란드(Netherlands)의 로열 더치(Royal Dutch) 회사는 인도네시아 석유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1897 영국(England)의 쉘(Shell) 회사는 인도네시아 보르네오에서 석유 개발을 시작했다. 이들 두 회사는 1907년에 제휴하여 영국과 네덜란드 자본으로 국제적인 거대 석유 회사 그룹인 로열 더치 쉘(Royal Dutch Shell) 그룹을 이루었다. 그동안 석유는 주로 등화용으로 이용되어 왔으나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등유의 용도가 난방용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석유에서 등유를 생산하게 되면, 잉여 제품 즉 휘발성이 있는 휘발유(Gasoline).와 검고 끈적끈적한 중질유(重質溜) 제품이 부산물로 생산되었다. 석유 부산물로 얻어지는 휘발유(Gasoline). 중유(heavy oil)는 용도가 적어 처음에는 귀찮은 존재로 천대받았다. 그러나, 1882년 제이피 모건(John Pierpont Morgan)의 투자와 에디슨(Thomas Edison)의 발명에 의해 미국 뉴욕에 세계 최초의 화력 발전소가 건설되었다. 이 순간 지구상에 새로운 산업이 태동했다. 석유를 연료로 전기가 생산되어 가정과 공장에 공급되기 시작한 것이다. 1882 중앙 발전소 에디슨 전등회사가 뉴욕에 설립됐다. 이후, 전기의 이용은 전 세계로 확산되어 산업 발전의 토대를 이뤘다. 에디슨 전등회사는 1892 톰슨 휴스턴 전기회사와 합병하여 GE(General Electric) 회사가 되었다. 그리고 1886년에는 칼 벤츠(Karl Benz) 휘발유(Gasoline) 자동차를 보급하기 시작하자, 휘발유의 가치가 치솟았다. 그 뒤, 휘발유와 등유의 위치가 점차 바뀌었다. 게다가 1901년 텍사스에서 대규모 유전이 발굴되고, 1901 올즈모빌’(Oldsmobile) 자동차가 생산되어 보급되기 시작했다. 이어 1903년 에디슨 조명회사의 선임 기술자였던 헨리 포드(Henry Ford) 포드(Ford) 자동차 회사를 설립하고, 라이트 형제(Wright brothers) 12마력의 휘발유 엔진에 프로펠러를 장치한 글라이더(glider)로 비행에 성공함으로써 휘발유 비행기 시대를 열었다. 특히 1908년 포드 자동차에서 ‘T형 포드의 대량 자동차 생산을 계기로 휘발유 사용이 극적으로 증가하면서 1911년에는 휘발유 소비가 등유를 웃도는 중요 제품으로 등장했다. 처음에는 가치 없고 귀찮은 부산물로 간주되던 휘발유는 불과 수년 사이에 원유에서 가장 많이 요구되는 석유 제품이 된 것이다. 이는 석유 산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1892년에 루돌프 디젤(Rudolf Diesel)은 중질유의 분사 작용에 의한 디젤(Diesel) 경유 엔진의 특허를 냈다. 공기를 20배 정도 압축하면, 연료를 태울 수 있을 정도로 온도가 올라간다. 이때 연료를 주입하면, 폭발을 일으켜서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처음 디젤 경유 엔진은 가게에서 동력 기계(power machine)로 사용하기 위해 발명되었다. 1910년경에는 배에 올려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개발이 진척되었다. 하지만, 작은 승용차에 처음 적용이 된 것은 1927년에 보쉬(Robert Bosch)가 소형 연료 주입 장치(fuel injection mechanism)를 발명하면서 비로소 가능하게 되었다. 이로써 중질유 가운데 디젤(Diesel) 경유가 자동차 연료로도 사용되었다. 경유는 현재 대부분 디젤 엔진의 원료로 쓰이고 있어 디젤유(Diesel Oil)라고 불린다. 디젤은 값이 쌀 뿐 아니라 연비가 우수해 휘발유 차와 비교하면 같은 연료량으로 훨씬 더 멀리 갈 수 있어 경제적이었다. 이와 같이 각종 용도의 석유 제품이 값싸게 대량으로 생산되어 그것을 연료로 사용할 수 있는 기계의 개발이 촉진되었다. 이에 따라 자동차. 항공기. 선박과 같은 거대 산업이 탄생되는 계기가 되었다. 1912년에는 원유에 열을 가해 끓는점에 따라 휘발유. 등유. 경유(디젤유). 중유를 차례로 생산해내는 최초의 현대식 정유 공장이 미국에 세워짐에 따라 다양한 종류의 석유 제품 공급이 가능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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