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학.성공비결

■ 99%의 노력으로 운명을 개척한 에디슨(Edison)

마도러스 2021. 6. 14. 08:19

 

■ 99%의 노력으로 운명을 개척한 에디슨(Edison)

 

 세계적인 발명가인 에디슨(Thomas Edison)은 어린 시절부터 만물에 대한 호기심이 많아서 당시의 주입식 교육에 적응하는데 심한 어려움을 겪었다. 또한, 에디슨은 난독증(難讀症)이 있었다. 그는 난독증(dyslexia) 때문에 학교에 입학한지 3개월도 못 되어 학교 선생님과 교육 전문가에게까지 학습 장애아로 낙인찍혀서 학교를 그만두었다. 그러나, 그는 평생 미국에서 살면서 연구 활동을 했다. 에디슨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것을 만든 발명가로 1,093개의 발명품에 대한 특허를 얻었다. 그러한 에디슨도 어린 시절에 학교를 그만둔 후, 12세 때에 휴런 항구(Huron port)와 가장 가까운 큰 도시인 디트로이트(Detroit)를 연결하는 기차 철도를 보며, 증기 기관에 매혹되어 기차(train)에서 신문과 사탕을 파는 일을 하기도 하였다. 에디슨은 당시 기차에서 팔고 있는 과학책, 신문, 잡지, 소설 등을 전부 읽었다.

 

 에디슨(Thomas Edison)은 도서관에 있는 책까지 모두 읽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10권 정도 읽다가 포기하게 됐다. 왜냐면, 에디슨은 그의 귀가 잘 안 들리는 청각(聽覺) 장애를 느끼게 되었고, 점점 악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에디슨은 이것을 불행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그의 청각(聽覺) 장애를 큰 재산이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귀가 잘 들리지 않으니, 일을 하는데 덜 산만했고, 외부 잡음에 영향을 받지 않았고, 잠도 깊게 잘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귀가 잘 들리지 않았지만, 항상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그는 그에게 주어진 새로운 기회들을 잘 활용했다. 그는 휴런 항구(Huron port)에서 신문과 잡지를 파는 가판대를 두 개나 운영하면서 다른 소년들을 고용하였고, 그는 기차 짐칸에 작은 실험실을 만들어 놓고, 실험에 몰두하게 되었다. 실험실에는 병, 전지, 시험관들로 가득했다. 그는 기차(train) 짐칸에서 화학물질인 인을 실험하다 화재가 나서 실험실과 인쇄기를 철도 직원이 모두 내려 버린 일이 발생하였지만, 이에 굴하지 않았고, 에디슨은 철도에서 계속 일을 하는 열정을 가졌다.

 

 에디슨(Thomas Edison)이 나이가 들었을 때의 일이다. 그가 일생을 바쳤던 커다란 실험실이 화재로 전부 다 전소(全燒)되는 일이 발생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가 67세였다. 에디슨이 그동안 노력했던 모든 작업과 결정적인 자료들이 모두 화염 속에서 타버리고 말았다. 다음날 아침, 에디슨은 폐허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재앙(災殃)도 가치가 있다. 그동안의 내 모든 실패들이 날아가 버렸으니 말이야! 새로 시작하게 해 주신 신이시여! 정말 감사합니다.” 에디슨은 화재 후 3주 만에 그의 첫 번째 측음기를 세상에 선보였다. 그리고, 에디슨(Thomas Edison)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시도했던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었더라도 그것을 또 하나의 전진이기 때문에 나는 용기를 잃지 않았다.” 여기서 그의 인생과 사물을 대하는 태도가 매우 긍정적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에디슨(Thomas Edison)이 한 말 중에 천재는 1퍼센트의 영감과 99퍼센트의 노력으로 이루어진다 라는 그의 말은 지금까지도 후세에 널리 잘 알려져 있다. '천재'란 그저 최선을 다해 끈기 있게 노력하는 약간의 재능을 갖춘 사람일 뿐이다. 에디슨은 또한 나는 발명을 계속할 돈을 손에 넣기 위해 항상 발명에 몰두했다.”라고 술회했다. 위대한 발명가의 불타는 개척 정신을 엿보게 한다. 그의 끊임없는 창조 활동과 불굴의 도전 정신 그리고 뜨거운 열정이 계속 되었다. 에디슨(Edison) 2,399의 실패의 실패를 거듭한 끝에 2,400번째 도전 장면에서 전구(electric bulb)를 발명했다고 한다. 그는 그의 어록에서 나는 2,399번 실패하지 않았다. 2,399번의 또 다른 경험을 했을 뿐이다.” 라고 말했다. 1879 10 21 백열 전구 실험에 성공했던 날이다. 인류 문명에 에디슨이 남긴 업적의 발명 발자취는 아무도 쉽게 따라하기 힘든 독보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에디슨(Thomas Edison)은 지구상에서 가장 위대한 발명가이다. 1년 반에 걸친 끈질긴 연구 끝에 1879 전구(electric bulb)를 발명하는데 성공했다. 2,399번의 실패를 거쳐 2,400번 만에 성공했다. 드디어 전류를 통해도 타지 않고 빛을 내는 흑연 필라멘트(filament)를 만드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리고, 전기 전구를 실용화하기 위해 합리적인 비용으로 제작할 수 있는 소켓(socket), 스위치(switch) 등의 부가 장치도 개발했다

 

 에디슨(Thomas Edison)은 일생 동안 한 달에 한 개꼴로  1,093개의 발명 특허를 따냈고, 세계적인 기업 GE(General Electric)를 설립했다. 그의 발명품은 1874년 자동 발신기 개발, 1877년 소리를 재생해주는 축음기(phonograph), 1879년 밤을 밝혀주는 전구(electric bulb), 전화 송신기 개발, 1880년 신식 발전기와 전등 부속품 개발, 1881년 전기 전차 실험을 했고, 1882년 발전소를 건설했고, 1888년 영화를 찍는 촬영기(camera), 등사기(light ware). 영사기(projector) 등의 영화 제작 방법을 고안했고, 1895년 광물을 가려내는 방법, 1900년 시멘트 공업의 개량, 1909년 전기를 모아주는 축전기(capacitor) 등을 개발하였다.

 

 에디슨(Thomas Edison)이 진정 훌륭한 것은 그가 이 세상에서 가장 많은 실패를 딛고 성공했다는 점이다. 그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 중 하나인 전구는 적어도 2,399번의 실패를 거친 후에 나왔다. 에디슨이 이처럼 많은 실패를 거쳐서 1879 전구(electric bulb)를 처음 만들었을 때 한 기자가 질문을 했다. "에디슨씨, 당신은 전구를 만들기까지 수많은 실패를 했는데, 그때마다 얼마나 좌절했나요" 에디슨이 답을 했다. "무슨 말씀을요. 2,399번의 실패는 단순한 실패가 아니라 성공을 위한 필수 과정이라는 것을 저는 알고 있어요." 실패는 새로운 생각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실패를 그냥 단순한 실패로 보지 않았고, 새로운 도전의 기회로 생각한 것이다.

 

 에디슨(Thomas Edison)이 그의 발명을 체계적으로 기록하는 것을 습관화한 것은 1871년부터이다. 1870 10월에 그는 그의 포켓 노트(pocket note)에 다음과 같은 말을 적었다. "지금부터 새로운 발명에 관한 모든 것들을 기록해야겠다." 그는 그 말 그대로 수백만 페이지에 달하는 3,500여권의 기록 노트를 남겨 놓았는데, 이것들은 현재 에디슨 역사 유적지에 보관되어 있다. 에디슨은 모든 아이디어를 기록하는 데 거의 광적이었다. 3,500여권의 아이디어 노트를 남겼다는데 솔직히 믿기지 않는다. 사실, 많이 양보해서 약 2,000권 정도 기록 노트를 남겼다고 해도 일주일에 한 권 정도의 아이디어 노트를 만들었다 말이 된다. 그런데, 그는 3,500여권의 기록 노트를 남겨 놓았다. 말 그대로 평생을 연구한 사람이다. 이렇듯 그는 평생을 쉬지않고 연구했다.

 

 에디슨(Thomas Edison) 당대의 미국 과학 기술은 유럽에 비해 크게 내세울 것이 없었다. 특히 유럽의 물리학은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까지 막스 플랑크, 닐스 보어, 퀴리 부부, 아인슈타인, 하이젠베르크 등 천재적인 학자들이 서로 경쟁하며 비약적인 발전하고 있었으나 미국은 변방이었다. 비록 에디슨은 학자적인 이론을 갖고 있지는 못했지만, 불타는 호기심과 끊임없는 실험을 통한 발명으로 미국을 응용 기술면에서 유럽을 압도할 수 있는 국가로 만들었다.

 

 1887 01 26, 조선(朝鮮)의 경복궁(景福宮)에 조선 최초로 백열 전구 전깃불이 들어왔다. 이날 경복궁 안 건청궁(乾淸宮)에서는 백열등 2기의 점등식이 열렸다. 경복궁 안 향원정(香遠亭) 연못에서 끌어올린 물로 발전기를 돌려 전기를 만들고, 이것으로 백열등을 밝힌 것이다. 이 발전기의 용량은 16촉 백열등 750개를 켤 수 있는 규모였다. 발전기를 설치하고, 전등을 가설하는 작업은 미국 에디슨(Edison) 전등회사가 맡았다. 1883년 미국에 보빙사로 파견됐던 민영익과 홍영식 등이 돌아와서 발전소 건설을 건의했고, 고종이 이를 받아들여 에디슨 전등회사에 작업을 맡긴 것이다. 조선에 전깃불이 들어온 것은 1879년 에디슨이 백열등을 발명한 지 8년 만이었다.

 

 에디슨(Thomas Edison) 1847년 미국 오하이오(Ohio) 주 밀란 시에서 일곱 자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그는 상상력이 풍부했고 호기심이 많았으나, 틀에 박힌 학교 교육에 적응하지 못하고 문제아 취급을 받았다.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지진아(遲進兒)라는 말까지 들었다고 한다. 에디슨의 훗날 이렇게 회상했다. "아버지는 나를 바보라고 믿었고, 나도 자신을 바보라고 믿었다." 에디슨의 어린 시절에 대한 웃지 못할 이야기들도 많다. 암탉처럼 자신이 알을 품어서 직접 부화(孵化)시키려 했다는 이야기, 불로 인해서 어떤 일들이 가능한지 알아보기 위해 헛간에 불을 놓아 전소(全燒)시켰다는 이야기도 있다. 아버지가 그를 문제아라고 생각한 것도 그럴 법하다. 그를 믿어준 단 한 명의 든든한 후원자는 어머니였다. 그녀는 아들을 자퇴시키고 직접 교육하기로 마음먹고, 로마 제국 흥망사, 셰익스피어 작품들을 읽어주었고, 여러 가지 과학 실험이 실려 있는 책을 사주었다. 훗날 에디슨은 어머니에 대해 "나 자신이 어머니에게 가치 있는 인간임을 알았고, 그러한 신뢰가 틀림없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기로 결심했다" 라고 회상했다. 에디슨은 15살 때 열차에 치일 뻔한 아이를 구해준 인연으로 아이의 아버지인 역장(驛長)으로부터 전신(電信) 기술을 배워서 전신 기사가 되었다. 점과 짧은 선으로 이루어진 초기 모스 전신(電信)을 해독하여 전송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소리로 이루어진 전신(電信) 장치가 등장하게 되면서 전신 기사 일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자, 그는 전신 기사를 그만두고 발명과 사업에 전념했다. 이때의 경험 때문인지 그는 인간의 육체적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도구를 발명하는 데 자신의 재능을 사용했다. 그의 특허 제1호는 '전자 투표 기록기'였다. 에디슨은 당시 의회의 투표 결과를 전신으로 신문사에 보고하는 일을 했는데, 의원 한 사람 한 사람이 소리를 내어 투표 사항에 대한 찬반 의견을 내는 것을 보고, 이것을 편리하게 기록할 수 있는 기계를 만든 것이다. 앉은 자리에서 버튼만 누르면, 자동으로 집계되어 결과가 현황판에 숫자로 나타났다. 그러나, 에디슨의 기대에도 불구하고 그 기계는 팔리지 않았다. 이때, 에디슨은 중요한 깨달음을 얻었다. 진정한 발명이란 반드시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개발하는 것'이라는 깨달음이었다.

 

 1876년 에디슨(Thomas Edison)은 뉴저지(New Jersey) 주 멘로파크(Menlo Park)에 실험실을 세웠다. 그의 위대한 발명품들은 거의 멘로파크(Menlo Park) 실험실에서 탄생했다. 1877년 여름, 에디슨은 축음기(蓄音機)를 발명했다. 전화에서 수신된 메시지를 음성으로 전환시킬 기계를 개발하던 중에 만들어진 것으로 이것이 상업적으로 이용되는 데는 이로부터 10년이 더 걸렸지만, 이로 인해 '멘로파크의 마술사'로 미국 전역에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에디슨의 최고의 발명은 역시 '백열 전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실용적인 전등이라면 2개의 탄소막대 사이에 아크 방전을 시켜서 불을 밝히는 아크등(arc) 밖에 없었는데, 이것은 탄소 막대가 얼마 지나지 않아 다 탔기 때문에 끊임없이 바꾸어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백열 전구에 쓰일 필라멘트(filament) 소재를 개발하기 위해 6,000종이 넘는 식물을 탐구했고, 서인도 제도나 남아메리카, 아시아까지도 탐험대를 파견했다. 이 실험을 기록한 노트는 무려 3,400권이나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일본산 대나무로 필라멘트(filament)를 생산하는 데 성공했다대나무를 그을려 만든 강력한 탄소섬유로 오래가는 필라멘트를 개발할 수 있었다. 개발된 백열 전구는 한 번에 40시간이 유지될 정도로 성능이 좋았으며, 이후 전구 부속 기구를 발명하여 전구 상용화에 성공했다1882, 뉴욕에 최초의 중앙 발전소가 만들어졌고, 일반 가정에서도 백열 전구가 밝혀지는 시대가 도래했다.

 

 1886년 에디슨(Thomas Edison) 웨스트오렌지(west orange)에 더 큰 연구소를 만들었으나 사람이 많은 곳에서의 연구는 그에게 잘 맞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도 에디슨은 이곳에서 축음기(蓄音機) '회전 요지경(zoetrope)'과 일치시켜 대중화시키려고 노력했고, 마침내 무성(無聲) 영화가 탄생하게 되었다. 에디슨은 자신의 연구소에 1893 '검은 마리아'라는 별명을 가진 세계 최초의 활동 사진 극장을 설립하고, 1894년에는 한 사람씩 구멍으로 활동 사진을 구경하도록 하는 키네토스코프(kinetoscope)를 도입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1931 10 18, 웨스트오렌지(west orange)에서 그가 사망하는 그 순간까지 그는 연구에 몰두했다. 신문 기자들이 그에게 성공 요인이 무엇인지를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천재란 1퍼센트의 영감과 99퍼센트의 노력으로 만들어진다. 일체의 사물을 분명하게 밝히는 최선의 방법은 근면하게 일하고, 시간과 정열을 투자하여 모든 것을 실험해보는 것뿐이다" 라고 말했다. 에디슨은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자신의 일에 확고한 자신감을 가졌던 탐구자였고, 우리 시대를 환하게 밝혀준 과학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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