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굴레

전생(前生)의 증오와 사랑이 한없이 반복된다해도

마도러스 2020. 11. 25. 02:38

■ 전생(前生)의 증오와 사랑이 한없이 반복된다해도

 

최근 방영중인 드라마 구미호뎐’(2020)에서 주인공 구미호(九尾狐)는 이전 생애에서 비극으로 끝난 첫사랑 남자의 환생(還生)을 기다렸다. 그리고, 600년 동안 기다린 끝에 다시 만난다. 이 감격스러운 순간, 문득 드는 의문 하나가 있다. 예전에 사랑했던 사람이란 반드시 지금 다시 만나 다시 사랑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어릴 때의 첫사랑을 모두 다 성장한 다음에 다시 만나봐야, 별 볼 일 없지 않던가? 차라리 추억으로 남겨 두는 것이 더 나았다며 후회가 되진 않을까? 불교(佛敎)에서 말하는 윤회(輪回)에는 하나의 전제 조건이 있다. 바로 전생(前生)의 기억이 소멸된다는 것이다. 전생의 사랑을 이생에서 다시 만난다는 것은 우리가 결국 같은 실수를 거듭 반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차라리 안 만나는 것이 좋고, 다시 사랑하지 않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문학과사회 2020’ 여름호에 실린 우다영의 단편 태초의 선함에 따르면은 이 의문의 정 반대 이야기를 소설로 만들었다. 전생(前生)의 모든 기억을 잊는 것이 아니라 전부 떠올릴 수 있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어떤 상황에 맞부딪히게 될까?

 

남태평양 사모아(Samoa) 제도에서 아즈깔이라는 신비의 풀이 발견된다. 이 풀의 독성에 노출된 사람은 지금껏 이어온 전생(前生)을 모두 기억하게 된다. ‘각성자라고 불리는 이들은 전생(前生)의 기억 뿐 아니라, 전생에 익혔던 기술과 능력까지 고스란히 되살려낼 수 있게 된다. 한마디로 고지능, 고능력의 인간이 된다.

 

무한하고 방대한 경험, 지식, 능력을 갖춘 각성자이건만, 이들은 불행하다. 이전 생애에서 그들 모두 언제나 매순간 좋은 사람일 수만은 없었기 때문이다. 어떤 남편은 사랑하는 아내를 무려 서른 여섯 번의 전생(前生)에서 모두 강간하고 죽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어떤 이는 자신의 아이들이 여러 생애에 거쳐 자신을 죽인 살인자들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무한한 윤회(輪回)의 삶에서 증오와 사랑 또한 무한하게 반복해온 각성자들은 역설적으로 사랑도 증오도 그 어떤 감정도 희미해진 상태에 도달하게 된다. 삶이란 거대한 패턴의 반복일 뿐이란 사실을 알아채버린 인간에게 지금 여기서 산다는 것은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소설을 읽어나가다 삶 자체가 허무해질 무렵, 작가는 독자를 위해 아름다운 장면 하나를 마련해뒀다. “규칙적인 엄격한 패턴으로는 서로 둘은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 라고 말했던 한 연인이 단 한 번의 생애에서 사랑을 이룬다. 이 사랑을 성사시켜주는 이는 그들을 혐오하는 사람이다. 삶이 비록 그런 것이라 해도, 인간은 늘 예측 불가능하며, 그로 인해 다른 가능성을 만들어내는 존재이다. “삶을 거듭 살아가는 것 또한 그렇게 허망하지만은 않다!” 라는 암시처럼 읽힌다.

 

얼마 전, 우리 곁을 떠난 개그맨 박지선씨는 생전 한 인터뷰에서 다음 생애에도 나로 다시 태어나고 싶다 라고 말했다. 그게 가능하다면, 진정 그리 되길 기원한다. 그리고, 그 생애는 부디 이번 생애 보다 덜 고통스런 생애이기를 기원한다. 다른 사람에게 기쁨을 준 만큼, 그 자신도 충분히 기쁜 생애이기를 바란다. 같은 이유로 다음 생애에는 엄마가 나의 딸로 다시 태어나기를 또한 바란다. 이 단편을 읽다 보니, 거듭되는 생애 중에서 한번쯤은 그래도 이 생애에서 빚진 사랑을 갚고 싶어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