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사 (조선)

■ 전봉준과 동학 혁명 그리고 동학

마도러스 2014. 11. 5. 15:44


■ 전봉준과 동학 혁명 그리고 동학

 

1855년 (철종 6년), 전봉준(全琫準) 장군은 전창혁의 아들로 향반(토반, 3대를 벼슬하지 못한 양반)의 집안에서 태어났고, 어릴 때 이름은 명숙(明叔)이고 호는 해몽이었다. 몸이 왜소했기 때문에 흔히 녹두(綠豆)라고 불렀고 뒷날 녹두장군이란 별명이 생겼다. 전봉준 장군의 출생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전라도 고부면 궁동면 양교리 (지금의 정읍시 이평면 장내리 458-1번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전창혁이 생활 형편상 고부, 태인, 고창 일대를 옮겨 다니며 살았기 때문에 출생지에 대한 혼란이 있을 수 있다. 아버지 전창혁은 젊어서 방랑하는 버릇이 있었다. 완전한 상민도 아니었고 생활의 바탕이 되는 농토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젊은 시절 흥덕 소요산에 들어가 도를 닦았다고 한다. 전봉준이 때어날 무렵 전창혁이 100일 기도 끝에 소요산 만장봉이 목구멍으로 넘어오는 태몽을 꾸었는데,  그 후에 전봉준이 태어났다고 한다. 전봉준의 어머니가 누구인지 형제가 몇 명이나 있었는지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다만 어머니가 젊은 시절 일찍 세상을 떠났다고 추측될 뿐이다.

 

1860년 (철종 11년) 4월 5일, 최제우는 구미산에 올라가 수도를 하고 있었는데, 봄 날 기운으로 몸과 마음이 선뜻해지더니 “천상 문답사건”을 경험했다. 상제님께서 깜짝 놀라는 최제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두려워 마라. 무서워 마라. 세상 사람들이 나를 일컬어 상제라고 하나니, 너는 상제를 알지 못하느냐? 서도(西道)로써 사람들을 가르칠 것이 아니요, 내가 너를 세상에 내어 이 법(法)으로 사람들을 가르치게 된다. 의심하지 마라.” 최제우는 유교, 불교, 도교를 공부하여 수도한 끝에 상제님(한울님, 천주님)으로부터 가르침을 얻어 내렸고, 조상을 모시지도 않고 세상 사람들을 어지럽히는 서학 (천주교)에 맞설 학문이라 하여 동학(東學)이라 하였다. 사람들을 현혹하여 도탄에 빠지게 하는 서학으로부터 세상 사람들을 건지고자 하였다. 최제우가 산에서 내려오자 늘 가까이에서 모시고 있던 최시형이 “잘 되셨습니까?” 라고 물었다. 나는 한울님(상제님)으로부터 도(道)를 받았느니라. 최시형은 다시 “그 도(道)란 무었입니까?” 라고 물었다. 나는 도(道)를 었었는데 동학이라 한다. 서학(천주교)과 도(道)는 같지만 이치가 다르기 때문이다. 서학은 음(陰)이고 동학은 양(陽)이다. 양으로 음을 제거하려면 공경해야 한다. 천주님(상제님)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하늘을 순종하는 마음 속에 천주님(상제님)이 있느니라. 최제우는 이어 주문을 적어 주었다. “시천주(侍天主) 조화정(造化定) 영세불망(永世不忘) 만사지(萬事지)”. “천주님(상제님)을 잘 모시면 조화의 바탕이 정해지고, 천주님(상제님)을 길이 잊지 않으면 만사가 통하여 알아진다.” 라는 주문이다.

 

조선 말에는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외척정치)로 인해 민생이 어지러웠는데, 김조순의 딸이 순조의 왕비가 됨으로써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시작되었고, 헌종은 7살에 즉위하였는데 대왕 대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하였고 헌종 3년에 김조근의 딸이 왕비가 되었다. 철종 9년 (1858년)에는 김조순의 셋째 아들 김좌근이 영의정이 되었는데, 그는 나주 기생 양씨를 첩으로 맞아들였다. 그러자 아첨하는 무리들이 너도나도 양씨에게 뇌물을 갖다 주고 벼슬자리를 사고 팔았다. 탐관오리(貪官汚吏)들의 횡포와 양반들의 토색(討索)질은 극에 달했다. 삼정(三政)이 문란해 졌다. 삼정은 전정(토지 제도), 군정(군사 제도), 환곡(곡식을 빌려 가을 추수에 이자를 붙여 갚는 것)의 세가지 제도였다. 나라는 부패해지고 백성들의 불만은 높아만 갔다. 그러던 차에 1862년 (철종 13년)에 진주민란이 일어났다. 그 후 민란은 충청. 전라. 경상도를 비롯하여 전국에서 일어났다.

 

1863년 (철종 14년)부터 최제우는 본격적인 포교활동을 시작했고 경주, 대구, 단양 등 13군데에 접소가 설치 되었다. 그러다가 1863년 12월 9일 용담리에서 최제우 이하 동학교도 23명이 체포되었고, 1864년 1월 4일 대구 감영으로 압송되었으며, 3월 10일 대구 달성공원에서 효수형 (목을 잘라 장대에 꽂아 보이는 것)을 당했다. 그 후에 동학은 최제우의 제자인 최시형이 대를 이어 교세를 늘려 나갔다. 최시형은 동학을 끝끝내 지켜내며 갖은 고생을 다 하였다. 고생이 얼마나 많았던지 30일 동안에 식사를 아홉 번 밖에 못했다. 그런 역경이었으나 언제나 미소를 잃지 않았고 화를 내는 일이 없었다. 최시형은 관헌에 쫓기는 몸이라 늘 거처를 옮겨가며 숨어 살았다. 그러면서도 가는 곳마다 나무와 꽃을 심었고 쉴 사이 없이 노끈을 꼬아 짚신을 손수 삼았다.

 

1866년 (고종 3년), 대원군의 천주교 탄압 사건인 병인 박해에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군이 강화도에 침입해왔다. 이것이 병인양요이다. 조선은 잘 방어해 냈다.

1869년 전봉준은 15살이 되던 해에 고창 송씨 집안의 규수와 결혼했다. 세월이 흘러 전봉준은 어느덧 아이가 둘이나 있었다. 그는 고부의 옛 동네에 가까운 두지리에서 작은 한약방을 하고 있었다.

1871년 (고종 8년), 제너럴쇼먼호의 사건 (1866년)을 빌미로 미국이 조선을 개항시키려고 무력 침략했는데 이것이 신미양요이다. 조선은 잘 방어해 냈다. 이를 계기로 대원군은 승리의 기쁨과 적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기 위해 전국에 “척화비”를 세우도록 하였다.

1873년 (고종 10년)최익현이 대원군의 탄핵을 상소했다. 고종이 이미 성년이 되었으니 섭정의 자리를 내 놓으라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대원군은 부득이 자리에서 물러났고 왕비인 민씨 일족들의 세력이 커졌다. 고종 시대에 우유부단한 왕을 둘러싸고 흥선 대원군과 명성 황후(민비)의 갈등은 계속 되었다. 이 두 사람은 예사 사람보다 뛰어난 총명함과 재주를 갖고 태어났으나 불행히도 숙명적인 경쟁자였다.

 

1875년 (고종 12년), 아버지 전창혁의 친구인 김순영이 전봉준에게 동학을 설명하고 동학에 입교할 것을 권했다. 김순영은 충청도 청산에 살고 있었다. 김순영의 말을 자주 들어서 동학에 대해 어느 정도 뜻을 두었지만, 아직 입교하겠다는 결심은 내리지 못하였다. 그에게는 부모님이 있었고 아직 가장으로서 해야할 책임이 남아 있었다. 이 무렵 아내 송씨가 시름시름 앓고 자리에 눕는 일이 많았다. 전봉준은 그런 아내를 위하여 성심껏 간호하였다. 하지만 아내의 병은 좀처럼 낫지를 않았다. 전봉준 자신이 한약방을 하고 있는 만큼 좋다는 약은 전부 썼고 이름 높은 의원이 있다고 하면 청해다가 진찰하였으나 아내의 맥을 짚어보고는 갸우뚱하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아내를 살리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지만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전봉준은 다만 뼈만 남은 아내의 앙상한 손을 잡아줄 뿐이었다. 그 때 아내가 힘없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여보, 저는 누구보다도 제 병을 잘 알고 있어요. 죽는 것은 두렵지 않지만, 다만 당신에게 미안해요. 당신이 큰 뜻을 품고 있으면서도 저 때문에 결심을 미루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얼마 후 전봉준의 아내는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전봉준은 자기 아내의 병도 고치지 못하는 주제에 의원 노릇을 어찌 하겠느냐 하는 생각에 한약방을 그만두었다. 그 후 글방을 차리고 동네 아이들을 가르쳤다.

 

1876년 (고종 13년), 병자 수호 조약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었다. 1875년 강화도에 침입한 운요호에 대한 조선의 발포 사건을 빌미로 계속 군함을 보내며 협박을 하여 강제적으로 체결한 불평등 조약이며 우리 나라가 외국과 체결한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다. 이 조약은 한일 수교, 사신 교환, 항구 개항의 내용이 들어 있었다.

1881년 (고종 18년), 27세에 동학교도 김순영과 황하일의 권유로 동학에 입교했다. 이 무렵에는 청나라 상인들은 값비싼 비단을 우리 나라에 들여와 팔고 있었고, 일본 상인들은 광목을 들여다가 팔고 있었고 성냥개비, 빨래비누, 석유 등도 들여다가 팔고 있었다. 전통적으로 우리 나라에서는 빨래를 잿물로 삶아 빨았고, 성냥 대신 유황 개비를 사용했고, 광목 대신 무명옷을 입고 있었다. 청나라와 일본이 우리 나라에서 시장 싸움을 하고 있었다.

 

1882년 (고종 19년), 극심한 흉년이 들었다. 이해 3월에는 한미 수호 조약이 체결되었고, 이어서 독일과도 조약을 맺었다. "별기군"이라는 신식군대가 있었는데, 이들 신식군대는 우대를 받았고, 구식 군대는 홀대를 받았다. 구식 군대의 군사들은 벌써 1년 가까이나 봉급(쌀)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6월에 가서 한달치 봉급을 준다는 공고에 군사들은 창고로 달려 갔으나, 부정한 관리들이 쌀을 빼돌려 팔아 먹고 쌀섬에 썩은 쌀과 쭉정이 쌀 및 모래 등을 섞어서 주었다. 당장 폭동이 일어났다. 대원군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군중을 부추겨 민씨 일파를 몰아내고 일본 공사관을 습격하여 "임오군란"을 일으켰다. 민비는 재빨리 변장하여 대궐을 탈출했고, 청나라에 군대를 요청했으며, 일본도 자기 나라 군대를 보내왔다. 대원군의 음모는 깨어지고 결국 청나라에 잡혀갔다. 한편 조선은 일본과 제물포 조약을 체결하게 됐고 배상금을 물고 일본 공사관의 경비병 주둔을 인정하였다.

 

1884년 (고종 21년), 8월 달에 조선에 와있던 청국 군사가 대거 본국으로 돌아갔다. 당시 프랑스가 베트남을 침략했는데 청나라가 그것을 막기 위하여 병력을 그 방면에 주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옥균, 서재필을 비롯한 개화당 사람들은 일본의 힘을 빌려 청나라 세력 즉 사대당을 몰아내야 한다고 믿고 있었는데, 좋은 기회가 생겼다. 김옥균은 10월 17일 우정국 개설 피로연을 이용하여 민씨 세력을 제거하고 사대당 세력을 없애고자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그러나 3일 천하로 끝났다. 청국 군대가 다시 공격해왔고, 일본 군대는 철수했기 때문이다. 일본 군대는 청국 군대와 싸우는 것은 아직 시기상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갑신 정변이 일어나던 해에 전봉준의 아버지 전창혁은 50살이 조금 넘은 나이였고 향청에 나가고 있었다. 향청은 수령과 아전(이.호.예.병.형.공방)의 부정부패를 견제하는 기관이었고, 수령은 향청을 통하여 백성들의 요구사항을 들을 수 있었다. 향청에서 일하는 사람은 풍헌이었고, 향청의 우두머리는 좌수였다. 전창혁은 좌수 밑에서 일하는 풍헌이었다.

 

1885년 (고종 22년), 전봉준은 31세가 되었다. 이해 4월 청나라 텐진에서 "텐진 조약"이 체결되었는데, 이것은 갑신정변에 대한 후속 조치였다. "청.일 양군은 조선에서 철수하고 만일 조선에 출병할 때는 청.일 양국이 서로 알린다." 라는 내용이었다. 이해 5월, 전봉준은 동학교도 황하일의 주선으로 보은에 있는 동학의 2대 교주 최시형을 만났고, 전봉준은 최시형으로부터 고부 지방의 동학 접주로 임명되었다. 전봉준은 동학의 다른 지도자들도 만났는데 특히 손병희를 만나게 됐고, 손병희는 체격이 우람하고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리는 호걸이었다. 이 해 8월, 임오군란의 배후 인물로 지목되어 청나라에 잡혀갔던 대원군이 귀국했다. 당시 조선에 러시아가 세력을 뻗치고 있었는데, 청국은 대원군을 돌려 보내면 러시아 세력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1888년 (고종 25년), 정부에서는 "균전관"을 내려 보내어 황무지의 개간하고 농민을 정착시키며 각종 세금을 감해주어 농민이 생활의 터전을 마련하도록 했다. 이 무렵 전주부자로 아전 출신인 김창석이 고부 일대의 균전관이 되었는데, 김창석은 각 고을의 아전들과 짜고 자기 배를 불리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 해 1월 전주에서 민란이 크게 일어났고, 9월에는 광양에서도 민란이 일어났다. 이 무렵, 일본 상인들의 농간과 횡포는 극에 달하였다. 추수기에 쌀을 몽땅 사들이다가 빈궁기에 15배나 되는 값에 되돌려 파는 폭리를 취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해 10월 함경감사 조병식은 “방곡령”을 선포하고 쌀과 콩의 일본 유출을 금지시켰다. 그러자 일본은 조정에 압력을 가하여 함경 감사를 해임케 하고 방곡령을 철폐케 하였으며 그 동안의 피해를 배상 청구하였다. 또한 고부에서는 김창석과 같은 앞잡이를 내세워 쌀을 모조리 거두어 가고 있었다. 이제 고부에서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전봉준은 농민의 청원 대표로서 세금의 경감과 나쁜 관리의 처벌 등을 고부 군수에게 요구하려고 생각했고, 이 사실을 먼저 아버지 전창혁과 의논했다. 그러자 아버지 전창혁은 이렇게 말했다. "잘 생각했다. 그러나 연판장의 대표는 내가 되겠다. 내가 향청의 풍헌으로 있지 않느냐? 그리고 이런 일은 나이 먹은 사람이 앞장을 서는 것이다. 너는 앞으로 할 일이 많은 사람 아니냐?" 이렇게 해서 전창혁은 고부 마을 수천명의 연판장이 되어 고부 군수에게 요구 사항을 고하게 됐다. 그러나, 아버지 전창혁은 도리어 죄인으로 몰려 곤장 100대를 맞고 그대로 죽고 말았다. 많은 농민들을 부추겼고 관장을 모욕했다는 죄목이었다. 전봉준은 싸늘하게 식은 아버지의 시체를 업고 나오면서 온몸이 분노로 가득했다. 많은 사람들이 전봉준의 집에 모여들어 폭동을 일으키자고 했다. 그러나, 전봉준은 지금은 그런 때가 아니라며 고개를 조용히 저었다. 전봉준은 아버지의 무덤을 아내가 묻혀있는 "황토현"의 양지 바른 곳에 모셨다. 황토현은 고부에서 20리 떨어진 곳에 있었고 산간 계곡지대였다.

 

1892년 (고종 29년), 전봉준은 벌써 38세가 되었고, 꾸준히 동학을 퍼뜨려 나갔다. 이 무렵 조병식이 충청 감사로 부임하였는데 함경 감사로 있으면서 방곡령을 내린 사람이다. 그는 부임하자 동학 교도들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이에 맞서, 동학 교도들은 교조 최수운의 신원 운동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 쓴 죄를 씻음)과 동학을 불법 단체가 아닌 합법적인 세력으로서 인정해 달라는 청원 운동을 벌였다. 이 해 12월, 최시형은 충청.전라.경상도의 동학 교도들에게 전주 삼례역으로 모일 것을 지시했다. 그 때까지의 군중 집회 중 최대 규모로 모였다. 전봉준도 고부의 동학 교도들을 이끌고 “삼례 집회”에 참석했다. 동학 교도들의 요구 사항을 전라감사 이경직에게 제출했고, 타협적인 전라 감사의 약속을 받아냈다. 평화로이 해산했다. 당분간 동학 박해는 없었고 동학의 세력은 부쩍 커졌다.

 

1893년 (고종 30년), 동학 지도부에서는 교조 신원과 동학의 공인을 받기 위해서 직접 고종에게 청원해야 한다는 의견이 일어났다. 최시형은 깊이 생각한 끝에 결단을 내렸다. 이해 3월 드디어 동학 교도 4000여명이 서울로 상경을 했고, 광화문 밖에 엎드려 고종에게 청원을 올렸다. 3일 후에 고종은 “원하는 것을 알았으니 집으로 돌아가 생업에 종사하라.“ 라고 말했다. 그 후, 고종은 약속을 지키기는 커녕 청원 대표 박광호를 체포하고 동학 교도의 활동을 막지 못했다는 이유로 전라감사를 파직시켰다. 서울에서의 청원 운동이 실패하자, 최시형은 ”광제창생(廣濟蒼生), 보국안민(輔國安民), 척양척왜(斥洋斥倭)“의 기치를 내걸고, 동학 교도들에게 충북 보은으로 집결하도록 지시했다. ”보은 집회“는 급히 조정에 보고됐고 조정에서는 양호 순무사 어윤중을 파견하여 최시형과 담판케 했다. 이 때 어윤중은 ”알았다. 먼저 무리를 해산시켜라. 내가 반드시 임금님께 당신들의 뜻을 전하겠다.“ 라고 말했다. 그래서 동학교도들은 일단 자진 해산했다.

 

한편 고부 군수 조병갑은 조 대비 (익종 비)의 먼 친척이었는데, 그는 동진강 하류에 필요없는 “만석보” 라는 제방을 쌓게 하고 농민에게 터무니 없이 물세를 700석이나 부과했고 익산 군수로 있었던 자기 부친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송덕비를 세운다는 명목으로 1000냥을 강제 징수했다. 농민들은 통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11월, 12월에 걸쳐 농민 대표들이 고부 관아에 찿아가 청원을 했다. 그러나 고부 군수는 대표들에게 태형(매로 볼기를 치는 형벌)을 가하거나, 곤장을 때렸다. 농민 대표들은 불구자가 되어 가족의 등에 업혀 나왔다. 사람들은 군수의 포악함에 이를 갈았다. 여기에 조병갑과 친척이면서 조세 운반 책임자였던 조필영의 악행이 가세했다. 농민들의 분노가 극에 달했다.

 

1894년 (고종 31년), 전봉준은 마음 속에 하나의 결심을 굳히고 있었다. 밤마다 사람들이 찾아와 억울함을 호소할 때마다 정의감을 불태우고 있었다. 백성들의 원한을 풀어주기 위해 들고 일어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전봉준은 깊고 추운 한밤 중에 혼자서 황토현의 묘지를 찾았다. 거기에는 부모님의 산소가 있었고 아내의 무덤이 있었다. 그는 오랫동안 부모님의 산소 앞에 엎드려 있었다. 전봉준은 자신의 목숨도 고아가 될 자식들도 모두 희생시키기로 결심했다. 꼭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었지만 수많은 민란의 지도자들처럼 기울어진 나라를 바로잡고 민족 발전의 작은 주춧돌이 되고자 했다. 1월 10일 고부 봉기가 일어났다. 첫 닭이 울자, 어둠 속에서 농민 1000여명이 이평면의 말목 (마항) 장터로 모였다. 하늘에는 아직도 별이 반짝이고 있었다. 농민들의 검은 그림자는 마치 산이 움직이고 숲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머리에는 흰 수건을 두르고 손에는 죽창을 들고 있었다. “일어서면 백산(白山), 앉으면 죽산(竹山)”이라는 옛 비결(秘結)이 맞았다. 전봉준은 맨 앞장을 서고 있었고 손에는 무기 하나 들고 있지 않았다. 말목 장터에 모인 고부 농민군은 전봉준의 지시에 따라 아직도 새벽 잠에 조용하기만 한 고부 관아를 들이쳤다. 조병갑은 잠결에 함성을 듣고 맨발로 뒷담을 넘어 달아났다. 정읍 순창을 거쳐 전주로 달아났다. 전봉준은 사람들에게 질서를 강조했다. 쓸데없는 살인이나 방화를 금하였고 창고를 열어 쌀 1400석을 가난한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14일이 되자, 이웃에 있는 각 고을의 농민군이 합류해 왔다. 전봉준은 말목 장터에서 대장간을 독려하여 무기를 만들고, 백산에 병력을 보내어 진지를 구축하게 했다. 조정의 태도를 지켜 보면서 8도(八道) 동지들을 규합하여 힘의 집결을 이루고자 하였다. 전봉준은 전군을 이끌고서 백산으로 이동하였다. 백산은 해발 50m 되는 작은 산인데, 정감록에 이르기를 “가활만민 (可活萬民)”이라 하여 백성 만명을 살릴 수 있는 곳이라 했고, 강이 세 방면을 구비 돌고 있어 천연의 요새였다. 백산에는 창고가 있었고 4000석이 넘는 쌀도 있어서 오래 주둔하기에 좋은 장소였다. 2월 15일부터 조정에서는 조병갑을 처벌하여 감옥에 가두게 하고, 광주사람 박원명을 고부 군수로 임명했다. 신임 고부군수 박원명은 농민 대표와 대화하고 일을 공평하게 처리했으므로 농민군은 자진 해산했다.

 

농민군이 해산한 후, 안핵사 이용태가 역졸 800명을 이끌고 고부에 나타나 고부 군수 박원명을 꾸짖었다. 폭동을 일으킨 농민들을 잡아다가 심문하여 죽이지 않고, 난동을 일으킨 죄인들을 오히려 양민처럼 관대하게 해주었다는 것이었다. 안핵사는 사건을 조사 처리하는 임시 직책인데, 이용태는 임명을 받고도 아프다는 핑계로 한 달이나 부임하지 않고 있다가 뒤늦게 나타났다. 이용태는 고부 일대의 농민들을 잡아다가 고문을 하며 조사하기 시작했다. 이용태의 명령을 받은 역졸들은 각 마을을 다니면서 남자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 들였고, 남자가 없으면 부인들을 마구 죽였고, 재산을 강탈하며 집에 불을 지르기까지 했다. 이래서 모처럼 가라앉은 동학혁명이 다시 일어났다. 전봉준은 고부 뿐만 아니라, 전라도 일대에서 한꺼번에 일어날 것을 계획했고, 정읍의 손화중, 남원의 김개남에게 연락을 하였다. 3월 1일 다시 일어났고 모두 백산으로 집결했다. 병력이 1만명 가까이 되었다. 백산에 모인 동학군은 4월 4일 금구와 부안을 점령하고 군산포와 법성포의 아전들과도 손을 잡았다. 전라 감사의 관군은 1800명이 출동하였고 동학군과 “황토현”에서 충돌하였다. 전봉준은 전략상 적보다 높은 고지에 진을 치고 있었고, 관군은 보초를 드문드문 세우고 술과 고기를 먹고 잠이 들어 있었다. 전봉준은 4월 6일 밤에 야습을 감행했고, 관군 780명을 섬멸했다. 나머지 1000명의 관군은 4월 7일 새벽에 전봉준의 유인 전술과 매복 전술에 의해 전멸됐고 살아 돌아간 자는 수십명에 지나지 않았다. 동학군은 정읍을 점령했고, 4월 8일에는 고창까지 점령했다. 영광, 함평, 무안을 지나 4월 18일에는 나주까지 입성하였다. 동학의 북접도 나중에 행동을 일으켜 4월 7일 회덕, 진잠을 점령하였으나 최시형의 지시로 자진 해산하였다. 한편 조정에서 새로이 편성된 800여명의 관군은 최신식 소총과 야포까지 무장하고 청나라 군함으로 수송되어 군산포에 상륙했다. 4월 7일 그들은 전주에 입성하여 방어 임무에 들어갔으나 330명은 동학군의 소문을 듣고 겁에 질려 도망갔고, 나머지 군사도 도무지 싸우려 하질 않았다. 동학군은 이미 수만 명으로 불어나 있었다. 동학군은 전주를 공격했고, 4월 27일 전주를 점령했다. 전주가 점령되자 조정은 발칵 뒤집혀 졌다. 청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했고, 5월 5일 청나라 군사 1000명이 아산에 도착했다. 정부가 청국에 출병을 요청했다는 소식을 들은 일본의 이등박문은 좋아서 길길이 날뛰었다. 일본 국내의 정치적 위기와 어려운 곤궁을 돌파할 계기가 마련 됐기 때문이다. 일본군은 텐진 조약에 의해 조선에 자동적으로 출병했고 전함을 조선 쪽으로 집결시켰다. 한편, 외국 군대가 들어 온다는 소식을 듣고서, 전봉준은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게 됐다. 청나라의 외국 군대 차용에 의한 북경 함락의 비극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관군과 휴전할 것을 생각했고, 5월 7일 “전주 화약”이 성립되었다. 전봉준은 전주에서 철수했다.

 

6월 11일 정부는 동학군의 요구를 받아들여 개혁을 추진하고자 교정청을 설치하고 일본군의 철수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6월 12일 일본은 조선에 있는 일본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는 명분아래, 대규모의 병력을 동원하여 인천항에 정박 중인 청나라 군함을 기습 공격하고 일본군을 인천에 상륙시켰다. 이것은 나중에 청.일 전쟁으로 확대되는 계기가 된다. 6월 21일 일본은 대원군을 앞세워 경복궁에 난입하고 민씨 세력을 몰아내고 개화파로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였다.

 

6월 23일 일본은 아산만 풍도 앞바다에서 정박중인 청국 함대를 기습 공격하고 “청.일 전쟁”을 일으켰다. 이 전쟁은 평양 전투를 거쳐 일본이 승리했다. 7월 27일 일본과 김홍집 일파는 “갑오 개혁”을 단행했다. 개혁추진기구로서 군국기무처를 설치하고 과거제도 폐지, 노비 해방, 사법권 독립, 도량형 통일 등등을 단행했다. 한편, 전봉준은 간부 20여명과 함께 각 고을을 돌아 다니며 각 군마다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고 동학군을 격려한 후, 7월 말쯤 태인에 있는 집으로 돌아왔다.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친일 내각을 구성했다는 소식이 전봉준에게 들려왔다. 9월이 되자 일본은 조선을 침략할 속셈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그래서 전봉준은 9월 12일과 13일 삼례에서 집회를 열고 “이제 우리가 비록 관군과 싸우지만, 분명한 적은 일본이다. 일본군이 우리 나라 침략의 원흉이다.” 라고 외쳤다. 전봉준은 본부를 논산 소토산에 두고 공주를 통과하여 서울로 진격할 계획을 세웠다.

 

이 무렵, 강증산 상제님은 상황이 불리하여 동학군이 패배할 것을 미리 아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지난 황토현 싸움에는 크게 이겼지만 , 이번에는 크게 패배할 것이니, 큰 눈 내린 겨울 들판에 패한 시체만 가득할 것이다. 그러니 무고한 생민을 그만 끌어 들이라.” 그러나, 동학군은 거세게 일어났고, 삼례에서 논산으로 이동한 동학군 2만여명은 공주쪽을 향해 공격하기 시작했다. 공주에는 관군 1만여명이 있었고, 일본군 1500여명이 가세하고 있었다. 10월 20일 동학군은 경천과 목천을 점령했으나, 세성산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10월 25일 홍주성이 함락되었다. 웅치 전투에서 대포와 연발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에게 많은 동학군이 피해를 입었다. 동학군은 계속 악착같이 사투를 벌이며 싸웠다. 피가 흘러서 내를 이루었고 시체가 쌓여 산이 되었다. 전투는 교착상태에 들어갔다.

 

11월 3일 다시 우금치 전투가 시작되었다. 우금치는 소를 가지고 넘지 못한다는 뜻으로 그만큼 가파르고 험한 곳이다. 11월 11일까지 9일 동안 50여 차례나 파상 공격을 하였으나 관군과 일본군의 방어 진지를 뚫지는 못했다. 동학군은 무기가 변변치 못했으므로 수천 명의 전사자를 냈다. 결국 우금치에서 물러나 논산쪽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3000명 남은 동학군은 논산에서 끝까지 저항하며 싸웠으나 패배하여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11월 25일 태인 일대에서 최후 혈전을 벌이다가 이 싸움을 고비로 전봉준은 지하로 숨었다. 11월 28일 순창에서 믿는 부하인 김경천의 집에 있었다. 그런데 12월 2일 김경천은 현상금 1000냥과 군수자리라는 미끼에 넘어가 밀고를 하였다. 전봉준은 순창 관아로 끌려갔고 나주 감옥을 거쳐 전주로 옮겨졌다.

 

1895년 (고종 32년), 1월 11일 전봉준은 또다시 전주를 떠나 공주를 거쳐 서울로 압송되었다. 모두 6차례 심문을 받았는데 일본 영사도 심문에 참가했다. 일본 영사는 전봉준과 대원군의 관계를 끈질기게 물었다. 일본은 대원군을 동학 혁명과 관련지어 제거하려 했기 때문이다. 3월 29일 전봉준은 교수형에 처해져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전봉준은 죽기 전에 다음과 같은 유시(遺時)를 남겼다. “때를 만나서는 천지(天地)도 내 편이더니, 운(運)이 다하니 영웅(英雄)도 할 수가 없구나. 백성사랑 올바른 길 무슨 허물이더냐. 조국과 민족을 위한 일편단심(一片丹心) 그 누가 알리요.” 전봉준은 나라를 뒤엎고 자기가 왕위에 오르겠다는 야심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나라에 대한 충성과 부모에 대한 효도를 강조하곤 했다. 이것이 다른 사람의 혁명이나 반란과 다른 점이었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 장수 울고 간다.” 이 노래는 조선 말엽에 민중에 널리 퍼진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노래이다. 전라도 부안, 정읍 근처에는 농민들이 갯벌을 막아 논을 일구어 살았는데, 날이 가물어 모를 심을 수 없게 되면 녹두를 심어 청포를 만들어 먹었다. 녹두가 익을 때 쯤 되면 새들이 모여 녹두꽃을 따먹게 되는데 녹두 밭을 지키던 처녀들이 새를 쫓기 위하여 이 노래를 불렀다. 동학 혁명 이후에는 농민들이 녹두 장군을 흠모하기 위해 이 노래를 많이 불렀다. 파랑새는 청나라 병사를 의미했고, 녹두는 전봉준 장군을 의미했고, 청포 장수는 일반 백성을 의미했다.

 

동학(東學)은 원래 수운 최제우가 가르침을 받아 내렸을 때, “시천주(侍天主) 조화정(造化定)” 즉 천주님을 잘 모시면 조화의 바탕이 정해진다. 그래서, 천주님을 잘 모시고 몸과 마음을 잘 닦으라는 것이었다. 그 후, 최제우가 3년 후에 죽고 난 후, 2대 교주 최시형은 “사인여천(事人如天)” 즉 사람을 섬기되 하늘과 같이 하라."라고 했다. 그리고, 3대 교주 손병희는 동학을 천도교로 교명을 바꾸고, “인내천(人乃天)” 즉 사람이 곧 하늘이라고 했다.

 

 

■ 세계 1차 대전으로 확산되는 동학 혁명

 

동학 혁명군은 전주를 점령하였고, 정부에 개혁을 요구한다. 이 때, 조선의 민씨 정권은 개혁을 들어줄 의사도 없었고, 농민군을 진압할 능력도 없었기에 청(淸)에 군대 파견을 요청한다. 청(淸)이 조선에 파병(1894.05.05)하자, 일본도 텐진 조약을 내세워 즉각 조선에 병력을 파견(1894.05.06)한다. 결국,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 청.일 전쟁(1894년-1895년)이 일어난다. 동학 혁명에서 발단된 청.일 전쟁(1894년-1895년)에서 일본은 승리하였다. 그 강화조약인 1985년 4월 17일 시모노세키 조약에서 일본은 청에게 요동반도의 영유권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6일 뒤에 러시아, 독일, 프랑스 3국이 개입(삼국 간섭)하였고, 일본의 요동 반도 점유를 정식으로 반대하고 나섰다. 일본 정부는 “청.일 전쟁에서 전력을 소모한 현재로는 3국과 싸울 힘이 없다.” 라는 결론에 도달해 이 권고를 받아들였다. 결국, 일본은 요동 반도를 청국에 반환하기로 결정하였다.


그 결과, 일본 국내에서는 3국 특히 러시아에 대한 적개심을 불태우며, 10년 후 러.일 전쟁(1904-1905년)에 대처할 준비를 시작한다. 그동안 중국에 막연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던 서양 제국주의는 삼국간섭 이후, 중국의 이권을 분할하기 시작했다. 서양 열강의 압력으로 일본의 진출은 중단됐으나, 청 나라는 한층 더 큰 대가를 요구받게 되었다. 이 후, 극동의 가장 가까이에 있던 러시아는 ‘삼국 간섭’으로 얻는 중국 요동 반도 끝단의 여순. 대련을 전초 기지로 마침내 한반도까지 진출하려는 야심을 가지고 조선의 이권에 개입하였다. 결국 청.일 전쟁(1894년-1895년)은 러.일 전쟁(1904-1905년)으로 이어지는 환경을 조성했다고 볼 수 있다. 10년간 절치부심했던 일본과 러시아는 드디어 러.일 전쟁(1904-1905년)을 하게 된다. 이 전쟁은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일본이 승리하게 된다.

 

러.일 전쟁(1904-1905년)의 결과로 전쟁 초기에 비웃음을 받았던 일본은 그 지위가 세계적으로 격상되었고, 태평양뿐 아니라 유럽의 세력 균형도 흔들어 놓게 되었다. 이 때 영국은 일본과 동맹을 맺고, 러시아의 발틱 함대의 수에즈운하 통과를 방해함으로써 일본 승리에 기여를 하게 되었다. 반면 극동 진출의 꿈이 좌절된 러시아는 발칸 반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러일 전쟁(1904-1905년) 이후 러시아의 영국에 대한 반감, 프랑스와의 불화, 독일과의 동맹 등으로 발전되어 세계 1차 대전(1914-1918년) 발발의 환경을 조성하였다. 세계 1차 대전은 오스트리아.독일.이탈리아와 러시아.프랑스.영국.미국의 대결이다. 오스트리아의 황태자가 세르비아의 19세 청년에게 암살당하자, 1914년 07월 28일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를 침공하면서 제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다. 러시아는 같은 민족인 세르비아를 도왔다 그러자 오스트리아의 동맹국인 독일이 합세하여 프랑스로 진격했고, 이로 인해 프랑스를 돕기 위해 영국이 독일에게 선전 포고를 하면서 전쟁은 확대되었다.


■ 동학군(東學軍)은 조선의 선각자(先覺者)


[농민군 높게 평가한 당시의 일본 신문 공개] 동학군(東學軍) 토벌 작전 큰 원한 남길 것이다!” 농민군 높게 평가한 그 당시의 일본 신문이 공개됐다. 1894년 동학 농민군에 대한 일본군의 ‘토벌 작전’을 강력히 비판했던 당시 일본 지방 신문의 사설이 공개된 것이다. 2008.12.22-23일, 한국 부산에서 열린 ‘한.중.일 전쟁의 유적을 평화의 초석으로’라는 주제의 국제 학술회의에서 공개됐다. 동북아 역사 재단과 창원대 경남학 연구센터가 공동주 최했다. 이노우에 가쓰오 일본 홋카이도 대학 명예교수는 2008.12.22일 발표에서 동학 농민 전쟁 당시 일본 가가와현에서 발행된 가가와(香川) 신보(新報)의 연재 사설을 소개했다. 이 신문은 1894년 12월 20일자 1면 사설에서 동학 농민군의 지도부를 ‘조선 국민 중의 선각자들’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2008.12.23일자 1면 사설에서도 일본군의 동학 농민군 ‘토벌’을 비판하고 있다. “어찌 원한(怨恨)을 후세에 남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100명이 죽으면 1000명이 원망(怨望)하고, 1000명이 쓰러져 죽으면 1만 명이 원망(怨望)한다. 아아! 어찌 우리의 덕(德)을 펼치는 일에 유리할 수 있겠는가?”라는 내용이다.

 

또한 이 신문은 당시 동학 농민군 학살을 진두지휘한 이노우에 가오루 조선공사의 이름을 거명해 비판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이노우에 교수는 지난 10년 간 동학 농민 전쟁 연구에 매달려 온 일본 학자이다. 그는 일본군 인천 병참 본부의 ‘진중(陣中)일지’라는 사료를 발굴해 동학 농민군에 대한 조직적인 ‘살육 명령’이 있었다는 사실을 학계에 소개한 바 있다. 이노우에 교수는 이날 발표에서도 “일본 방위성에 보존돼 있는 ‘진중(陣中)일지’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일본군의 동학군 포위 섬멸작전이 놀랍게도 조선 현지의 일본군이 아니라, 히로시마 대본영에서 총리 대신이나 참모 본부에 의해 입안됐다는 것이다.” 라고 강조했다.

 

이날 토론에 나선 박맹수 원광대 교수는 “당시 일본군은 청.일 전쟁과 동학 농민 전쟁 보도에 엄격한 검열을 가했다.” 라고 말했으며, “전쟁의 진실이 매우 제한적으로 알려지는 상황에서 동학 농민군을 높이 평가한 신문 사설의 존재는 매우 귀중하다.” 라고 말했다. 이번 학술 대회는 한국. 중국. 일본. 대만의 학자들이 모여 전쟁과 침략의 과거를 올바르게 평가하고 평화의 21세기를 열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자리이다. 기조 강연을 한 도진순 창원대 교수는 “동북아에 견실한 평화가 정착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발판은 전쟁에 대한 기억을 바로 잡는 것이다.”라며, “유럽 등지에 존재하는 ‘국경을 넘는 평화 공원’과 같이 동북아 국가들에 흩어져 있는 전쟁 유적지들을 공통의 ‘평화 공원’으로 만들어야 한다.” 라고 제안했다. (중앙일보. 배노필 기자, 2008.12.24)

 

■ 동학 혁명 발발은 날씨 때문이었다!

 

1877년과 1878년에 발생한 강력한 엘니뇨(El Nino)는 아시아, 아프리카 지역에 큰 가뭄을 가져왔다. 그 당시 인도와 중국에서만 2천만 명 이상이 굶어 죽었다1884년 조선에서도 강력한 대가뭄이 발생했으며, 가뭄의 정점이었던 1901년은 38년 주기와 124년 주기의 가뭄이 겹쳐 전국적으로 엄청난 피해가 발생했다. 1890년대에 들어서면서 대기근으로 사회는 더욱 혼란에 빠지고 도적이 들끓고 민심이 흉흉함에도 관리들은 오히려 토색질을 일삼았다. 동학 농민 운동은 고부군수 조병갑의 가렴주구에 통분한 농민들이 전봉준 동학 접주를 중심으로 1894년 2월 10일 고부 군청을 습격하면서 시작됐다. 조선을 식민지로 삼을까 노리던 일본에 동학 농민 전쟁은 그야말로 ‘울고 싶은데 뺨을 때려준 격’이었다.

 

조선 조정에서 청국에 원병을 요청하자, 일본도 6월 초에 급히 군대를 조선에 파견했다. 그러나 1894년 6월 11일 전주 화약으로 동학 농민 전쟁이 종식되자, 조선에 출병한 일본은 병력을 철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이에 일본의 군부는 경복궁에 침입해 민씨 정권을 몰아내고 대원군 정권을 수립했으며, 청나라와 청일 전쟁(1894-1895)을 벌였다. 1894년 7월25일 일본 순양함 3척이 충청도 아산 앞바다의 청국 군함을 선전 포고도 없이 격파하여 1100명의 청나라 군사가 수장되었다. 일본은 청나라 군대를 참패시킨 후, 친일 김홍집 내각을 수립했다. 이에 해산했던 동학 농민군은 항일 구국 투쟁을 선언하고 다시 무장군을 일으켰으나, 10월 22일부터 시작된 공주. 우금치 싸움에서 일본군에 참패한 후 해산했다. 당시 엘니뇨로 인한 가뭄과 대기근이 없었다면 동학 농민 전쟁이 발생했을까?

 

■ 배달(倍達)민족의 과거 역사와 미래 문명의 비젼)

 

★ 우리 배달 민족의 환국(桓國,BC 7,199-3,897), 배달국(倍達國,BC 3,897-2,333). 고조선(古朝鮮,BC 2,333-238) 문화는 중국의 (堯.재위BC 2,357-2,258), (舜.재위BC 2,255-2,208), (夏,BC 2,205-1,766), (殷,BC 1,600-1,046), (周,BC 1,046-771) 문화의 뿌리이다. 우리 배달 민족 문화가 중국 문화의 뿌리이다. 우리 민족의 역사가 환국(桓國,BC 7,199-3,897), 배달국(倍達國,BC 3,897-2,333), 고조선(古朝鮮,BC 2,333-238). 부여.옥저.동예.낙랑국.마한.변한.진한.고구려.백제.신라로 이어져서 무려 9,200년이나 된다. 

 

 '신시(神市)개천경(開天經)'기록에 의하면, 환국(桓國)의 말엽에 환웅(桓雄)이 있었다. 그는 홍익인간(弘益人間), 재세이화(在世理化), 광명이세(光明理世)의 뜻을 간직하고 있었다. 환웅(桓雄)은 동방 땅 백두산(白頭山)에 문명 개척단 3,000명과 함께 배달국(倍達國,BC 3,897-2,333)을 건설하였다.배달국(倍達國,BC 3,897-2,333년)은 신시배달(神市백두산,1-13대 환웅)과 청구배달(靑丘산동성.태산(泰山),14대-18대 환웅)로 나누어진다. 배달국(倍達國)의 환웅(桓雄)이 북만주와 대진국(발해) 연안의 땅에 뛰어난 석공예와 질공예를 남겼는데, 이것을 배달(倍達) 환웅(桓雄)의 '홍산(紅山)문화'라고 한다.

  

 우리 배달(倍達)민족이 천제(天祭) 및 제사(祭祀) 풍습을 중국 한(漢) 민족에게 전해줬다. 배달국(倍達國) 말엽 및 고조선(古朝鮮) 초기에 중국에서 나라를 창업한 사람들 중에서, 임금(하夏나라의 시조). 임금(은殷나라의 시조). 문왕(주周나라의 시조). 무왕(주周왕조 개창). 강태공(병법의 시조,제齊나라)도 역시 우리 동이족(東夷族)이었다. 또한, 중국의 건국(建國) 시조(始祖)인 삼황오제(三皇五帝)는 전부 우리 동이족(東夷族)이었다. 삼황(三皇)은 태호복희(太昊伏羲). 염제신농(炎帝神農). 황제헌원(黃帝軒轅)을 말하고, 오제(五帝)는 소호금천전욱고양제곡고신. (堯)임금(舜)임금을 말한다. 그들 모두 배달(倍達)민족이었다. 중국의 건국 시조의 8명 중에 우리 민족이 8명으로 전부를 차지한다.

 

★ 중국은 예로부터 우리나라를 청구(靑丘)라고 했는데, 청구 배달(靑丘,14대-18대 환웅)을 일컫는 말이며, 청구 배달의 문화가 '홍산 문화 (紅山文化)'이다. 그 다음 나라에 이르러, 고조선의 '단군(檀君) 신화' 중에는 호랑이와 곰이 나오는데, 실제는 호족(虎.호랑이)과 웅족(熊.곰)을 배달(倍達) 동이족(東夷族)이 교화해서 건국한 것을 신화 형태로 기록한 것이다. 고대 사회의 사람들은 '신화의 형태'로 이야기해야 알아듣는 그런 시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