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 (한국)

전쟁나자마자 곧바로 도망친 이승만

마도러스 2014. 5. 15. 16:08


전쟁나자마자 곧바로 도망친 이승만


■ 이승만 대통령은 전쟁 나자마자 대전. 부산으로 도망쳤다.


이승만 대통령은 ‘북진 통일론’을 주장했다. 하지만, 허황성세(虛荒聲勢)에 불과했다. 그의 ‘북진 통일론’은 실제로 전투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북한 위협으로부터 국민들의 동요를 막고 반공(反共) 정신과 안보 의지를 다잡고자 하는 목적에 불과했다. 1950년 신성모 국방장관은 '이승만의 ‘북진 통일론’에 편승해서 명령만 내리면, 점심은 평양에서 먹고,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겠다!' 라고 했다. 국민들은 꼼짝없이 그들의 ‘주댕이 국방’을 믿었다. 하지만, 그들은 허풍장이었고 거짓말쟁이었다.


1950년 06월 25일, 국민 전체의 안위를 책임지고 있었던 이승만은 새벽부터 전쟁 발발의 소식을 듣고 곧바로 서울을 버리고 도망가기 시작했다. 1950년 06월 26일 아침 8시 신성모 국방장관은 라디오 방송에 나와 “국군이 인민군을 물리치고 북진 중에 있다”라는 라고 거짓 선전을 해서 서울 시민을 속였다. 1950년 06월 27일 새벽, 비상 국무회의가 열렸지만, 이승만은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열차편으로 이미 몰래 서울을 빠져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장관. 국회의원. 육군 본부에게 통보하지 않고 대전(大田)으로 도망갔다. 대전에 도착하자마자 이승만은 곧 특별 담화를 녹음했다. ‘서울 시민은 안심하십시오. 남침을 감행한 북한 괴뢰군은 용감한 국군의 반격으로 38선 너머로 쫓겨나고 있으며 국군은 38선을 굳세게 지키고 있습니다. 국군을 믿고 자리를 지키십시오. 우리 국군이 용감하게 적을 물리치고 있습니다. 국민과 공무원은 정부 발표를 믿고 동요하지 마십시오. 대통령인 나 역시 서울을 떠나지 않고, 국민과 함께 서울을 지키고 있습니다.” 하지만,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그 방송은 서울 방송국이 아닌 대전 방송국에서 행해졌다. 대전(大田)에서 녹화된 라다오 방송은 06월 27일 밤 9시부터 서울 중앙 방송국에서 전파를 타고 전국민에게 전달되었다.


06월 28일 새벽 2시30분 이승만은 아무 예고도 없이 하나 밖에 없던 한강 다리를 폭파했다. 수많은 시민들이 다리 위에 있었음에도 사전 통보나 어떤 통제도 없었다. 다리 위의 50대 이상의 차량이 물에 빠지고, 그 다리를 건너가던 시민 500여명이 폭사(爆死)당했다. 군사 전략적으로 볼 때도 이것은 터무니없는 실수였다. 서부 전선에 배치되었던 우리 국군이 퇴로를 차단당하고 희생된 것이다. 06월 28일 서울은 북한 괴뢰군에게 함락되어 지옥 같은 세월을 보내야 했다.


1950년 07월 01일, 이승만은 대전(大田)에서 또다시 도망갈 때도 목포(木浦)로 이동한 후, 부산(釜山)으로 배를 타고 갔다. 경부가도(京釜街道)가 이미 위험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이승만은 서울 시민을 서울에 가두어놓고 자기 혼자만 살 생각을 했다. 그리고, 1950년 9·28 서울 수복을 했을 때 서울에 남아 고생한 뭇 시민들은 북한 괴뢰군에 부역(賦役)했다고 고문(拷問)해서 죽이고, 연좌제(緣坐制)로 묶어 놓았다. 그런데, 한국의 역사 교과서에서는 이승만은 거의 위인(偉人) 수준으로 묘사되어 있다. 국민을 우롱하고, 국민 상식에도 벗어나는 역사적인 오류와 무지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진실이 왜곡된 교과서는 교과서가 아니다.


이승만은 1960년 3.15 부정 선거로 다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는 부정 선거를 저지른 자유당에서 손을 떼고 대통령의 직무에만 충실하면 국민들이 화를 가라앉힐 줄로 생각했다. 그리고, 경찰은 데모를 일으킨 학생들과 시민들에게 총을 쏘아댔다. 뿐만 아니라 데모에 나선 사람들을 공산당으로 몰아 모조리 잡아들였다. 그러던 중에 1960년 04월 11일에 마산(馬山) 앞바다에서 얼굴에 최루탄 파편이 박힌 김주열 군의 시체가 낚시꾼에 의해 발견되었다. 당시 17세였던 김주열 학생은 시위에 참가한 후 행방불명되었는데, 그의 시체를 검시한 외과 의사는 ‘학생의 사인(死因)은 최루탄이 안부(眼部)에 박힌 것’이라고 진술했다. 김주열은 그의 고향인 전북 남원(南原)시 금지면 용정리에 묻혔다. 데모에 참가했다가 무참하게 죽어 바다에 던져진 고등학생 시체 소식에 국민들의 노여움은 하늘을 찌를 듯 높아졌다.


1960년 4월 19일, ‘독재 정권 물러가라! 부정 선거 다시 하라!’ 데모 군중은 이승만 대통령이 살고 있는 경무대(청와대)를 향해 계속 함성을 질러댔다. 수만 명의 대학생과 고등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수천 명이 경무대(청와대)로 몰려들었다.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했고, 학생들의 시위는 폭발하기 시작했다. 부산·대구·광주·인천·목포·청주 등과 같은 주요 도시에서 학생들이 가세했다. 경무대(지금의 청와대) 앞에서의 경찰의 발포 등으로 당일 183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고, 1,000여 명 이상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04월 25일에 묵묵히 지켜보던 대학 교수들까지 시위를 함으로써 이승만 정부는 무너질 위기를 맞고 있었다. 4월 26일 오후 1시에 이승만은 라디오 연설을 통해 대통령에서 하야(下野)하겠다고 발표했으며, 이에 자유당도 해체하겠다고 발표했다. 결국, 이승만 대통령은 1960년 4·19 혁명으로 대통령직을 물러난 뒤, 미국 하와이로 망명하여 1965년 세상을 떠났다.


■ 조선 선조(宣祖)는 임진왜란 때에 의주로 도망쳤다.


1592년 04월 13일, 왜군(倭軍)은 일본 전함 7백여 척으로 부산포에 내습했고, 04월 14일 부산(釜山)에 상륙했다. 04월 15일 부산 동래성(東萊城)이 함락되었고, 04월 19일 김해가 무너졌다. 04월 28일 신립은 충주 남한강에서 대패했다. 조선군의 방어선은 완전히 붕괴되었다. 04월 30일 선조(宣祖) 임금은 서울을 버리고 의주(義州)로 향했다. 백성들의 야유를 받으며 한양을 버리고 북쪽으로 도망갔다. 비가 오는 캄캄한 밤, 임진강 앞에 도착하여 화석정(花石亭)이라는 정자에 불을 질러 그 불빛 덕분에 선조 일행은 나룻배 5척을 찾아 무사히 강을 건널 수 있었다. 


선조(宣祖)와 그의 일행들은 임진강을 건넌 후, 배를 불태웠다. 처음에 한양을 버리고 도망 갈 때에 수많은 관직에는 수많은 관료들이 호위 동행하였으나, 임진강을 지나면서 부터 슬슬 다 도망 가버리고, 나중에는 밥해 주는 사람 등의 몇 사람만 남았다. 임금이 궁궐을 버리고 떠나고 한성 수비군도 도망가자 백성들은 분노했다. 분노의 불길은 하늘을 찔렀다. 백성들은 경북궁. 창덕궁. 창경궁을 불을 질렀다. 노비 문서를 관리하던 장예원도 불을 질렀다.


사실, 왜군(倭軍)은 이순신에게 해상 보급로가 차단당했기 때문에 식량 보급이 되지 않았고 지쳐 있었다. 수도 한양(漢陽)은 한강으로 둘러싸인 천혜의 요새였다. 그리고 당시 수도 한양(漢陽)에는 화약이 2만7천 근이나 저장되어 있었다. 한강의 대형 수송배들과 지형 지물을 잘 활용하고, 한강 북쪽에 군사를 배치하여 대처했더라면, 왜군(倭軍)은 한강을 쉽사리 넘을 수 없었다. 그러나, 선조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선조(宣祖)는 한양을 버리고 도망갔다. 결국, 05월 02일 조선의 서울 한양(漢陽)이 함락되었다. 선조 임금은 6월 22일부터 의주(義州)에 있었다.


1592년 07월 08일, 이치(전북 완주군 운주면 산북리) 전투에서 도원수 권율(權慄) 장군과 동복 현감 황진(黃進) 장군이 이끄는 관군과 의병 1500명은 왜군 2만여명의 격퇴하고 진입해 오는 일본군을 거의 전멸시켰다. 그 후, 왜군은 다시는 호남에 진출할 엄두도 못 내게 되었다. 이치(梨峙) 대첩은 군량미(軍糧米)의 현지 보급을 꾀하고자 했던 왜적의 전략을 차단하고 조선의 곡창지(穀倉地) 호남(湖南)을 방어해 낸 전투였으며, 조선군이 육지에서 일본군과 대규모 정면 충돌해서 승리를 쟁취한 첫번째 전투였다.


1592년 7월 6일, 이순신은 전라 좌수영, 우수영의 수군을 합친 전함 49척으로 발진했다. 한산도 앞바다에서 돌연 배의 방향을 180도 선회하면서 양쪽으로 날개를 펼쳐서 “학익진(鶴翼陣)”을 형성하며 적선을 포위하고 마침내 격침시켰다. 한산도(閑山島) 대첩(大捷)은 전쟁 전체의 국면을 바꾸어 놓았다. 적들은 남해안을 통한 보급이 끊어졌고 퇴로가 막혔다. 적의 남해를 통한 서해 진입을 좌절시킴으로써 조선은 전라도. 충청도. 서해 바다를 지켜냈다. 반격의 교두보가 확보되었고 서해를 통한 지휘 계통이 회복되었다.


1593년 02월, 경기 고양시 행주(幸州) 산성의 권율(權慄) 장군은 크게 이겼다. 왜군(倭軍)은 이치 전투에서 조선군에게 패배했었고, 북쪽에서는 명나라 군대가 지원군으로 내려오면서 위기에 봉착했다. 한편, 조선군(朝鮮軍)은 수도 한양(漢陽)을 탈환하고자 했다. 한양 탈환을 위해 행주산에 진출하여 있던 전라도 순찰사 권율의 조선군은 왜군 3만 군사와 충돌하게 되었는데, 그 결전지가 행주 산성이었다. 성(城) 안의 조선군(朝鮮軍)은 화차. 석포. 진천뢰(震天雷). 총통(銃筒) 등을 쏘아대며 용감히 맞섰고, 군관민(軍官民) 및 남녀 모두 참여했다. 부녀자들도 긴 치마를 잘라서 짧게 만들어 입고 돌을 나르며, 군사들을 도왔다. 행주(幸州) 대첩에서 조선군의 사상은 130명에 불과했지만, 왜군은 3만 군사 가운데 2만 4천여명의 사상자가 났다. 이치(梨峙) 대첩, 한산도(閑山島) 대첩, 행주(幸州) 대첩은 임진왜란의 3대 대첩이었다.


조선(朝鮮)의 선조(宣祖) 임금은 임진왜란(壬辰倭亂)이 끝나고 전체 훈공(勳功)을 평가하는 자리에서 이순신이 일적추(一賊酋)의 목도 베지 못했고, 일적진(一賊陳)도 함락시키지 못했다고 이순신을 모함하며 거짓말을 했다. 왜란을 평정한 것은 오로지 자기가 의주(義州)에서 요청하여 들어온 명(明)나라 군사 덕분이라고 말했다. 선조는 이순신에게 원균(元均)의 모함을 빌미로 종적죄를 씌워 서울로 끌어올리자마자 심한 고문(拷問)을 가했다. 삼도(三道) 수군(水軍) 통제사로서 5년 동안 나라를 구한 명장을 함부로 문책한 것이다. 이순신은 노량 해전에서 1598년 전사할 때까지 고문(拷問)의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다.


우리 민족은 수천 년의 긴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이루었던 때는 그리 많지 않았다. 우리 민족같이 늘 외세(外勢)의 침략이 끊이지 않았던 나라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전쟁이 나면, (王)과 조정(朝廷)은 무력했고, 지도층들은 도망가기 바빴다. 지도층들은 자신들의 안위(安危)를 걱정하는데 바빴다. 나라가 위난(危難)에 처했을 때마다 이 강산과 이 나라를 면면하게 지켜온 것은 항상 민초(民草)들이었고 의병(義兵)들이었다.


박정희는 독립군을 토벌했고, 공산당 빨갱이 당원이었다.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은 1939년 03월 그는 일제(日帝) 만주국(滿洲國)의 만주 군관 학교에 지원했으나, 연령 초과로 1차에서 탈락하였다. 1939년 08월 24일 그는 일본군(日本軍)으로서 동북 항일 연군(독립군)을 토벌하는 대사하 전투에 참여했으나 패퇴했다. 1940년 04월 01일 그는 만주국 육군 군관 학교 제2기생으로 입교할 수 있었고, 1942년 3월 25일 1등으로 졸업한 후, 일본 육군 사관 학교에 3학년 과정에 편입하였다. 1944년 04월 육군 사관 학교를 졸업했고, 1944년 12월 28세의 나이로 만주군 보병 제8단 육군 소위(少尉)로 임관하였다.


1945년 07월 만주군 중위(中尉)로 임관되었으며, 동시에 만주(滿洲) 동북부의 열하성(熱河省) 주둔 만주군 보병 제8사단에 배속되었다. 그들의 주된 토벌 부대는 중국의 팔로군(八路軍)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독립군 투사들이 주로 팔로군(八路軍)에 가담하였고, 박정희(朴正熙)팔로군(八路軍) 토벌에 참여하였으므로, 독립군(獨立軍) 토벌에도 참여한 셈이다. 만주 보병 제8사단에서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망할 때까지 만주국의 일본군 중위(中尉)로 근무했다. 조국이 해방될 때까지 그는 ‘일본군의 충실한 장교’로 착실히 복무했다.


1945년 08월 15일 광복이 되자 만주 보병 제8단 소속 부대가 없어진 박정희는 1945년 09월 21일 동료들과 함께 중국(中國) 베이징(北京) 쪽으로 건너가 장교 경험자를 찾고 있던 광복군(光復軍)에 편입되었다. 일본군(日本군) 장교로서 일본에 충성하여 입신양명(立身揚名)하고자했던 박정희는 일본이 2차 대전에서 패망하자 갑자기 광복군(光復軍)으로 변신(變身)하였다. 그는 북경의 김학규가 지휘하는 광복군(光復軍) 제3지대 제1대대 제2중대장에 임명되어 광복군 장교로 활동하다가 1946년 05월 08일 미군(美軍) 수송선을 타고 부산항으로 귀국하였다.


1946년 05월 08일, 광복군 제2중대장으로 귀국한 그는 고향에서 넉 달간 휴식을 취하다가 1946년 09월 조선 경비 사관 학교 2기생으로 입학하여 단기 과정을 마치고 1946년 12월 14일 졸업 후, 대한민국 임시 정부 군대에서 다시 육군 소위(少尉)로 임관해 군인 생활을 시작했다.


육군 소위(少尉)로 임관한 박정희는 강원도 춘천에 있던 8연대로 발령받았다. 8연대는 1947년 2월, 미군(美軍)38선 경비 업무를 일부 이관하면서 다섯 곳에 경비 초소를 설치 운영하게 되었다. 이 시절 국군의 연대 단위 기동 훈련을 기안한 공로로 중위를 거치지 않고 바로 육군 대위(大尉)로 진급했다. 그 뒤 육군 소령(少領)으로 진급, 1948년 육군 본부 작전 정보국에 근무하던 중, 여수. 순천 14연대 사건에 연루되었다. 공산당(共産黨)의 남한 조직인 남로당(南勞黨)의 한국군 조직책이었던 박정희(朴正熙)는 여수. 순천 14연대 사건 후에 시작된 대한민국 정부의 군대 내 공산주의자(共産主義者)를 색출하는 숙군(肅軍) 작업에서 그동안 간첩 활동의 핵심 역할을 했던 것이 들통 나서 1948년 11월 11일 체포되었다. 


그는 1945년 이후 남로당(南勞黨)에 입당하여 공산당(共産黨)의 한국군 하부 조직책으로 일해 온 것이었다. 그는 그의 형 박상희에게서 사상적으로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그의 형 박상희는 1946년 10월 01일 공산당(共産黨) 좌익(左翼) 시위를 하다가 경찰의 총격에 의해 사망하였다. 박정희(朴正熙)는 간첩 활동의 핵심 역할 죄목으로 무기 징역형을 선고받았는데, 그의 동지들 명단을 넘겨주는 댓가로 간신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결국 실형을 면하게 된 그는 1949년 01월 백선엽 장군의 배려로 다시 예편되어 육군 정보국에서 비공식 문관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1950년 06월 25일 한국 전쟁 발발 이후에 육군 소령(少領)으로 현역 복귀하였고, 이후 육군 본부 작전 정보국 제1과장을 거쳐 1950년 09월 15일 인천 상륙 작전이 감행될 때에 육군 중령(中領)으로 진급하고 대구(大邱)로 가는 육군 본부의 수송 지휘관을 맡았다. 1950년 10월 25일 제9사단 참모장으로 임명되었다.


1953년 11월 육군 준장(准將)으로 승진하여 장군이 되었으며, 1955년 7월 14일 제5사단 사단장이 되었다. 1955년 겨울 예기치 않은 폭설이 발생, 작업 중이던 여러 사단 소속 장병들이 사고를 당한 사건이 있은 후 박정희는 문책성 인사 조치로 대기 발령되었다가 1956년 육군 대학에 입교하였다. 1957년 03월 20일 육군 대학을 졸업한 뒤, 육군 소장(小將)이 되었다. 이어 박정희는 제 6군단 부군단장으로 부임하였으며, 1957년 제7사단 사단장으로 부임하였다. 1959년 07월 육군 제6관구 사령관이 되었다. 1960년 01월 부산 군수 기지 사령부 사령관으로 발령받았다.


1960년 08월 12일 윤보선(尹潽善) 대통령이 대통령 선거에 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여 제4대 대통령이 되었다. 박정희는 육군 본부 작전 참모부 부장으로 부임하였다. 이 때, 이종찬(李鐘贊) 장군은 국무총리 장면(張勉)을 찾아가 박정희의 중용(重用)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총리 장면(張勉)은 이 문제를 바로 답변하지 않고 주한 미군 사령관 매그루더(Magruder) 사령관을 찾아 논의하였다. 며칠 뒤 매그루더는 한국 육군 본부로 박정희의 신원 조회를 요청하였고 김형일(金炯一) 육군 본부 참모차장은 “박정희는 좌익(左翼) 빨갱이이다!” 라고 답변하였다. 매그루더는 다시 장면(張勉)을 찾아 '그런 사람을 어떻게 그런 요직에 앉혀뒀냐'며 항의하였다. 육군 본부 작전 참모부 부장이었다가 이 일이 있은 후 1960년 12월 15일 제2군 사령부 부사령관으로 전보되었다.


제2군 사령부 부사령관으로 전보되었던 박정희는 윤보선(尹潽善) 정권에 대해 불만을 품게 되었다. 권력에 대한 욕구가 충만했던 그는 중령 김종필(金鍾泌)과 함께 1960년 09월부터 이미 군사 반란(反亂)을 계획했으며, 결국 1961년 5월 16일 새벽, 5·16 군사 정변(政變)을 일으켰다. 1963년 10월 15일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부정 선거에 의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윤보선(尹潽善) 대통령은 부정 선거로 치러진 것에 항의했으며, “내가 사실상 정신적 대통령이다!” 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1979년 10월 04일, 박정희(朴正熙)는 신민당 총재 김영삼(金永三) 의원 제명 파동 등을 주도하였다. 결국, 1979년 10월 16일 부산(釜山)에서 민주 항쟁이 시작되었고, 부산. 마산 민주 항쟁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10월 18일 부산(釜山)시에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정부는 부마(釜馬) 항쟁을 무력으로 진압하려 하였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朴正熙)는 중앙정보부 부장 김재규(金載圭)의 총격에 의해 사망했다. 김재규(金載圭)“내가 거사(巨事)를 안 하면 틀림없이 부마(釜馬) 항쟁이 5대 도시로 확대되어 4·19 보다 더 큰 사태가 일어났을 것이다. 이승만은 물러날 줄 알았지만, 박정희는 절대 물러날 성격이 아니다. 차지철(車智徹)은 ‘캄보디아에서 300만명 죽였는데 우리가 100만-200만명 못 죽이겠느냐!’라고 했다. 그래서, 내가 더 큰 희생을 막기 위해서 거사(巨事)를 했다!” 라는 말을 남겼다.


박정희(朴正熙) 재임 기간(1963-1979)의 무역 적자 규모가 233억 달러였다. 지금의 화폐 가치로 환산하면, 천문학적인 무역 적자 규모인 것이다. 결국, 미국과 유럽 및 일본의 차관(借款)을 끌어다가 돌려 막기에 급급했다. 쉽게 비유하면, 박정희 경제는 결국 카드 돌려 막기 경제였고, 만성적인 적자 구조 경제였다. 마이너스 카드 뽑아다가 계속 써 대고 나서 그걸 다시 돌려막기 하다가 망하는 그런 경제였다. 그래서, 박정희 임기 내에 국가 부도 위기10번 정도 있었다. 1980년대 특히 1986년부터 1988년 사이에 3저 호황(저금리. 저달러. 저유가)이 없었으면 한국은 아마 총체적 국가 부도를 맞이했을 것이다.


박정희 정권 18년 동안, 전국 지가(地價)180배 이상 상승했고, 토지 불로 소득이 국민 소득의 무려 2.5배나 됐다. 불로(不勞) 소득의 천국이었고, 부익부(富益富) 빈익빈(貧益貧)의 극치였다. 연평균 물가 상승률을 보면, 이승만 22.7%, 박정희 14.7%, 김영삼 5.0%, 김대중 3.5%, 노무현 2.9%였다. 독재 정부 때에 물가가 한없이 상승했었고, 민주 정부 때에 물가가 안정되었다. 연평균 땅값 상승률 통계를 보면, 박정희 정권 때에 33.1%를 보여 매우 높은 상태에 도달했고, 민주주의 정권에 들어서면서 노무현 정권 때 4.3%를 보이며 땅값이 안정되었다.


'박정희 대통령 덕분에 우리 경제가 이만큼 발전했다!' 라는 잘못된 인식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뭘까? 1950년대까지만 해도 독일(Germany)에서 여론 조사를 하면, 히틀러(Adolf Hitler)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꼽혔다. 하지만, 복지 국가의 기틀을 잡아간 이후부터는 일부 파시즘(fascism) 추종 세력에게서만 추앙받는 꼴이 되었다. 이와같이, '더 좋은 세상'을 살아보지 못한 사람들이 겪을 수밖에 없는 한시적 한계이다. 우리 현대사(現代史)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으니, 흑백(黑白)을 구분하지 못하고 독재 정권의 해악(害惡)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1961년 05월 16일 새벽 3시의 5.16 쿠데타! 이 치욕(恥辱)의 날을 우리는 똑똑히 기억해야 한다. 군사 정권을 미화(美化)하거나 찬양하는 나라는 문명 사회의 일원이 될 수 없다. 군사 독재가 경제를 살렸다는 속설은 이제 폐기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