뺏긴 역사찾자

■ 백제(百濟)의 일본 지배와 일본의 역사 왜곡

마도러스 2013. 2. 13. 10:06

 

■ 백제(百濟)의 일본 지배와 일본의 역사 왜곡

 

1. 우리 민족의 일본 이주와 백제의 일본 지배  

 

일본 건국신화 중에서 '신대 상편' 제2권 '팔주기원' 기록에 '담로'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담로는 백제의 통치기구로 일본국 기원은 담로, 즉 백제라는 사실을 말해 준다. 또한 일본의 천황이라 일컬어지는 왕들 전부 우리 한민족의 국가인 고조선 및 부여, 고구려, 신라, 가야, 백제라는 사실은 현재 누구라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요즘 일본 천황가에서 자신들의 뿌리가 백제라고 밝히는 것을 보면, 백제가 일본에 끼친 영향력은 막대한 것이었으며 그것은 식민지 경영으로 이루어진 것이라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삼국시대 말기 일본 열도 국가의 왕이 백제의 왕족이었음은 주지의 사실이요, 일본의 정사인 『일본서기』는 주객만 전도되었을 뿐 백제의 일본통치사라 하여도 무방할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백제국에 대한 일본 왜국의 비교적 대규모의 군사적 지원이 세 차례 있었는데, 고구려 광개토태왕의 백제 침공시, 백제 성왕시의 위기, 그리고 백제 멸망 당시가 그것으로, 만약 왜(일본)가 백제의 식민지가 아닌 동맹관계였다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이다.

 

백제가 660년 13만 나당연합군(신라.당나라 연합)의 침공으로 멸망한다. 그 후 661년 9월, 백제 왕자 부여풍에 의해 백제부흥운동이 전개되어 주류성(周留城, 부안군 상서면 위금암(位金巖) 산성을 수도로 하는 백제 부흥국이 다시 세워졌다. 주류성을 기반으로 백제 부흥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이에 신라와 당은 2차 연합군을 결성, 백제를 완전히 멸망시킬 준비를 한다. 663년 3월, 왜(倭) 나라는 전함 1,000척과 병력 2만7천명의 대규모 파병을 강행한다. 백제부흥군(백제-왜)과 나당연합군이 663년 한반도 백촌강(부안 동진강)에서 맞붙은 전쟁을 ‘백촌강 전투’라고 한다. 동북아시아 모든 세력이 충돌한 최초의 국제 대전이었다. 그러나, 결국 백제부흥군(백제-왜)은 패배하고 만다.

 

663년 주류성의 함락으로 백제 부흥운동이 막을 내리자 후퇴하던 왜군들이 "아, 아, 주류성이 함락되었구나. 이제 조상의 땅을 잃었으니 어찌 찾아 뵈리오" 라고 울부짖은 걸 볼 때 당시 왜국의 뿌리가 백제였음을 확인해볼 수 있다. 이처럼 백제의 일본 통치는 강력한 것으로 본국인 백제가 위기에 처하거나 어려울 때면 언제든지 왜에게 군사적 징발을 강요하였고, 비류백제의 통치기구인 담로에 의하여 직접적인 통치가 이루어졌는데, 이와 관련된 대표적 유물 중의 하나가 바로 '칠지도'이다. 이와 같은 군사적 징발은 물론, 자기 종주국과 적대적인 나라라는 이유로 일본은 해적으로 가장하여 수없이 신라 해변을 강탈하였다. 이는 역사서에 명백히 나와 있는 것으로 신라는 수 많은 왜구의 침탈을 받은 반면, 백제는 왜구의 침탈을 받았다는 기록이 어디에도 없는 바, 이는 왜에 대한 백제 통치의 작은 증거가 되는 셈이다.

 

이처럼 왜는 백제의 식민지로서 자연스런 망명지가 되고, 일시 피난처도 되었다. 백제 본국의 세력다툼을 피하여 일시 일본으로 건너가 힘을 기른 후 다시 백제에 돌아와 정권을 잡은 동성왕, 무령왕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백제 멸망시에는 백제 무왕의 딸이자 의자왕의 누이 동생인 일본 열도의 제명여왕은 백제의 멸망을 막으려고 안간힘을 다하여 백제에 원병을 보내기 위하여 직접 진두 지휘하다가 사망하고, 제명 여왕의 아들이 뒤를 이어 천지왕이 되자, 일본 열도의 나라 이름을 ‘(倭)’에서 '일본(日本)'이라 칭하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 열도에 대한 우리 민족의 지배는 단군 조선 멸망과 함께 이주를 시작한 단군 조선 유민이 그 기반이고, 이후 가야인의 규슈 지방 이주에 의하여 기반이 형상된 후, 백제의 담로 체제를 통해 일본 열도를 고대 국가로서 식민 지배하게 되었다. 이후 일본은 아스카(지금의 오사카)를 중심으로 고대 국가의 틀을 마련하고 고대 문명을 이루게 된다. 통치자의 상징인 백제식 칼과 금동제 신발 등의 출토는 백제에 의한 직접 통치가 이루어졌다는 확실한 증거가 된다.

 

2. 일본 칠지도(七支刀)의 진상 및 칠지도에 깃든 한.일 관계사  

 

일본이라는 나라가 국호를 '일본(日本)'이라고 칭한 시기는 670년 부터이고, 그 전에는 '(倭)'라고 불리운 여러 지방정권 국가 단계였다. 그들의 종주국이자 모국인 백제가 멸망하자 비로소 한반도와의 단절을 꾀하고, 독자적인 나라를 꾸미기 위해서, 한반도 특히 백제에 종속적인 역사에서 탈피하고자 일본의 중앙통일정권이 완전 허구로 꾸민 역사서가 『일본서기』라는 것은 주지 없는 사실이다. 나라의 정통성과 통일성을 필요로 한 명치 유신(메이지 유신) 이후에 나라의 주체성과 역사성을 억지로 조작한 일본 서기는 왕권강화와 군국주의에 의한 팽창주의에 적당한 근거가 되어, 이후 일본은 『일본서기』에서 자기의 역사 및 우리의 역사를 억지로 꿰맞추는 제2의 역사 왜곡을 시행한다. 이에 대한 대표적인 예가 '광개토태왕릉 비문의 변조'와 '칠지도에 대한 왜곡 작업'이다.

 

일본 건국 신화에 의하면, 사신(四神) 중 하나인 스사노오(소전오)가 8개의 머리를 가진 뱀을 죽이고 그 뱀 속에서 끄집어 낸 보검(칠지도)을 지니고 있다고 하는데, 이 보검은 천황가에 대대로 내려와 천황의 상징물이 되었다고 한다. 이후 환란 중에 그 보검을 분실하였는데, 천황가의 권위를 회복하고자 명치시대에 이 보검을 열망하였다. 그러던 중 그 보검이 어딘가에 보관되어 있다는 전설을 듣고는 이것을 찾으라는 밀명이 천황가로부터 떨어졌다. 여기서 찾은 것이 다름 아닌 칠지도(七支刀)였다. 그러나 이를 찾은 간마사토모는 여기에 새겨진 명문이 자기들의 필요성과는 엄청나게 틀리다는 것을 알고 긁어 못쓰게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는 오히려 엉뚱한 해석을 내려 백제가 왜에 종속되었다고 주장하여 그것이 오늘에 이른 것이다. 현재 많은 일본학자는 물론 우리나라 및 중국의 학자들에 의하여 기존에 주장하여 온 이러한 주장은 틀린 것으로 판명되었으나, 그것은 자신들 편의대로 끊임없이 고집하는 주장으로 아직도 많은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이 칠지도(七支刀)는 일곱 개의 가지가 있어 칠지도라 일컫게 되었는데, 이 일곱가지는 '백제의 일곱 나라 통치'를 의미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여기에는 놀랍게도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어 그 명문 중 '태화'아는 연호가 문제되었는데, 예전의 일본인 학자들은 이를 중국 동진의 연호 '태화'라고 주장하였다. 즉, '백제의 종주국인 동진의 황제가 왜왕을 위해 만들어 백제왕을 통하여 왜왕에게 하사한 것이다'라고 해석하여, 왜(倭)의 백제에의 종속국임을 부정하게 되는 것이다.

 

일본은 『일본서기』의 편찬 과정에서 백제 등 우리나라와의 종속관계를 극력 부정하고, 반대로 중국과의 직접 교류를 강조함으로써 애써 일본의 독립성과 주체성을 강조하는 이중적 역사관을 가지게 된다. 즉 '동북아의 문화 및 군사대국이었던 중국과는 문화교류가 있었지만, 한반도로부터는 일체 유입이 없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반도와 동등 내지는 우월하다'라고 교묘히 주장하고 있다. 이와 같이 일본은 『일본서기』를 쓸 당시 일본의 역사가 백제에 의한 식민지 통치 역사였으므로 이를 부정하기 위한 방편으로 백제의 한반도와 일본 열도 내에서의 역사적 활동을 일본의 활동으로 바꾸어 놓았다. 즉 백제가 가여 지방을 지배하였던 것을 일본이 가야를 지배한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칠지도(七支刀)가 왜국에 전해진 시대는 백제가 중국 본토 동북부 해안 등을 식민지로 두어 동진이 백제의 속국이나 다름없었던 시기이다. 그리하여 이같은 주장은 허무맹랑할 수 밖에 없으며, 일본의 전통적인 역사관을 인식하면 쉽게 이해될 수 있는 사안이다. 더군다나 이 칠지도를 처음 발견하여 왜곡된 설을 전파한 간마사토모는 일본 군국주의 시기에 역사 왜곡에 깊이 간여한 인물로서, 그러한 이가 일본에 치욕적인 칠지도의 명문을 그대로 놓아둘 리가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또 하나 살펴볼 것은 전통적인 일본 왕가의 보검 및 그 유래 또한 한반도와 깊은 연관성이 있다는 것이다. 일본의 건국신화는 앞서 살펴보았듯이 한반도인의 일본 정복사를 신화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여기의 소전오와 검은 한반도인, 특히 가야인의 일본 열도로의 철 문화 전래 사실을 신화적으로 묘사한 것에 불과하다. 일본은 근본적으로 역사에 왜곡을 가하고, 또 다시 근세에 이르러 왜곡을 가하게 되는 역사 왜곡의 전통성을 보여주고 있다. 정확히 말하여 이 칠지도는 '백제국 태자가 왜왕을 위하여 칼을 만들어 하사한 것으로, 백제국의 왕자가 왜왕과 동격 내지는 상급이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을 짚고 넘어가겠다. 그것은 태화라는 연호와 아울러 태자라는 단어에 대한 것이다. 경주 출신 김부식의 『삼국사기 편찬에서 신라의 역사를 중요시하면서 고구려 및 백제의 역사를 깎아내리는 작태를 행한 것은 주지의 사실로, 김부식은 신라의 연호 사용은 전하면서 고구려와 백제의 연호 사용은 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고대국가에서 연호의 독자적 사용은 중국과의 관계에 있어 독립성을 나타낸 것으로, 우리나라의 역사를 살펴보면 중국과 대등 내지는 우월한 관계에 있었던 삼국시대 및 그 이전의 연호를 사용하였다. 그 이후 통일신라, 근세 조선에는 이러한 사실이 없다가 대한 제국의 성립으로 황제로 칭하는 시기에 연호를 사용하게 된다. 삼국시대에는 독자적인 연호를 고구려. 신라. 백제가 모두 사용하고 있었다. 광개토왕 비문에는 ‘영락’이라는 연호와 칠지오에 나타난 백제의 ‘태화’라는 연호가 있으며, 이외의 고구려 태조의 연호 융무, 장수태왕의 건흥, 평원왕의 대덕, 영양왕의 홍무, 보장왕의 개화란 연호가 기록상 확인되고 있다.

 

엄연히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한 고구려, 백제를 중국에 복속국화한 김부식의 작태를 이어받은 우리의 역사관이 너무도 개탄스럽다. 앞으로 우리나라 고대국가의 왕들은 황제라 칭하고, 반대로 일본의 천황은 왕이라 칭하는 것이 옳을 듯 하다.

 

3. 백제 무령왕릉에 나타난 일본에 대한 지배 증거  

 

충남 공주시에 있는 백제 무령왕릉의 발굴은 그야말로 동북아 삼국의 역사 정립에 중요한 계기를 제공하였던 역사적 발굴이었으나 그만큼 논란도 많았고, 졸속 발굴과 발굴 결과의 해석에 대한 비판이 상당히 많았다. 여기서 무령왕릉의 역사적 의의에 대하여 살펴본다.

 

1) 백제 무령왕의 관으로 사용한 관목(冠木)은 일본산 금송  

 

백제 무령왕의 관목(冠木)을 분석한 결과, 일본 내 백제의 본거지인 오사카 부근 와카야마현 고야산의 금송인 것으로 판명되었다. 고야산 근처의 오사카 하비키노 포도밭에서 소위 관음청이라는 백제 양식의 횡혈식 고분이 발견되는 등 이 근방에는 무려 약 1000여 개의 고분이 있다. 이 고분들의 부장품 중에는 무령왕릉에서 발굴된 청동 다리미와 똑같은 것들이 있었고, 토기 또한 백제의 것이며 벽화에는 머리에 깃털을 꼽고 말을 탄 인물상인 북방 기마민족상이 나타나는 등 모두가 아예 한반도 백제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인근에는 백제 무령왕을 낳은 곤지왕을 모시는 아스카베 신사가 있는데, 그 당시에는 최대의 규모였다고 한다. 일본의 이 지방에서 특한되는 금송으로 관을 만들었다는 것은 이 곳이 백제의 통치 지역이라는 확실한 증거인 셈이다. 

 

2) 금동 신발은 백제의 통치기구인 '담로제'의 증거  

 

무령 왕릉에서 발견된 금동제 신발과 똑같은 것이 익산 입점리 고분에서 발견되었다. 이 고분은 왕급 무덤으로 역시 5세기 중엽의 백제 양식인 횡혈식 석실고분이다. 또한 일본의 구마모토현 후나야마의 6세기 백제 양식 고분에서도 무령왕릉의 그것과 똑같은 금동관모 및 금동신발이 발견되었다. 중국의 사서 '양서' 「백제전」에는 "백제는 22개 ‘담로’를 두어 전체 영토를 통치하였는데, 왕의 자제 및 친척을 보내어 다스린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모두 백제 담로제에 의한 통치의 또 다른 확실한 증거가 된다.

 

또한 중국 남경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흑치상지 묘비에 "흑치 상지는 원래 백제 왕족인 부여씨였으나, 흑치 지방의 수장으로 임명되었기 때문에 흑치로 성을 바꾸었다"고 되어 있다. 여기서 흑치 지방은 남양군도에 있는 지명으로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는 "일본에서 4천리 밖에 흑치라는 나라가 있다"라고 하여 이를 증명하고 있다. 여기서 '흑치'라는 지명에 대하여 "원래 양자강 부근에 있었는데 옮겼다"는 설이 있다. 이것이 맞는다면 흑치의 위치는 동남아가 아니라 양자강 양안(월주, 주산부근)으로, 그 곳을 백제가 지배하였다는 증거가 된다. 이와는 별도로 ‘담로’라는 말이 한반도는 물론 중국 동북부 및 남부 멀리 동남아시아에서까지 나타나는 것을 보면, 백제가 중국, 일본은 물론 동남아시아에도 ‘담로’를 두어 통치하던 해상 대제국이었다는 사실을 추정해 볼 수 있다.

 

 

■ 우리 배달(倍達) 민족의 역사는 9,200년이다.

    

 우리 배달 민족의 환국(桓國, BC 7,199-3,897), 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 고조선(古朝鮮, BC 2,333-238) 문화는 중국의 (. 재위BC 2,357-2,258), (. 재위BC 2,255-2,208), (, BC 2,205-1,766), (, BC 1,600-1,046), (, BC 1,046-771) 문화의 뿌리이다. 우리 배달(倍達민족 문화가 중국 문화의 뿌리이다우리 민족의 역사가 환국(桓國, BC 7,199-3,897), 배달국(倍達, BC 3,897-2,333), 고조선(古朝鮮, BC 2,333-238). 부여.옥저.동예.낙랑국. 마한.변한.진한고구려.백제.신라로 이어져서 무려 9,200이나 된다환국(桓國, BC 7,199-3,897)의 장자국(長子國) 배달국(倍達國)이었고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의 장자국(長子國) 고조선(古朝鮮, BC 2,333-238)이었음을 비추어 볼 때, 우리 배달(倍達)민족과 한국이 세계 4대 문명의 정통성을 이어 받은 민족이며 나라임을 알 수 있다.

 

 '신시(神市) 개천경(開天經)' 기록에 의하면환국(桓國)의 말엽에 환웅(桓雄)이 있었다그는 홍익인간(弘益人間), 재세이화(在世理化), 광명이세(光明理世)의 뜻을 간직하고 있었다환웅(桓雄)은 동방 땅 백두산(白頭山)에 문명 개척단 3,000명과 함께 배달국(倍達, BC 3,897-2,333)을 건설하였다배달국(倍達, BC 3,897-2,333) 신시 배달[神市 백두산, 1-13대 환웅] 청구 배달[靑丘 산동성.태산(泰山), 14-18대 환웅] 시대로 나누어진다. 배달국(倍達)의 환웅(桓雄)이 북만주와 대진국(발해) 연안의 땅에 뛰어난 석공예와 질공예를 남겼는데, 이것을 배달(倍達, BC 3,897-2,333) 환웅(桓雄) '홍산(紅山) 문화'라고 한다.

 

 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 홍산(紅山) 문화는 1920년대 프랑스 에밀 리쌍(Emile Licent)이 요서 지방 츠펑 (적봉赤峰) 지역에서 처음 발굴 시작하여 1922년부터 1924년 사이에 신석기 유적지 22곳을 발견하였고, 요서 지방 홍산(紅山) 문화의 소하서 지역 유적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신석기 문화는 최고 8,50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들 유적은 '인류 최고(最古) 신석기 문화'로 규정되고 있다. 1930년대 중국 철학자 양계초의 아들 양사영이 홍산(紅山) 유적지를 조사한 이래, 많은 학자들이 연구에 뛰어 들었다. 그 후, 중국 정부에서 대대적으로 발굴하였는데, 1980년대에 홍산(紅山) 문화의 대표적인 유적지인 우하량 유적이 발굴되어 전세계가 깜짝 놀랐다. 이 곳에서 나오는 유물들은 중국의 황하 문명(BC 3,000-2,500) 보다 2-3천년 앞 서 있었고, 유적과 유물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지역의 문명은 이미 국가 단계의 구비 조건을 모두 갖춘 5의 문명이었기 때문이다.

 

 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 홍산(紅山) 문화의 유적과 유물들은 세계 문명의 발상지라고 꼽히는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인더스. 황하 문명 보다 훨씬 앞 선 문명 형태였기 때문이다. 예를들면, 홍산 문화의 소하서 지역 유적들은 무려 8,5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결론적으로 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 홍산(紅山) 유적지 발굴은 세계 문명사를 다시 쓰게 하는 엄청난 사건이다. 최근에도 중국은 동북(東北공정의 일환으로 이 곳을 계속 발굴하고 있다. 지중해 문명 (이집트 문명, 에게 문명, 그리스 로마 문명)이 서양 문명에 자양분을 공급했듯이, 동이족(東夷族)이 발해 연안에서 창조한 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 홍산(紅山) 문화는 중국은 물론 만주. 한반도. 일본의 고대 문명을 일궈주었다.

 

 현재, 중국은 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 홍산(紅山) 문화 요하(遼河문명이라고 하여 자기네 역사 유적이라고 우기고 있지만, 그 유적지의 위치와 문명 양식 등을 보면동이족(東夷族배달(倍達)의 문화 양식임에는 어쩔 수가 없다. 중국이 만주의 홍산(紅山) 유적지 문화를 자기네 것이라고 우기는 것은 마치 송곳을 주머니 속에 넣고 감추는 것과 같다. 결국 밖으로 드러나게 마련이다. 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 신시 배달(神市 백두산, 1-13대 환웅) 청구 배달(靑丘 산동성.태산(泰山), 14-18대 환웅)로 나누어진다. 배달국(倍達國)의 환웅(桓雄)이 북만주와 대진국(발해) 연안의 땅에 뛰어난 석공예와 질공예를 남겼는데, 이것을 배달(倍達) 환웅(桓雄) '홍산(紅山문화'라고 하는 것이다.

 

 환국(桓國, BC 7,199-3,897)의 신교(神敎) 문화는 고대 문화의 원형이고그 후, 배달국(倍達國)으로 이어졌으며, 환국과 배달국의 문화는 세계 4대 문명의 뿌리가 되었다환국(桓國) 12개 나라 가운데수밀이국 우루국은 그동안 서양에서 최초의 문명족으로 알려져 있던 나라 이름이고, BC 3,500년 전의 고대 메소포타미아(수메르) 문명을 일으킨 나라이다. 최근, 120여 년 동안의 고고학 발굴 결과, 중동의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BC 3,500년 경에 오늘의 서양 문명의 뿌리인 수메르(Sumer) 문명이 있었고, 이 문명을 건설한 수메르 민족은 동방에서 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수메르 문명은 다시 이집트 문명에게 영향을 주었고, 또한 고대 희랍 문화에 영향을 미쳤으며로마 제국을 거쳐 오늘날 서양 문명이 나온 것이다인더스 문명 또한 북방 문명에서 기원했다고 하며배달국(倍達國)의 문화가 유입되어 인더스강 유역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근래에 만주에서 동북 공정의 일환으로 요하(遼河) 문명 유적을 발굴하고 있는데요하(遼河문명은 배달(倍達) 문명의 일부이다. '황하 문명' 보다 앞선 유적들이 무수히 쏟아져 나왔다. 중국 당국이 발칵 뒤집혔다. 중국의 황하 문명(BC 3,000-2,500)은 황하강 유역에서 발생했는데, 이것은 북만주와 산동 반도 유역의 배달국(倍達國, BC 3,898-2,333) 문명의 영향을 받아 생겨난 것이다. 배달(倍達 BC 3,898-2,333)의 홍산 문화는 메소포타미아 문명(BC 3,500-2,600). 황하 문명(BC 3,000-2,500). 인더스 문명(BC 2,500년경). 이집트 문명(BC 3,100년경) 보다 앞선 것이며세계 4대 문명에게 영향을 준 것이라는 증거와 유적들이 최근 속속 발굴되고 있다. 한민족의 배달(倍達문명이 중국 민족의 황하 문명 보다 빨랐고, 중국의 황하 문명은 한민족 배달(倍達) 문명을 받아서 생긴 것이라는 역사적 사실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우리나라 배달(倍達) 민족이 천제(天祭)  제사(祭祀) 풍습을 중국 한족(漢族)에게 전해줬다배달국(倍達國) 말엽 및 고조선(古朝鮮) 초기에 중국에서 나라를 창업한 사람들 중에서() 임금(나라의 시조). () 임금(나라의 시조). 문왕(나라의 시조). 무왕(왕조 개창). 강태공(병법의 시조, 나라)도 역시 우리 동이족(東夷族)이었다또한, 중국의 건국(建國) 시조(始祖) 삼황오제(三皇五帝)는 전부 우리 동이족(東夷族)이었다삼황(三皇) 태호 복희(太昊伏羲). 염제 신농(炎帝神農). 황제 헌원(黃帝軒轅)을 말하고오제(五帝) 소호 금천전욱 고양제곡 고신. () 임금() 임금을 말한다그들 모두 배달(倍達)민족이었다. 중국의 건국 시조의 8명 중에 우리 민족이 8명으로 전부를 차지한다.

 

 중국은 예로부터 우리나라를 청구(靑丘)라고 했는데, 배달국(倍達國, BC 3,898-2,333) 청구 배달(靑丘, 14-18대 환웅)을 일컫는 말이며, 청구 배달의 문화가 '홍산(紅山) 문화'이다. 그 다음 나라에 이르러고조선(古朝鮮, BC 2,333-238) '단군(檀君) 신화중에는 호랑이와 곰이 나오는데, 실제는 호족(.호랑이) 웅족(.)을 배달(倍達) 동이족(東夷族)이 교화해서 건국한 것을 신화 형태로 기록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