뺏긴 역사찾자

■ 대한민국(大韓民國) 국호 제안자는 누구일까?

마도러스 2013. 2. 13. 11:02

 

■ 대한민국(大韓民國) 국호 제안자는 누구일까?  

 

 역사학자들 대개 몰라! 임시정부 당시, 신석우 선생이 제안!

                

우리나라 국민 중에 ‘대한민국(大韓民國)’이라는 국호가 언제 누구에 의해 만들어졌는지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3·1운동 81주년을 맞아 새삼 우리 국호의 창안자가 누구인가가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10여명의 근현대사 전공자들에게 질문했으나 뜻밖에 ‘모른다’는 대답이 거의 대부분이었다. 서울대 사회학과 신용하 교수가 정확히 알고 있었다.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탄생한 상해 임시정부의 국호였으며, 1948년 8월15일 건국과 함께 계승한 우리의 국호이다. 1919년 4월 10일 오후10시 중국 상해 프랑스 조계(租界)의 김신부로(金神父路)에 있는 허름한 셋집에 밤을 새워 열린 임시정부 첫 의정원(오늘날의 국회)의 가장 중요한 안건은 '나라 이름, 국호의 결정'이었다.

 

참석 의원은 29명, 처음 ‘대한민국’이란 명칭을 제안한 사람이 신석우(申錫雨·1894-1953)이었다. 그러나 논란이 만만치 않았다. 여운형(呂運亨) 의원이 반대했다. “대한(大韓)이란 말은 조선 왕조 말엽 고종 임금께서 대한제국(大韓帝國) 잠깐 쓰다가 망한 이름이니, 부활시킬 필요가 없다.”라는 것이 이유였다. 그러자, 신석우 의원이 되받았다. 대한(大韓)으로 망했으니, 대한(大韓)으로 흥해보자.” 결국 표결에 부치기로 했고, 다수결로 ‘대한민국(大韓民國)’ 국호가 채택됐다.

 

어떻게 많은 역사 전공자들조차 대한민국 국호의 발안자를 모르고 있는 것일까? 한 소장역사학자는 “우리 역사학계가 거시적 흐름을 중시하다 보니 개개의 사안과 관련된 인물들에 대한 연구가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자연히 ‘신석우’란 인물에 대한 연구나 일반의 인식도 낮을 수밖에 없었다. 신석우는 1920-30년대 민족운동 과정에서 겉으로 화려하게 드러나진 않았지만 중요한 고비마다 결정적 역할을 했던 거목이었다.

 

임시 의정원 기사록에 따르면, 신석우는 국호 제정 말고도 임정 관제에 군무부(軍務部) 증설, 임정 초대 총리에 이승만추천, 임시헌장에 병역(兵役) 포함 등을 관철시키는 등 초기의 임시정부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한국의 언론사에서 굵직한 흔적을 남긴 것은 1924년 30세의 나이에 만석꾼 부친을 설득해 8만5000원을 주고 신석우가 조선일보를 인수한 것이었다.

 

만성적인 경영난을 겪고 있던 조선일보는 신석우의 인수로 재도약 계기를 마련했으며, 사장으로 민족의 스승 월남 이상재 선생을 추대하는 등 대대적인 개편을 단행했다.

 

신석우의 활약은 일제하 최대의 민족운동인 신간회 활동에서 절정에 이른다. 1927년 2월15일 오후7시 서울 종로 기독교청년회 대강당에서 열린 신간회 창립총회에서 신석우는 사회를 맡았고 벽초 홍명희가 개회를 선언했으며 이어 이상재가 회장으로 추대됐다. 처음에 이상재 선생이 거절하자, 신석우는 “신간회 회장이 되시는 것이 그렇게도 겁이 나십니까”라며 간곡히 설득해 추대를 성사시켰다. 신간회 창립 때 간부 및 발기인은 모두 51명이었다. 그 중 조선일보계가 사장 부사장 편집국장 등 9명으로 가장 많았다.

 

1931년 5월 신간회가 해산되자, 신변에 위험을 느낀 신석우는 안재홍 선생에게 사장직을 물려주고, 상해로 탈출했다. 신용하 교수는 “아마도 전 재산을 쏟아 부으면서 펼쳤던 독립 운동이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하는데 대한 실망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라고 분석하면서 “그러나, 대한민국(大韓民國)이라는 국호 제정이야말로 신석우라는 이름을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이유이다.” 라고 밝혔다. (참고: 대세계의 역사. 삼성출판사.1971)

     

     

■ 우리 배달(倍達) 민족의 역사는 9,200년이다.

    

 우리 배달 민족의 환국(桓國, BC 7,199-3,897), 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 고조선(古朝鮮, BC 2,333-238) 문화는 중국의 (. 재위BC 2,357-2,258), (. 재위BC 2,255-2,208), (, BC 2,205-1,766), (, BC 1,600-1,046), (, BC 1,046-771) 문화의 뿌리이다. 우리 배달(倍達민족 문화가 중국 문화의 뿌리이다우리 민족의 역사가 환국(桓國, BC 7,199-3,897), 배달국(倍達, BC 3,897-2,333), 고조선(古朝鮮, BC 2,333-238). 부여.옥저.동예.낙랑국. 마한.변한.진한고구려.백제.신라로 이어져서 무려 9,200이나 된다환국(桓國, BC 7,199-3,897)의 장자국(長子國) 배달국(倍達國)이었고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의 장자국(長子國) 고조선(古朝鮮, BC 2,333-238)이었음을 비추어 볼 때, 우리 배달(倍達)민족과 한국이 세계 4대 문명의 정통성을 이어 받은 민족이며 나라임을 알 수 있다.

 

 '신시(神市) 개천경(開天經)' 기록에 의하면환국(桓國)의 말엽에 환웅(桓雄)이 있었다그는 홍익인간(弘益人間), 재세이화(在世理化), 광명이세(光明理世)의 뜻을 간직하고 있었다환웅(桓雄)은 동방 땅 백두산(白頭山)에 문명 개척단 3,000명과 함께 배달국(倍達, BC 3,897-2,333)을 건설하였다배달국(倍達, BC 3,897-2,333) 신시 배달[神市 백두산, 1-13대 환웅] 청구 배달[靑丘 산동성.태산(泰山), 14-18대 환웅] 시대로 나누어진다. 배달국(倍達)의 환웅(桓雄)이 북만주와 대진국(발해) 연안의 땅에 뛰어난 석공예와 질공예를 남겼는데, 이것을 배달(倍達, BC 3,897-2,333) 환웅(桓雄) '홍산(紅山) 문화'라고 한다.

 

 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 홍산(紅山) 문화는 1920년대 프랑스 에밀 리쌍(Emile Licent)이 요서 지방 츠펑 (적봉赤峰) 지역에서 처음 발굴 시작하여 1922년부터 1924년 사이에 신석기 유적지 22곳을 발견하였고, 요서 지방 홍산(紅山) 문화의 소하서 지역 유적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신석기 문화는 최고 8,50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들 유적은 '인류 최고(最古) 신석기 문화'로 규정되고 있다. 1930년대 중국 철학자 양계초의 아들 양사영이 홍산(紅山) 유적지를 조사한 이래, 많은 학자들이 연구에 뛰어 들었다. 그 후, 중국 정부에서 대대적으로 발굴하였는데, 1980년대에 홍산(紅山) 문화의 대표적인 유적지인 우하량 유적이 발굴되어 전세계가 깜짝 놀랐다. 이 곳에서 나오는 유물들은 중국의 황하 문명(BC 3,000-2,500) 보다 2-3천년 앞 서 있었고, 유적과 유물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지역의 문명은 이미 국가 단계의 구비 조건을 모두 갖춘 5의 문명이었기 때문이다.

 

 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 홍산(紅山) 문화의 유적과 유물들은 세계 문명의 발상지라고 꼽히는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인더스. 황하 문명 보다 훨씬 앞 선 문명 형태였기 때문이다. 예를들면, 홍산 문화의 소하서 지역 유적들은 무려 8,5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결론적으로 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 홍산(紅山) 유적지 발굴은 세계 문명사를 다시 쓰게 하는 엄청난 사건이다. 최근에도 중국은 동북(東北공정의 일환으로 이 곳을 계속 발굴하고 있다. 지중해 문명 (이집트 문명, 에게 문명, 그리스 로마 문명)이 서양 문명에 자양분을 공급했듯이, 동이족(東夷族)이 발해 연안에서 창조한 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 홍산(紅山) 문화는 중국은 물론 만주. 한반도. 일본의 고대 문명을 일궈주었다.

 

 현재, 중국은 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 홍산(紅山) 문화 요하(遼河문명이라고 하여 자기네 역사 유적이라고 우기고 있지만, 그 유적지의 위치와 문명 양식 등을 보면동이족(東夷族배달(倍達)의 문화 양식임에는 어쩔 수가 없다. 중국이 만주의 홍산(紅山) 유적지 문화를 자기네 것이라고 우기는 것은 마치 송곳을 주머니 속에 넣고 감추는 것과 같다. 결국 밖으로 드러나게 마련이다. 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 신시 배달(神市 백두산, 1-13대 환웅) 청구 배달(靑丘 산동성.태산(泰山), 14-18대 환웅)로 나누어진다. 배달국(倍達國)의 환웅(桓雄)이 북만주와 대진국(발해) 연안의 땅에 뛰어난 석공예와 질공예를 남겼는데, 이것을 배달(倍達) 환웅(桓雄) '홍산(紅山문화'라고 하는 것이다.

 

 환국(桓國, BC 7,199-3,897)의 신교(神敎) 문화는 고대 문화의 원형이고그 후, 배달국(倍達國)으로 이어졌으며, 환국과 배달국의 문화는 세계 4대 문명의 뿌리가 되었다환국(桓國) 12개 나라 가운데수밀이국 우루국은 그동안 서양에서 최초의 문명족으로 알려져 있던 나라 이름이고, BC 3,500년 전의 고대 메소포타미아(수메르) 문명을 일으킨 나라이다. 최근, 120여 년 동안의 고고학 발굴 결과, 중동의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BC 3,500년 경에 오늘의 서양 문명의 뿌리인 수메르(Sumer) 문명이 있었고, 이 문명을 건설한 수메르 민족은 동방에서 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수메르 문명은 다시 이집트 문명에게 영향을 주었고, 또한 고대 희랍 문화에 영향을 미쳤으며로마 제국을 거쳐 오늘날 서양 문명이 나온 것이다인더스 문명 또한 북방 문명에서 기원했다고 하며배달국(倍達國)의 문화가 유입되어 인더스강 유역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근래에 만주에서 동북 공정의 일환으로 요하(遼河) 문명 유적을 발굴하고 있는데요하(遼河문명은 배달(倍達) 문명의 일부이다. '황하 문명' 보다 앞선 유적들이 무수히 쏟아져 나왔다. 중국 당국이 발칵 뒤집혔다. 중국의 황하 문명(BC 3,000-2,500)은 황하강 유역에서 발생했는데, 이것은 북만주와 산동 반도 유역의 배달국(倍達國, BC 3,898-2,333) 문명의 영향을 받아 생겨난 것이다. 배달(倍達 BC 3,898-2,333)의 홍산 문화는 메소포타미아 문명(BC 3,500-2,600). 황하 문명(BC 3,000-2,500). 인더스 문명(BC 2,500년경). 이집트 문명(BC 3,100년경) 보다 앞선 것이며세계 4대 문명에게 영향을 준 것이라는 증거와 유적들이 최근 속속 발굴되고 있다. 한민족의 배달(倍達문명이 중국 민족의 황하 문명 보다 빨랐고, 중국의 황하 문명은 한민족 배달(倍達) 문명을 받아서 생긴 것이라는 역사적 사실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우리나라 배달(倍達) 민족이 천제(天祭)  제사(祭祀) 풍습을 중국 한족(漢族)에게 전해줬다배달국(倍達國) 말엽 및 고조선(古朝鮮) 초기에 중국에서 나라를 창업한 사람들 중에서() 임금(나라의 시조). () 임금(나라의 시조). 문왕(나라의 시조). 무왕(왕조 개창). 강태공(병법의 시조, 나라)도 역시 우리 동이족(東夷族)이었다또한, 중국의 건국(建國) 시조(始祖) 삼황오제(三皇五帝)는 전부 우리 동이족(東夷族)이었다삼황(三皇) 태호 복희(太昊伏羲). 염제 신농(炎帝神農). 황제 헌원(黃帝軒轅)을 말하고오제(五帝) 소호 금천전욱 고양제곡 고신. () 임금() 임금을 말한다그들 모두 배달(倍達)민족이었다. 중국의 건국 시조의 8명 중에 우리 민족이 8명으로 전부를 차지한다.

 

 중국은 예로부터 우리나라를 청구(靑丘)라고 했는데, 배달국(倍達國, BC 3,898-2,333) 청구 배달(靑丘, 14-18대 환웅)을 일컫는 말이며, 청구 배달의 문화가 '홍산(紅山) 문화'이다. 그 다음 나라에 이르러고조선(古朝鮮, BC 2,333-238) '단군(檀君) 신화중에는 호랑이와 곰이 나오는데, 실제는 호족(.호랑이) 웅족(.)을 배달(倍達) 동이족(東夷族)이 교화해서 건국한 것을 신화 형태로 기록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