뺏긴 역사찾자

킹 메이커(king maker), 소서노(召西奴)

마도러스 2013. 1. 4. 14:51

 

킹 메이커(king maker), 소서노(召西奴)

 

동명성왕이 세운 골본(忽本) 부여(夫餘)에 인물이 출중한 “소서노(召西奴)라는 여왕이 살고 있었다. 소서노(召西奴)는 부여 동명성왕의 아들 “고무서 왕”의 딸이었고, 우태(해부루의 서손庶孫)와 결혼하여 비류(沸流) 온조(溫祚)라는 두 아들을 두었는데 남편이 일찍 세상을 하직하여 여왕이면서 과부로 살고 있었다. 바로 그 무렵, 그녀 앞에 고주몽이라는 젊은 청년이 불쑥 나타났다.

 

고주몽은 겨우 신하 세명 끌고, 동부여(東夫餘)에서 이웃 나라로 도망쳐 온 주제에 자기는 북부여의 천제이신 해모수의 3세손 “고모수”와 만주의 군장 하백의 딸 “유화” 사이에서 태어나신 귀하신 몸이라고 떠벌리며 백발백중 만주 벌판 최고의 궁사로 이름을 날려, 그녀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B.C 58년 골본부여 고무서 임금은 아들이 없었는데, 고주몽을 보고 범상치 않음을 느끼고는 과부가 된 자신의 딸과의 결혼을 허락하였다. 소서노(召西奴)는 우태(해부루의 서손庶孫)와 사별한 후, 주몽을 두 번째 남편으로 맞이 한 것이다. 소서노(召西奴)와 주몽은 세력을 키우고 도읍을 옮겨 나라 이름을 고구려(高句麗)로 바꾼 뒤, 일대의 부족들을 정복하며 점점 세력을 확장하였다. 이 과정에서 소서노(召西奴)는 토착 세력의 분열을 잠재우고 주몽에게 힘을 집결시키는 킹 메이커(king maker) 역할을 톡톡히 하였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전 남편(우태)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큰 아들 비류(沸流)가 후계자가 될 것이라 굳게 믿었다.

 

그러나, 주몽이 동부여에서 도망쳐 나올 무렵, 동부여의 예씨 부인과의 사이에 태어난 “유리(琉璃)”라는 아이가 성장하여 왕이 된 아버지 주몽을 찾아왔다. 그리고, 주몽은 바로 그 유리(琉璃)에게 태자의 자리를 넘겨주게 된다. 고주몽은 고구려라는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 자신의 입국(立國)과 성장을 도운 소서노(召西奴)를 왕비로 하였지만, 소서노(召西奴)의 큰 아들 비류(沸流)를 태자로 삼지 않고 전에 골본(忽本)에 있을 때 북부여(北夫餘) 6세 고무서(高無胥) 단제(檀帝)의 딸 예씨(禮氏) 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유리(琉璃)를 태자로 삼은 것이다.


소서노(召西奴)와 그녀의 아들 비류(沸流)는 동부여에서 찾아온 고주몽의 아들 유리(琉璃)를 고구려의 후계자로 지목하자, 소외감을 느꼈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기로 결심하였다. 비류(沸流)는 자신이 비록 적자는 아니지만 맏이(伯)이고 또 고주몽의 입국(立國)을 도왔는데도 자신을 태자로 삼지 않고 유리(琉璃)를 태자로 삼은데 불만을 품었다. 마침 그 무렵, 고주몽이 죽게되는데, 고주몽이 죽은 바로 그해 B.C 19년에 요녕성 패(浿).대(帶) 지역에서 스스로 임금(帝)의 위(位)에 올랐다. 이때 비류(沸流)는 고구려의 정통성이 맏이(伯)인 자기에게 있다는 뜻으로 자신을 백제(伯帝)라 칭하였다. 그러나 아무도 비류(沸流)를 따르지 않아 비류(沸流)는 유리(琉璃)와의 정통성 싸움에서 패하였다. 그 결과 고주몽 고구려 지역 대부분은 유리(琉璃)가 장악하였고, 비류(沸流)는 근거지인 패.대 지역만 장악하였다.


온조(溫祚)는 형인 비류(沸流)가 B.C 19년에 패.대 지역에서 스스로 임금(帝)의 위(位)에 올랐을 때, 아무도 비류를 따르지 않는 것을 보고 후환을 걱정하여 B.C 18년에 따르는 무리들을 이끌고 배를 타고 한반도로 와서 한강(漢江) 이북에 나라를 세우고 나라 이름을 온조국(溫祚國)으로, 수도 명칭을 위례성(尉禮城)이라 칭하였다. 고대 시데에 ‘온(百)’은 단순히 100이라는 뜻이 아니고 아주 많다는 뜻이고, 조(祚)는 천자(天子)의 자리를 뜻하므로, 온조(溫祚)는 온(百) 세상을 다스리는 임금(帝)이라는 뜻이다. 즉 온조(溫祚)는 백제(百帝)와도 같은 뜻이다. 그리고 위(尉)는 하늘에 있는 해 즉 천제(天帝)를 뜻하고, 례(禮)는 부여 무리를 뜻하므로, 위례성은 천제의 아들 무리가 살고 있는 성(城)이라는 뜻이다. 이를 보면 온조는 해님의 아들을 상징하는 글자로 "위(尉)"자를 사용하였다.


또한, 온조(溫祚)가 백제(百帝)라 칭하지 않고 온조(溫祚)라 칭한 것은 형 비류(沸流)가 칭한 백제(伯帝)와 같은 발음을 피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온조국(溫祚國)은 B.C 6년에 낙랑(樂浪)이 보낸 5무리의 기마부대(五虎)에 의해 위례성이 점령당하였다. 위례성이 점령당하자 온조(溫祚)는 온조국(溫祚國)의 유민들을 데리고, 한강 남쪽으로 이동하였다. 다급한 처지에 빠진 온조(溫祚)는 한강 이남 지방을 다스리고 있던 홍성(洪城) 금마(金馬) 마한(馬韓)으로부터 마한(馬韓)의 동북 땅 1백 리를 할양 받아 금마산(金馬山:홍성 금마)에서 마한(馬韓)의 후국(侯國)인 십제국(十濟國)을 세웠다. 이 십제(十濟)는 10명이 한강을 건너와서 세운 나라라는 뜻이 아니고 아주 적은 숫자의 사람이 한강을 건너와서 세운 나라라는 뜻이다. 그 뒤 온조(溫祚)는 힘을 길러 홍성 금마 마한의 세력권에서 벗어난 후부터 다시 위례(尉禮)라는 칭호를 사용하였고, 비류 백제가 멸망하자, 다시 나라 이름을 십제(十濟)에서 백제(百帝)로 바꾸었다.

 

 백제(百帝) 동부여의 우태(해부루의 서손庶孫)와 소서노(召西奴)의 첫째 아들 비류(沸流)가 요녕성 패(浿).대(帶) 지역에 세운 나라이고, 소서노(召西奴)의 둘째 아들 온조(溫祚)가 남쪽 한강지역으로 내려와서 계승한 나라이다.

 

 

★ 우리 배달(倍達) 민족의 과거 역사와 미래 문명의 비젼

 

우리 배달 민족의 환국(桓國,BC 7,199-3,897), 배달국(倍達國,BC 3,897-2,333). 고조선(古朝鮮,BC 2,333-238) 문화는 중국의 (堯.재위BC 2357-2258), (舜.재위BC 2255-2208), (夏,BC 2,205-1,766), (殷,BC 1,600-1,046), (周,BC 1,046-771) 문화의 뿌리이다. 우리 배달 민족 문화가 중국 문화의 뿌리이다. 우리 민족의 역사가 환국(桓國,BC 7,199-3,897), 배달국(倍達國,BC 3,897-2,333), 고조선(古朝鮮,BC 2,333-238). 부여.옥저.동예.낙랑국.마한.변한.진한.고구려.백제.신라로 이어져서 무려 9,200년이나 된다. 


'신시(神市)개천경(開天經)'기록에 의하면, 환국(桓國)의 말엽에 환웅(桓雄)이 있었다. 그는 홍익인간(弘益人間), 재세이화(在世理化), 광명이세(光明理世)의 뜻을 간직하고 있었다. 환웅(桓雄)은 동방 땅 백두산(白頭山)에 문명 개척단 3,000명과 함께 배달국(倍達國,BC 3,897-2,333)을 건설하였다. 배달국(倍達國,BC 3,897-2,333년)은 신시배달(神市백두산,1-13대 환웅)과 청구배달(靑丘산동성.태산(泰山),14대-18대 환웅)로 나누어진다. 배달국(倍達國)의 환웅(桓雄)이 북만주와 대진국(발해) 연안의 땅에 뛰어난 석공예와 질공예를 남겼는데, 이것을 배달(倍達) 환웅(桓雄)의 '홍산(紅山)문화'라고 한다.

  

우리 배달(倍達)민족이 천제(天祭) 및 제사(祭祀) 풍습을 중국 한(漢) 민족에게 전해줬다. 배달국(倍達國) 말엽 및 고조선(古朝鮮) 초기에 중국에서 나라를 창업한 사람들 중에서, 임금(하夏나라의 시조). 임금(은殷나라의 시조). 문왕(주周나라의 시조). 무왕(주周왕조 개창). 강태공(병법의 시조, 제齊나라)도 역시 우리 동이족(東夷族)이었다. 또한, 중국의 건국(建國) 시조(始祖)인 삼황오제(三皇五帝)는 전부 우리 동이족(東夷族)이었다. 삼황(三皇)태호복희(太昊伏羲). 염제신농(炎帝神農). 황제헌원(黃帝軒轅)을 말하고, 오제(五帝)소호금천. 전욱고양. 제곡고신. (堯)임금. (舜)임금을 말한다. 그들 모두 배달(倍達)민족이었다. 중국의 건국 시조의 8명 중에 우리 민족이 8명으로 전부를 차지한다.


중국은 예로부터 우리나라를 청구(靑丘)라고 했는데, 청구 배달(靑丘,14대-18대 환웅)을 일컫는 말이며, 청구 배달의 문화가 '홍산 문화 (紅山文化)'이다. 그 다음 나라에 이르러, 고조선의 '단군(檀君) 신화' 중에는 호랑이와 곰이 나오는데, 실제는 호족(虎.호랑이)과 웅족(熊.곰)을 배달(倍達) 동이족(東夷族)이 교화해서 건국한 것을 신화 형태로 기록한 것이다. 고대 사회의 사람들은 '신화의 형태'로 이야기해야 알아듣는 그런 시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