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사 (조선)

"호남 땅마저 없어지면 조선은 망한다".

마도러스 2006. 11. 26. 03:21

"호남 땅마저 없어지면 조선은 망한다".           


충무공, 임진왜란 때 지인에게 '약무호남 시무국가' 편지   

왜군과 결사항전 의지 다져, 진지 옮기고 호남방어에 총력   


김대중 전 대통령이 2006.10.29일 전남 도청을 방문했을 때, 방명록에 ‘무호남(無湖南) 무국가(無國家)’라고 적었다. 그는 잠시 후 “방명록을 다시 가져오라”고 한 뒤 ‘이 충무공 왈(曰)’이란 말을 추가했다. 김 전 대통령이 ‘이 충무공 왈(曰)’이라고 덧붙인 데서 알 수 있듯이, 임진왜란의 영웅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했다는 ‘무호남 무국가’는 정확한 이해를 필요로 한다. 자칫하면 충무공의 본의가 잘못 전달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충무공 이순신이 썼던 정확한 표현은 ‘무호남 무국가’가 아니라 ‘약무호남(若無湖南) 시무국가(是無國家)’이다. 직역할 경우 ‘만약 호남이 없었으면 곧바로 나라는 없어졌을 것’이라는 뜻이다.


이는 ‘발해고(渤海考)’의 저자로도 유명한 유득공(柳得恭)이 1795년(정조 19년) 왕명에 따라 편찬한 이순신 장군의 문집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의 끝부분 서간문 모음집에 실려 있는 사헌부 지평 현덕승에게 보낸 편지에 포함돼 있는 글이다. 보낸 날짜는 임진왜란 발발 1년2개월여가 지난 1593년(선조 26년) 7월 16일이다.


현덕승이라는 인물이 누구이기에 한창 전란의 와중에 편지를 주고받았을까? 현덕승(玄德升ㆍ명종 19년~ 인조 5년, 1564~1627)은 이순신보다 19살 아래로 천안 출신이며 임진왜란이 나기 2년 전인 1590년 문과에 급제했다. 따라서 불과 3년 후에 이순신과 편지를 주고받았다면 공적인 관계라기보다는 개인적으로 알고 지내던 인물로 봐야 한다. 당시 이순신 장군의 편지도 아산에 있던 현덕승에게 보낸 것으로 되어 있다.


‘사헌부 지평’이라는 정5품 관직은 현덕승이 훗날 가장 높이 올라가서 그렇다는 것이고 당시에는 피란가는 광해군을 수행한 동궁기사관(東宮記事官)이라는 낮은 직위에 머물다가 아산에 돌아와 있었다. 이순신 장군의 고향이 바로 아산이었다. ‘이충무공전서’의 번역자인 노산 이은상은 편지 내용 중에 ‘척하(戚下)’라는 표현이 담겨 있는 것을 들어 외가 쪽 친척으로 추정했다.


다음으로 주목해야 할 점은 이순신 장군이 현덕승에게 편지를 보낸 ‘1593년 7월 16일’이라는 시점이다. 임진왜란은 1592년 4월 13일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등이 이끄는 90여척의 선단이 부산포에 들어오면서 시작됐다. 다음날까지 150여척, 400여척이 지금의 대한해협을 건넜다. 당시 이순신은 전라좌수사로 부임해온 지 1년을 맞은 때였다. 좌수영의 본거지는 여수항이었다. 당시 조선의 남해안은 전라우수사 이억기, 전라좌수사 이순신, 경상우수사 원균, 경상좌수사 박홍이 나눠 맡고 있었다.


왜군은 부산포에 들어선 다음날 동래부를 함락시키고 파죽지세(破竹之勢)로 북상을 거듭해 보름 후인 4월 28일 어쩌면 조선 ‘최정예’ 육군이라 할 수 있는 삼도도순변사(三道都巡邊使) 신립이 이끄는 조선군을 단숨에 격파했다.


이 소식을 접한 조선의 국왕 선조 일행은 4월 30일 새벽 도둑처럼 한양을 탈출해 북쪽으로 ‘파천(播遷)’길에 올랐고 곧바로 한양은 왜군에 함락당했다. 이런 가운데 개전 초기인 5월 초 이순신이 이끄는 전라좌수영 부대는 원균의 관할구역인 거제도까지 진출해 옥포에서 첫 번째 승리를 거둔다. 5월 7일 옥포(거제도)에서 적선 26척을 격파하고 연이어 합포(창원)에서 적선5척, 5월 8일 적진포(충무)에서 적선 13척을 격파했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이후 조선군의 첫 번째 승리였다.


그러나 육지는 상황이 달랐다. 조선군의 연전연패였다. 한양 점령 후 잠시 숨고르기를 하던 왜군은 5월 중순이 되면서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당초 서해안을 통해 식량보급을 하기로 했던 계획이 이순신에게 막히면서 착오가 생긴 때문이었다. 게다가 곳곳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늘어난 보급로는 곳곳에서 의병에 의해 차단되었다. 일본군 지휘부로서는 미처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했던 것이다.


조선 ‘정벌’에 나선 일본군의 총대장은 우키타 히데이에(浮田秀家)였다. 한양 점령 열흘이 지난 5월 11일 우키타 총대장은 당초의 작전계획을 수정했다. 보급계획이 원활하지 않은 데다 북쪽으로 갈수록 산악지형이 많아 원래의 계획을 밀어붙이는 데 한계를 느낀 때문이기도 했다. 북진과 관련해서 평안도 쪽은 고니시 유키나가, 함경도 쪽으로는 가토 기요마사, 황해도 쪽은 구로다 요시타카가 지휘책임을 맡고, 보급로 확보를 위한 삼남지방 소탕작전은 별도의 부대에 책임을 맡겼다.


5월 27일 고니시군과 가토군의 협공으로 개경이 함락되었다. 여기서 두 부대는 갈라섰고 가토가 이끄는 함경도 점령군은 6월 18일 함흥 부근 안변에 이르렀다. 개경에서 가토군과 헤어진 고니시의 평안도 점령군은 6월 9일 대동강에 이른다. 치열한 공방전 끝에 결국 6월 16일 평양도 함락되었다. 그러나 일본군의 진격은 여기까지가 한계였다.


이순신은 5월 29일 2차 출격에서 나서 사천포·당포·당항포·율포 등 4곳에서 대승을 거두고 6월 9일 여수항으로 귀항했다. 이때 사천포 해전에서 거북선을 최초로 투입해 실전에서의 효용을 확인하기도 했다. 한 달 후인 7월 6일 여수를 떠난 이순신 부대는 한산도에서 70여척의 왜선을 격파하고 수천여 명의 왜(倭)수군을 살상하는 대승을 거둔다. 한산대첩이었다.


당시 거의 유일하게 왜군의 발길이 닿지 않은 전라도 지역은 국토수복의 근거지였다. 남쪽지방 소탕작전에 나선 고바야카와 다카가게(小早川隆景)군은 금산은 물론 전주까지 위협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라도 육군을 이끌던 광주목사 권율과 의병장 고경명 등이 이끌던 민관군은 1만여명에 이르는 왜군을 격퇴시켰다. 1592년 7월의 일이었다. 더불어 10월 진주목사 김시민이 영호남의 의병까지 동원해 왜군의 서진을 막아냄으로써 마침내 조선의 식량기지였던 전라도를 지킬 수 있었다.


안골포해전, 부산포해전 등을 통해 이순신이 남해안을 확실히 장악하고 있는 동안 육지에서도 명군과 조선군의 반격이 이어졌다. 해가 바뀐 1593년 1월 명나라 이여송 부대는 평양을 탈환했고 2월에는 권율이 이끄는 조선군이 행주산성에서 일본군을 대파해 한양수복을 향한 대대적인 압박에 들어갔다.


수원의 독산산성에서 전라육군을 이끌고 승리를 거둔 전라감사 권율은 북쪽에서 남하해 오는 조명(朝明) 연합군과 함께 한양 수복에 참여하기 위해 한양의 턱밑이라고 할 수 있는 행주산성을 확보했다. 이순신역사연구회가 펴낸 ‘이순신과 임진왜란’을 보면 행주산성 공격을 앞둔 일본군의 회의록이 나온다. 여기서 총감독(오늘날의 참모장)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는 전라육군에 대한 증오에 가까운 분노를 표출하고 있다. 행주산성에 대한 공격을 꺼리는 일본군 장성들을 자극할 의도였다.


“저들이 누구요? 바로 이순신과는 한통속이나 다름없는 전라도 군대란 말이오! 해전에서 잘못된 것은 그렇다고 칩시다. 권율은 일찍이 금산 이치에서 고바야카와의 정예군에 해를 가한 자요. 그 때 우리 군이 전라도로 진격해 들어갔다면 이순신의 무리는 벌써 섬멸되었을 것이오!”


행주산성의 교전은 결국 권율이 이끄는 조선군의 대승으로 끝났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어쩔 수 없이 남해안으로 퇴각명령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 바람에 경상도 일대 남해안에만 왜병 16만 병력이 집결하는 새로운 국면이 전개됐다. 전라도 확보 없이 조선정벌이 불가능해졌음을 알게 된 일본군 수뇌부는 육상과 해상을 통한 집중적인 전라도 공격에 나섰다. 하나는 진주 하동을 거쳐 전라도로 들어가는 것이고 또 하나는 견내량을 통해 여수 전라도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6월 중순 김해를 출발한 10만의 최정예 일본군이 진주를 향해 출발했다. 여기에 가토 기요마사와 고니시 유키나가 등 일본군의 맹장들이 모두 지휘관으로 참여했다. 조선정벌의 꿈을 무력화시킨 전라도에 대한 복수심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권율과 곽재우가 이끌던 진주성의 1만여 민관합동 군대는 일본군의 기세에 눌려 퇴각을 했고 결사대 3000명만이 남아 일본군과 맞섰다. 치열한 공방전 끝에 일주일 만인 6월 29일 진주성은 무너졌다.


그러나 더 이상의 진격은 불가능했다. 구키 요시다카(九鬼嘉隆)가 이끄는 수군이 이순신에게 막혀 해로를 통한 전라도 돌파의 교두보를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보급로를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육로로 전진할 경우 선봉부대가 고립될 위험이 컸다. 이후 이순신의 조선 수군과 일본 수군은 임진왜란이 끝날 때까지 3년 이상 이 견내량을 두고 지루한 대치상태를 벌이게 된다.


문제의 ‘7월 16일’은 바로 이 무렵이다. 이순신은 ‘난중일기’ 7월 9일자에서 “본영의 탐후선이 들어와서 진주의 함락은 거짓말이라고 하였으나 진주 일은 그럴 리가 만무하다”고 적고 있다. 이순신은 진주함락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서로간의 탐색전으로 해상의 긴장도가 조금씩 높아지고 있던 이때 오히려 이순신은 약간의 여유를 되찾은 듯 고향 친척 현덕승에게 편지를 썼던 것으로 보인다. 이미 정읍현감으로 재임하고 있을 때부터 두 사람은 편지를 주고받았다.


‘竊想湖南國家之保障(절상호남국가지보장) 若無湖南是無國家(약무호남시무국가)’ ‘혼자서 가만히 돌이켜 생각해 보니 호남이야말로 나라를 지키는 울타리다. 만약 호남이 없었으면 곧바로 나라는 없어졌을 것이다.’


이순신은 장군이다. 아직 전쟁도 끝나지 않았다. 겨우 국망의 위기를 넘겼을 순간이다. 이순신은 두 가지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하나는 군수물자의 기지가 되어준 전라도의 역할, 그리고 또 하나는 전라도 해안이 갖고 있는 천혜의 요새와도 같은 다도해와 물길이었다. 물론 그가 자신과 함께 싸워준 전라도 백성과 수군들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갖고 있었으리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다만 이순신의 ‘만약 호남이 없었으면 곧바로 나라는 없어졌을 것’이라는 말은 전혀 다른 문맥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나라를 지키는 울타리’라는 뜻도 지정학적인 사실과 관련되는 말이다.


무엇보다 ‘만약 호남이 없었으면 곧바로 나라는 없어졌을 것’이라는 구절 바로 다음에 오는 글이 이 같은 해석에 힘을 실어준다. 다음 문장은 아주 담담하게 이어진다. ‘是以昨日進陣于閑山島以爲遮海路之計(시이작일진진우한산도이위차알해로지계)’ ‘그래서 진을 한산도로 옮겼으며 이로써 해로를 가로막을 계획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순신은 외가 쪽 친척과의 사사로운 편지에서 한 고비를 넘기고 새로운 국면을 앞둔 상황에서 전략적 요충지로서 호남의 지리적 가치에 대해 간략하게 군사적 차원의 언급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관련 문장을 한데 모아놓으면 훨씬 분명하게 드러난다.


‘혼자서 가만히 돌이켜 생각해 보니 호남이야말로 나라를 지키는 울타리다. 만약 호남이 없었으면 곧바로 나라는 없어졌을 것이다. 그래서 진을 한산도로 옮겼으며 이로써 해로를 가로막을 계획이다.’


조선일보 이한우 차장대우 입력 : 2006.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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