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사 (조선)

세조 때 기생 초요갱, 왕실의 넋을 빼앗다.

마도러스 2006. 12. 3. 00:01

세조 때 기생 초요갱, 왕실의 넋을 빼앗다.    


허리 가늘고 미모 뛰어나, 왕실 형제·친척 간에 서로 차지하려고 쟁탈전   

궁궐 행사 때면 불려다녀, 권력 다툼 속에 ‘난신의 첩’으로 몰려   


한명회, 권람 등을 거느리고 쿠데타에 성공한 수양대군은 스스로 영의정에 올라 단종을 옹호하던 왕실 사람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작업에 나선다. 그 대상이라는 게 실은 그의 동복(同腹)·이복(異腹)형제였다. 단종 3년(1455) 2월 27일 수양대군을 비롯한 쿠데타 세력은 화의군 이영(李瓔) 등이 금성대군 이유(李瑜)의 집에서 무사들을 모아놓고 활쏘기 경연을 하며 잔치를 벌였다는 이유로 이영 등을 잡아들여야 한다고 어린 단종을 몰아세웠다. 그런데, 겉으로 명확하게 드러난 반역의 죄목(罪目)은 없다면서 화의군 이영이 평원대군 이임(李琳)의 기첩 초요갱(楚腰)과 간통한 것을 구실삼아 먼 곳으로 유배를 보내야 한다고 덧붙였다.


여기서 문제의 기녀 초요갱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모르긴 해도 대단한 미모와 재예(才藝)를 갖춘 요염한 여인이었을 것이다. 그 이름도 초나라의 미인은 허리가 가늘다고 한 데서 누군가가 붙여준 것 같다. 화의군 이영은 세종과 신빈 김씨 사이에서 난 아들이었고, 평원대군 이임은 세종과 소헌왕비 사이의 일곱 번째 아들이다. 금성대군 이유는 여섯째 아들이었다. 결국 화의군 이영은 외방으로 유배를 떠나고 초요갱은 ‘장(杖) 80대’의 중형을 받았다.


이후 궁궐에서 내쫓긴 초요갱은 세종 말년에 좌의정을 지낸 신개의 세 아들 중 막내인 신자형(申自衡)과 눈이 맞았다. 눈이 맞은 정도가 아니라 아예 안방을 꿰차고 들어앉았다. 이름은 스스로 균형을 잡으라는 의미에서 ‘자형(自衡)’이었는데 실상은 정반대였던 것이다. 결국 세조 3년(1457) 6월 26일 사헌부에서는 왕실의 장례를 담당하는 예장(禮葬)도감 판사 신자형이 본부인을 멀리하고 초요갱에게 빠져서 초요갱의 말만 듣고 여종 두 명을 때려죽였다며 처벌을 요구했다. 그러나 신자형은 계유정난의 공신이었기 때문에 유배는 가지 않고 직첩(職牒)만 빼앗겼다.


그런데 석 달여 후인 10월 7일 사헌부에서는 훨씬 충격적인 보고를 올린다. 신자형의 7촌 조카뻘인 안계담이란 자가 초요갱을 ‘덮치기 위해’ 다짜고짜 신자형의 안방으로 들이닥쳐 신자형의 아내 이씨는 놀라서 달아나다가 땅에 뒹굴고, 초요갱을 찾지 못한 안계담은 신자형의 노비들을 마구 구타하는 사건이 발생했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아름다운 기녀를 둘러싼 사내들의 쟁탈전에는 왕실에서 미관말직까지 귀천(貴賤)이 따로 없었다. 기녀들은 사치(奢侈)의 상징이기도 했다. 연산군 때 어무적이라는 인물이 올린 상소문에 보면 조선시대 기녀의 사치풍조가 서민에게까지 만연되고 있음을 비판하는 대목이 나온다.


“기녀 한 사람의 옷 장식이 평민 열 사람의 의복보다 지나칩니다. 대체로 창기(娼妓)는 교태를 부려 사람 홀리기를 여우처럼 하기 때문에 비록 행실이 뛰어난 사람이라 할지라도 빠지지 않는 사람이 적습니다. 경대부의 첩도 이들을 본받고 서민의 아내도 여기(女妓)를 흉내내어 아름다움을 다투고 사랑을 시기하여 여기를 스승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 말은 연산군 때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전체에 걸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초요갱은 미모뿐만 아니라 가무(歌舞)에도 능했다. 옥부향, 자동선, 양대와 함께 ‘4기녀’의 하나로 꼽혔다. 세조 시절 궐내에 행사가 있을 때면 이들 4기녀는 함께 불려들어가 공연을 가졌다.


그 중에서 옥부향(玉膚香)이란 기생은 일찍부터 세종의 형님인 효령대군 이보와 사통하다가 이후에는 익현군 이관과도 관계를 가졌다. 이관도 세종의 서자다. 말하자면 큰아버지의 애기(愛妓)와 통정을 한 것이다. 훗날 세조는 이들 4기녀에게 천민(賤民)의 신분을 면하게 해준다.


여기서 잠깐, 당시 기생의 이름을 보면 각자의 특장을 알 수 있다. 허리가 가늘어서 ‘초요갱’이었다면, 피부가 옥같이 희다고 해서 ‘옥부향’이었다. 남이장군의 기첩 ‘탁문아(卓文兒)’는 글을 잘 지었음에 틀림없다. 그밖에도 ‘이슬을 머금은 꽃’이라는 뜻의 ‘함로화(含露花)’라는 기생도 있었다.


재예(才藝)가 뛰어나다는 이유로 초요갱을 다시 악적(樂籍)에 올려 궁궐로 불러들이자 이번에는 화의군 이영의 동복아우인 계양군 이증(李)이 초요갱을 범했다. 세조 9년의 일이었다. 그래서 세조는 당장 이복아우이기도 한 이증을 불러 “어찌 다른 기생이 없어 형제끼리 서로 간음을 하는가”라며 호통을 쳤다. 이증은 하늘을 가리켜 맹세하며 딱 잡아뗐다. 하지만 실록은 “이증은 이날도 초요갱의 집에서 묵었다”고 적고 있다. 심지어, 변대해라는 인물은 초요갱의 집에 묵었다는 이유만으로 이증의 종들에게 몰매를 맞아 목숨을 잃기까지 하였다.


사실 계양군 이증은 세종의 끔찍한 사랑을 받은 아들이었다. 학문을 좋아하고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래서 서자임에도 불구하고 세종은 주요 국무를 그에게 맡기기도 하였다. “일찍이 귀하고 세력있는 것을 스스로 자랑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다만, 주색(酒色)으로 인하여 세조 10년 8월 16일 졸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40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뜬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보자면, 초요갱은 남자들에게 횡액(橫厄)을 가져다 주는 ‘요부(妖婦)’와도 같은 존재였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초요갱의 입장에서 보자면 억울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자신이 누구를 죽인 적이 없다. 사내들이 그저 자기를 놓고 싸우다가 그들끼리 벌어진 불상사일 뿐이었다. 죽음도 불사한 사내들은 불나방처럼 초요갱을 향해 달려들다가 날개를 태워버리기도 하고 목숨을 잃기도 했다.


세조가 죽고 예종이 즉위하면서 남이를 비롯한 세조의 측근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시작되었다. 초요갱의 이름은 이때도 나온다. 정확히 누구의 첩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예종 1년 2월 8일 실록에는 ‘난신의 첩’ 초요갱이라는 대목이 나온다. 남이에게는 탁문아라는 기첩이 있었던 것을 보면 남이와 함께 했던 또 다른 고위층 인사의 첩으로 있다가 남이세력이 제거될 때 한양에서 추방당했다. 초요갱은 역사의 패자 편에 있었던 것이다.


기구하다는 팔자는 바로 이 초요갱을 두고 하는 말이었는지 모른다. 5개월 후 초요갱은 평양 기생으로 변신한다. 아마도 남이 제거 후 탁문아가 진해의 관비(官婢)로 내쫓겨갈 때 초요갱은 평양 관기로 보내진 것 같다. 예종 1년 7월 17일 평양부의 관비인 대비(大非)라는 여인네가 사헌부에 신고를 하였다. 평안도 도지사 임맹지가 초요갱과 간통을 했다는 것이었다. 당시는 아직 세조가 죽은 지 얼마 안되는 국상(國喪) 중이었기 때문에 관리의 이 같은 행위는 국법을 어기는 중죄였다.


당시 기생과 놀아났다 하여 처벌을 받은 사람은 임맹지만이 아니었다. 평양시장격인 부윤 이덕량의 반인(伴人·오늘날의 보좌관) 박종직은 기생 망옥경(望玉京)과 관계를 가졌고 이어 기생 소서시(笑西施)와 사통하려 하다가 뜻대로 되지 않자 소서시의 어미까지 때려죽이는 악행을 저질렀다가 의금부에 붙들려왔다. 평안도 관찰사 어세겸도 함로화와 사통한 죄로 압송되었다. 실록에 특별한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임맹지와 달리 초요갱은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았던 것 같다. 이 사건을 끝으로 초요갱이라는 이름은 더 이상 볼 수 없다.


초요갱은 실록에 16차례나 나오지만, 황진이는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초요갱이 놀았던 인물이 황진이가 놀았던 인물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높은 인물들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일보 이한우 기자 입력 : 2006.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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