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칼럼

소가 밟아도 잔디가 잘 크는 이유

마도러스 2006. 8. 21. 08:14

소가 밟아도 잔디가 잘 크는 이유

 

꽃샘 추위가 한풀 꺾였다. 나뭇가지에서도, 땅바닥에서도 삐죽삐죽 새싹이 솟아 나온다. 생명이 꿈틀 꿈틀 움직이는 소리도 느껴진다. 매년 가을 말라 죽었던 누런 잔디도 잘 살펴보면 푸릇푸릇한 새싹이 자라고 있다.

 

잔디는 대나무, 억새와 같이 볏과에 속하는 키 작은 다년생 식물이다. 문헌에 의하면 산야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띠’ 라는 식물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그런데 키가 작아 ‘작은 띠’라고 불렸고, 이것이 ‘잔띠’로, 그리고 다시 ‘잔디’로 변했다는 것이다. 볏과 식물들이 대개 그렇듯이 잔디도 지표면과 땅속 얕은 곳을 포복해 기어다니듯 자란다. 줄기 마디마디에서 땅 위로 다시 줄기를 내어 푸름이 가득한 잔디밭의 풍경을 만들어낸다.

 

그런데 이런 멋진 잔디밭의 풍경은 사람이나 동물에 의해 정기적으로 깎이거나 짓밟히지 않으면 유지될 수가 없다. 잔디는 성장에 많은 빛을 필요로 하는 양지성(陽地性) 식물이다. 양지성 식물은 빛을 많이 받으려고 뻗어나가서 키가 큰 게 보통이다. 그런데 잔디는 키가 작다. 그래서 잔디는 키가 큰 다른 식물이 침입해 자리를 잡으면 제대로 자라질 못한다. 광합성에 필요한 빛을 얻지 못해 쇠약해지는 것이다. 그런 상황이 계속되면 말라 죽게 된다.

 

또 잔디는 건조에 강한 생리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고온에서는 강하지만 습한 환경에서는 성장이 현저히 저하된다. 만일 잔디를 제때 잘라주지 않으면 빽빽하게 자란 줄기들이 통풍을 막게 된다. 마치 한여름에 두꺼운 이불을 덮어 놓은 것처럼 잔디밭은 뜨끈뜨끈하고 축축해진다. 이런 환경에서는 잔디가 제대로 자라지 못하고 썩고 만다. 이런 이유로 잔디는 지속적으로 깎이거나 짓밟혀 키 큰 식물이 못 들어오고 통풍이 원활해져야 잘 자랄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요즘처럼 막 잔디가 자라기 시작한 시기에 잔디를 밟아선 안 된다. 잔디의 줄기들이 아직 여려서 쉽게 부러지거나 짓이겨지고 만다. 하지만 조금 더 지나면 줄기가 단단해져서 밟는 힘에 버틸 수 있게 된다.

 

과거에 잔디가 생육하기 좋았던 곳이 바로 시골의 냇둑이었다. 냇둑은 집에서 기르던 소를 매어두던 장소다. 소는 키 큰 식물을 먹어 치운다. 또 육중한 발로 잔디를 적당히 밟아준다. 그러면 통풍도 잘 되고 햇빛도 듬뿍 받을 수 있어 잔디가 잘 자라는 것이다. 요즘의 시골 냇둑엔 어지간해선 잔디가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매어두던 소가 없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공원이나 골프장과 같은 인공 잔디밭은 잔디 깎는 기계로 일부러 깎아주고 제초제를 쳐서 다른 식물이 들어오는 것을 막아준다.


잔디가 이렇게 짓밟히도록 적응한 것은 생존에 필요한 자원 획득 과정에서 다른 종과의 경쟁을 피하기 위해서다. 다른 식물은 사람 발에 짓밟히는 환경에서는 정상적으로 생육할 수가 없다. 잔디만은 밟는 힘에 견딜 수 있기 때문에 다른 종과 경쟁하지 않고 안전하게 번식할 수 있는 것이다.

 

생물의 생태를 아는 것은 재미있는 자연 공부가 된다. 또 그런 지식을 알게 되면 자연이 가깝게 느껴진다. 자연을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도 절로 생긴다. 이건 꼭 잔디에만 국한된 얘기는 아니다. 조경용으로 심는 게 유행처럼 돼버린 소나무도 그렇고, 건물이나 도로의 방음벽을 기어오르는 담쟁이도 그렇다. 우리 주변의 식물과 생태가 어떤 원리로 자라고 번성하고 죽어가는지를 알게 되면 생태니 자연이니 하는 말을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우리는 이미 그 속에 있는 거나 마찬가지가 될 것이다.

 

이재석 건국대 교수·환경생태학 입력 : 2006.04.07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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