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칼럼

性에 대한 즐거운 가치 전복

마도러스 2006. 8. 21. 08:13

性에 대한 즐거운 가치 전복

 
잡지 ‘이프’ 10년 여정 마쳐 여성의 몸·욕망·섹스…
禁忌에 맞서 ‘발칙한 도전’ 소임 다했기에 폐간 아닌 完刊

▲ 이성표 그림
깨진 돌들이 굴러다니는 무덤 같은 토굴에 한 여자가 벌거벗은 채 누워 있다. 거친 땅 위에 누운 그녀의 몸은 춥고 가여워 보인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그녀의 다리와 가랑이, 겨드랑이와 가슴 위에서 초록의 풀들이 솟아나 무덤을 뚫고 나올 듯 하늘을 향해 자라고 있다. 2006년 봄 호로 ‘완간호’를 낸 페미니스트 잡지 ‘이프’의 표지 그림이다.
 

1997년 5월 창간한 ‘이프’ 첫호의 표지는 금방 아이를 낳을 것 같은 만삭의 임산부였다. 박영숙이 찍은 이 사진 속 여자 또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았다. 그러나 여자의 튼튼한 손은 부른 배를 단단히 받치고 있고, 생명을 품은 여자의 몸 위로 푸른 창공의 바람과 흰 구름이 부드럽게 흘러갔다. 창간호와 완간호의 두 여자 모습은 이렇듯 다르면서도 닮았다.

 

‘만약에(If)…’라는 가정형의 이름을 달고 세상에 나온 한국 최초의 페미니스트 저널 ‘이프’. 지난 10년간 각종 문화비평과 논쟁의 중심에 있었던 이 잡지를 세상에 태어나게 한 산파는 아이로니컬하게도 이문열의 소설 ‘선택’이었다. 작가는 조선 선조 때의 정부인이었던 장씨 부인의 입을 빌려 ‘요즘 여자’들을 가차없이 질책했다. “…그들은 이혼의 경력을 무슨 훈장처럼 가슴에 걸고 남성들의 위선과 이기와 폭력성과 권위주의를 폭로하고 그들과 싸운 무용담을 늘어놓는다….”

 

소위 베스트셀러가 된 이 소설이 보여준 여성 삶에 대한 몰이해, 페미니즘의 왜곡에 분노한 여성운동가들이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가부장적 권력과 맞장을 뜨기 위해 만든 무기가 바로 ‘이프’였다.

 

IMF 외환위기로 잘 나가던 잡지사들도 문을 닫던 당시, 계간 형태에 고작 1만 부도 안 되는 부수로 출발한 ‘이프’는 마초 기질 다분한 남성 지식인들에겐 ‘나쁜 여자들의 소굴’이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젊은 페미니스트들은 물론, 시인 김승희, 화가 윤석남, 신학자 현경, 작가 김신명숙, 영화평론가 유지나, 사진작가 박영숙 등 문화계 여걸들이 ‘백 그라운드’로 대거 합류한 ‘이프’는 남성 중심의 문화비평계를 위협했다.

 

창간호부터 ‘이프’는 도발했다. 광화문 네거리의 이순신 동상에 ‘지모신(地母神)’을 합성한 사진으로 가부장제와의 전면전을 선포했는가 하면, 여성의 외모에 점수를 매겨 차등화하는 ‘미스코리아 선발대회’에 제동을 걸어 수영복 심사 폐지와 지상파 중계방송 포기 선언을 받아냈다.

 

금기시돼 있던 여성의 몸과 성(性)에 대한 담론을 양지로 이끌어낸 주역도 단연 ‘이프’다. “왜 여성은 섹스를 주도해서는 안 되는가?”를 반문하며 여성의 오르가슴에 대해 공개석상에서 자유분방하게 토론할 만큼 발칙했다. 동성애자·트렌스젠더들이 사회에서 지탄받을 때는 ‘세상에는 다양한 삶과 사랑의 선택이 있다’고 편들었다.
 

정치사회적 논쟁의 중심에도 ‘이프’가 있었다. ‘여성도 군대 가자’ ‘여자도 남자들처럼 정치적으로 연대해야 한다’ ‘사랑은 움직이는 것(간통제 폐지 주장)’이라는 주장은 여성계 내부에서조차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이프’에 대한 비판은 거셌다. ‘인텔리 중산층 여성들의 자기 만족적 유희’ ‘오만하고 불경스러운 쾌락적 글쓰기’…. 그러나 놀랍게도 10여 년이 지난 지금 ‘이프’의 예언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삶의 물결로 흐르고 있지 않은가. 많은 이들이 ‘이프’의 목소리를 배부른 아줌마들의 헛소리일 뿐이라고 치부했지만, ‘이프’야말로 여성이고 아줌마여서 주도할 수 있었던 가치 전복, 문화게릴라 운동이었다. 이제 여성들은 자신은 물론 남자의 몸과 성에 대해 적극적으로 이야기하고 소비한다.

 

미스코리아 대회? 남성들에게조차 그건 쌍쌍파티만큼이나 오래된 쌍팔년도의 구닥다리 유물이다. 동성애 코드는 어떤가? 동성애 영화로 분류되는 ‘왕의 남자’ ‘브로크백 마운틴’을 사람들은 거부감 없이 관람하고 감동받지 않던가. ‘이프’가 경영난으로 폐간하면서도 ‘완간’(完刊)이라고 자신 있게 말하는 이유는, ‘성(性)에 대한 즐거운 가치 전복’이라는 소임을 다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덤에 누운 나신(裸身)의 그 여자, 그 생명력을 믿기 때문이다. 그 몸을 양분 삼아 자라날 초록 풀의 꿈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완간은 또한, ‘이프’로 상징되는 여성운동도 자기만의 세계, 아집에서 벗어나 일상으로 내려앉아야 한다는 새로운 다짐을 의미한다. 투쟁에서 어우러짐으로, 거부에서 소통으로 거듭나는 즐겁고 신나는 또 하나의 실험! ‘틀에 얽매이지 않는 페미니즘(Infinite feminism)’이야말로 여성과 남성이 서로 존중하며 행복해지는 세상을 앞당기는 유일한 해법이기 때문이다.

권혁란. 페미니스트 저널 '이프' 前편집장  입력 : 2006.04.07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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