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 역사.문화

칭기스칸, 역사상 가장 무서운 사람

마도러스 2006. 7. 26. 04:00


칭기스칸, 역사상 가장 무서운 사람


웬만한 사람들에게 2006년의 키워드는 ‘월드컵’일 것이다. 하지만 몽골 유목민들의 키워드는 따로 있다. 그들에게 2006년은 칭기스칸 제국이 출범한 지 800주년이 되는 해이다. 몽골의 푸른 호수에서 첫 깃발을 꽂은 1206년, 그해 6월에 시작된 작은 바람은 돌풍이 되고 태풍이 되어 유라시아 대륙을 휩쓸어 나갔다. 그리하여 인류 역사에 처음으로 중국 문명과 이슬람 문명, 유럽 문명이 하나로 통일되었다.


전 지구에 ‘역참제’라는 네트워크 시스템이 갖춰졌고, ‘정보. 물자. 자본. 사람이 오고가는 길’이 생겼다. 점조직으로 만들어진 프로토콜 개념의 이 길을 몽골인들이 800년 전의 인터넷이라고 말하는 이유이다. 올해가 바로 그런 모든 것들의 원형을 세운 몽골 제국 탄생의 해이다.

 

칭기스칸을 맞이하는 그들에게 아픈 상처가 하나 있다. 지난 사회주의 시절에(1921 -1991년) 칭기스칸이 한번 왔다 갔다. 칭기스칸은 1162년에 태어났다. 그의 탄생 800주년이 되는 1962년, 몽골인들은 칭기스칸을 맞이할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당시 중앙 정치 위원회 위원이던 투무르 어치르(Tumur-Ochir)가 앞장서 칭기스칸 탄생 800주년 기념 행사를 준비했다. 1962년 2월에 정기 국회에서 기념 행사를 국가적 총력 사업으로 확정했고, 칭기스칸의 고향인 헨티 아이막에 탄생 기념비를 세웠다. 칭기스칸 우표를 만들었고, 칭기스칸 영화를 만들기로 했다.


전 세계의 연구자들을 초빙해 학술 회의를 개최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해 나갔다. 중국에서도 칭기스칸의 탄생 800주년 기념 행사를 했다. 중국 내몽골의 허흐호트에 있는 칭기스칸의 무덤(ongon)이 당시에 만들어진 것이다. 중국인들은 ‘칭기스칸이 한족은 아니지만, 중국 사람이다’ 라고 말할 정도였다.

 

몽골 중앙 도서관에서 학술 회의가 시작되었다. 그날 아침, 몽골인들은 전통에 따라 유제품 음식과 우유를 차려서 도서관으로 왔다. 도서관 학술 회의실에 사람들이 꽉 찼고, 복도에도 꽉 찼고, 건물 밖에도 사람들이 모여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도서관 앞 5미터의 거대한 스탈린 동상 앞에서(1990년에 그 동상은 철거되었다) 몽골의 유명한 학자인 담딘수렝(Damdinsuren)이 연설을 시작했다.

 

“프랑스 아이들은 나폴레옹에 관하여, 그리스 아이들이 마케도니아 알렉산더에 관하여 배우고 있는데 우리 몽골 아이들이 왜 칭기스칸의 관해서 배우지 못하는가? 왜 이름까지도 부르지 못하는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 소련의 역사 학자들, 소설가들, 화가들은 왜 칭기스칸의 나쁜 점만 보고, 위대한 장군이었음을 잊어버리는가?”

 

연설은 감동적이었다. 그러나 일이 생겼다. 소련 대사관에서 모스크바로 전문 한통을 날렸다. 내용은 ”몽골에서 민족 사상가들이 일어나서 소련을 무시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큰일 났다. 그 때 몽골 공산당(인민혁명당) 서기장 체덴발(Tsedenbal)이 모스크바에 있었다. 얼마 후에 있을 후르시초프의 몽골 방문 준비 때문이었다. 몽골일은 보고받은 후르시초크는 체덴발을 불러 “도대체 울란바타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몽골의 젊은이들이 칭기스칸 마크가 붙은 옷을 입고 다닌다. 이게 무슨 뜻이야?”라고 호통 쳤다. 실제로 사회주의 시절 몽골의 서기장 중 4명이 크렘린에 들어갔다가 이유 없이 돌아오지 못했다.

 

체덴발 서기장이 급해졌다. 울란바타르에 돌아온 체덴발은 칭기스칸 800주년 기념 행사를 모두 금지시켰다. 행사를 주도한 투무르 오치르는 위원직을 상실했고, 울란바타르에서 1000km나 떨어진 훕스걸에 유형(流刑)당했다. 그는 1985년에 다르항이란 도시에서 살해당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연설을 했던 담딘수렌과 렌친(B. Renchin)은 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었다. 칭기스칸의 관한 논문, 우표는 모두 불살라졌다. 고향에 세운 동산까지 무너뜨린다고 했지만 이미 세운 동상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없앴다. 지금 헨티 아이막 다달솜에 있는 기념비는 그런 피의 흔적이다.

 

몽골인들이 칭기스칸이란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금지됐다. 이미 1932부터 7년간에 걸쳐 칭기스칸의 후손인 몽골의 귀족들을 공산주의란 이름으로 모두 처형했고, 칭기스칸을 입에 올렸다가 죽은 지식인들이 4만 명이 넘었다. 소련이 칭기스칸을 핍박하는 외형적 이유는 공산주의였다. 공산주의와 민족주의는 함께 할 수 없는 가치였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칭기스칸의 큰아들 조치(적장에게서 탄생한 아들, 나그네라는 뜻)와 그의 아들 바투에 의해 러시아는 몽골 말발굽 아래 짓밟혔다. 13세기 몽골이 러시아에 세운 킵차크칸국(알탄 오르도)은 18세기 중반까지 지속됐다. 당시의 공포를 러시아인들은 잊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도 그들은 몽골인들에게 당한 수모와 치욕을 ‘타타르의 멍에’라고 말한다.

 

칭기스칸에 대한 몽골인들의 사랑은 다시 마음 속으로 숨겨졌다. 시인 푸렙도르지(Purevdorj)는 “칭기스”라는 시를 썼다. 그의 시는 1990년까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지 못했다. 지금은 일흔살이 넘은 푸렙도르지는 ‘국민 문학상’을 두 번째로 수상한 몽골의 유명한 시인이다.


독살당한 아버지와 납치당한 어머니를 가진 고아, 이복형을 살해해야 했고, 강간 당한 아내와 살아야 했던 수난의 역사, 그 극한 상황을 극복한 인간 승리의 화신으로 살아있다. 100-200만 명의 군사로 세계를 정복한 리더십 혁명, 속도 혁명의 창시자, 정보화 마인드의 구현자로 살아서 우리의 경영인들에게 새로운 경영 전략을 전파하는 사람으로 살아 있다.


지금도 유럽에서 역사상 가장 무서운 사람이 누구인가 여론 조사하면 1위가 징기스칸이다. 어쨌거나 동양을 확실하게 알렸다. 공산주의는 진짜 악마의 선물이었던 것 같다. 어찌 그리 우둔했을까? 역사를 지울 수 있다고 믿는 그런 어리석음이 어디 있을까. 공산주의는 악마의 환상이었던 게 분명하다.


고려 때 100년 동안 1년에 8000명씩 무려 80만의 공녀가 원으로 갔다. 그중 기씨 부인은 원나라 최후의 황제 순제의 아들을 낳았고, 이아들은 나중에 원나라 멸망 후, 만주와 몽골을 지배했던 북원의 황제가 된다. 치욕과 고통의 역사에선 교훈을 얻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