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三國).고려

■ 족보(族譜)의 역사와 임진왜란 및 위조 족보

마도러스 2006. 6. 17. 13:44

■ 족보(族譜)의 역사와 임진왜란 및 위조 족보

 

          1. 임진왜란 이후의 족보와 신분 변화

          2. 우리나라에서의 족보의 기원

          3. 우리나라의 “성(姓)”과 “씨”의 기원

          4. 우리나라의 “성(姓)”과 “씨”의 종류

          5. 중국에서의 족보의 기원

          6. 외국의 성씨와 족보 및 한국의 여성존중

          7. 백두산과 한라산은 여자 존중의 표상!

          8. 여자를 존중하는 한국문화와 결혼제도

                  1) 여자를 존중해 온 우리들의 전통문화

                  2) 우리나라의 결혼제도와 여자에 대한 존중

 

 

1. 임진왜란 이후의 족보와 신분 변화

 

원래, 조선 개국(1392년)에서 임진왜란(1592~1598년) 때까지는 양반이 전체인구의 10% 정도였다. 그런데, 임진왜란(壬辰倭亂)이 끝나면서 신분제의 동요가 일어나게 된다. 양반들이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도망질한 다음 도리어 일반 농민, 상민, 서민들이 의병을 조직해서 관군보다 더 큰 전과를 올리자, 양반과 지배층에 대한 회의와 저항감이 생겼다.

그래서, 임진왜란 때 선조(1552~1608) 임금과 지배층이 한양을 비우고, 평양과 신의주로 떠나자, 가장 먼저 불태워 진 것이 노비문서가 보관되어 있던 관청이었다. 임진왜란(1592~1598년)이 끝나고, 부족한 재정을 보충하는 방법으로 돈 많은 서민과 양민들에게 돈을 받고 양반직을 파는 공명첩(空名帖)이 생겨났고, 돈으로 관직과 지위를 얻게 되는 매관매직(賣官賣職)의 행위들도 생겨났다. 노비들도 일정량 이상의 양곡을 바치는 노비에게는 양인으로 올려주는 납속책(納贖策)을 이용해서 평민으로 신분 상승하였다. 그리하여, 조선 초기에는 전인구의 40%에 달했던 노비의 비중이 19세기 중엽에 이르러서는 10% 이하로 떨어졌다.

 

어제만 해도 같이 옆 마을에 살던 돌쇠가 언젠가부터 위조 족보를 들고 양반행세를 하니까, 밥술깨나 먹는 집은 전부 다 신분 상승을 꿈꾸었다. 양반이 되면 군역이나 각종 세금도 면제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숙종(1661~1720) 때는 조선 초기에 10%였던 양반이 30%정도로 증가하고, 철종(1831~1863) 때에 이르러는 50%를 넘기게 된다. 나중에 갑오개혁(1894년)으로 신분제가 폐지된 후에는 전부 이전의 출신을 속이고 족보를 위조하게 되었다. 그런데, 족보를 위조 할 때, 자기가 섬기던 주인 양반의 성(姓)을 따다가 위조했다. 결국,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던 양반인 이씨와 김씨, 박씨 등의 성(姓)을 따다가 족보를 위조했다. 그래서, 요즘 김씨, 이씨, 박씨 성(姓)을 가진 분들 중에 진짜는 별로 없다는 얘기가 나돌 정도이다. 조선시대에 조상 대대로 양반을 유지해 온 집안은 종가집 빼고는 믿기가 힘들다고 한다.

 

 이앙법(移秧法)이 고려와 조선초기에는 일부의 삼남지방에만 보급되었으나, 임진왜란(1592~1598년) 이후에는 전국적으로 확대 보급됨에 따라서, 부농(富農)과 빈농(貧農)이 생기게 되고, 부농들은 자신들의 부(富)를 기반으로 하여 양반이 되고 싶어 했으며, 그래서 조선말기에 신분의 변동이 크게 일어나게 되는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특히, 양반이 되면 군포(軍布)를 안 내고 여러가지 세금도 면제되었다. 평민의 일부는 공명첩(空名帖)을 이용해서 공개적으로 양반자리를 사기도 하였지만, 대부분은 도망가서 아주 먼 지역에서 족보위조해서 양반인척 하고 살았다. 결국, 세금을 내야할 평민들이 사라지자, 국가는 어쩔 수 없이 노비들을 해방해서 평민으로 만들어 주야 하는 형편에 직면 했고, 1886년에는 노비해방 운동이 전국적으로 격렬하게 전개되자, 고종(高宗)은 1886년 2월 2일, 노비세습제를 폐지하기에 이른다. 또한, 갑오개혁(1894년)에서는 양반. 양인. 천민에 이르기 까지 신분제 자체가  전면적으로 폐지되었다.

 

2. 우리나라에서의 족보의 기원

 

 우리나라에는 고려 왕실의 계통을 기록한 것으로 고려 의종(1127~1173년)때 김관의(金寬毅)가 지은 “왕대종록(王代宗錄)”이 그 효시(嚆矢)라 할 수 있다. 또한, 사대부 집안에서는 가승(家乘)이 전해져 내려왔는데, 체계적으로 족보(族譜)의 형태를 갖춘 것은 조선 성종 7년(1476년)에 발간된 안동 권(權)씨 성화보(成化譜)이고, 지금과 같이 혈족 전부를 망라한 족보는 조선 명종(1534~1567)때 편찬된 “문화(文化) 유씨보(柳氏譜)”로 알려져 있으며, 그 후 각 사대부 집안에서 서둘러 족보를 만들기 시작하여, 대부분의 많은 족보가 이로부터 약 100년 사이에 만들어져 지금까지 전해져 오고 있다. 이것은 임진왜란(1592~1598년)을 전 후하여 만들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나라의 족보는 세계에서 부러워할 정도로 가장 발달된 족보로 정평이 나있으며, 계보학의 종주국으로 꼽힌다. 따라서 우리의 족보를 우리나라보다 외국에서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연구하는 실정이다.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의 계보학 자료실에는 600여종에 13,000여권이 소장되어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열람하고 있다.

 

3. 우리나라의 “성(姓)”과 “씨”의 기원

 

 우리나라 고대(古代)에는 성(姓)이 없었는데, 지배계층이 생겨나자 임금이 지배계층의 귀족들에게 그 귀족들의 “출생지”의 이름을 따서 “성(姓)”을 내렸는데 그 사람의 숫자가 100명 정도였다. 그리하여, 백 사람에게 성(姓)을 주었다는 의미에서 백성(百姓)이라는 낱말이 유래하였다. 그 후, 특정한 성(姓)을 가진 사람이 크게 공적을 남기면, 그 사람이 사는 “지역명”을 따서 다시 “”로 구분해 주었다. 예를 들어, 똑같은 “김”가인데 경주에 사는 사람과 전주에 사는 사람이 각각 공적을 크게 남기면, 각각 경주 김씨와 전주 김씨가 되었다.

 우리나라 성(姓)씨의 발생 근원은 정확한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다만, 고조선(古朝鮮, B.C2,333~238) 시대에 왕족(王族)부터 사용한 것으로 전해온다. 따라서, 삼국시대에는 왕실이나 귀족에게서만 국한되어 사용되다가 점차 확대되어 나갔다. 일반서민들의 (姓)의 사용은 과거제도가 발달한 고려시대 문종9년(1055년) 이후부터 보편화 되었는데, 특히 문종9년(1055)에는 성(姓)이 없는 사람은 과거 급제할 수 없다는 법령(法令)을 내렸었다. 그리고, 상민과 노비를 포함한 모두가 성을 갖게 된 것은 조선시대 후기부터라고 한다. 시대가 흐르면서 성(姓)씨가 점차 확대되면서 같은 성(姓)이라고 하더라도 계통이 달라지게 되어 가까운 친척 여부를 가리기 위해 필연적으로 등장한 것이 본관(本貫) 즉 “씨”의 구분이다. 본관은 김씨라도 김해김씨와 경주김씨와 같이 똑같은 성(姓)을 쓰면서도 조상이 다른 경우가 있고, 강릉김씨와 광주김씨와 같이 본관이 다르지만 같은 김씨 계통의 후손들인 경우가 있다.

 

4. 우리나라의 “성(姓)”과 “씨”의 종류

 

 1) 삼국 시대의 성(性)의 기록

고구려 : 건국 시조 주몽(朱蒙)은 국호를 고구려라고 하였기 때문에 고(高)씨라고 하였으나, 중국의 한서를 보면, 장수왕을 고연(高璉)으로 기록하여 처음으로 고구려 왕실의 성을 고(高)씨로 기록 하였으며, 장수왕이 사신으로 보낸 고익, 마루, 손참구, 동마 등의 이름에도 모두 성(姓)을 사용하였다. 주몽은 충신들에게 극(克)씨, 중실(仲室)씨, 소실(小室)씨를 내려 주었다고 한다.

백제 : 건국 시조 온조(溫祚)가 부여계통에서 나왔다 하여 성(姓)을 부여(扶餘)씨라고 하였으나, 중국의 진서, 송서 등의 기록에는 근초고왕(13대) 부터 위덕왕(27대)까지는 여(餘)씨로 표시하다가 무왕(29대)부터 부여(扶餘)씨로 기록하였다.

신라 : 박(朴), 석(昔), 김(金)의 왕족 성(姓)씨가 전해 오며, 유리왕 9년(32)에는 육부(六部)의 촌장에게 각각 이(李), 정(鄭), 손(孫), 최(崔) , 배(裵), 설(薛)씨의 성을 내려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중국의 "북제서"에는 진흥왕(540~576)을 금진흥(金眞興)으로 기록하여 처음으로 김(金)씨라는 성을 사용 한 것으로 나타난다.

 

중국의 기록으로만 의존하면, 고구려는 장수왕 시대(413~490)부터,  백제는 근초고왕 시대(346~375)부터, 신라는 진흥왕 시대(540~576)부터 성(姓)을 제대로 기록해 놓았으나, 사실은 그 이전부터 성(姓)을 사용했다고 볼 수 있다.

 

2) 삼국 시대의 성(性)의 종류

 

고구려 : 고(高), 을(乙), 예(芮), 송(松), 목(穆), 간, 주(舟), 마(馬), 손(孫),

           동(董), 채, 연(淵), 명림(明臨), 을지(乙支).

백 제 : 여, 사, 연, 협, 해, 진, 국, 목, 국 등의 팔족과

            왕, 장, 사마, 수미, 고이, 흑치

신 라 : 박, 석, 김 3성과  이, 최, 정, 손, 배, 설의 육부의 6성과  장, 비 등이 있고,

            왕실의 성인 고(高), 여(餘), 김(金)을 쓴 사람이 많았다.

 

삼국사기에도 성을 쓴 사람보다는 없는 사람이 더 많았고, 주로 중국에 왕래한 사신들과  유학자와 장보고와 같이 무역을 한 사람들이 성(姓)을 사용하였으며, 일반 민중은 신라 말기까지 성(姓)을 쓰지 않았다.

 

3) 고려 시대

고려의 태조 왕건이 개국 공신들과 지방 토호세력들을 통합 관장하기 위하여 전국의 군·현 개편작업과 함께 성(姓)을 하사하면서 우리나라 귀족들의 성(姓)씨의 체계가 확립되었다. 이와 같이 고려 초기부터 귀족 관료들은 거의 성(姓)을 쓰게 되었다. 고려 문종9년(1055년)에 성이 없는 사람은 과거 급제할 수 없다는 법령(法令)이 내려졌고, 이 법령 이후로는 우리나라의 성(姓)이 보편화되어 일반민중까지 성(姓)을 쓰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때문에 고려 문종9년(1055년) 이후의 사람을 시조(始祖)로 하는 성씨가 많아졌다.

 

4) 조선시대 및 현대

  조선 초기 성(姓)은 양민에게 까지도 보편화되었으나, 노비와 천민계급 등은 조선 후기까지도 성을 쓸 수가 없었다. 그러나, 1909년 새로운 민적법(民籍法)이 시행되고, 어느 누구라도 성(姓)과 본(本)을 가지도록 법제화가 되면서, 우리나라 국민 모두가 성(姓)을 취득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때를 기회로 성(姓)이 없던 사람에게  본인의 희망에 따라 호적을 담당한 동(洞)사무소 서기나 경찰이 마음대로 성(姓)을 지어 주기도 하고, 머슴의 경우 자기 주인의 성(姓)과 본관(本貫)을 따르기도 하였을 뿐만 아니라, 명문 집안의 성(姓)씨를 모방하여 성(姓)을 정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성(姓)씨의 종류가 더욱 늘어났다. 따라서, 1930년 국세조사에서 처음으로 나타난 성(姓)씨가 많아졌다.

 

5. 중국에서의 족보의 기원

 

 세계에서 처음으로 姓)을 사용한 것은 한자를 발명한 중국이며, 처음에는 그들이 거주하는 지 역, 산,  강 등을 성으로 삼았다. 신농(神農, B.C3,218~3,070)씨의 어머니가 강수(姜水)에 있었으므로 (姜)씨 라고 했고, 황제(黃帝)의 어머니가 희수(姬水)에 있었으므로 희(姬)씨로, 순(舜)의 어머니가 요허(姚虛)에 있었으므로 요(姚)씨로 한 것은 이것을 실증한다.

 족보는 원래 중국의 6조(六朝)시대부터 시작되었는데, 이는 제왕연표(帝王年表, 왕실계통)를 기술한 것이었으며, 조상의 관력과 혼인 관계 등을 구별하려는 데서 시작되어 발전하여 내려 오다가 개인적으로 족보를 갖게 된 것은 한(漢, B.C202~A.D220) 나라 때에 관직등용을 위한 현량과(賢良科) 제도를 설치하여, 응시생의 내력과 그 선대(先代)의 업적 등을 기록한 것이 시초가 된다. 송나라에 와서 한 집안의 역사를 모두 기록하게 되었고, 전체 가족을 수록하게 되는 발전을 갖게 되었다. 특히 북송(北宋)의 대문장가인 소순, 소식, 소철에 의해서 편찬된 족보는 그 후 모든 족보편찬의 표본이 되어왔다.

 

6. 외국의 성씨와 족보 및 한국의 여성존중

 

 외국에서는 여자가 시집을 가면 남편의 성(姓)씨를 따른다. 유독 우리나라만 여자의 성(姓)씨를 존중해 준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나라가 가장 여자를 잘 존중해 주는 나라이다. 미국, 영국,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독일, 스위스, 브라질 등도 원칙적으로 아내는 남편의 성(姓)을 따르는 것이 통례이다. 그러나 법률로 정해진 것이 아니며, 여자는 결혼 전의 성(姓)을 그대로 가질 수도 있고 남편의 성(姓)을 사용할 수도 있다.

 

   러시아의 경우도 여자가 남편의 성(姓)을 따르는 것이 통례이나, 법률로는 부부가 서로 의논하여 어느 한쪽의 성(姓)을 사용하거나 각자의 성(姓)을 사용할 수도 있다. 중국에서는 부부는 각자의 성명을 사용할 권리를 가진다고 규정하고 있다. 대만의 경우는 아내는 자기의 성(姓) 위에 남편의 성(姓)을 합하여 사용하는 복성주의를  원칙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결혼한 여자의 성(姓)은 두 글자 성씨가 된다.

  또한 지구상에는 성(姓)이 없는 국가도 많다. 동남아시아의 미얀마, 인도네시아 등이 한 예이다.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이름만 가지고 있는데, 다만 개인적으로 필요하거나 취미로 이름 위에 이것 저것 덧붙여 사용한다고 한다. 미얀마에서는 이름 위에 '우'나 '몽'을 붙이는 경우가 많아서, '우 와 '몽'이 우리나라의 김씨나 이씨 만큼 많은 것으로 착각할 정도이다. 그러나 '우'자는 나이가 많거나,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들에게 붙이는 경칭이며, '몽'자는 미혼의 젊은 사람에게 붙이는 것으로 영어의 미스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의 성(姓)씨는 매우 복잡하고, 그 숫자로도 13만 2천여 성씨로 세계에서 제일 많은 민족 중의 하나이다. 일본의 성(姓)씨는 두 글자 성(姓)씨가 제일 많고 한 글자나 세 글자 성(姓)씨도 많다.

 족보는 한국이나 동양의 일부국가에만 있는 것으로 아는 이가 많은데, 사실은 세계 거의 모든 나라에 족보제도가 있다. 많은 나라들에 족보학회가 있으며, 족보만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도서관이 있는 나라도 있다. 미국의 족보전문 도서관에는 마이크로 필름화가 되어 있으며 족보학회가 창립된 지도 80년이 넘어 많은 학자들이 국제 회의를 통하여 족보에 대한 여러가지 세미나를 하고 있다. 특히 하버드 대학에서는 한국의 족보제도를 연구하기 위하여 한국의 족보들을 모두 마이크로필름으로 촬영하여 보관하고 있다.

 

7. 백두산과 한라산은 여자 존중의 표상!

 

백두산은 남자를 상징하는 이 밑에 자리 잡고 있고, 여자를 상징하는 연못(천지.天池)이 위에 떠 받쳐져 있다. 제주도의 한라산도 마찬가지로 남자를 상징하는 이 밑에 있고, 여자를 상징하는 연못(백록담.白鹿潭)이 위에 있다. 다른 곳의 연못 및 호수는 산 밑에 깔려 있는데, 이 곳의 연못 및 호수는 산 위에 떠 받쳐져 있다. 마치 여자남자 위에 떠 받쳐져 있는 형상을 취하고 있다. 남자를 의미하는 산이 여자를 의미하는 연못과 호수를 떠 받치고 있는 것이다. 다른 곳의 연못 및 호수는 산 밑에 깔려 있어서, 마치 여자가 남자 밑에 눌려 있는 형상을 취하고 있는데, 유독 이곳의 지형 만큼은 전혀 그렇지가 않은 것이다. 이것이 백두산 한라산의 깊은 매력이다. 백두산과 한라산은 우리 한민족의 풍습과 기질을 잘 표현하고 있는 상징물이며, 여자를 잘 받들어온 우리민족의 전통과 문화를 잘 표현해 내는 우리 민족의 가장 아름다운 표상인 것이다. 백두산과 한라산이 잘 떠 받들고 있는 백두산의 천지(天池)와 한라산의 백록담(白鹿潭)은 태고의 신비함과 아름다움을 간직한 천상(天上)의 호수이다. 우리나라 여인들과 아낙네들의 정갈한 모습에 견줄만 하다.

 역사적으로 우리 배달민족(倍達民族) 보다 여자를 잘 존중해 온 민족은 이 세상의 그 어느 구석에도 없다. 단지, 중국 대륙 문화의 왜곡된 유교 문화가 들어 와서 여자들이 힘들었던 조선 후기와 말기의 어두운 역사의 질곡을 제외하곤 말이다. 환국. 배달국.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발해. 통일신라. 고려. 조선 초기까지의 우리 민족의 전체 역사를 통해서 보면, 우리 민족의 전통과 문화는 항상 여자를 잘 받들어 왔다. 적어도 조선 후기와 말기의 역사의 부그러운 과거를 빼놓고는 말이다.

 

8. 여자를 존중하는 한국문화와 결혼제도

 

1) 여자를 존중해 온 우리들의 전통문화

 

중국의 역사는 대부분 이민족이 들어와서 중국 대륙에 나라를 세웠고, 하(夏).은(殷)나라 이후 한 왕조가 300년 이상 지탱한 나라가 없었으며, 기껏해야 명나라 276년, 청나라 268년 유지했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역사는 신라만 해도 1000(992)년 왕국이고, 고려 500(457)년, 조선 500(519)년 유지했었다. 중국의 문화는 매우 호전적이고 침략적 기질이 강해서, 중국의 가족 문화는 부계중심의 가부장적 차별적 가족문화이다. 그러나, 한국의 문화는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材)를 잘 받들고 사람을 존중하는 기질이 강해서, 한국의 전통 문화는 아들. 딸. 친가. 외가를 차별하지 않는 평등의 가족문화로서, 고조선. 삼국. 고려. 조선 전기 까지로 이어져 왔다. 그러나, 임진왜란병자호란 이후인 17세기 사림세력에 의해 성리학적 중국 문화가 사회 전반을 지배하면서 부계줌심(친가중심, 외가.처가 차별), 장자.아들(자녀간 차별) 가족 문화로 변화해 갔다. (한국사. 의희천著, 박영사 출판 참조)

 

 우리나라 전통적인 결혼문화는 일단 모계사회의 전통이 이어져 왔었고, 결혼을 하게 되면 남자는 일정기간 처가살이를 해야 했고, 애를 낳고 애가 성장하면 따로 분가 하는게 전통적인 결혼 문화였다. 조선 초에도 성리학을 도입하여 여자가 남자 집에서 살게 하자는 주자가례의 친영론이란게 있었는데, 그다지 보급되지 못했다. 중종(1488-1544)도 이 시책을 추구했지만, 그다지 빛을 바라지 못했다. 율곡 이이(1536-1584)선생도 퇴계 이황(1501-1570)선생도 모두 처가살이를 했었다. 그런데, 왜 우리 전통 문화인 처가살이가 없어졌는가 하면, 선조 때의 임진왜란(1592-1598)과 인조 때의 병자호란(1636-1637)으로 사회민심 회복 차원에서 유교 이념을 민중에까지 퍼트리려 노력했기 때문이다.

 

조선 전기에는 유교적 가치관의 남녀관이 정립되지 않았고, 그런 덕분에, 여성의 사회, 경제적 지위가 남성과 큰 차이가 나지 않았다. 재산의 상속도 남녀의 차별 없이 균등했었다. 그러나, 조선 중기, 즉 17세기를 기점으로 그 이전과 그 이후의 여성의 역할과 삶의 모습은 질적으로 크게 변화했다. 특히, 임진왜란(1592-1598)과 병자호란(1636-1637)을 겪으면서 여성들의 삶은 한 획을 그을 만큼 큰 변화를 가져왔다. 유교 문화의 토착화가 그것의 원인을 제공했다. 유교문화는 조선이 건국되면서부터 도입되어 생활에 접합시키려는 노력이 계속되어 왔고 그 결과 17세기에 이르러서 비로소 생활세계의 규범으로 자리 잡히게 되었다. 그러나, 경제적 역할 면에서 여성의 삶은 17세기 이전과 이후 큰 변화는 없었다. 다만 문화적 사회적 측면에서의 여성의 삶은 크게 변화했다.

 

2) 우리나라의 결혼제도와 여자에 대한 존중

 

고려시대 호적은 모계, 처계도 부계와 같이 광범위하게 기록했다. 조선시대 호적과는 달리 여자도 모두 이름을 함께 썼다. 고려시대 호적에는 남녀 구분 없이 출생순서대로 기재하고, 여성이 호주가 될 수도 있었다. 조선 초기까지는 남녀의 권리 및 사회적 지위가 대등했다. 재산도 평등 분할했고, 족보에 까지 올랐다. 그러나 조선 후기로 넘어가면서 여자의 지위가 많이 떨어졌으며, 심한 차별과 함께 순종을 강요 당하게 되었다. 그 이전까지 여자는 남자와 평등한 존재였고, 여자 역시 자신의 할 일과 도리를 잘 했고 평등한 대화를 했다.

 

조선시대의 결혼은 남자 15세, 여자 14세이며 허용되었다. 조선전기 까지는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 즉 남자가 처가에서 결혼하고 일정기간 처가에 사는 방식이 일반적으로 행해졌으나, 임진왜란병자호란 이후인 17세기 조선 후기부터는 가부장적인 가족제도가 확립되면서 중국식인 친영(親迎)제도, 즉 여자가 남자 집에 와서 결혼식을 올리고, 남자 집에서 시집살이하는 방식이 일반화되었다. 조선시대 초기까지는 결혼에 있어서 여성의 입장은 매우 유리하였다. 결혼식은 신부 집에서 치러졌으며 자식을 낳아 한 가정을 이룰 때까지 친정살이를 하는 경우도 많았다.

 

조선사회의 남녀 관계는 선조 때의 임진왜란(1592-1598)과 인조 때의 병자호란(1636-1637) 이후인 17세기 이후 성리학의 지배이념이 확고하게 성립되면서 반전된다. 이후 조선사회는 철저한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질서가 강요되어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점점 열악해진다. 특히 결혼이 시집살이를 강요하는 형태로 변모하자, 여성들의 지위 향상은 물론이고 사회진출은 완전히 차단되게 된다. 결혼에 따른 시댁에 대한 여러 가지의 의무사항은 여성으로 하여금 더 이상 사회활동에 관심을 두지 못하게 하였다. 그렇지만 모든 여성이 집안일에 매몰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19세기가 되면 영남의 일부와 관북지방에서는 여자가 장터에 나가 상인과 상대하며 흥정을 벌였다. 특히 관북의 여성은 목축과 밭일을 남자 이상으로 하였다. 이것은 제주도의 여성이 바다에 나가 일하는 것과 같은 현상으로 삶의 터전이 척박한 곳의 일반적 현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