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 (한국)

■ 베트남 전쟁에서 천하무적이었던 한국군

마도러스 2021. 12. 22. 02:02

■ 베트남 전쟁에서 천하무적이었던 한국군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의 대우는 보급과 수당 면에서 미군은 물론이고, 다른 참전 연합국에 비해서도 좋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군의 9:1 사상자 포로 교환 비율에 비하여 한국군은 25:1의 사상자 포로 교환 비율을 나타냈다. 베트콩 포로 25명과 한국군 포로 1명이 교환되는 것이다. 파병 한국군의 전과는 놀라운 수준이었다. 전쟁 후반기의 작전에는 100대의 1의 교환비를 보여주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실제로 베트콩 및 북베트남 군대 내부에서 '한국군과의 전투에서 확실히 이긴다는 보장이 없을 경우, 절대로 한국군과 싸우지 말고 피하라'는 식의 명령을 내렸다. 한국군의 용맹함은 동맹군들 사이에서도 유명한 편이었다. 장비나 신체 조건 상으로 보면, 미군보다 활약이 떨어져야 정상인데, 도리어 정반대 결과가 나왔기 때문이다.

 

한국군이 잘 싸운 이유로는 첫째로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의 해외 파병이라 교대할 병력을 보낼 때에 전투력 최우수자를 우선적으로 뽑는 식으로 철저하게 준비를 했기 때문이고, 둘째로 해방 이후 오랜 기간 이어온 빨치산 토벌 등의 전훈으로 게릴라를 상대하는 방법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게릴라는 민심을 얻어야 살아남을 수 있는 만큼 대게릴라전에서도 민심을 이쪽으로 돌리는 것이 중요하다. 한국군은 민심 확보를 최우선 과제로 두고 대민 작전과 지원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한국군은 참전 기간 중에 대민 진료 352 3,364, 식량 1 9,640, 의류 46 1,764, 농기구 6,406, 가옥 및 교실 3,319, 교량 132, 도로 394, 태권도 보급 90 2,060, 경로 및 어린이 잔치 6,848, 연예 공연 2,304회 등 대민 사업을 적극적으로 실시하여 한국군이 전투력 보다 민사 작전 능력이 더 널리 알려질 정도가 되었으니, 한국군이 베트콩을 상대로 전공이 높았던 데는 모두 다 이유가 있었다. 한국군은 지금도 해외 파병시에 현지 주민 진료, 대민 지원 사업을 우선시하고 있으며, 한국군의 민사 작전은 유엔에서도 인정받고 있고, 현재 민사 작전에서는 세계 최고로 평가 받고 있다.

 

한국군은 원래 구식 무기인 M1 개런드를 들고 있었으나 채명신 장군이 미군 지휘부를 설득한 끝에 미군이 막 보급받던 M16 소총을 약간 받아온 것을 시작으로, 몇 년이 지나고 나서는 한국군 전군이 M16 등의 신예 병기로 무장하였다. 따라서, 병사 개개인의 화력에서도 미군에 뒤떨어지지 않았다. 거기다가 사령관의 제대로 된 지휘 덕에 지구 방위대 미군보다도 오히려 더 잘 싸우는 결과가 나왔다.

 

미군이 12년간 수백만 발의 포탄을 쏘아대고, 수천 명의 전사자를 냈음에도 불구하고, 미군에게 실패와 좌절을 안겨준 공산군의 요새를 한국 해병대가 단 2시간 만에 점령했다, 한국군은 적으로부터 사격을 받으면, 즉각 2개 혹은 그 이상의 방면에서 공격을 가하여 베트콩이 도망칠 기회를 주지 않았다. 반면, 미군은 적으로부터 사격을 받으면 뒤로 물러나 포병지원이나 공중폭격을 요청한다. 그 다음에 공격을 하게 되니, 적은 이미 자취를 감추고 없었다.

 

베트남 전쟁에서 공산주의 병력의 공격에 있어서 미국 다음으로 한국의 기여가 가장 컸다. 남한의 육군, 해군, 해병대, 공군에서 총 30만 명의 병력을 베트남에 보냈으며, 이곳에서 이들은 북베트남군으로부터 매우 무서운 적이라는 평판을 얻었다. 1973년 철수 전까지 한국은 4 1천명의 적군을 사살하며,  3 8백 명의 병력만 잃었.

 

사실 초창기에는 미군이 헬리콥터 사격 지원과 포병 지원을 잘 안 해준 데다 한국군에게 주둔 지역을 넘긴 후, "너희들이 알아서 해라!" 라는 식으로 푸대접을 받아서 처음에는 어려움을 꽤 많이 겪은 면이 있었다. 전쟁 초창기, 해병 청룡 부대의 첫 대규모 작전 "청룡 1" 작전이나 맹호 부대의 "비호 6" 작전은 한국군의 독자적 작전이었다

 

물론, 후반부 대규모 작전도 한국군의 단독 지휘와 한국군 위주 작전이었지만, 미군 헬리콥터 지원은 기본이었다. "청룡 1" 작전은 투이호아의 혼바산 등의 험난한 산악전을 벌여야 했고, 고지나 산 속에 숨어있는 베트콩 기지들을 산 밑에서 치고 올라가기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예상 밖의 대성공을 거두자, 미군들이 대대적으로 지원을 해주기 시작했다. 후반 작전들에서는 밑에서 치고 올라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미군의 헬리콥터를 타고, 고지에 투입된 병력이 함께 앞뒤에서 적을 포위시켜 섬멸하면서 더욱더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