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 (한국)

■ 광복군(光復軍)은 대한민국 국군(國軍)의 뿌리!

마도러스 2021. 12. 28. 03:30

■ 광복군(光復軍)은 대한민국 국군(國軍)의 뿌리!

 

 1919 3·1운동 이후, 1919 04 11, 중국 상하이(上海) 이동녕(李東寧)의 주도로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다. 1919년 중국 상하이(上海) 육군 무관학교를 설립했고, 자체적으로 군사 간부를 양성하는 한편, 만주 지역의 독립군(獨立軍)을 관할하에 두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은 지역적 차이. 재정적 어려움 등으로 인해 실현되지 못했다. 그 뒤, 1932년 윤봉길(尹奉吉) 의거를 계기로 중국 정부의 지원과 협조를 받게 되었다.  1933 11 05일부터 김구(金九)는 낙양(洛陽) 군관학교에 한인 특별반을 설치하여 군사 간부를 양성하였다. 그리고, 중국의 중앙 육군 군관학교에서도 우리나라 청년들을 입교시켜 군사 인재의 양성에 힘썼다.  1937 중일(中日) 전쟁이 발발하자, 임시 정부는 군사위원회를 설치하고, 광복군 창설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일본군의 점령 지역이 중국 대륙으로 확대되면서, 임시 정부는 여러 곳으로 피난처를 옮겨다니는 상황에서 여의치 않았다.

 

 1940 09 17, 한국 광복군(光復軍)이 창설되었다. 중국의 임시 수도였던 충칭(중경重庆)에 정착하면서 광복군 총사령부를 창설했다. 임시 정부 김구(金九) 주석은 광복군 선언문을 발표하여 광복군은 한·중 두 나라의 독립을 회복하고자 일본 제국주의 타도하며, 연합군의 일원으로 항전할 것을 목적으로 한다 라고 광복군 창설의 취지를 천명하였다. 한국 광복군(光復軍)이 설치되기 전부터 사실 독립 운동가들은 여러 군대를 가지고 있었다. 각지의 독립 운동가들은 군사 학교를 세우거나 군대를 양성하는 일에 전력을 다했다. 하지만, 임시 정부는 독립 운동 계열 전체를 통틀어 유일한 정부 체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여러 세력 융합하고, 정규적인 군대를 가지고 싶어 했다. 그래서, 원래부터 있었던 임시 정부의 한국 독립당 당군과 지청천(池靑天)이 이끌던 독립군, 이범석(李範奭)이 이끌던 독립군 등 각지의 다양한 독립군을 연합하기 시작했다. 창군 준비는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1940 09 17,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군대인 광복군”(光復軍) 발대식을 갖고 창설되었다. 광복군(光復軍) 총사령관은 지청천(池靑天)이었다. 처음에는 광복군 스스로는 큰 역할을 갖지 못했다. 그래서, 중국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중국 장제스(蔣介石)가 한국의 독립 운동에 상당히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도움을 받는 것이 가능했다. 대신 광복군(光復軍)의 지휘권은 중국 국민당 정부가 통제하기로 했다. 광복군은 처음 시작할 때에 무척 초라했다. 임시 정부와 광복군은 실력을 키우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중요한 것은 일단 광복군 바깥에 있는 세력을 광복군으로 끌어들이는 일이었다. 노력은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다. 1941 01월에는 무정부주의 계열을 끌어들였다.  1941 11, 중국 국민당은 광복군 행동 준승 9개항이라는 것을 하달하기도 했다. 이 준승에 따르면, 한국 광복군은 중국군을 보조하는 입장이었으며, 중국의 명령과 통제를 받아야만 움직일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광복군은 이런 조항에 대단히 반발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1942 05, 광복군은 사회주의 계열의 김원봉(金元鳳)이 이끄는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 세력을 끌어들였다. 김원봉은 그간 김구 주석과 사상을 두고 경쟁하던 상황이라 이런 통합은 매우 값진 것이었다.

 

 태평양 전쟁 (1941 12 07-1945 09 02) 발발 때에는 연합군의 일원으로서 일본. 독일을 향해 선전 포고를 하기도 했다. 1943년에는 영국군에 파견되어 인도. 버마 전선에서 전투에 참여하기도 했다. 전투에 참여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포로 심문이나 적군 회유 등에 투입됐다. 당시에 연합군 쪽에서 일본어를 유창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광복군이 거의 유일했기 때문이었다. 임시 정부의 끈질긴 노력으로 결국 광복군 행동 준승 9개항은 1944 08월에 폐기되었다. 광복군(光復軍) 통수권은 완전히 임시 정부로 이양되었다. 다만 국민당은 재정적인 지원은 끊지 않았고, 따라서, 영향력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1945 06 광복군(光復軍)은 모두 3개 지대로 재편성되었다. 1지대장은 김원봉(金元鳳), 2지대장은 이범석(李範奭), 3지대장은 김학규(金學奎)가 맡았다. 광복군은 미국 국무성과 연락을 취해 OSS (Office of Strategic Services 전략 사무국)에서 한반도 진입을 위한 특별 훈련을 받았다. OSS는 현재 미국 CIA의 전신이다. 1945 08 04 3개월 과정 훈련을 받은 1기생 배출이 완료되었다. 임시 정부 김구 주석은 OSS 책임자와 협의하여 훈련받은 광복군을 1945 08 11일 국내에 침투시킨다는 국내 진공 작전을 계획했다. 통수권자는 김구 주석이었고, 총지휘관은 제2지대장 이범석(李範奭) 장군이 맡았다. 광복군 '국내 진공 작전' 2지대 3지대 장병들 위주로 진행되었고, 1지대는 거의 배제되었다. 왜냐면, 김구(金九) 주석이 사회주의 냄새 나는 1지대 김원봉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 세력을 멀리했기 때문이다. 국내 진공군 작전 내용은 시안(西安)과 푸양(阜陽)에서 OSS 훈련을 받은 광복군에게 각종 비밀 무기를 주고, 산뚱(山東) 반도에서 미국 잠수함을 태워 1945 08 11일 한반도롤 들여보내서, 이들로 하여금 국내의 일본군 거점 파괴 및 중요 전략지 점령한 후에 미국 비행기로 첨단 무기를 국내로 운반한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1945 08 06 히로시마에 원자폭탄 투하되고, 08 09 나가사키에 추가로 투하되면서 광복군의 서울 진공 작전은 취소되었다. 설령 서울 진공 작전이 실행되어 성공했다 해도 임시 정부가 승전국 지위를 얻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대대(大隊) 병력만도 못한 병력으로 조선 주둔 일본군에 혼란을 줄수는 있을지언정 일본군을 몰아내기는 어려웠고, 설령 몰아냈더라도 미국이나 소련은 임시 정부를 승전국으로 인정해줄 마음이 전혀 없었다.

 

 1945 08 15, 일본은 항복 선언했고, 국토는 광복군이 아닌 외국 군대에 의해 해방(解放)을 맞았다. 1945 08 16 광복군(光復軍) 선발대는 국내로 들어가기 위해 미군 비행기를 타고 한반도로 향했다. 하지만, 아직도 일본 가미카제 특공대가 연합군을 공격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회항하고 말았다. 1945 08 18, 장준하(張俊河). 김준엽(金俊燁) 등 광복군 대원들이 미 육군 고문단과 같이 미 육군 항공대의 비행기를 타고 서울 여의도 비행장에 착륙했다. 하지만, 일본 육군의 저항 탓에 발길을 돌렸다. 결국, 비행기를 다시 돌려 중국으로 돌아갔다. 결국, 미군(美軍)에 의해 혼란이 어느 정도 수습된 뒤에서야 임시 정부 요인들과 광복군 요원들이 한국으로 귀국할 수 있었다. 정부와 군인 자격이 아니라 개인 자격의 귀국이었다. 광복군을 껄그럽게 생각하던 미군정에 의해서 중국을 압박하여 해산했고, 개인 자격으로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미군정(美軍政) 사설 군사 단체 해산령을 내려서 국내에 진주한 광복군을 해시켰다. 그리고, 중국에 남아 있던 광복군도 결국 해체를 선언하고 돌아오게 되었다특히, 애국(愛國) 애민(愛民)에 몸바쳤던 광복군 출신들은 미국과 소련에 의한 남북 신탁(信託) 통치를 강력하게 반대했기 때문에 미군정(美軍政) 임시 정부 및 광복군 모두를 강제 해산시켰다. 결국광복군(光復軍)은 1946 06월 완전 해체되었. 광복군의 규모는 작았지만, 임시 정부가 유일하게 정통성을 가지고 있었다 광복군 출신 장준하(光復軍) 1967년 대통령 선거에 맞추어 나온 소설 광복군’(저자 박영만)에 격분했다. 만주군 일본 장교였던 박정희(朴正熙) 비밀 광복군으로 둔갑시켰기 때문이었다. “박영만은 청와대에서 몇푼 돈을 받을 생각으로 소설 광복군을 썼는데, 내용을 훑어본 박정희 대통령은 내가 어디 광복군이냐? 누가 이따위 책을 쓰라고 했냐?’ 라며 화를 냈다. 결국, 박영만은 돈 한푼 못 받았고, 거창하게 준비한 출판 기념회도 치르지 못했다 라고 김승곤 전() 광복회장이 증언했다. 소설 광복군에 근거해서 수많은 가짜 정보들이 유통 삽입되었다. 육군 본부가 발간한 '창군 전사', 장창국이 출간한 '육사 졸업생'에도 그와같은 가짜 거짓 정보가 삽입되었다1967년에 발간된 소설 광복군의 여파는 몇십년간 이어져서 1991 MBC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에서도 만주군 일본 장교로 활동했던 박정희를 비밀 광복군 모습으로 둔갑시켰다가, 독립 운동가들의 거센 항의를 받기도 했다.

 

 광복군(光復軍)은 훗날 대한민국 국군(國軍) 창설에 기여했는데, 주로 2지대와 3지대 출신이었다. 반면, 광복군 1지대장 김원봉(金元鳳) 1948년 북한으로 월북하여 6·25전쟁의 공로로 북한 훈장까지 받았다. 광복군 '국내 진공 작전'에서 김원봉이 이끄는 1지대는 배제되었고, 광복군의 주류 활동과는 거리가 멀었다★ 1945년 광복 후, 미군정(美軍政) 유동열(柳東說) 광복군 참모총장에게 통위부장(국방장관)을 맡겼다. 미군정은 국군(國軍)의 모체인 조선 경비대(국방경비대)를 창설했고. 총사령관은 광복군 훈련처장 및 2지대장 출신인 송호성(宋虎聲)에게 맡겼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국군(國軍)이 창설되었는데, 미군정 ‘조선 경비대 국군(國軍)의 모체가 되었다. 국군(國軍) 창설 과정에서 광복군의 주요 인사들이 중심 역할을 맡았다. 청산리 전투에 참전했던 광복군 참모장 및 2지대장 이범석(李範奭)은 대한민국 초대 국방장관이 되었고, 광복군 총무처장 최용덕(崔用德)은 초대 국방차관과 제2대 공군 참모총장을 맡았다. 이봉창. 김봉길 의거 때 폭탄을 지원했고 광복군 참모장을 지낸 김홍일(金弘壹)(金弘壹) 육사 교장을 맡다가 6·25전쟁 때 큰 전공을 세웠다. 광복군 출신들이 거의 대부분 한국 육군(陸軍)에 입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광복군 숫자 자체가 워낙에 적었고, 나이 좀 있는 사람들은 정치쪽으로 빠졌다. 육군(陸軍)에는 일본군과 그 하수 노릇했던 만주군 출신들이 더 많았기 때문에 광복군 출신들이 목소리를 많이 내기 힘들었다. 광복 직후부터 6.25 전쟁기까지 군() 경험을 가진 자원을 모두 끌어모으다 보니, 대부분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이었고, 초창기 국군 고위 지휘관과 장교 다수가 일본군, 만주군 출신으로 구성될 수 밖에 없었다.  대한민국 해군(海軍)은 독립운동가 손원일(孫元一) 제독을 비롯한 상선 사관을 중심으로 창설되었다. 손원일(孫元一) 제독 본인이 독립운동가였고, 중국 해군 국비 유학생이었으며, 임시 정부 의정원 의장 및 교통부 총장을 역임한 손정도(孫貞道) 아들이었으므로 철저한 광복군 계열이었다. 해군은 창군 때부터 독립운동가 손원일 제독을 위시한 상선 사관들이 주류를 이루었기에 일본군 출신들이 가장 많이 배제된 군종이었다.  대한민국 공군(空軍)의 경우, 중국 공군에서 기지 사령관과 공군 차장을 역임한 베테랑 최용덕(崔用德) 장군을 중심으로 출신 불문 항공인들이 모여 창설이 진행되었다. 특히, 공군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최용덕崔用德) 장군은 육군 항공대 초대사령관, 공사 교장, 공군 참모총장까지 역임하였다. 김구(金九)의 아들인 김신(金信)을 비롯한 중국 공군 군관학교, 운남 비행학교 출신 고위 장교 및 고위 인사들이 초기 공군 창건에 지대한 공헌을 한 탓에 대한민국 공군은 광복군의 영향이 가장 컸고, 건군 초기부터 미군의 영향을 크게 받은 이유로 일제의 잔재가 가장 적었다.

 

 국군의 날 10 01 6.25 한국 전쟁(1950-1953) 당시 남침한 북한 공산군을 반격한 끝에 38선을 돌파하여 북으로 진격한 날로 지정하였다. 1950 10 01, 유엔군 사령부로부터는 정식 북진 명령이 하달되지 않은 상태에서 구두 명령에 의해 국군 제3사단  23연대와 수도사단의 선두 부대가 먼저 동부 전선에서 38선 돌파함으로써 북진 작전의 막이 올랐다. 서부 전선에서는 미() 8군이 1950 10 09일부터 일제히 38선 돌파를 성공시켰다. 맥아더(MacArthur)의 북진 명령이 떨어지자, 곧장 대대적인 예비 폭격이 시작되었다. 정찰기들이 쉴새 없이 북한 상공을 날아다녔으며, 북한군 부대나 진격에 방해가 될 것으로 추정되는 목표물들이 발견되면, 얼마 뒤에 B-29 폭격기들이 날아들어 융단 폭격을 퍼부었고, 이후에는 F-80. F-51D 같은 전폭기들이 또다시 날아들어 전략 요충지를 폭탄으로 쑥대밭을 만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군은 대낮에는 퇴각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었으며, 야음을 틈타 계속 북쪽으로 도주해야 했다. 1950 10 09, 미군이 개성(開城)에 입성했으며, 1 기갑 사단이 북한의 수도인 평양(平壤) 쪽으로 진격을 시작했다. 1950 10 19, 서부 전선의 국군 제1사단은 밤낮을 가리지 않는 강행군으로 평양(平壤)에 제일 먼저 입성하였으며, 곧이어 미군 제1 기병 사단, 국군 제7사단의 선두 부대도 평양에 진입하였다. 이무렵, 북한군은 더 이상 저항할 수 없을 정도로 와해되었으므로, 곧 전쟁이 승리로 끝날 것으로 예상되었다. 미군 F-51D 전폭기들은 압록강 상공까지 진출하여 퇴각 중인 북한군을 공격했다. 한국 전쟁으로 인해 북한의 경우, 43만여 발의 폭탄이 투하된 평양(平壤)은 전쟁 후 건물이 단 두 채밖에 남아있지 않았으며, 산업 기반은 거의 초토화되었다. 그 이후, 북한은 미군의 융단 폭격과 공습을 가장 무서워했다. 1973년에 개통된 평양 지하철 승강장이 지하 100m-150m에 있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현재, 우리가 기념하고 있는 국군의 날 10 01은 국군의 새로운 위상과 참모습을 적극 홍보하고, 장병의 사기를 진작하며, 유비무환의 총력안보 태세를 확립하기 위하여 제정되었다. 하지만, 장차 통일이 되면 북한군 역시 자연스레 우리 국군과 통일될 것이다. 그러므로, 통일 한국의 국군을 기념하는 국군의 날 역시 새롭게 제정되어야 한다. 대한민국 국군의 뿌리인 한국 광복군의 창설일 1940 09 17을 기념해야 할 것이다. 과거 분단 시대에 벌어졌던 동족상잔(同族相殘) 비극을 기념하는 것은 모순일 것이다. 광복군(光復軍)의 후예인 우리 국군이 1940 09 17을 기념함으로써 광복군의 정통성을 계승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