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 (한국)

■ 박정희 보자마자, 돌아서 누워버린 김창숙 선생

마도러스 2022. 4. 6. 03:58

■ 박정희 보자마자, 돌아서 누워버린 김창숙 선생

 

 박정희(朴正熙) 1961 5.16 쿠데타 직후, 독립운동가 김창숙(金昌淑) 선생을 병문안(病問安) 인사했다. 독립 운동가들의 지지를 획보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창숙 선생은 독립 운동가들을 토벌했던 박정희(朴正熙)를 악질 친일파(親日派)로 생각하여 돌아누우며 외면하였다. 독립운동가 김창숙(金昌淑) 선생은 중국 상하이에서 독립 투쟁을 하다 체포된 후, 14년 형을 받고, 수감 중에 옥중에서도 투쟁을 하다 일본 경찰의 고문(拷問)으로 앉은뱅이가 되신 분이다. 그 분은 아무에게도 보살핌을 받지 못한채 병원 골방에서 쓸쓸히 지내고 있었다. 그가 병석에 누워있을 때에, 1961 5.16 쿠데타 직후, 독립 운동가들의 지지를 얻으려했던 일본 관동군 장교 출신 박정희(朴正熙)가 나타났다. 그러자, 당시 김창숙(金昌淑) 선생은 박정희(朴正熙)를 쳐다보자마자, 반대로 돌아서 누웠다고 한다.

 

 김창숙(金昌淑) 선생 : 중국 상하이 임시정부의 주요 인물이며, 1945 8·15 해방 후에는 이승만 정권의 독재에 반대하는 투쟁을 벌였다. 서울 성균관대학교의 설립자이다. 1910년 일제(日帝)에 국권을 빼앗긴 뒤, 칩거하며, 유학 연구에 몰두했다. 그의 유학적 소양과 한학의 조예는 주로 이 시기에 기반이 다져졌다. 1919 3·1운동이 일어나자, 전국의 유림을 규합하여 '1차 유림단 사건'과 제2차 유림단 사건'을 이끌었다. 이후, 활발한 항일 운동을 벌였다. 1924년 중국 국민당과 교섭하여, 만주와 몽고 접경지의 황무지를 개간하여 한인(韓人)들이 집단 거주하는 독립 운동 기지를 건설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1925년 국내에 잠입하여, 모금 활동을 폈으나 기대한 성과는 올리지 못하고, 중국으로 돌아갔다. 이때의 모금 활동으로 600여 명의 유림계 인사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는데, 이것이 '2차 유림단 사건'이다. 1926년 청년 결사대를 국내에 파견하여 친일파와 일제의 통치 기관을 박멸하기로 결정하고, 양척식주식회사를 폭파하게 했다. 1927년 중국 상하이의 한 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중, 일본 영사관 관원에게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었다. 대구 지방법원에서 14년형을 선고받았고, 대전 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34 9월 병세가 악화되어 형집행정지로 출옥했다. 출옥한 뒤에도 항일(抗日) 자세를 꼿꼿이 유지했다. 1945년 해방 이후, 난립한 유림 단체의 통합에 힘썼다. 그리고, 친일파 유림이 득세했던 성균관을 정비하여 성균관대학을 새롭게 설립했다. 1953년에는 종합대학으로 승격하고, 초대 총장이 되었다.

 

 

■ 한국 경제 망친 원흉은 바로 박정희(朴正熙) 였다!

 

박정희(朴正熙)는 1932년 구미(龜尾) 보통 학교를 졸업하고 대구(大邱) 사범 학교에 입학한 후, 1936년 04월 01일 20세의 나이로 3살 아래인 김호남과 결혼했다. 경북 선산군의 부잣집 딸이었으며, 훤칠하고 늘씬하게 예뻤다고 한다. 1937년 03월 그는 21세의 나이로 대구 사범 학교 졸업했고, 그 해 04월에 문경 보통학교로 부임하여 교사로 근무했으나 학교 교장하고 사이가 안 좋았다. 그래서, 만주(滿洲)로 가고자 했고, 군인(軍人)이 되고자 했다. 그런데, 그가 찾아간 곳은 만주의 독립군(獨立軍)이 아니라 일본(日本)의 만주군(滿洲軍)이었다. 1939년 03월 그는 일제(日帝) 만주국(滿洲國)의 만주 군관 학교에 지원했으나, 연령 초과로 1차에서 탈락하였다. 1939년 08월 24일 그는 일본군(日本軍)으로서 동북 항일 연군(독립군)을 토벌하는 대사하 전투에 참여했으나 패퇴했다.

 

1940년 04월 01일 그는 만주국 육군 군관 학교 제2기생으로 입교할 수 있었고, 1942년 3월 25일 1등으로 졸업한 후, 일본 육군 사관 학교에 3학년 과정에 편입하였다. 대구(大邱) 사범 학교 시절에는 성적이 ‘꼴찌’까지 떨어졌지만, 일본 육군 사관 학교에 간 뒤에는 늘 우등생이었다. 1944년 03월 28세의 나이로 만주군 보병 제8단 육군 소위(少尉)로 임관하였고, 1944년 04월 육군 사관 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 1945년 07월 10일에 만주군 중위(中尉)로 승진하였으며, 만주 보병 제8사단에서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망할 때까지 만주국의 일본군 중위(中尉)로 근무했다. 조국이 해방될 때까지 그는 ‘일본군의 충실한 장교’로 착실히 복무했다.

 

1939년 03월 박정희는 일제(日帝) 만주국(滿洲國)의 만주 군관 학교에 지원했지만 연령 초과로 1차에서 탈락했는데, 1939년 03월 31일자로 발행된 만주(滿洲) 신문에 따르면, 박정희(朴正熙)는 만주 군관 학교에 다시 지원하면서 지원 서류 중에 일본군에 충성을 맹세한 혈서(血書)와 일본군 지원을 호소했던 편지(便紙)를 첨부하여 제출함으로서 반드시 만주군에 들어가려고 하였다. 혈서에 대해 보도한 1939년 3월 31일자 만주 신문은 현재 일본 국회 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다. 일본군에 충성을 맹세한 혈서(血書)에 쓴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 번 죽음으로써 충성함(一死以テ御奉公 朴正熙)”

 

만주(滿洲) 신문 1939년 03월 31일자 기사의 박정희(朴正熙)가 일본군 지원을 호소했던 편지(便紙)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이 첨부되어 있다. "일본인(日本人)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 일사봉공(一死奉公)의 굳건한 결심입니다. 확실히 하겠습니다. 목숨을 다해 충성을 다할 각오입니다. 한 명의 만주 국군으로서 만주국(滿洲國)을 위해, 나아가 조국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멸사봉공, 견마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

 

박정희(朴正熙)는 스스로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로 창씨개명(創氏改名)하였다. 첫 번째의 변신(變身)이었다. 만주 군관 학교 2기생 졸업 앨범에서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 이름을 사용하였음이 확인되었다. 그 후, 그는 또 하나의 이름을 사용하였다. 그것이 바로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이다. 두 번째의 변신(變身)이었다.

 

재미 언론가 문명자는 1999년 그의 저서 ‘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에 “만주 군관 학교 시절 박정희의 창씨개명(創氏改名)은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였으며, 그 곳을 졸업하고 일본 육군 사관 학교에 편입했을 때 박정희는 창씨개명(創氏改名)을 완전히 일본 사람 이름처럼 보이는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로 또 한번 바꾼다.”라고 서술하였다. 건국대학교 김병태 교수는 “박정희가 일본 육군 사관 학교를 졸업하고 관동군 23사단 72연대에 배속됐는데 거기에서 연대장의 이름이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였다”고 설명하였다.

 

중국 조선족 작가 류연산은 ‘일송정 푸른 솔에 선구자는 없었다’(아이필드 출판)에서 박정희(朴正熙)가 일본의 육군 군관 학교 제2기생으로 입학하기 전인 1939년 08월 24일 그는 일본군(日本軍)으로서 동북 항일 연군(독립군)을 토벌하는 대사하 전투에 참여했으나 패퇴했고, 이 후에는 만주 일대에서 독립군(獨立軍) 토벌에 나섰는데, 동북 항일 연군의 토벌이 그 증거라고 주장하였다.

 

군관 학교 졸업 후, 5개월 정도 현장 실습을 마친 박정희(朴正熙)는 1942년 10월 일본 육군 사관 학교 57기에 3학년으로 편입했으며, 1944년 04월 육군 사관 학교를 졸업했다. 1944년 12월 28세의 나이로 만주군 보병 제8단 육군 소위(少尉)로 임관하였다. 그리고 1945년 07월 10일에 만주군 중위(中尉)로 승진함과 동시에 만주(滿洲) 동북부의 열하성(熱河省) 주둔 만주군 보병 제8사단에 배속되었으며, 그들의 주된 토벌 부대는 중국의 팔로군(八路軍)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독립군 투사들이 주로 팔로군(八路軍)에 가담하였고, 박정희(朴正熙)가 팔로군(八路軍) 토벌에 참여하였으므로, 독립군(獨立軍) 토벌에도 참여한 셈이다.

 

박정희는 문경(聞慶)으로 돌아와 문경 보통학교 교사 시절에 자신을 핍박하였던 군수. 서장. 교장을 불러 사과를 요구했다고 전해지는데, 아래는 제자인 이순희의 증언이다. “박 선생님이 만주(滿洲)로 떠난 지 3-4년이 지난 어느 여름방학 때 긴 칼 차고 문경(聞慶)에 오셔서 십자거리(문경 보통학교 아래 네거리)에 계신다는 얘기를 듣고 달려갔지요. (중략) 하숙집으로 자리를 옮긴 뒤 박 선생님은 방에 들어가자마자 문턱에 그 긴 칼을 꽂고는 군수. 서장. 교장을 불러오라고 하시더군요. 그때 세 사람 모두 박 선생님 앞에 와서 ‘용서해 달라’고 했습니다. 아마 교사 시절 박 선생님을 괴롭혔던 걸 사과하는 것 같았습니다.”

 

1944년 12월 정식 만주군 소위(少尉)로 임관하였다. 이때 함께 근무했던 신현준, 이주일, 방원철 등은 훗날 1961년 5·16 군사 정변의 동지가 되었다. 박정희(朴正熙)는 만주 보병 제8단에서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망할 때까지 근무하였다.

 

1945년 08월 15일 광복이 되자 만주 보병 제8단 소속 부대가 없어진 박정희는 1945년 09월 21일 동료들과 함께 중국(中國) 베이징(北京) 쪽으로 건너가 장교 경험자를 찾고 있던 광복군(光復軍)에 편입되었다. 세 번째의 변신(變身)이었다. 일본군(日本군) 장교로서 일본에 충성하여 입신양명(立身揚名)하고자했던 박정희는 일본이 2차 대전에서 패망하자 갑자기 광복군(光復軍)으로 변신(變身)하였다. 박정희는 철저한 기회주의자(機會主義者)였고, 욕심이 많은 인간이며 패륜아(悖倫兒)였다. 그는 북경의 김학규가 지휘하는 광복군(光復軍) 제3지대 제1대대 제2중대장에 임명되어 광복군 장교로 활동하다가 1946년 05월 08일 미군(美軍) 수송선을 타고 부산항으로 귀국하였다.

 

1946년 05월 08일, 광복군 제2중대장으로 귀국한 그는 고향에서 넉 달간 휴식을 취하다가 1946년 09월 조선 경비 사관 학교 2기생으로 입학하여 단기 과정을 마치고 1946년 12월 14일 졸업 후, 대한민국 임시 정부 군대에서 다시 육군 소위(少尉)로 임관해 군인 생활을 시작했다.

육군 소위(少尉)로 임관한 박정희는 강원도 춘천에 있던 8연대로 발령받았다. 8연대는 1947년 2월, 미군(美軍)이 38선 경비 업무를 일부 이관하면서 다섯 곳에 경비 초소를 설치 운영하게 되었다. 이 시절 국군의 연대 단위 기동 훈련을 기안한 공로로 중위를 거치지 않고 바로 육군 대위(大尉)로 진급했다.

 

그 뒤 육군 소령(少領)으로 진급, 1948년 육군 본부 작전 정보국에 근무하던 중 여수. 순천 14연대 사건에 연루되어 조사를 받았다. 공산당(共産黨)의 남한 조직인 남로당(南勞黨)의 한국군 조직책이었던 박정희(朴正熙)는 여수. 순천 14연대 사건 후에 시작된 대한민국 정부의 군대 내 공산주의자(共産主義者)를 색출하는 숙군(肅軍) 작업에서 그동안 간첩 활동의 핵심 역할을 했던 것이 들통 나서 1948년 11월 11일 체포되었다. 그는 1945년 이후 남로당(南勞黨)에 입당하여 공산당(共産黨)의 한국군 하부 조직책으로 일해 온 것이었다. 그는 그의 형 박상희에게서 사상적으로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그의 형 박상희는 1946년 10월 01일 공산당(共産黨) 좌익(左翼) 시위를 하다가 경찰의 총격에 의해 사망하였다. 박정희(朴正熙)는 간첩 활동의 핵심 역할 죄목으로 무기 징역형을 선고받았는데, 그의 동지들 명단을 넘겨주는 댓가로 간신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결국 실형을 면하게 된 그는 1949년 01월 백선엽 장군의 배려로 다시 예편되어 육군 정보국에서 비공식 문관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1950년 06월 25일 한국 전쟁 발발 이후에 육군 소령(少領)으로 현역 복귀하였고, 이후 육군 본부 작전 정보국 제1과장을 거쳐 1950년 09월 15일 인천 상륙 작전이 감행될 때에 육군 중령(中領)으로 진급하고 대구(大邱)로 가는 육군 본부의 수송 지휘관을 맡았다. 1950년 10월 25일 제9사단 참모장으로 임명되었다.

 

1950년, 이승만 정권에게 앙금을 갖고 있던 박정희는 한국 전쟁이 발발한 상황에서 군사 반란을 시도했지만, 북한군과 전투 상황이었기에 그의 상급자들이 박정희를 무마시켜서 군사 반란(反亂)을 일으키는 것을 막았다.

 

1953년 11월 육군 준장(准將)으로 승진하여 장군이 되었으며, 1955년 7월 14일 제5사단 사단장이 되었다. 1955년 겨울 예기치 않은 폭설이 발생, 작업 중이던 여러 사단 소속 장병들이 사고를 당한 사건이 있은 후 박정희는 문책성 인사 조치로 대기 발령되었다가 1956년 육군 대학에 입교하였다. 1957년 03월 20일 육군 대학을 졸업한 뒤, 육군 소장(小將)이 되었다. 이어 박정희는 제 6군단 부군단장으로 부임하였으며, 1957년 제7사단 사단장으로 부임하였다. 1959년 07월 육군 제6관구 사령관이 되었다. 1960년 01월 부산 군수 기지 사령부 사령관으로 발령받았다.

 

1960년 04월 19일, 이승만 정권의 부정 선거에 항의하며 4·19 의거(義擧)가 발생하자 이승만 정권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헌병들을 동원하여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그 뒤에 국회에서 개헌을 통과시키고 직선제 대통령으로 출마하려고 하였다. 이승만 정권에게 앙금을 갖고 있던 박정희(朴正熙)는 다시 군사 반란(反亂)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1960년 05월 이승만 대통령이 자진 하야(下野)함으로써 실패하였다.

 

그 뒤 허정(許政) 대통령 권한 대행 겸 내각 수반의 과도 내각을 거쳐 1960년 07월 민주당 정권이 집권하게 되었으며, 1960년 08월 12일 윤보선(尹潽善) 대통령이 대통령 선거에 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여 제4대 대통령이 되었다.

 

민주당 정권이 집권한 후, 박정희는 육군 본부 작전 참모부 부장으로 부임하였다. 이 때, 이종찬(李鐘贊) 장군은 국무총리 장면(張勉)을 찾아가 박정희의 중용(重用)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총리 장면(張勉)은 이 문제를 바로 답변하지 않고 주한 미군 사령관 매그루더(Magruder) 사령관을 찾아 논의하였다. 며칠 뒤 매그루더는 한국 육군 본부로 박정희의 신원 조회를 요청하였고 김형일(金炯一) 육군 본부 참모차장은 “박정희는 좌익(左翼) 빨갱이이다!” 라고 답변하였다. 매그루더는 다시 장면(張勉)을 찾아 '그런 사람을 어떻게 그런 요직에 앉혀뒀냐'며 항의하였다. 육군 본부 작전 참모부 부장이었다가 이 일이 있은 후 1960년 12월 15일 제2군 사령부 부사령관으로 전보되었다.

 

제2군 사령부 부사령관으로 전보되었던 박정희는 윤보선(尹潽善) 정권에 대해 불만을 품게 되었다. 권력에 대한 욕구가 충만했던 그는 고급 장성의 부정 부패와 승진의 적체 현상을 공격하는 하극상(下剋上) 풍조를 야기했다. 소장 박정희(朴正熙)와 중령 김종필(金鍾泌)을 중심으로 1960년 09월부터 이미 군사 반란(反亂)을 모의하고 있었으며, 결국 1961년 5월 16일 새벽, 5·16 군사 정변(政變)을 일으켰다.

 

■ 왜? 우리는 박정희(朴正熙)를 역적이라고 부르는가? 

 

그는 꼭 일본(日本천황 폐하에게 혈서(血書)를 쓰고, 독립군(獨立軍)을 때려 잡는 간도(間道토벌대 일본군 출신이어서 만이 아니다. 굴욕적인 1965년 한일 협정, 몸도 마음도 모두 일본에게 다 갖다 바친, 나라를 팔아먹는 매국(賣國행위 때문이다. 이승만(李承晩)은 일본에 전후 배상금을 20억불을 요구했다. 장면(張勉) 정부는 28억불을 요구하였고, 장준하(張俊河) 선생은 21억불을 요망하였다. 그러나, 박정희는 단돈 3억불에 낙찰 시켰다. 그것도, 과거사는 "과거는 묻지 마세요!" 하기로 하고, 일본이 도둑질해 간 우리 문화재도 "너희들이 그냥 가져라!"하고, “위안부 문제, 강제 징용, 강제 노동자 임금 문제, 사할린 교포 문제, 모두 너희 좋을 대로 하세요!” 라고 했다. 그리고, 최근 발굴된 일본의 자료에는 일본(日本) 기업과 정부로 부터 엄청난 뒷거래 사실이 폭로되었다.

 

■ 박정희 때문에 경제 발전했나? 아니다!

 

★ 역대 대통령 재임 기간의 무역 수지를 살펴보면, 박정희 233억 달러 적자, 전두환 8억 달러 흑자, 노태우 132억 달러 적자, 김영삼 366억 달러 적자, 김대중 846억 달러 흑자, 노무현 980억 달러 흑자 등이다. 1986년부터 1988년 사이에 3저 호황(저금리. 저달러. 저유가)이라는 천혜의 외부 환경 때문에 대한민국 건국 이래 최초로 무역 흑자를 기록했다. 박정희 임기 내에 국가 부도 위기가 10번 정도 있었다. 외국에서 빌려온 차관 금액의 40% 가까이를 부채 해결에 쓰게 됨으로써 부채 돌려 막기 경제가 계속 반복되었다. 다행히도 1980년대 이후 민주화(民主化) 운동을 거치면서 정치 경제가 새로운 패러다임을 재구성하는 단계를 밟으면서 경제 체질이 개선되었다.

 

★ '박정희 대통령 덕분에 우리 경제가 이만큼 발전했다!' 라는 잘못된 인식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뭘까? 1950년대까지만 해도 독일(Germany)에서 여론 조사를 하면, 히틀러(Adolf Hitler)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꼽혔다. 하지만, 복지 국가의 기틀을 잡아간 이후부터는 일부 파시즘(fascism) 추종 세력에게서만 추앙받는 꼴이 되었다. 이와같이 '더 좋은 세상'을 살아보지 못한 사람들이 겪을 수밖에 없는 한시적 한계이다.

 

★ 박정희식 막개발이 땅값과 물가를 폭등시켜 후대에 큰 부담을 안겼다. 군사 독재가 경제를 살렸다는 속설은 이제 폐기되어야 한다. 2012년 우리나라 평당 땅값은 세계 1위인데, 이것은 누구의 책임인가?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독재 시대에 대부분의 지가 상승이 일어났고,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합해서 2% 정도 책임이 돌아갈 뿐이다. 한국의 땅값을 세계 최고로 만든 책임의 50%는 박정희 정권에게 있다.

 

★ 박정희 경제는 결국 카드 돌려 막기 경제였고, 만성적인 적자 구조 경제였다. 마이너스 카드 뽑아다가 계속 써 대고 나서 그걸 다시 돌려막기 하다가 망하는 그런 경제였다. 결국, 미국과 유럽 및 일본의 차관(借款)을 끌어다가 돌려 막기에 급급했다. 1962년도 무역 적자 규모가 5천 5백만 달러였는데, 1971년에는 5억8천2백만 달러, 1974년에는 20억 달러, 1979년에는 30억 달러로 상승했다. 결국 외국 차관(借款)으로 무역 적자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1980년대 특히 1986년부터 1988년 사이에 3저 호황(저금리. 저달러. 저유가)이 없었으면 한국은 아마 총체적 국가 부도를 맞이했을 것이다.

 

★ 박정희(朴正熙) 경제는 재벌과 결탁한 방식의 정경(政經) 유착 체제를 고착화시켰다. 그리고 관치 금융을 구조화했고, 강압적 노사 개입을 강행했으며, 농업을 압축 쇠퇴시켰다. 각종 특혜와 비리, 수조 수천억원대의 비자금, 그 피해는 고스란히 선량한 기업들과 남아있는 국민들의 몫으로 돌아왔다. 박정희 인맥과 그들의 정경(政經) 유착에 의해 그 더럽고 치욕스런 패착(敗着)의 고리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차별받고 상처받고 있는지 아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다.

 

★ 박정희는 독재 정권의 기득권으로 19년간 대한민국을 떡 주무르듯이 가지고 놀았고, 한국의 동서남북 찢어서 국민들 가슴에 상처를 주었고, 수많은 사람들을 눈물 흘리게 했다. 우리 경제가 겪고 있는 재벌 독식, 양극화 경제, 관치 금융 경제 같은 문제의 뿌리는 바로 박정희 정권 때문에 고착화 되어 왔다. 군사 독재 정권은 장기적 관점을 갖고 양심적으로 경제를 운용하는 것이 아니다. 눈앞의 성과(成果)에 급급하므로 경제를 잠시 흥청거리게 하고, 거시(巨示) 경제를 망친다. 독재가 경제를 살린다는 속설은 잘못된 것이다. 오히려 반대이다. 민주주의가 책임 의식을 갖고 경제를 제대로 운용한다.

 

★ 박정희 군사 쿠테타 세력은 특정 세력에 대한 온갖 특혜와 특정 출신의 지배 구조를 심화시켰다. 전국적으로 국민 공짜 강제 노역은 일상적으로 실시되었다. 모든 경제적 성과는 특정 지역에 배당되었고, 기업인마저 특정 지역 및 특정 세력에게만 특혜를 주는 관료주의 방식이었다. 그 나머지는 도산(倒産)되어 나가는 것이 실상이었다. 그 결과, 특정인들이 한국 경제를 장악했고, 대기업 및 재벌 기업이 양산되었다. 모든 생산 시설은 특정 세력에게 편중되었고, 임금 및 소득 격차가 심화되었다. 집권 세력의 비자금(祕資金) 및 불법 자금이 난무했고, 온갖 국민 성금(誠金) 모금이 정치적으로 성행됐다.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비리(非理)와 부패(腐敗)가 특권 세력에 의해 양산되었다. 부정 축재(蓄財)의 불법 자금은 천문학적인 수준이었다. 5공 청문회에서도 수십조의 돈이 비자금(祕資金)으로 세탁된 것이 발각되었다. 정치 건달과 정치 권력의 사조직이 난무했다. 정치와 권력에 빌붙어 기생하는 신문과 언론이 활개를 쳤고, 특정 세력의 비리가 독버섯처럼 자라났다.

 

■ 새마을 운동과 경제 개발 계획은 박정희 작품 아니다.

 

‘새마을 운동’과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은 원래 장준하(張俊河) 선생의 작품이었다. 그런데, 장준하(張俊河)는 박정희 정권에 의해 1975년 타살되었다. 그리고, 박정희는 장준하(張俊河)의 ‘새마을 운동’을 훔쳤고, 장준하(張俊河)의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역시 훔쳤다. 장준하 선생님이 오로지 가난한 국민을 위해 기획한 ‘국토 건설 사업’ 기획안을 박정희가 도둑질한 것이다. 1960년 장준하(張俊河) 선생의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은 1962년 그 이름 그대로 추진되었다.

 

1960년 장준하(張俊河) 선생의 ‘농촌 부흥 운동’은 이름표를 1970년 ‘새마을 운동’이라고 바꿔 달고 추진되었다. 그 후, 새마을 운동과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은 박정희의 창작물처럼 거짓 포장되어 역사에 기록되었다. 박정희씨는 장준하(張俊河)를 암살(1975)했고, 김영삼(金泳三)에 대한 염산 테러(1969) 및 김대중(金大中) 납치(1973) 행각을 벌인 독재자였다. 박정희 정권은 한국의 경제를 망쳐 놓았다. 박정희 집권 기간(1963년-1979년)에 전국의 땅값은 100배나 폭등했고, 물가는 11.8배나 올랐다. 무역 적자 규모는 천문학적인 규모였다.

 

★ 장준하 선생 작품을 훔쳐서 이름만 바꾼 새마을 운동

 

1960년 4.19 혁명으로 들어선 장면(張勉) 총리 정권은 곧바로 경제 발전 계획을 수립했다. 그 때 표방한 표어가 ‘경제 제일주의’, ‘1961년은 경제 건설 출발의 해’였다. 그 계획 중 하나가 ‘농촌 부흥 운동’ 및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추진을 위한 ‘국토 개발 기획단’ 사업의 발족이다. 그 단장을 장준하(張俊河) 선생이 맡았다. 하지만, 1961년 05월 16일 박정희(朴正熙) 육군 소장이 주도한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다. 그야말로 날벼락이었다. ‘국토 건설 사업’이 본 궤도에 올라서려는 순간, 군사 쿠데타에 의해 모든 사업은 중단되었다.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朴正熙) 군부 세력이 정권의 정통성 작업이 시급한 마당에 대대적인 ‘국토 건설 사업’은 후순위로 밀려났다.

 

1960년 장준하(張俊河) 선생의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은 박정희 제3공화국의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으로 이름을 바뀌었고, ‘농촌 부흥 운동’은 폐기 처분됐다.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그동안 방치되었던 농촌 개발과 식량 문제가 현실 과제로 대두됐다. 그래서, 1960년 장준하(張俊河) 선생의 ‘농촌 부흥 운동’을 부활시켰다. 대신, 이름표를 1970년 ‘새마을 운동’이라고 바꿔 달고 다시 등장시켰다. 박정희 군사 정권은 1960년 장준하(張俊河) 선생의 ‘농촌 부흥 운동’을 폐기해버렸다가 10년이 지난 뒤, 1970년 적당히 ‘새마을 운동’이라는 이름으로 바꿔 달고, 박정희의 창작품인 것처럼 표방했다.

 

★ 박정희 정권 시대에 매년 4월이 되면, 농촌에 ‘부녀자 가출 방지 기간’ 현수막이 걸렸었는데, 그 까닭이 뭐였을까? 1968년대말 특히 1968년 보건 사회부가 전국적으로 ‘부녀자 가출 방지’ 사업을 대대적으로 벌였다. 시골에서 먹고 살 게 없기 때문에 서울로 많이 올라간 것은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올라간다고 딱히 좋은 직업을 얻는 것은 아니었는데, 여성들은 주로 가정부(家政婦)나 공장(工場) 같은데 취직했다. 그거라도 얻는다면 좋은 거였다.

 

박정희의 새마을 운동은 구호만 요란했고, 농업을 압축 쇠퇴시켰기 때문이다. 특히, 농업 생산 과정 및 유통 과정이 국가와 자본에 의해 강력하게 종속되는 상황이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농(離農). 이촌(離村) 현상이 나타났다. 특정 세력에 대한 온갖 특혜가 성행했고, 전국적으로 국민 공짜 강제 노역은 일상적으로 실시되었다. 모든 경제적 성과는 특정 세력에게만 특혜를 주는 관료주의 방식이었다. 박정희의 새마을 운동은 군사 쿠테타 및 친일 매국노들의 군사 독재 체제의 선전 및 선동에 이용되었으며, 농민들이 실제로 느끼는 경제적 빈곤감은 심화되었다. 다행히도 1980년대 이후 민주화(民主化) 운동을 거치면서 정치 경제가 새로운 패러다임을 재구성하는 단계를 밟으면서 경제 체질이 개선되었다.

 

★ 박정희(朴正熙)는 독립군(獨立軍)을 토벌했다. 1939년 08월 24일 일본군(日本軍)으로서 동북 항일 연군(독립군)을 토벌하는 대사하 전투에 참여했다. 이 후에도 만주 일대에서 독립군(獨立軍) 토벌에 나섰다. 군관 학교 졸업 후, 5개월 정도 현장 실습을 마치고, 1942년 10월 일본 육군 사관 학교 57기에 3학년으로 편입했으며, 1944년 04월 육군 사관 학교를 졸업했다. 1944년 12월 만주군 보병 제8단 육군 소위(少尉)로 임관하였다. 1945년 07월 10일에 만주군 중위(中尉)로 승진함과 동시에 만주(滿洲) 동북부 열하성(熱河省)의 만주군 보병 제8사단에 배속되었으며, 그들의 토벌 대상은 팔로군(八路軍)이었다. 독립군 투사들이 주로 팔로군(八路軍)에 가담했는데, 박정희가 팔로군(八路軍) 토벌에 참여한 것이다. 독립군(獨立軍)을 토벌한 것이다.

 

★ 박정희(朴正熙)는 빨갱이 공산주의자였다. 공산당(共産黨)의 남한 조직인 남로당(南勞黨)의 한국군 조직책이었다. 여수. 순천 14연대 사건에 대해 공산주의자(共産主義者)를 색출하는 숙군(肅軍) 작업에 박정희가 간첩 활동의 핵심 역할을 했던 것이 들통 났고, 1948년 11월 11일 체포되었다. 1945년 이후 남로당(南勞黨)에 입당하여 공산당(共産黨)의 한국군 하부 조직책으로 간첩 활동의 핵심 역할을 해 왔다. 그는 그의 형 박상희에게서 사상적으로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그의 형 박상희는 1946년 10월 01일 공산당(共産黨) 좌익(左翼) 시위를 하다가 경찰의 총격에 의해 사망하였다. 박정희(朴正熙)는 간첩 활동의 핵심 역할 죄목으로 무기 징역형을 선고받았는데, 그의 동지들 명단을 넘겨주는 댓가로 간신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는 1949년 01월 백선엽 장군의 배려로 다시 예편되어 육군 정보국에서 비공식 문관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 1948년 박정희, 그는 원조 종북(從北) 빨갱이였다!

 

★ 1948년 11월 11일, 공산주의 남로당(남로당빨갱이에 연루되어서 검찰로부터 사형 구형을 언도받았고, 법원으로부터 무기징역 선고를 받은 사람이 있는데, 그가 바로 박정희(朴正熙)이다. 1948년 11월 11일 당시, 그는 육군 소령, 보직은 육사 1중대장이었다. 당시 군(軍)은 좌익 분자를 색출했는데, 박정희가 연루된 것이다. 남로당 군 총책인 이재복을 수사하다가 박정희가 남로당 당원임을 알게 되었다. 이재복은 박정희 형인 박상희씨 친구였다. 박정희는 이재복에게 포섭됐다. 숙군(肅軍) 당시 실무 책임자로 조사 과정에서 박정희가 쓴 '자술서'를 직접 읽어본 김안일 특무과장은 "박정희는 '대구 10.1사건'으로 형 박상희가 우익에 피살되자, 그에 대한 복수심과 형 친구 이재복의 권유로 남로당에 가입한 것 같다"고 증언한 바 있다. 또한, 춘천 8연대 시절 박정희의 직속 상사였던 김점곤 장군도 "박정희가 체포된 후 그의 자술서를 봤더니, 이재복을 통해 입당했다고 되어 있었다"고 증언한 바 있다.

 

★ 박정희는 누구인가? 일제(日帝) 식민지 때에 일본 '황군 장교'였고, 1948년 좌익이 한국 사회를 지배하자, 남로당에 가입했다. 하지만, 숙군(肅軍) 대상에 올라 처형당할 처지가 되자, 동료들을 밀고했다. 당연히 그는 자기 목숨을 건졌다. 박정희는 대한민국 전복 '반란 기도죄'로 1심서 무기징역, 2심서 징역 15년에 형집행정지를 받은 '빨갱이'였다. 그는 1950년 한국전쟁으로 군인 부족 사태가 발생하자, 구사일생하여 다시 군인으로 복귀되었다. 그리고, 1961년 05월 16일 군사반란을 일으켰고, 불법적으로 정권을 탈취했다. 그 후, 18년 동안 대한민국을 통치했다. 1972년에는 유신 쿠데타를 일으켰고, 체육관에서 대통령이 되었다. 그리고, 긴급조치를 난발하여 시민들의 자유를 빼앗았다. 그는 지독히 자신의 이익을 위해 권력을 지향한 사람이다. 박정희는 분명 일본 황군 장교로 조국을 팔았고, 남로당 당원으로서 동료를 팔았다. 또한, 권력을 잡기 위해 민주주의를 유린했다. 우리는 민주주의적인 양심으로서 그를용납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