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 (한국)

■ 이낙연(李洛淵) 인생 스토리와 정치 인기 드라마

마도러스 2021. 11. 3. 07:45

 

■ 이낙연(李洛淵) 인생 스토리와 정치 인기 드라마

 

★ 이낙연(李洛淵)은 조선 왕족 완풍대군(完豊大君)의 후손이다. 그는 태도를 중시한다. 부드럽다. 권투로 치면, 아웃 복싱(out boxing)을 한다. 상대의 공격을 받아치는 크로스 카운터(cross counter)가 일품이다. 그는 중도(中道) 보수에 가깝다. 목소리가 매우 중후하고 발성도 좋은 편이다. 오랜 기자 생활, 국회의원 경력, 도지사 및 국무총리 행정 경력에서 나오는 뛰어난 화술(話術)은 꽤 유명하다. 화술 내용 자체에도 사실 간의 관계가 짜임새 있게 들어 있다. 말을 많이 하는 정치인의 특성상 실언이 나오거나 틀린 말을 하는 경우도 많은데, 이낙연은 그런 경우가 다른 정치인에 비해 거의 없다. 기억력이 상당히 좋은 편이어서 사실에 관한 내용을 정확히 기억하며, 다른 사람의 주장에 대해 반박할 때도 'A 주장은 옳지 않다' 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A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라고 말하는 식이어서 재반박이 어려운 편이다. 하지만, 반대편의 합당한 주장은 바로 인정하는 편이라서 말꼬리 잡기가 쉽지 않다. 이런 식의 논설법으로 대정부 질문에서 야당 국회의원들을 비교적 쉽게 누를 수가 있었다. 국회 대정부 질의에서 언제나 내공 있는 언변을 보여주면서 ‘문재인 정부 최고의 달변가’ 라는 평가를 받았다. 원래 기자 출신이었기 때문에 그런 경력이 도움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리고, 그 내공에서 나오는 유머 감각은 범상치 않다. 키가 같은 또래들에 비해 큰 편이다. 젊었을 때는 177cm였다고 한다. 동아일보 재직 당시 도쿄 특파원과 한일 의원연맹 부회장을 역임했기 때문에. 일본어 실력 또한 유창한 편이다. 그의 막걸리 사랑은 매우 뜨겁다. 단순히 막걸리를 잘 마실 뿐만 아니라, 아예 국무총리실에서 주관하는 각종 만찬 행사에서도 다양한 막걸리 파티를 하며,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이 때문에 2019년 12월 27일에는 막걸리 협회로부터 감사패를 받기도 했다. 막걸리 애주가로 주량이 막걸리 6이라고 했다. 국무총리로 내정된 직후에도 "막걸리라도 마시면서 소통하겠다" 라며, 막걸리를 자주 언급했다. 술자리 분위기를 실수하지 않으면서 잘 맞출 줄 아는 사람이다. 아랫사람들에게 무척 꼼꼼하고 엄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국무총리 시절에 장관. 차관들을 벌벌 떨게하는 사람이었다. 얼굴을 보면, 곱슬머리이다. "곱슬머리는 국회의원 되기 힘들다" 라는 정치권 속설이 있었는데, 이를 깨버린 정치인이다. 평상시 얇은 수첩을 들고 다니며, 엄청난 정보를 메모한다. 매번 수시로 메모 수첩을 바꾸었다. “메모한다고로 나는 존재한다” 라고 그는 말했다. 그의 메모 습관이 가장 잘 드러난 사례는 2019년 강원도 산불 사태였다. 화재 발생 경과부터 피해 상황, 복구 대책 수립 과정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모습을 메모했다. 그것을 정부 브리핑이나 정부 회의 때에 꼼꼼하게 언급했다. 그의 꼼꼼한 메모 습관은 동아일보 취재기자 시절부터 익숙해진 것이라고 한다.

 

★ 2021 10 10, 민주당의 상식을 벗어난 사사오입(四死五入)으로 이재명(李在明) 경기도 도지사 결선 투표 없이 제20대 대통령 대선 민주당 후보로 잠정 확정되었다. 그러자이낙연(李洛淵)은 쉼표를 찍었고, 기나긴 여운을 남겼다. "어른이 된 뒤로 처음으로 이정표 없는 여행을 떠나게 됐다." 라고 말했다. 2021 10 14일 선거 캠프 해단식에서 그의 지지자들을 향해 강물은 굽이굽이 흐르다가 돌을 만나면 뛰어넘고, 바위에 부닥치면 돌아가고, 강물이 얼면, 강물은 얼음장 밑으로 흘러서 기어이 바다에 간다 라고 말했다. “강물은 절대로 바다를 포기하지 않는다!” 라며, 긴 여운과 쉼표를 던졌다.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의 품격과 정치 철학을 끝까지 계승하고, 나라와 민족 그리고, 한국 국민의 미래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정의로운 사회가 이루어지는 따뜻한 그날을 위해 함께 노력하기를 부탁했다.

 

 

★ 이낙연(李洛淵)은 1952년 전남 영광군 법성면 용덕리 386번지에서 7남매 중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광주 일고서울 법대 출신 엘리트이다. 서울 이태원의 8군 21 수송 중대에서 병역 근무했다. 동아일보 국제부 부장을 지내다가 정치에 입문한 5(국회의원이다. 국회의원을 지내는 동안, 몇백건에 달하는 제정개정 법률안을 대표 발의했다. 국회의원으로 활동할 당시 국정감사 우수의원으로 10차례 선정되었다. 1987년 김대중(金大中)이 사면 복권된 후, 김대중을 밀착 취재 과정에서 김대중과 가까워질 수 있었고, 2,000년에 새천년민주당 국회의원으로 당선되며, 정계에 입문했다. 그 후, 국회에서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 시정을 위한 특별위원회 간사와 과거사 진상 규명에 관한 특별위원회 위원을 역임했다. 2002년에는 대선 후보 단일화 추진 협의회 의원들에게 "지름길을 모르거든 큰길로 가라! 큰길을 모르겠거든 직진하라. 그것이 어렵거든 잠시 멈춰 서서 생각해 보라." 라는 논평을 내기도 했다. 2003년부터 노무현 대통령 대변인으로 활동했다. 전남 도지사국무총리민주당 당대표 등을 역임했다. 2017년 05월 31일 문재인 정부 초대 국무총리로 취임하였고, 2020년 01월 13일까지 활동했다. 그의 엄청난 활약 덕분에 그는 역대 최장기 국무총리로서 그의 역할을 200% 훌륭하게 수행했다. 이낙연 총리의 내각 장악력은 디테일에서 나온다는 평가가 많다. 오랜 기자 생활과 풍부한 행정경험이 어우러져 각 현안에 대한 이해도가 높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평소 디테일을 강조하는 스타일로 인해 관가에서는 ‘이테일’이라는 별명도 갖고 있다. 그는 규제 혁신 분야에서 산업 현장을 자주 찾았고, 기업인들도 꾸준히 만났다. 현장의 목소리를 직접 듣고 이를 정책에 반영할 것을 지시하였다. 특히, “규제는 내버려 두면, 반드시 늘어나게 되어 있다. 그래서, 비상한 각오를 하지 않으면, 절대로 줄어들지 않는다” 라고 말하기도 했다. 2018년 04월 한국지역신문협회 인터뷰에서 “소득이 낮으신 분연로하신 분장애를 가지신 분어린이 여성 이런 사회적 약자들께서 꿈과 희망을 가지고, 인생을 재미있게 살고, 자식을 키우며 편안하게 살 수 있는 최소한의 복지 사회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라며 그의 소신을 밝혔다. 국무총리로서는 최초로 2018년 07월 아프리카 순방 당시 대통령 전용기인 공군 1호기를 탑승하였으며, 이후 해외 순방 시에도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공군 1호기를 이용하였다. 문재인 정부의 신북방신남방 외교의 외연 확대를 위해에 노력했다. ‘투톱 외교’ 방침에 따라 이낙연 총리는 취임 이후 2-3개월에 한 번꼴로 해외 순방에 나섰다. 2020년 08월부터 민주당 당대표를 맡아서 수행했다.

 

★ 이낙연(李洛淵)은 경력이 매우 화려하다. 성공적인 기자 생활전남 도지사5선 국회의원역대 최장기 국무총리민주당 대표 등의 인생 경력을 밟았다. 경남도지사. 5선 국회의원. 한국당 대표를 엮임했던 홍준표(洪準杓)와 경력이 비슷하다. 하지만, 홍준표는 청와대 경력이 없다. 경력이 왜 중요한가? 국회의원은 국회의 일을 하고, 도지사는 지방 행정의 일을 하고, 청와대는 국가 행정의 일을 한다. 이러한 경험들은 국정 운영에 큰 도움이 된다. 국회 도움 없이 청와대 혼자 일하는 것은 어렵고, 행정 업무를 안해 본 경험으로 정부 운영은 어렵다. 업무가 돌아가는 사정을 빠삭하게 알아야 적재적소(適材適所)에 인재를 등용시켜서 국정 운영을 할 수 있다. 역대 최장기 국무총리 역임을 했던 이낙연(李洛淵)은 정부 행정이 돌아가는 것을 전부 도맡아 했기 때문에 대통령이 되는 가장 중요한 이력이다. 그래서, 그는 준비된 대통령이다. 그리고, 그의 얼굴은 신뢰를 보장한다. 살아온 이력에 흠이 없고, 외모에서도 호감형이다. 이낙연 후보는 직접 문재인 대통령이 점찍은 사람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 05월 제19대 대통령으로 출범하자마자 다음 대통령 후보까지 만들겠다고 공언했고, 전남도지사로 있던 이낙연을 국무총리로 모셔왔다. 그리고, 역대 최장기 총리 타이틀을 만들어 주었다. 민주당 대표까지 진출하는 것을 도와줬다. 적절한 시기에 국무총리직을 내려놓고, 선거에 뛰게 했고, 민주당 대표와 대선 경선 후보에 진출하게 만든 것을 보면, 미리 계획된 각본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민주당 정부에 걸맞는 인물이다. 이낙연 역시 문재인 대통령을 반드시 지키겠다고 선언했다. 가족 간의 불화도 없다. 형제간의 우애도 좋고, 심지어 실력도 좋다. 특히, 부인의 모습은 한국적인 기풍이 있다. 한국의 대통령 영부인으로서 아무런 손색이 없다. 대통령 영부인은 외교에서 아주 중요한 자리이다. 미술 선생님을 하며, 남편의 정치를 치밀하고 묵묵하게 내조했다. 봉사 활동 가는 곳마다 일을 잘 한다고 칭찬받았다. 마지막으로 자주 국방은 매우 중요하다. 국방 병역 의무를 제대로 이수한 사람이어야 한다. 군필(軍必대통령이 자주 국방을 강화시킨다. 노무현 대통령은 무기 매니아였고, 첨단 무기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자주 국방을 강화시켰다. 문재인 대통령은 미국과 외교를 통해서 미사일 중량 제한 해제 및 미사일 거리 제한 해제를 성사시켰고, 언제든 위협이 될만한 나라는 모두 폭파시킬 수 있는 자주 국방의 위엄을 달성했다. 막강한 자주 국방을 위해서는 군필이 필수적이다. 이낙연 후보 역시 군필이다. 거리 제한이 없는 미사일 개발은 한반도 주변 강국에게 매우 위협적이다. 그것을 중국도 알고, 일본도 알고, 미국도 알고, 러시아도 알 것이다. 그래서, 한국의 미사일 개발을 주변국들이 그동안 강력하게 반대해 왔다. 그런데, 문재인 대통령이 외교 수완을 발휘하여 풀어 놓았다. 그래서, 군필(軍必) 대통령이 중요하다. 윤석열(尹錫悅) 전 검찰총장은 부동시(不同視), 이재명(李在明) 경기도 도지사는 장애6급 판정을 받아 병역 면제를 받았다. 홍준표(洪準杓) 경남 도지사는 체중 미달로 군부대에서 방위 소집으로 있다가 이병 소집 해제되었다. 이낙연(李洛淵)을 대통령으로 만들어야 하는 이유는 무척 차고 넘친다. 외모만으로 뽑아도 되고, 실력만으로 뽑아도 되고, 말을 잘하는 것으로 뽑아도 되고, 배려있고 위트있고, 현장감 넘치는 사람을 뽑아도 되고, 옷빨이 잘 받아서 뽑아도 되고, 이력이 화려해서 뽑아도 되고, 가족이 화목해서 뽑아도 되고, 중량감 있고, 엄중하면서도 친근한 대통령 후보라서 뽑아도 된다. 대통령으로 뽑을 사유는 충분하다. 전라도 출신이기 때문에 김대중에 이어 새로운 전라도 출신 대통령이 배출되길 고대하는 전라도 민심의 갈증을 해소해 줄 수 있다는 것도 장점으로 꼽을 수 있다. 군사 정권 시기에는 말할 것도 없고, 제6공화국 이후에도 호남 출신은 김대중이 유일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제는 비영남 출신 대통령이 나올 법도 하다고 할 수 있다.

 

 다음은 이낙연(李洛淵)이 직접 쓴 글이다. 2000년 07월 31일 광주일고 동문 에세이집 "때론 치열하게 때론 나지막이"에 ”선생님을 그리워하며“ 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나는 선생님 복이 많은 사람이다. 학생 시절의 중요한 고비마다 선생님들의 큰 도움을 받았다. 선생님들께서는 나에게 바른 길을 제시하여 주셨고, 내가 조금이라도 빗나가지 않게 배려해 주셨다. 나에게 거의 정기적으로 고기를 먹여 주시기도 했다. 나는 궁벽한 시골에서 태어났다. 전라남도 영광군 법성면 용덕리가 내 고향이다. 그곳에는 삼덕 초등학교라는 조그만 학교가 있었다. 지금은 폐교되어서 법성 초등학교로 통합되었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에도 전체 학생 수가 200 남짓밖에 안 됐다. 각 학년에 한반씩 있었고, 학생수도 30-40명 정도였다. 그런 곳이어서 광주 같은 대도시의 중학교로 진학한다든가 하는 것은 거의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다. 주변에도 그런 전례가 별로 없었다. 나도 대도시로 진학할 생각은 갖고 있지 않았다. 그렇게 초등학교 6학년이 되었다. 그런 때에 광주 출신의 박태중 선생님이 부임하여 오셨다. 여드름 투성이의 22살 총각이셨다. 사범학교를 졸업하시고, 군대를 마치신 뒤에 맨 처음 부임하신 곳이 우리 삼덕초 등학교였다. 부임하시자마자, 박태중 선생님은 나를 지목하셨다. 광주 서중으로 진학하라고 일방적으로 명령하셨다. 그리고는 과목별로 목표 점수를 지정해 주셨다. 국어 95점, 산수 90점 하는 식이었다. 그 점수에서 1점이 모자랄 때마다 회초리를 한 대씩 때리셨다. 나는 공부를 가장 잘하면서도 선생님한테 회초리를 가장 많이 맞았다. 회초리가 너무 아파서 “내가 언제 광주 서중 간다고 했습니까?” 라고 항변도 했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뿐만이 아니었다. 박태중 선생님은 며칠에 한 번꼴로 밤에 우리 집에 오셨다. 수련장이나 전과를 갖다 주시기도 하고, 과자를 사다 주시기도 했다. 그러면서 “공부 잘 해!” 하고 격려하시곤 했다. 대도시 진학이나 입학 시험이라는 개념 자체를 갖지 못했던 나도 조금씩 달라졌다. 그래도, 나는 공부보다는 아버지와 농사 심부름을 하거나 친구들과 노는 시간을 더 많이 보냈다. 나는 전기였던 광주 서중에 합격하지 못하고, 후기였던 광주 북중에 합격했다. 광주에서 입학 시험을 보는 기간에도 나는 박태중 선생님의 자택에서 먹고 잤다.

 

광주 북중 1학년 때의 담임은 국어를 가르치신 정종선 선생님이셨다. 광주 북중은 현재의 북성 중학교이다. 정종선 선생님은 한 달에 한 번꼴로 나를 자택에 불러서 밥을 먹여 주셨다. 그 때, 선생님 댁에서 먹었던 쇠고깃국과 고소한 김 그리고 따뜻한 놋그릇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선생님은 밥상에 나와 단둘이 앉아 나에게 이것 저것을 먹게 하시고, 인생에 보탬이 될 만한 많은 말씀을 해주셨다. 선생님은 나의 가정 사정도 자주 물으셨다. 우리 집이 가난하다는 것을 아신 선생님은 내가 고향에 갈 때마다 “아버님께 갖다 드려라!” 하시면서 김이나 쇠고기를 싸주셨다. 광주 북중 3학년 때, 나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성적으로 보면, 광주 일고로 진학하고 싶었지만, 광주 일고에서는 장학금을 받기가 어려웠다. 공주 일고를 졸업한 뒤에 대학에 가려 해도 아버지는 나를 대학에 보낼만한 재산을 갖고 있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광주고로 가겠다고 마음 먹었다. 광주고에 가면, 장학금을 받기가 쉬웠고, 광주고에서는 학비가 거의 들지 않는 육군 사관 학교에 많이 진학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선생님들이 나를 교무실로 불렀다. 3학년때 담임 위후량 선생님께서 ‘주동자’가 되셨고, 다른 선생님들이 동조하셨다. 정종선 선생님도 동조자의 한 분이셨다. 위후량 선생님은 나에게 “광주 일고로 가거라!” 하시면서 “학비 걱정은 말라!” 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머뭇거리자, 위후량 선생님은 “아버님을 학교에 모시고 오라!”고 하셨다. 며칠 뒤에 나는 아버지를 모시고 교무실에 갔다. 위후량 선생님 등은 아버지에게 “낙연이 학비는 우리 선생님들이 모아서 댈 테니, 낙연이를 광주 일고에 보내주십시오!” 하고 요청하셨다. 아버지는 기분이 좋아지셨다. 아버지는 즉석에서 동의하셨다. 선생님들이 실제로 학비를 모아 주시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나 나는 선생님들을 한 번도 원망하지 않았다.

 

광주 일고 3학년 때의 담임은 국어를 가르치신 김정수 선생님이셨다. 김정수 선생님께서도 나를 몇 사람의 학생들과 함께 간간이 자택에 불러서 돼지 불고기를 먹여 주시곤 했다. 선생님께서는 항상 “너희들 나이에는 잘 먹어야 하는데, 내가 가난해서 이것밖에 못 준다” 라며 미안해하셨다. 옆에서 고기를 구워주시던 사모님께서는 “당신이 검사나 변호사를 했더라면, 돈도 더 많고, 학생들에게 고기도 많이 먹게 했을 텐데...” 라고 거드셨다. 그러면, 선생님께서는 “내가 선생이 아니었으면, 당신을 만나지 못했겠지!” 하고 되받곤 하셨다. 고등학교 3학년 2학기에 우리는 교련 반대 데모 열풍에 휩싸였다. 나도 때로는 친구의 자취방에 찾아가 데모를 모의하곤 했다. 학교로서는 큰 고민이었다. 대학 입시를 몇 달도 안 남긴 시점에 데모라니? 그런 고민들을 하셨던 모양이다. 선생님들은 고민 끝에 묘안(妙案)을 내놓았다. 3학년생들을 데리고 수학 여행을 다시 가자는 것이었다. 데모 열기를 다른 데로 돌리려는 아이디어였던 셈이다. 그러나, 데모를 모의하던 친구들은 수학 여행을 거부하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 무렵, 나의 하숙방은 좁은 골목으로 손바닥만한 창문이 나 있었다. 어느 날 밤, 누군가가 창문을 두드렸다. 창문을 열어보니, 김정수 선생님이 서 계셨다. 선생님은 “공부하냐?” 하시더니, “수학 여행 가거라! 이번에는 술을 마셔도 좋다!” 라고 하시는 것이었다. 선생님의 말씀이 너무 멋있어서, 나는 “예! 가겠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그리고, 데모를 모의하던 친구들을 설득하여 수학 여행에 동참하기로 했다.

 

수학 여행 2박 3일 동안, 나는 술을 마시지는 않았지만, 머릿속을 정리하고, 다시 공부에 몰두할 수 있게 됐다. 그 후로도 밤에 하숙방 창문 두드리는 소리에 창문을 열어보면, 김정수 선생님이 서 계시곤 했다. 선생님은 “공부하냐? 나 간다!” 하시며, 그냥 가시곤 했다. 고교 3학년 시절을 그렇게 보냈다. 그리고, 나는 서울대 법대에 입학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를 마친 뒤에 내가 동아일보 기자로 일하는 동안에 김정수 선생님은 정년 퇴임하셨다. 선생님은 경기도 과천으로 이사하여 살고 계셨다. 선생님은 간간이 신문사에 찾아오셔서 “자네글 잘 읽었네! 열심히 하게!” 하신 후, 그냥 가시곤 했다. 그리고, 내가 2000년 4·13 총선거에 출마하자, 선생님은 과천에서 전남 영광까지 내려오셔서 얇지만 따뜻한 봉투를 놓고 가셨다. 나는 선생님들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의 100만분의 1도 보답하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허둥지둥 살고 있다. 선생님들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저리고, 눈물이 솟구친다. 이 글이 선생님들에 대한 나의 작은 속죄가 될 수 있다면 좋겠다.

 

 이낙연(李洛淵)은 2021 10 10 20대 대통령 민주당 후보 경선에서 이재명 경기도지사에게 밀리면서 아쉽게 낙마했다. 이낙연 전 민주당 대표는 2021 10 13일 이재명 경기도지사의 민주당 경선 승리를 축하하면서 그의 지지자들에게 단합을 요청했다. 그는 "지금은 민주당의 위기이다. 그래서, 동지 그 누구에 대해서도 모멸하거나 배척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하면, 결코 승리할 수 없다" 라고 말했다. 그는 "우리가 단합할 때, 국민은 우리를 더 안아 주신다. 문재인 정부가 성공해야 한다. 기필코 대선에서 이기자!" 라고 말했다.

 

 이낙연(李洛淵)은 "아버지의 가르침"을 언급했다. 그는 "위기 앞에 서로를 포용하고, 그 힘으로 항상 승리했던 것이 민주당의 자랑스러운 역사이다" 라며, "그것이 평생을 이름 없는 지방 당원으로 사셨던 제 아버지의 가르침이다!" 라고 말했다. 이낙연 부친은 생전에 전남 영광의 민주당 당원으로 이낙연 전 대표에게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졌다. 1960 4.19 혁명 이후, 이낙연 전 대표가 초등학교 3학년 때쯤 학교에 다녀오니, 집 밖에서 남자 울음소리가 들렸다. 집 뒤에 있는 상추밭에서 아버지가 엎드려 울고 있었다. 큰아들 낙연이가 아버지를 달래 드렸지만, 부친은 한참을 눈물 흘린 뒤에야 사연을 말했다. 1960 4.19 이후 민주당은 여당이 됐다. 부친이 보좌했던 민주당 국회의원이 부르더니 말했다. "() 동지, 이력서 한 장 써 와! 법성 조합장을 자네가 하게." 아버지는 이력서 용지를 구했지만, 쓸 내용이 없었다. 학교를 다닌 적이 없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이력서 용지를 찢어 버리고, 국회의원을 찾아가 말했다. "저는 자격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 시키시오!" 부친은 그렇게 국회의원 집 대문을 나와서 집으로 오는 길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고 한다. 아버지는 아들 낙연에게 말했다. "나는 너를 끝까지 가르쳐야겠다." 이낙연 전 민주당 대표 2021 09 21, 추석을 맞아 부모님 묘소에 성묘하고 "그 일이 오늘의 저를 만든 시작이었다" 라고 페이스북에 썼다. 그리고, 덧붙였다. "부모님이 서럽도록 그립다." 20대 대통령 민주당 후보 경선 결과 승복에 끼친 아버지의 영향은 이낙연 전 대표와 남매들이 함께 쓴 책 '어머니의 추억'에서도 볼 수 있다. 이낙연 전 대표는 "아버지는 어떤 야당 정치인을 도왔다. 그 정치인의 아드님이 정치를 이어받자, 아버지는 다시 그 아드님을 도왔다. 그 아드님은 1980년 전두환 정권 출범과 함께 야당을 떠나 여당인 민정당에 합류하였다" 라고 했다. 그리고, "아버지께도 민정당에 함께 가자고 권유하셨던 모양이다. 아버지는 흔들리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런 아버지를 어머니가 붙잡으셨다. 아버지는 어머니 말씀을 따랐다" 라고 했다.

 

★ 이낙연(李洛淵)의 아들은 활액낭염 및 건초염이 있었고, ‘어깨 견갑관절 재발성 탈골로 인하여 병역 면제 최종 대상이 되었다. 그러자, 이낙연은 병무청에 탄원서를 냈다. 현역이 안 되면 보충역이라도 근무하도록 기회를 줘어서 병역(兵役)의 의무를 수행하게 해 달라고 했다. 병무청에서는 이낙연의 탄원서를 거절했다. 그의 아들은 부산대학교 의학전문대학원을 졸업했고, 현재는 정신과 의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