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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땅 속에서 훈민정음 금속 활자들이 쏟아졌다.

마도러스 2021. 6. 29. 23:38

■ 땅 속에서 훈민정음 금속 활자들이 쏟아졌다.

 

 기록만 전하던 과학 유산 실물 대거 발견, '세계적인 사건' 평가

 

"대단한 사건입니다. 깜짝 놀랄 만한 일이죠. 기다리던 유물이 나온 것 같아서 매우 기쁩니다." 서지학자인 한국학중앙연구원 옥영정 교수는 2021 06 29일 연합뉴스와 통화에서 서울 인사동 피맛골에서 무더기로 나온 조선 전기 금속 활자 1 600여 점을 평가해 달라는 요청에 이같이 답했다. 문화재청에 따르면, 서울 인사동 유적에서는 매우 희귀한 조선 전기 금속 활자뿐만 아니라 그동안 기록으로만 전하던 천문시계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부품 물시계 옥루 혹은 자격루의 부속품인 '주전'(籌箭)으로 추정되는 동제품까지 한꺼번에 출토됐다.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이번 발굴이 구텐베르크 인쇄술보다 앞선 우리나라 금속 활자 기술의 실체를 알려주고, 매우 부족했던 조선 전기 과학 유산 실물이 대거 발견된 '세계적 사건'이자, '2021년 고고학 발굴의 최고 성과' 라는 평가가 나왔다. 땅속에 있던 '과학 박물관'이 지상 위로 출현했다는 의견도 있었다.

 

 갑인자. 을해자, 이름만 알려진 조선 금속 활자가 실제 나타났다.

 

구텐베르크 이전부터 우리나라가 금속 활자로 책을 찍어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졌지만, 고려 시대나 조선 시대 전기 금속 활자 실물 자료는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1592년 발발한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많은 금속활자가 불에 탔을 가능성이 크고, 기존 금속 활자를 녹여서 새로운 활자를 만드는 경향이 있어 현존하는 유물이 매우 적은 것으로 분석된다. 2010년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 '직지심체요절'보다 이른 시기에 만든 고려 시대 금속 활자라는 주장이 제기된 이른바 '증도가자'(證道歌字) 101은 문화재청이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할 만한 가치가 없다고 결정했고, 이후에도 여전히 학계에서 진위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문화재계에서 두루 공인된 금속 활자 중 가장 이른 시기 유물은 1455년 무렵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한글 활자 약 30이다. 이외에는 임진왜란 이전 금속 활자가 사실상 전무한 형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1443년 훈민정음 창제 당시 표기가 반영된 가장 이른 시기의 한글 금속 활자를 비롯해 한자 활자인 1434년 갑인자(甲寅字), 1455년 을해자(乙亥字), 1465년 을유자(乙酉字)로 추정되는 유물이 무더기로 나오면서 서지학계가 발칵 뒤집혔다. 조선시대 금속 활자는 1403년 계미자(癸未字)로 시작해 1420년 경자자(庚子字), 갑인자 등을 거치며 발전했다.

 

 활자. 시계. 화포, 학계 놀라게 한 땅속 '과학 박물관'의 출현

 

한국학중앙연구원 옥영정 교수는 "금속 활자 가운데 일부를 봤는데, 갑인자. 을해자. 을유자가 있는 것은 맞는 듯하다. 조선 전기 금속 활자 유물이 나온 것은 매우 큰 의미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재정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 전기 활자는 을해자라고 하지만, 한자 활자가 아닌 한글 활자는 사실 육십갑자를 붙여 부르지 않는다. 1461년에 찍은 책인 '능엄경언해'의 글자와 활자 모양이 일치해 1455-1461년에 만들었을 확률이 높다" 라고 설명했다.

 

이어 "15세기 금속 활자는 세계적으로도 거의 없고, 국내에 있는 조선 시대 금속 활자도 대부분은 조선 후기에 만들어졌다. 이번에 확인된 조선 전기 활자는 발굴 조사를 통해 나왔기 때문에 출처가 명확하다는 점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라고 주장했다. 이 연구관은 그러면서도 "활자는 정밀하게 치수를 측정하고, 직접 찍어서 당시 책과 대조해야 정확한 제작 시기를 알 수 있다. 금속 활자에 대한 추가 연구가 진행되면,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활자의 재평가도 이뤄질 수 있을 것이다" 라고 덧붙였다.

 

 세종이 일궜다는 '과학 혁명'의 소산이 등장한 것일까?

 

조선 제4대 임금인 세종(재위 1418-1450)은 이상적 유교 정치를 펼치고, 한글을 창제한 성군으로 일컬어진다. 그의 업적 중 빠지지 않는 것이 과학 기술 진흥이다. 물시계 자격루 천문 시계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는 세종 시기 대표적 발명품으로 거론되지만, 실물은 없는 상황이다.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면, 꿈틀거리는 용이 떠받치고 있는 듯한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나 국립고궁박물관과 국립중앙과학관에 있는 커다란 자동 물시계가 존재하지만, 모두 기록을 바탕으로 복원한 산물이다. 국보로 지정된 자격루는 중종 31년인 1536년에 만든 유물로, 청동으로 만든 물그릇만 남아 있다.

 

인사동에서 나온 천문 시계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부품은 시계에서 바깥쪽 테두리를 구성하는 원형 고리 3점으로 판단된다. 바깥쪽부터 주천도분환(周天度分環), 일구백각환(日晷百刻環), 성구백각환(星晷百刻環)으로 불린다. 주천도분환(周天度分環)은 당시 원을 나누는 각도인 365.25도를 등분한 고리이고, 일구백각환(日晷百刻環)과 성구백각환(星晷百刻環)은 하루를 100각으로 나눠 눈금을 새긴 도구이다. 일구백각환(日晷百刻環)은 태양을 관측하고, 성구백각환(星晷百刻環)은 별을 볼 때 썼다. 물시계 관련 유물 '주전'(籌箭)의 일부로 보이는 동제품이다. 조선시대 자동 물시계는 시간을 측정하는 부분과 시간을 알리는 부분이 구분되는데, 주전(籌箭)은 시간을 알리는 시보(時報) 장치를 작동시키는 부품이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주전(籌箭) 1438년에 만든 흠경각 옥루나 1536년 제작한 자격루의 부속품일 가능성이 있는데, 기록만 있던 자료의 실물이 처음 확인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라고 말했다. 그는 "세종 시대 과학 유산이 이야기만 전할 뿐, 유물은 거의 없었다. 세종 시대 과학 기술을 복원할 실마리가 마련됐다는 점에서 엄청난 사건이다" 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