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 (한국)

■ 한국이 세계에서 가장 혁신적인 나라가 된 원인

마도러스 2021. 2. 15. 04:53

 

■ 한국이 세계에서 가장 혁신적인 나라가 된 원인

 

 남한. 북한 대치 경쟁 상태에서 정부. 기업. 국민이 함께 뭉쳤다.

 

 위기(危機)는 위험(危險)과 기회(機會)가 함께 상존(相存)한다. 그래서, 위기(危機)는 위험(危險) 고통과 도전 기회(機會)가 반드시 함께 찾아온다.  정신 분석의 창시자인 프로이드(Freud)가 너무나 너무나 멋진 말을 언급했다. ‘Optimal Frustration’ 적절한 좌절 고통이 있어야 인간이 도전. 발달. 성장. 성숙한다는 진리이다. 한국은 일제(日帝) 식민지 시대의 좌절 고통을 겪었고, 1950 한국 정쟁의 위기 상황을 잘 극복했다. 그 후, 한국은 남한. 북한 대치 경쟁 상태에서 정부. 기업. 국민이 함께 똘똘 뭉쳤다. 그리고, 크게 발전했다. 한국의 근현대사는 위기(危機)의 역사이다. 한국의 근현대사는 남북(南北) 이데올로기 냉전 '트라우마(trauma)의 역사'이면서 '성취의 역사'이다. 미국 블룸버그(Bloomberg) 통신은 2013년부터 혁신 지수를 발표했다. 한국이 블룸버그 혁신지수에서 ‘2021년 세계에서 가장 혁신적인 나라로 선정됐다. 한국은 2014-2019년까지 6년 연속 1위를 했다. 2020년에 독일이 1위를 했고, 2021년에 한국이 다시 1위를 탈환했다

 

 블룸버그 혁신지수는 주요 60개국을 대상으로  연구 개발 (R&D) 집중도  특허 활동  제조업 부가가치  생산성  첨단기술 집중도  교육 효율성  연구 집중도  7개 부문을 평가하여 100점 척도로 매년 산출한다. ? 한국은 가장 혁신적인 나라로 평가받게 됐을까? 예컨대 연구 개발 (R&D) 집중도와 특허, 제조업 부가가치, 첨단기술 집중도의 경우, 한국 대기업의 역할이 결정적이다.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SK 하이닉스, LG전자, 포스코 등이 한국의 연구 개발 (R&D) 투자를 주도하고 있다. 한국 대기업의 연구 개발 (R&D) 투자는 국제 비교 자료를 봐도 다른 나라에 비해 적극적이다. 한국의 R&D 투자 관련 국제 비교 자료를 보면, 정부 차원에서도 대부분의 선진국보다 높고, 민간 기업에서도 대부분의 선진국 보다 높다. 기업과 정부를 합산 합계한 국가의 연구 개발 (R&D) 역시 높을 수밖에 없다. 정부 연구 개발 (R&D)의 경우, 상용화되지 않는 장농 특허도 많고, 비효율성도 만만치 않다. 기업 분야 연구 개발 (R&D)는 가성비도 매우 높다. 그 이유는 한국의 제조업 분야 대기업이 치열한 글로벌 경쟁에 노출된 상황에서, 경쟁 우위를 확보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적극적인 연구 개발 (R&D) 투자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1인당 GNI 수치는 G7 국가인 이탈리아를 추월했다.

 

2020, 한국 국민들의 생활 수준을 보여주는 1인당 국민총소득(GNI)이 주요 7개국(G7) 구성원인 이탈리아를 처음으로 추월했다. 인구와 1인당 GDP(국내총생산)를 종합한 국가 GDP(국내총생산) 기준으로는 러시아, 캐나다, 이탈리아를 제치고, 세계 8-10위권에 들어가게 됐다. 한국은 어떻게 하다가 선진국을 따라잡는, 추월의 시대를 맞이하게 됐을까? 여러 가지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던 것이지만, 그중에서도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한국 대기업과 기업가들의 역할이다. 한국 대기업 창업주들과 2-3세들은 높은 기업가 정신을 발휘했다고 봐야 한다. 정주영(현대), 이병철(삼성), 구인회(LG). 김우중(대우) 같은 1세대는 물론이고, 이건희와 정몽구로 상징되는 2세대 역시 마찬가지이다. 한국이 세계에서 가장 혁신적인 나라가 될 수 있었던 역사적 과정을 추적해보면, 정부의 과감한 지원과 기업의 활발한 추진력이 함께 했다.

 

 첫째, 남한. 북한 대치 경쟁 상태에서 정부 주도의 과감한 기업 지원 정책이 있었다. 그리고, 기업의 대규모화 촉진 정책이 결정적으로 중요했다.

 둘째, 정주영 회장의 건설 및 자동차 시장 개척과 삼성이 그룹 전체의 명운을 걸고 도전한 반도체 투자가 상징하듯이 혁신 지향적 기업가 정신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셋째, 한국 관료들의 연구 개발 투자  경제 개발 기획력 그리고, 한국 국민의 뜨거운 교육열 등이 종합적으로 작동했다.

 

크게 보아 한국의 정치권은 보수. 진보를 막론하고, 대체로 혁신을 지원하는 정책을 추구했다. 김대중 정부, 노무현 정부, 문재인 정부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김대중 정부 IT 산업 활성화, 노무현 정부 FTA 추진, 문재인 정부의 삼성전자 시스템반도체 지원, 현대차의 수소 전기차 지원, 디지털 뉴딜이 모두 같은 맥락이다. 한국 근현대사 150여 년은 일제(日帝) 식민지, 외세의 개입, 분단, 한국 전쟁, 절대 빈곤, 군사 독재, 민주화의 시대를 살았다. 이 과정에서 한국인들은 ‘3대 트라우마를 간직하게 됐다.  일제(日帝) 식민지 트라우마  남북(南北) 이데올로기, 북한 빨갱이 트라우마  군부 독재 트라우마 등이 바로 그것이다.

 

 위기(危機)는 위험 고통과 도전 기회가 반드시 함께 찾아온다.

 

일제(日帝) 식민지 트라우마는 좌파. 우파를 막론한 모든 국민의 공감대를 갖고 있고, 북한 빨갱이 트라우마 60대 이상 보수 세대의 트라우마가 됐고, 군부 독재 트라우마 40-50대 진보세대의 트라우마가 됐다. 마음속에 자리 잡은 트라우마는 외부를 향해서는 증오의 형태로 표출된다. 우리가 증오의 정치를 접하게 되는 이유이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보수도, 진보도 모두 열심히 살았다. 관료도, 기업인들도, 정치인들도 나름 모두 열심히 살았다. 대한민국 정부가 처음 수립된 1948년부터 현재 2021년까지 한국 국민은 모두 세계에서 가장 혁신적인 나라가 될 수 있도록 분발했고, 전투적으로 노력했다. 기업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고, 한국 정부 관료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한국의 정치, 기업인, 관료가 아무런 과오(過誤)가 없었고 완벽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재벌은 여전히 개혁의 대상이고, 정치권도 혁신해야 하고, 관료체계도 혁신해야 한다. 

 

 그렇더라도, 한국은 세계가 부러워할 만한 보수. 진보 지식인을 가졌었고, ‘세계가 부러워할 만한 기업가들을 가졌었고, 세계가 부러워할 만한 관료 집단을 가진 나라이다. 물론 세계가 부러워할 만한 국민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기도 하다. 정치(政治) ‘‘갈등축을 매개로 하는 적과 동지의 구별이 중요한 갈등 경쟁 산업이다. 정치권이 전선을 긋고, 싸움을 하고, 갈등을 일으키는 것은 당연한 것이기도 하고, 불가피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약간 거리를 두고 큰 시야로 볼 때, 한국의 근현대사는, 한국의 20세기는 트라우마의 역사이기도 했지만, 역경에 맞서 도전하고 하나씩 하나씩 성과를 만들어낸 성취의 역사이기도 하다. 위기(危機)는 위험(危險) 고통과 도전 기회(機會)가 반드시 함께 찾아온다. 한국은 일제(日帝) 식민지 시대의 좌절을 겪었고, 1950 한국 정쟁의 위기 상황을 잘 극복했다. 정주영(현대), 이병철(삼성), 구인회(LG). 김우중(대우) 같은 기업인들이 그랬고, 단군 이래 최대 경제 위기였던 1997 IMF 외환 위기를 잘 극복했던 김대중 대통령이 그랬다. 20세기를 살았던, 한평생 고생만 하시다 가신 우리 엄마를 포함해서 대한민국의 민족 해방. 근대화. 산업화. 민주화를 위해 열심히 노력했던 수많은 지식인들의 열정. 눈물. 도전. 성취의 결과물이 지금 우리가 접하고 있는 세계에서 가장 혁신적인 나라이기도 하다.

 

 치열한 경쟁과 팽팽한 긴장감이 주는 건강 효과

 

 치열한 경쟁과 팽팽한 긴장감은 성장 효과를 유발한다.

 

 위기(危機)는 위험(危險)과 기회(機會)가 함께 상존(相存)한다. 그래서, 위기(危機)는 위험(危險) 고통과 도전 기회(機會)가 반드시 함께 찾아온다.  정신 분석의 창시자인 프로이드(Freud)가 너무나 너무나 멋진 말을 언급했다. ‘Optimal Frustration’ 적절한 좌절 고통이 있어야 인간이 도전. 발달. 성장. 성숙한다는 진리이다.

 

 늑대 효과(wolf effect) : 처음에 사슴과 늑대가 알래스카의 자연 보호 지역에서 함께 살았다. 그런데, 알래스카 당국은 사슴의 안전을 위해 늑대를 모조리 없애버렸다. 그 후, 안전이 보장된 사슴은 그 수가 10년 동안에 4천 마리에서 무려 4만여마리로 늘어났다. 하지만, 편안하고 게으른 삶은 운동량을 감소시켜서 체질의 약화를 가져왔고, 사슴의 죽음을 재촉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결국, 4천마리도 남지 않게 되었고, 이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 알래스카 당국은 다시 늑대를 투입시켰다. 사슴에게 긴장감은 팽팽하게 고조되었다. 사슴은 늑대에게 희생 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뛰었고, 다시 건강해졌다.

 

 메기 효과(catfish effect) : 청어는 영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고급 어종이다. 그런데, 그 청어는 먼 바다에서 잡히기 때문에 대부분 냉동 청어가 많다. 싱싱한 청어를 먹기가 어렵다. 청어를 육지까지 옮기려면 오랜 시간이 걸리고, 대부분 운송 중에 청어가 죽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런던 수산 시장에 싱싱한 청어가 대량으로 공급되기 시작했다. 그 비결은 청어를 운반 해 오는 수조에 천적인 메기를 함께 넣은 것이다. 청어들은 메기에게 잡혀 먹히지 않으려고, 잔뜩 긴장해서 도망 다니고, 그런 생존의 몸부림이 청어를 살아있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었다. 팽팽한 긴장감이 청어를 살아있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한국 경제 망친 원흉은 바로 박정희 대통령이었다.

 

● 박정희(朴正熙) 재임 기간(1963-1979)의 무역 적자 규모가 233억 달러였다. 지금의 화폐 가치로 환산하면, 천문학적인 무역 적자 규모인 것이다. 결국, 미국과 유럽 및 일본의 차관(借款)을 끌어다가 돌려 막기에 급급했다. 쉽게 비유하면, 박정희 경제는 결국 카드 돌려 막기 경제였고, 만성적인 적자 구조 경제였다. 마이너스 카드 뽑아다가 계속 써 대고 나서 그걸 다시 돌려막기 하다가 망하는 그런 경제였다. 그래서, 박정희 임기 내에 국가 부도 위기가 10번 정도 있었다고 한다.  

 

1980년대 특히 1986년부터 1988년 사이에 3저 호황(저금리. 저달러. 저유가)이 없었으면 한국은 아마 총체적 국가 부도를 맞이했을 것이다. 1962년도 무역 적자 규모가 5천 5백만 달러였는데, 1971년에는 5억8천2백만 달러, 1974년에는 20억 달러, 1979년에는 30억 달러로 상승했다. 결국 외국 차관(借款)으로 무역 적자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고, 차관 금액의 40% 가까이를 부채 해결에 쓰게 됨으로써 부채 돌려 막기 경제가 계속 반복되었다.

 

● 역대 대통령 재임 기간의 무역 수지를 살펴보면, 박정희 233억 달러 적자, 전두환 8억 달러 흑자, 노태우 132억 달러 적자, 김영삼 366억 달러 적자, 김대중 846억 달러 흑자 등이다.

 

전두환(1980.09-1988.02) 대통령이 지금도 큰소리 치는 것이 있는데, 바로 그것이 바로 자신의 집권 기간 중에 대한민국 유사 이래 최초로 무역 흑자를 기록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1980년대 특히 1986년부터 1988년 사이에 3저 호황(저금리. 저달러. 저유가)이라는 천혜의 외부 환경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김대중(1998~2003) 대통령은 김영삼(1993-1998) 정부로부터 1997년 IMF 경제 파탄 상황을 물려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불과 5년 동안에 846억 달러라는 최고의 무역 흑자를 기록했으니, 경제 운영을 매우 잘 한 것으로 평가된다.

 

● '박정희 대통령 덕분에 우리 경제가 이만큼 발전했다!' 라는 잘못된 인식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뭘까? 1950년대까지만 해도 독일(Germany)에서 여론 조사를 하면, 히틀러(Adolf Hitler)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꼽혔다. 하지만, 복지 국가의 기틀을 잡아간 이후부터는 일부 파시즘(fascism) 추종 세력에게서만 추앙받는 꼴이 되었다. 이와같이, '더 좋은 세상'을 살아보지 못한 사람들이 겪을 수밖에 없는 한시적 한계이다.

 

우리 현대사(現代史)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으니, 흑백(黑白)을 구분하지 못하고 독재 정권의 해악(害惡)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1961년 05월 16일 새벽 3시의 5.16 쿠데타! 이 치욕(恥辱)의 날을 우리는 똑똑히 기억해야 한다. 군사 정권을 미화(美化)하거나 찬양하는 나라는 문명 사회의 일원이 될 수 없다.

 

박정희(朴正熙) 경제는 결국 땅값과 물가를 폭등시켰고, 재벌과 결탁한 방식의 정경(政經) 유착 체제를 고착화시켰다. 그리고 관치 금융을 구조화했고, 강압적 노사 개입을 강행했으며, 농업을 압축 쇠퇴시켰다. 우리 경제가 겪고 있는 재벌 독식, 양극화 경제, 관치 금융 경제 같은 문제의 뿌리는 바로 박정희 정권 때문에 고착화 되어 왔다.

 

군사 독재 정권은 장기적 관점을 갖고 양심적으로 경제를 운용하는 것이 아니다. 눈앞의 성과(成果)에 급급하므로 경제를 잠시 흥청거리게 하고, 거시(巨示) 경제를 망친다. 독재가 경제를 살린다는 속설은 잘못된 것이다. 오히려 반대이다. 민주주의가 책임 의식을 갖고 경제를 제대로 운용한다.

 

경북대 이정우 교수는 "2011년 학교 무상(無償) 급식(給食) 논쟁이 일었을 때 대통령, 총리, 재정부 장관 등 모두 일관되게 '복지 포퓰리즘(populism) 때문에 나라가 망한다. 경제가 무너진다!’고 했었다"며 "무상 급식을 시행하면서 문제가 발생하기는커녕 일자리가 생겨나고, 아이들이 모두 굶지 않고 밥을 잘 먹을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 경북대 이정우 교수는 박정희(朴正熙) 집권기 동안 땅값과 물가 폭등을 실증적으로 입증하면서, “박정희 정권이 경제를 구했다”는 주장의 허구성을 지적했다. 전국의 땅값(地價) 총액은 박정희의 집권기 (1963년-1979년) 16년 동안 3조 4000억원에서 329조원으로 100배나 폭등했다. 1953년에서 2007년까지 54년 동안 땅값 총액의 전체 상승분 가운데 절반이 넘는 50.5%가 박정희 정권 때 이뤄졌다. 물가(物價)의 경우도 박정희 정권 때 11.8배나 올랐다. 박정희식 막개발이 땅값과 물가를 폭등시켜 후대에 큰 부담을 안겼다. 군사 독재가 경제를 살렸다는 속설은 이제 폐기되어야 한다.

 

역대 정권이 부동산을 어떻게 관리 했는지 연평균 땅값 상승률 통계를 보면, 박정희 정권 때에 33.1%를 보여 매우 높은 상태에 도달했고, 민주주의 정권에 들어서면서 노무현 정권 때 4.3%를 보이며 땅값이 안정되었다.

 

또한, 연평균 물가 상승률을 보면, 이승만 22.7%, 박정희 14.7%, 김영삼 5.0%, 김대중 3.5%, 노무현 2.9%였다. 독재 정부 때에 물가가 한없이 상승했었고, 민주 정부 때에 물가가 안정되었다.

 

박정희 정권 18년 동안, 전국 지가(地價)가 180배 이상 상승했고, 토지 불로 소득이 국민 소득의 무려 2.5배나 됐다. 불로(不勞) 소득의 천국이었고, 부익부(富益富) 빈익빈(貧益貧)의 극치였다. 2012년 우리나라 평당 땅값은 세계 1위인데, 이것은 누구의 책임인가?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독재 시대에 대부분의 지가 상승이 일어났고,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합해서 2% 정도 책임이 돌아갈 뿐이다. 한국의 땅값을 세계 최고로 만든 책임의 50%는 박정희 정권에게 있다.

 

물가(物價)는 또 어떤가? 한국의 물가는 세계 1위군에 속한다. 물가(物價)가 비싸니까 수출도 불리하고 관광객 유치도 어렵다. 이승만, 박정희 독재 시대에 물가 상승의 거의 대부분이 일어났고, 특히 박정희 정권 혼자서 물가 상승의 45% 책임을 져야 한다. 민주 정부 책임은 합계 10%밖에 안 된다. 세계 최고 수준의 지가(地價)와 물가는 독재의 유산이며, 특히 박정희의 책임이 가장 크다. 높은 지가와 물가는 중산층, 서민, 노동자, 자영업자의 생활고를 가져오는 주요인이며, 우리 곁에서 사라지지 않고 두고 두고 괴롭힐 것이다. 높은 지가(地價)와 물가(物價)는 수출 주도형 한국 경제에 치명적 장애물이다.

 

● 매년 4월이 되면, 농촌에 ‘부녀자 가출 방지 기간’ 현수막이 걸렸었는데, 그 까닭이 뭐였을까? 1968년대말 특히 1968년 보건 사회부가 전국적으로 ‘부녀자 가출 방지’ 사업을 대대적으로 벌였다. 시골에서 먹고 살 게 없기 때문에 서울로 많이 올라간 것은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올라간다고 딱히 좋은 직업을 얻는 것은 아니었는데, 여성들은 주로 가정부(家政婦)나 공장(工場) 같은데 취직했다. 그거라도 얻는다면 좋은 거였다. 서울로 가출해 상경(上京)한 여성의 출신지를 보면, 전남도가 23%로 제일 많았고, 충남(11%)이 그 다음이었다. 농촌 부녀자 가출이 전남도가 23%로 제일 많은 이유는 박정희 정권(1963-1979)의 지역 편중적 산업화 정책 때문이었다. 

 

국가의 중요 기간 산업은 포항(철강), 울산(중화학. 자동차), 거제(조선), 창원(기계), 대구(섬유), 구미(전자) 등의 영남(嶺南) 지역에 지어졌다. 그리고, 박정희(朴正熙) 측근인 국회의장 이효상은 ‘전라도 사람들은 쌀 속의 뉘다!’라는 말을 공개적으로 퍼뜨렸고, 그로인해 호남(湖南) 사람들은 공직 사회 및 대기업의 간부가 되는 것이 힘들어졌다. 결국, 경상도(慶尙道) 정권이 박정희(1963-1979), 전두환(1980-1987) 노태우(1988-1993), 김영삼(1994-1998)으로 이어지면서 경상도 인구는 상대적으로 매우 증가했으며, 아무리 잘못해도 선거에서 승리하는 여당(與黨)이 되었다. 그리고, 정부 요직과 공공 기관의 고급 간부들을 독식(獨食)하는 체제가 성립된 것이다.

 

● 만주(滿洲) 신문 1939년 03월 31일자 기사의 박정희(朴正熙)가 일본군 지원을 호소했던 편지(便紙)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이 첨부되어 있다. "일본인(日本人)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 일사봉공(一死奉公)의 굳건한 결심입니다. 확실히 하겠습니다. 목숨을 다해 충성을 다할 각오입니다. 한 명의 만주 국군으로서 만주국(滿洲國)을 위해, 나아가 조국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멸사봉공, 견마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

 

중국 조선족 작가 류연산은 ‘일송정 푸른 솔에 선구자는 없었다’(아이필드 출판)에서 박정희(朴正熙)가 일본의 육군 군관 학교 제2기생으로 입학하기 전인 1939년 08월 24일 그는 일본군(日本軍)으로서 동북 항일 연군(독립군)을 토벌하는 대사하 전투에 참여했으나 패퇴했고, 이 후에는 만주 일대에서독립군(獨立軍) 토벌에 나섰는데, 동북 항일 연군의 토벌이 그 증거라고 주장하였다.

 

박정희는 군관 학교 졸업 후, 5개월 정도 현장 실습을 마쳤다. 그리고, 박정희(朴正熙)는 1942년 10월 일본 육군 사관 학교 57기에 3학년으로 편입했으며, 1944년 04월 육군 사관 학교를 졸업했다. 1944년 12월 28세의 나이로 만주군 보병 제8단 육군 소위(少尉)로 임관하였다. 그리고 1945년 07월 10일에 만주군 중위(中尉)로 승진함과 동시에 만주(滿洲) 동북부의 열하성(熱河省) 주둔 만주군 보병 제8사단에 배속되었으며, 그들의 주된 토벌 부대는 중국의 팔로군(八路軍)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독립군 투사들이 주로팔로군(八路軍)에 가담하였고, 박정희(朴正熙)가 팔로군(八路軍) 토벌에 참여하였으므로, 독립군(獨立軍) 토벌에도 참여한 셈이다.

 

박정희는 1948년 육군 본부 작전 정보국에 근무하던 중, 여수. 순천 14연대 사건에 연루되어 조사를 받았다. 그는 공산당(共産黨)의 남한 조직인 남로당(南勞黨)의 한국군 조직책이었다. 그리고, 박정희(朴正熙)는 여수. 순천 14연대 사건 후에 시작된 대한민국 정부의 군대 내 공산주의자(共産主義者)를 색출하는 숙군(肅軍) 작업에서 그동안 간첩 활동의 핵심 역할을 했던 것이 들통 나서 1948년 11월 11일 체포되었다. 그는 1945년 이후 남로당(南勞黨)에 입당하여 공산당(共産黨)의 한국군 하부 조직책으로 일해 온 것이었다. 그는 그의 형 박상희에게서 사상적으로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그의 형 박상희는 1946년 10월 01일 공산당(共産黨) 좌익(左翼) 시위를 하다가 경찰의 총격에 의해 사망하였다. 박정희(朴正熙)는 간첩 활동의 핵심 역할 죄목으로 무기 징역형을 선고받았는데, 그의 동지들 명단을 넘겨주는 댓가로 간신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결국 실형을 면하게 된 그는 1949년 01월 백선엽 장군의 배려로 다시 예편되어 육군 정보국에서 비공식 문관으로 근무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