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 (한국)

■ 정주영 현대 회장, 자동차는 달리는 국가이다!

마도러스 2021. 2. 18. 03:03

■ 정주영 현대 회장, 자동차는 달리는 국가이다!

 

 정주영 현대 회장이 처음 시작한 한국 자동차 개발 역사

 

우리나라는 1975년 정주영 현대 회장이 국내 최초 독자 자동차 모델 포니(pony)를 개발했는데, 인기도 별로 없었다. 그러자, 미국은 정주영 회장에게 독자 모델을 포기하고, "포드. GM 등의 모델을 조립 생산하라!" 라고 회유하였다. 그러나, 정주영은 "자동차는 달리는 국가이다. 실패해서 내가 일생에 번돈 모두를 날리더라도, 후대에서는 반드시 성공할 수 있는 디딤돌이 되어야한다"면서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 실패를 거듭하다가 1982 '포니2'가 생산되어 정부 시책에 힘입어 택시 시장을 장악하게 되었고, 이를 기반으로 엑셀. 아반떼. 소나타. 그랜저 등 세계 시장에 내놓을 수 있는 히트작들을 계속해서 생산해 내었다. 현대자동차가 성공가도를 달리던 그 시간 대우(DAEWOO)에서 르망. 레간자. 프린스, 기아(KIA)에서 봉고. 콩코드, 쌍용에서 무쏘. 코란도. 체어맨, 삼성 SM5 등 여러회사에서 승용차. 버스. 트럭. RV 등 거의 모든 종류의 차종을 생산, 춘추전국시대가 되어 국내 수요를 충족할 수 있게 되었다.

 

 불가능에 도전하여 성공 신화를 쓴 현대 포니(pony) 자동차

 

 1970년대만 해도 동네 앞 도로에 자가용 자동차가 지나가면, 마을 사람들이 신기하고 부러운 눈으로 바라봤습니다. 그 때, 그 시절 도로 위를 누비던 현대자동차가 포니(pony)였다. 이제는 자동차 박물관에 가야 볼 수 있지만, 한때 우리 아버지의 첫 차 혹은 생애 최초의 내 차라고 불리던 포니(pony)와였다. 1974년 데뷔했고, 1976년 양산되었다. 포니(pony)는 현대자동차 최초이자 대한민국 최초의 고유 모델이며, 세계에서 16번째, 아시아에서 2번째 고유 자동차 모델이었다. 세계 시장에 선보이겠다는 야심찬 목표와 놀라운 추진력으로 개발을 시작한 지 1년 반 만에 1974년 이탈리아 토리노 모터쇼에서 첫 선을 보였고, 뜨거운 찬사를 받았다. 이런 전세계적인 인기에 자신감을 얻은 현대자동차는 1975 12월 울산에 대규모 공장을 세우고, 1976년부터 본격적인 생산에 돌입했다. 1976년 국내에서 판매된 포니(pony) 10,726대로 국내 승용차 판매의 절반에 가까운 43.5%라는 시장 점유율을 차지했고, 해외 수출 역시 꾸준히 늘어났을 정도로 큰 인기를 누렸다. 포니(pony)가 이렇게 큰 인기를 누릴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세련된 디자인이었다. 반듯한 선과 간결한 면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포니의 디자인은 자동차 디자인의 거장이자 20세기 최고의 자동차 디자이너로 손꼽히는 이탈리아 조르제토 주지아로(Giorgetto Giugiaro)의 작품이다. 세계 최고의 디자인을 원했던 현대자동차는 포니(pony) 프로젝트를 시작하면서 스타 디자이너로 급부상한 조르제토 주지아로(Giorgetto Giugiaro)를 찾아가 디자인을 의뢰했다. 그렇게 탄생한 차가 바로 포니였던 것이다. 그 당시 포니는 이름난 유럽차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세상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사실 현대자동차 포니(pony) 프로젝트는 무모한 도전이었다. 포드사의 기술을 빌려 5년 동안 자동차 조립 생산의 경험이 전부였던 현대자동차는 이전까지 부품 하나 설계해본 적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1973년 포드와 기술이전 협상이 결렬되면서 현대자동차는 위기에 빠졌고, 이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자동차 독자 개발을 결심하게 되었다. 디자인은 이탈리아 조르제토 주지아로(Giorgetto Giugiaro) 이탈 디자인 회사에 도움을 받았고, 엔진 기술은 일본 미쓰비시사의 도움을 받았다. 이러한 노력으로 현대자동차는 국산 고유 모델 개발을 선언한지 3년 만에 포니(pony)를 만들 수 있었다. 현대자동차는 포니 출시 이후, 꾸준히 연결 모델을 시리즈로 선보였다. 1976년 출시된 포니의 인기에 힘입어 1976년 선보인 포니 픽업, 1977년 포니 왜건을 내놓았고, 1978년에는 배기량을 높인 포니 1400가 등장했다. 또한, 1980년대에는 좌우로 문을 한 개씩 단 쿠페 스타일의 포니도 출시되었다. 이렇게 해마다 발표된 포니 시리즈는 큰 사랑을 받았다. 특히 1982년 기존의 포니 디자인에서 곡선을 강조한 형태로 출시한 포니2 모델은 단종되던 1990년까지 총 661,500여 대가 판매되는 놀라운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지금의 현대자동차가 세계적인 자동차 회사로 성장하는데, 포니(pony)는 든든한 주춧돌과 같은 역할을 했다. 독자적인 힘으로 자동차를 만들겠다는 의지와 도전 정신이 있었기에 지금의 현대자동차가 있는 것이다. 현대자동차가 보여준 놀라운 기적은 지금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1976년 국내 최초로 고유 모델 자동차를 생산하여 2010 세계 5위의 글로벌 자동차 회사로 성장하였고, 2013년에는 글로벌 브랜드 43위에 올라선 현대자동차 성공 신화의 출발점에는 포니가 있었다.

 

 1997 IMF 금융위기 독약을 마시고, 한국차는 변신했다.

 

1997 IMF 금융위기는 국내시장 차지에만 몰두하고 있던 자동차 회사들 중에 세계 시장에서 버텨낼 수 없는 기업들을 모조리 도태시켰다. 그리고, 그전부터 수출에 주력하던 현대자동차 중심으로 재편시켰다. 그 후, 2021년 현대자동차는 러시아. 이스라엘 시장을 장악하고 있고, 심지어는 자동차 산업의 본고장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에까지 공장 설립하여 판매하고 있으며, 독일의 벤츠. BMW. 폭스바겐. 아우디 등이 버티고 있는 유럽 자동차 시징에서도 승승장구하며 잘 팔리고 있다.

 

1997 IMF 금융위기 전에는 정부에서 주는 특별 보조금에 의지하여 덤핑 수출하는 수준이었으나, IMF 금융 위기로 인해 이같은 혜택이 없어지자, 살아남기 위해 제품 경쟁력으로 승부한 결과, 2021년 세계 정상급 5위 이내 수준의 자동차가 된 것이다. 2020 자동차의 네비게이션 등 전자 분야는 독일 벤츠. BMW 보다도 현대자동차가 월등하게 우수한 성능을 구사하고 있다. 그래서, 해외에 나간 연수생들이 옛날에는 독일. 미국. 일본 자동차를 주로 탔지만, 지금은 웬만하면 현대나 기아차를 탄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귀국 후에도 연수생 시절에 타던 현대차를 국내에 가지고 와서 타는 경우도 있다.

 

 그동안 신분의 상징이었고, 사치품 중의 애용품이었던 자동차

 

1970년대까지만 해도 자동차, 특히 자가용 승용차를 타보는 것은 꿈에 그리던 것이었다. 그야말로 최고의 갑부이거나 특권층이 아니면 탈 수 없는 사치품이 바로 자동차였다. 그래서, 승용차에는 특별 소비세가 붙었다. 그중에서도 외제 승용차는 '사치품 중의 사치품'이었다. 자동차가 신분의 상징처럼 여겨지자, 고급 호텔에서 경비원들은 국산차는 잘 안 보이는 구석에 몰아넣었고, 외제차는 출입에 편리한 입구 쪽에 주차시켰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 몹쓸 행태가 사라졌다. 물론, 아직도 그런 천박하고 퇴폐적인 악습과 폐습이 사람들의 뇌리에 강하게 남아있는 사람들도 있다. 무척 어리석은 사람들이다.

 

 21세기 들어서 매우 확 달라진 한국인들의 자동차 소비 문화

 

 과거에는 특권층들이 주로 외제차를 탔다. 옛날에는 80년대까지만 해도 외제차 1대 가격이 집 3-4채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 반대이다. 오히려 국산차가 더 비싸고, 성능이 더 우수하다. 이제, 외제차는 더 이상 특권층 신분의 상징이 아니다. 지금은 자동차 구입 풍속도(風俗圖)가 사뭇 다르다. 장관. 대학총장 등 힘이 있거나 앞으로 선거를 통해 선출직 (국회의원, 지자체 단체장, 교육감, 기타 사회 단체 기관장)에 진출할 꿈을 가진 사람이라면, 평소에 누가 말 안 해도 국산차를 애용한다. 그만큼 국산차의 성능이 월등하게 좋아졌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공무원들은 외제차가 금지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규제가 사라졌는데도 외제차를 탄 고위 공무원은 거의 없다. 눈치 보이기도 하지만, 국산. 외제차의 성능이 별로 없고, 오히려 국산차의 성능이 더 우수하기 때문이다. 특히, 외제차는 고장 사고가 나면, 외제차 수리비가 너무 많이 나오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이제, 외제차는 빛살 좋은 개살구에 불과하다. 지금 외제차를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곳 중 하나는 10평 남짓한 오피스텔 주차장이다. 서민들이 주로 사는 소형 빌라촌과 영세민용 임대 아파트, 복도식 소형 아파트 단지에서는 흔하게 볼 수 있다. 왜 그럴까? 이제, 외제차는 쾌쾌묵은 과시욕이 강한 사람들이 즐겨 찾는 자동차에 불과하거나, 혹은 외제차를 구입할 수 밖에 없는 처지의 사람들이 구입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제, 외제차는 빛살 좋은 개살구에 불과하다.

 

 현대차그룹은 세계 최고 수준의 수소차. 연료 전지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현대차그룹은 2030 70만기의 수소 연료 전지를 판매하겠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이를 위해 수소 연료 전지 시스템 브랜드 'HTWO'를 만들고, 수소 전기차 뿐만 아니라 선박. 기차. 도심 항공 모빌리티(UAM), 발전용 등으로 사용처를 확장하는 전략을 사용하고 있다. 국내 뿐만 아니라 유럽. 미국. 중국 등에서도 사업을 본격화했다. 현대차그룹이 2021년 첫 전용 플랫폼 E-GMP (전동화 세계 모듈 플랫폼) 전기차를 본격 출시하는 가운데, 전기차에 대한 무한 성장 가능성에도 관심이 쏠린. 현대차. 기아. 제네시스 브랜드로 2025년 전기차 23 100만대를 판매하고, 시장 점유율 10% 이상을 달성하겠다" 라고 자신감을 내비쳤다.

 

 2019 09 10,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수석부회장은 3()에 거쳐 재탄생한 포니(pony)를 자동차 본고장으로 꼽히는 독일에서 선보였다. 포니(pony) 45년 전인 1974 ()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의 특명으로 만들어진 한국 최초의 승용차이며, 손자인 정의선 수석부회장은 이를 기반으로 한 전기 콘셉트카를 내놓았다. 현대차는 2019 09 10, 독일 프랑크푸르트 메세에서 열린 '68회 프랑크푸르트 모터쇼에 참가하여 새로운 EV 콘셉트카 45를 최초 공개했다. 45는 현대차 전기차 디자인의 이정표가 될 E-GMP (전동화 세계 모듈 플랫폼) 기반의 콘셉트카이다. 현대차의 시작을 알린 포니(pony) 자동차가 1974년 이틸리아 토리노 모터쇼에서 공개된 후, 45년 동안 쌓아온 유산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담았다. 정주영 회장은 1977년 포니(pony) 300대 수출을 시작으로 유럽 수출 길을 열었다. 현대차는 차명 45 45년 전 시작된 도전 정신이 현재 현대차를 끊임없이 진보하게 만드는 원동력으로 이어져 내려오며, 소비자 중심의 라이프 스타일 브랜드로 진화하고 있는 회사 미래 청사진으로서 기능한다는 의미를 담아 결정됐다.

 

 정주영 현대회장 1915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 아산리에서 아버지 정봉식과 어머니 한성실씨 사이에서 6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한국 대표 기업 현대(現代)를 창업하여 우리나라 창업 1세대이자 한국 경제 발전 기틀을 닦은 경제 거목(巨木)으로 일컬어진다. 해방 1년이 지난 1946 '현대 자동차 공업사'를 설립하면서 건설업의 잠재력에 눈떴다. 1947년 현대건설의 전신 '현대 토건사'를 설립하였고, 이를 기반으로 한국 전쟁 (1950-1953) 전후(戰後) 복구 사업을 수행하면서 한국 경제사 전면에 등장했다. 이후 자동차와 중공업, 전자 등 국가 기간 산업 분야에 과감히 진출했고, 명실공히 '한강의 기적'을 이룩한 주역 기업인 중 한명으로 올라섰다. 정주영 명예회장은 1992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했었고, 1998 84세 고령에 소떼 1,500마리를 이끌고 방북(訪北)을 성사시킨 일화는 유명하다. 이후 금강산 관광. 개성 공단 사업을 시작하는 등 남북간 경제 협력의 새 시대를 여는데도 일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