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 (한국)

■ 박정희, 한.일 협정 때, 6,600만불 뇌물 받았다.

마도러스 2021. 1. 9. 14:52

 

■ 박정희, 한.일 협정 때, 6,600만불 뇌물 받았다.

 

★ 2014 06 25, KBS ‘일요스페셜 프로그램에서 베일 속의 한일 협정 문서, 한일 양국은 왜 40년 동안 침묵하나?’ 라는 주제 내용이 방송되었다KBS 일요스페셜’ ‘한겨레 신문 등이 보도한 민족 문제 연구소 보고에 의하면, 굴욕적인 1964 06 03일 한.일 회담에 임한 후, 한국 집권자 박정희(朴正熙)가 일본 쪽으로부터 6,600만 달러의 뇌물을 받은 다음, 1965 06 22 한국에 불리한 한·일 협정을 체결해 준 것이 밝혀졌다. 당시 6,600만 달러는 오늘날의 몇 백억 달러에 이르는 거액이다. [2018년 물가 기준, 몇백조-1,000조원 거액 뇌물]

 

 당시, 일본은 3년간 점령했던 필리핀에게도 무상 6억 달러 배상을 하고 국교를 재개했다. 한국은 36년간 강점당해 온갖 살육. 투옥. 착취를 당하고, 무상 3억 달러를 그것도 배상이란 이름도 못 붙이고, 경제 협력 자금이라는 명목으로 받았으니, 웬일인가? ·일 협정에서 평화선 (어족 자원 보호선) 철폐, 독도 문제 회피 (독도 폭파 희망 피력 등), 징용 및 징병. 정신대 피해. 원폭 피해자 보상 회피, 용 및 징병자의 강제 저축금 반환 불청구, 문화재 반환 포기, 재일 동포 법적 지위 보장 포기 등 상식적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국익 손실을 내면서 대부분 일본 쪽의 주장대로 협정에 서명해 준 이유를 당시 순진한 우리는 알 수 없었다.

 

 1961 5·16 군사 쿠테타에 성공한 박정희(朴正熙) 정권의 한국 집권자들은 6,600만 달러의 일본 쪽 뇌물을 받았고, 국익을 팔아먹어서 그렇게 된 것이었다. 당시 순진한 우리 국민과 학생들은 군사 정변 주동자들이 아무리 양심이 썩었어도 일제 식민지 통치를 배상받는 회담에서 일본 뇌물을 받고, 국익을 팔아먹는 매국적 외교를 하리라고는 상상치 못했다. 국력 부족으로 굴욕 외교를 한 것으로 짐작했었다.

 

 그래서, 굴욕적인 1964 06 03일 한.일 회담을 반대했던 6·3세대가 선두에 서고, 학계. 언론계. 문화계 온 국민이 총궐기해서 굴욕 외교 파기를 외쳤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일본 쪽으로부터 뇌물 6,600만 달러를 받았고, 국익을 팔아 매국 외교를 한 무리들이, ‘굴욕 외교 파기를 주장했던 수많은 애국 학생들과 국민들을 탄압하고, 체포 투옥하여 징역을 살리고, 고문하여 불구자를 만든 것이었다. 당시 1965년 한·일 협정은 미국이 동아시아에서 소련. 중공 공산주의(共産主義)에 대항한 반공(反共)의 띠를 만들려고 추진한 프로그램이었다. 이 때, 미국 중앙 정보국(CIA) 1964년 한·일 회담, 1965년 한·일 협정의 일정까지 짜주면서 깊이 개입했기 때문에, 1965년 한·일 협정에 관한 한 미국 중앙 정보국의 보고서는 세계에서 가장 정확한 자료이다.

 

 미국 중앙 정보국 보고서(CIA)에서 당시 한국 민주 공화당이 1961-1965년의 약 4년간 일본의 6개 재벌로부터 6,600만 달러의 정치 자금을 뇌물로 제공 받았. 이것은 당시 공화당의 정치 활동 1965년 한·일 협정이 일본의 배후 조종 아래 매국적으로 되었음을 알려주는 충격적인 것이다. 일본한테 받은 무상 3억이 한국 경제 개발의 종잣돈이 되었다는 일본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니며 어불성설이다. 1960 4·19 혁명이 성공하여 4·19 주체들이 강력히 경제 개발 계획 수립 요구에 직면하자, 당시 민주당 정권은 부흥부가 중심이 되어 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했다.

 

 1960 4.19 혁명 이후, 한국 헌정 사상 최초로 의원내각제가 실시되었고, 장면(張勉) 총리 정부가 집권하였다. 하지만, 이듬해 1961 박정희(朴正熙) 5·16 군사 쿠테타로 민주 헌정을 중단시켰고, 정권을 찬탈했다. 박정희는 선생의 새마을 운동을 훔쳤고, 장준하(張俊河)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역시 훔쳤다. ‘새마을 운동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은 원래 장준하(張俊河) 선생의 작품이었다. 장준하 선생은 오로지 가난한 국민을 위해 국토 건설 사업 기획안을 기획했다. 그런데, 박정희가 도둑질한 것이다. 1960년 장준하(張俊河) 선생의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1962년 그 이름 그대로 추진되었다. 결국, 장준하(張俊河) 선생은 박정희 정권에 의해 1975년 타살되었다.

 

 5·16 군사 정변 주동자들은 반공(反共)만 강조했을 뿐, 경제 개발은 상상에도 없었으므로 처음에는 대기업 경제인들을 모조리 부정 축재자로 몰아 투옥하기 시작했었다. 그러던, 어느날, 군사 쿠테타 주동자들이 장면(張勉) 정부 부흥부 사무실을 접수 중에 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안을 발견했다. 그리고, 이를 찬탈하여 헌정 중단의 중죄를 만회해 보려고, 이듬해 1962년부터 자기들이 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실시하였다. 이 때, 개발의 종잣돈은 민주당 정권 부흥부 계획의 원안(原案) 대로 내부 자금 및 세계 각국 차관으로 시작되었다.

 

 1965년 한·일 협정 후, 무상 3억 달러와 차관 2억 달러 등 5억 달러는 개발 시작 4년 후인 1966년부터 현금으로 들어온 것이 아니라, 10년 분할로 10년에 걸쳐 현물 물자로 들어왔다. 이때 일본 플랜트도 몇개 들어왔는데, 부속품을 일본 제품 사용 조건으로 했기 때문에 한국 경제는 일본 시장으로의 종속 예속이 가속화된 것이다. 당시, 한국의 차관 규모는 500억 달러에까지 달했으므로 무상 3, 차관 2억은 경제 개발의 종잣돈은 커녕 한국 경제의 일본 시장화 구조의 출발과 단계적 강화가 시작되었을 뿐이다. ()한말 일제(日帝)가 조선(朝鮮)을 병합할 때에도 일제는 거액의 정치 자금을 구한국 정계에 뿌렸다.

 

 결국, 1910 08월 일제(日帝)가 조선(朝鮮) 강점에 성공하자, 그 공로자에게 작위를 주었고, 1910년과 1912년 두 차례 거액의 은사금을 뿌렸다. 또한 일제(日帝) 1910-1918년 토지 조사 사업을 실시하여 식민지 강점으로 빼앗은 토지를 은사금을 받은 친일 매국노들에게 염가로 불하해서 친일 매국노들을 토지 부호로 만들어 주고, 뿌린 은사금들은 회수해 갔다. 오늘날 남·북 분단을 비롯하여 일제가 남긴 상처는 치유되지 않았다. 징용 및 징병자. 그리고, 정신대 할머니들이 울고 있다. 재일 동포들이 허덕이고 있다.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어야 할 민주 정부를 총칼로 찬탈하고, 일본 뇌물을 받아 국익을 팔아먹은 매국 외교의 진상을 이번에 반드시 밝혀야 한다. 다시는 일본 뇌물을 정치 자금으로 받아 친일 매국외교를 자행하는 악폐를 영원히 한국 민족사에서 철폐 청산해야 한다. [신용하, 한양대 석좌교수. 백범학술원 원장]

 

 ? 우리는 박정희(朴正熙)를 역적이라고 불러야만 하는가? 그는 꼭 일본(日本) 천황 폐하에게 혈서(血書)를 쓰고, 독립군(獨立軍)을 때려 잡는 간도(間道) 토벌대 일본군 출신이어서 만이 아니다. 굴욕적인 1965년 한일 협정, 몸도 마음도 모두 일본에게 다 갖다 바친, 나라를 팔아먹는 매국(賣國) 행위 때문이다. 이승만(李承晩)은 일본에 전후 배상금을 20억불을 요구했다. 장면(張勉) 정부는 28억불을 요구하였고, 장준하(張俊河) 선생은 21억불을 요망하였다. 그러나, 박정희는 단돈 3억불에 낙찰 시켰다. 그것도, 과거사는 "과거는 묻지 마세요!" 하기로 하고, 일본이 도둑질해 간 우리 문화재도 "너희들이 그냥 가져라!"하고, “위안부 문제, 강제 징용, 강제 노동자 임금 문제, 사할린 교포 문제, 모두 너희 좋을 대로 하세요!” 라고 했다. 그리고, 최근 발굴된 일본의 자료에는 일본(日本) 기업과 정부로 부터 엄청난 뒷거래 사실이 폭로되었다.

 

 역대 정권 1인당 국민 소득 증가액 : 통계청이 발표한 1997년-2011년 역대 정권의 1인당 국민 소득(GNI) 증가액은 노무현. 김대중 정권 때에 가장 양호했다. 1인당 국민 소득(GNI) 증가액의 통계 자료를 보면, 노무현 9,532달러, 김대중 4,493달러, 이명박 857달러, 김영삼 -107달러 등의 순서이다.

 

★ 대북 송금액 1.2위는 김영삼.이명박 : 통일부가 발표한 역대 정권의 대북(對北) 송금액을 비교해 보면, 김영삼 4조원, 이명박 2조 5천억원, 노무현 1조 6천억원, 김대중 1조 5천억원이다. 북한(北韓)에 송금한 금액을 보면, 김대중. 노무현 때에 가장 적었다. 다만, 통일부 당국자는 2017년 04월 27일 기자들과 만나 "역대 정권 대북 송금액은 (현금. 현물) 기준이 상이하기 때문에, 기준이 서로 다른 자료를 단순 비교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말했다.

 

★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 조직원 및 안기부 비밀 공작원이었던 오정은(전 청와대 행정관), 장석중. 한성기 등 3명은 이회창 후보의 지지율을 높이기 위해 1997년 12월 10일 베이징에서 북측 인사와 접촉해 판문점에서 무력 시위를 벌여줄 것을 요청했다.

 

■ 박정희 때문에 경제 발전했나? 아니다!

 

★ 역대 대통령 재임 기간의 무역 수지를 살펴보면, 박정희 233억 달러 적자, 전두환 8억 달러 흑자, 노태우 132억 달러 적자, 김영삼 366억 달러 적자, 김대중 846억 달러 흑자, 노무현 980억 달러 흑자 등이다. 1986년부터 1988년 사이에 3저 호황(저금리. 저달러. 저유가)이라는 천혜의 외부 환경 때문에 대한민국 건국 이래 최초로 무역 흑자를 기록했다. 박정희 임기 내에 국가 부도 위기가 10번 정도 있었다. 외국에서 빌려온 차관 금액의 40% 가까이를 부채 해결에 쓰게 됨으로써 부채 돌려 막기 경제가 계속 반복되었다. 다행히도 1980년대 이후 민주화(民主化) 운동을 거치면서 정치 경제가 새로운 패러다임을 재구성하는 단계를 밟으면서 경제 체질이 개선되었다.

 

★ '박정희 대통령 덕분에 우리 경제가 이만큼 발전했다!' 라는 잘못된 인식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뭘까? 1950년대까지만 해도 독일(Germany)에서 여론 조사를 하면, 히틀러(Adolf Hitler)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꼽혔다. 하지만, 복지 국가의 기틀을 잡아간 이후부터는 일부 파시즘(fascism) 추종 세력에게서만 추앙받는 꼴이 되었다. 이와같이 '더 좋은 세상'을 살아보지 못한 사람들이 겪을 수밖에 없는 한시적 한계이다.

 

★ 박정희식 막개발이 땅값과 물가를 폭등시켜 후대에 큰 부담을 안겼다. 군사 독재가 경제를 살렸다는 속설은 이제 폐기되어야 한다. 2012년 우리나라 평당 땅값은 세계 1위인데, 이것은 누구의 책임인가?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독재 시대에 대부분의 지가 상승이 일어났고,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합해서 2% 정도 책임이 돌아갈 뿐이다. 한국의 땅값을 세계 최고로 만든 책임의 50%는 박정희 정권에게 있다.

 

★ 박정희 경제는 결국 카드 돌려 막기 경제였고, 만성적인 적자 구조 경제였다. 마이너스 카드 뽑아다가 계속 써 대고 나서 그걸 다시 돌려막기 하다가 망하는 그런 경제였다. 결국, 미국과 유럽 및 일본의 차관(借款)을 끌어다가 돌려 막기에 급급했다. 1962년도 무역 적자 규모가 5천 5백만 달러였는데, 1971년에는 5억8천2백만 달러, 1974년에는 20억 달러, 1979년에는 30억 달러로 상승했다. 결국 외국 차관(借款)으로 무역 적자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1980년대 특히 1986년부터 1988년 사이에 3저 호황(저금리. 저달러. 저유가)이 없었으면 한국은 아마 총체적 국가 부도를 맞이했을 것이다.

 

★ 박정희(朴正熙) 경제는 재벌과 결탁한 방식의 정경(政經) 유착 체제를 고착화시켰다. 그리고 관치 금융을 구조화했고, 강압적 노사 개입을 강행했으며, 농업을 압축 쇠퇴시켰다. 각종 특혜와 비리, 수조 수천억원대의 비자금, 그 피해는 고스란히 선량한 기업들과 남아있는 국민들의 몫으로 돌아왔다. 박정희 인맥과 그들의 정경(政經) 유착에 의해 그 더럽고 치욕스런 패착(敗着)의 고리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차별받고 상처받고 있는지 아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다.

 

★ 박정희는 독재 정권의 기득권으로 19년간 대한민국을 떡 주무르듯이 가지고 놀았고, 한국의 동서남북 찢어서 국민들 가슴에 상처를 주었고, 수많은 사람들을 눈물 흘리게 했다. 우리 경제가 겪고 있는 재벌 독식, 양극화 경제, 관치 금융 경제 같은 문제의 뿌리는 바로 박정희 정권 때문에 고착화 되어 왔다. 군사 독재 정권은 장기적 관점을 갖고 양심적으로 경제를 운용하는 것이 아니다. 눈앞의 성과(成果)에 급급하므로 경제를 잠시 흥청거리게 하고, 거시(巨示) 경제를 망친다. 독재가 경제를 살린다는 속설은 잘못된 것이다. 오히려 반대이다. 민주주의가 책임 의식을 갖고 경제를 제대로 운용한다.

 

★ 박정희 군사 쿠테타 세력은 특정 세력에 대한 온갖 특혜와 특정 출신의 지배 구조를 심화시켰다. 전국적으로 국민 공짜 강제 노역은 일상적으로 실시되었다. 모든 경제적 성과는 특정 지역에 배당되었고, 기업인마저 특정 지역 및 특정 세력에게만 특혜를 주는 관료주의 방식이었다. 그 나머지는 도산(倒産)되어 나가는 것이 실상이었다. 그 결과, 특정인들이 한국 경제를 장악했고, 대기업 및 재벌 기업이 양산되었다. 모든 생산 시설은 특정 세력에게 편중되었고, 임금 및 소득 격차가 심화되었다. 집권 세력의 비자금(祕資金) 및 불법 자금이 난무했고, 온갖 국민 성금(誠金) 모금이 정치적으로 성행됐다.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비리(非理)와 부패(腐敗)가 특권 세력에 의해 양산되었다. 부정 축재(蓄財)의 불법 자금은 천문학적인 수준이었다. 5공 청문회에서도 수십조의 돈이 비자금(祕資金)으로 세탁된 것이 발각되었다. 정치 건달과 정치 권력의 사조직이 난무했다. 정치와 권력에 빌붙어 기생하는 신문과 언론이 활개를 쳤고, 특정 세력의 비리가 독버섯처럼 자라났다.

 

 새마을 운동과 경제 개발 계획은 박정희 작품 아니다.

 

‘새마을 운동’과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은 원래 장준하(張俊河) 선생의 작품이었다. 그런데, 장준하(張俊河)는 박정희 정권에 의해 1975년 타살되었다. 그리고, 박정희는 장준하(張俊河)의 ‘새마을 운동’을 훔쳤고, 장준하(張俊河)의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역시 훔쳤다. 장준하 선생님이 오로지 가난한 국민을 위해 기획한 ‘국토 건설 사업’ 기획안을 박정희가 도둑질한 것이다. 1960년 장준하(張俊河) 선생의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은 1962년 그 이름 그대로 추진되었다.

 

1960년 장준하(張俊河) 선생의 ‘농촌 부흥 운동’은 이름표를 1970년 ‘새마을 운동’이라고 바꿔 달고 추진되었다. 그 후, 새마을 운동과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은 박정희의 창작물처럼 거짓 포장되어 역사에 기록되었다. 박정희씨는 장준하(張俊河)를 암살(1975)했고, 김영삼(金泳三)에 대한 염산 테러(1969) 및 김대중(金大中) 납치(1973) 행각을 벌인 독재자였다. 박정희 정권은 한국의 경제를 망쳐 놓았다. 박정희 집권 기간(1963년-1979년)에 전국의 땅값은 100배나 폭등했고, 물가는 11.8배나 올랐다. 무역 적자 규모는 천문학적인 규모였다.

 

★ 장준하 선생 작품을 훔쳐서 이름만 바꾼 새마을 운동

 

1960년 4.19 혁명으로 들어선 장면(張勉) 총리 정권은 곧바로 경제 발전 계획을 수립했다. 그 때 표방한 표어가 ‘경제 제일주의’, ‘1961년은 경제 건설 출발의 해’였다. 그 계획 중 하나가 ‘농촌 부흥 운동’ 및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추진을 위한 ‘국토 개발 기획단’ 사업의 발족이다. 그 단장을 장준하(張俊河) 선생이 맡았다. 하지만, 1961년 05월 16일 박정희(朴正熙) 육군 소장이 주도한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다. 그야말로 날벼락이었다. ‘국토 건설 사업’이 본 궤도에 올라서려는 순간, 군사 쿠데타에 의해 모든 사업은 중단되었다.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朴正熙) 군부 세력이 정권의 정통성 작업이 시급한 마당에 대대적인 ‘국토 건설 사업’은 후순위로 밀려났다.

 

1960년 장준하(張俊河) 선생의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은 박정희 제3공화국의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으로 이름을 바뀌었고, ‘농촌 부흥 운동’은 폐기 처분됐다.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그동안 방치되었던 농촌 개발과 식량 문제가 현실 과제로 대두됐다. 그래서, 1960년 장준하(張俊河) 선생의 ‘농촌 부흥 운동’을 부활시켰다. 대신, 이름표를 1970년 ‘새마을 운동’이라고 바꿔 달고 다시 등장시켰다. 박정희 군사 정권은 1960년 장준하(張俊河) 선생의 ‘농촌 부흥 운동’을 폐기해버렸다가 10년이 지난 뒤, 1970년 적당히 ‘새마을 운동’이라는 이름으로 바꿔 달고, 박정희의 창작품인 것처럼 표방했다.

 

★ 박정희 정권 시대에 매년 4월이 되면, 농촌에 ‘부녀자 가출 방지 기간’ 현수막이 걸렸었는데, 그 까닭이 뭐였을까? 1968년대말 특히 1968년 보건 사회부가 전국적으로 ‘부녀자 가출 방지’ 사업을 대대적으로 벌였다. 시골에서 먹고 살 게 없기 때문에 서울로 많이 올라간 것은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올라간다고 딱히 좋은 직업을 얻는 것은 아니었는데, 여성들은 주로 가정부(家政婦)나 공장(工場) 같은데 취직했다. 그거라도 얻는다면 좋은 거였다.

 

박정희의 새마을 운동은 구호만 요란했고, 농업을 압축 쇠퇴시켰기 때문이다. 특히, 농업 생산 과정 및 유통 과정이 국가와 자본에 의해 강력하게 종속되는 상황이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농(離農). 이촌(離村) 현상이 나타났다. 특정 세력에 대한 온갖 특혜가 성행했고, 전국적으로 국민 공짜 강제 노역은 일상적으로 실시되었다. 모든 경제적 성과는 특정 세력에게만 특혜를 주는 관료주의 방식이었다. 박정희의 새마을 운동은 군사 쿠테타 및 친일 매국노들의 군사 독재 체제의 선전 및 선동에 이용되었으며, 농민들이 실제로 느끼는 경제적 빈곤감은 심화되었다. 다행히도 1980년대 이후 민주화(民主化) 운동을 거치면서 정치 경제가 새로운 패러다임을 재구성하는 단계를 밟으면서 경제 체질이 개선되었다.

 

★ 박정희(朴正熙)는 독립군(獨立軍)을 토벌했다. 1939년 08월 24일 일본군(日本軍)으로서 동북 항일 연군(독립군)을 토벌하는 대사하 전투에 참여했다. 이 후에도 만주 일대에서 독립군(獨立軍) 토벌에 나섰다. 군관 학교 졸업 후, 5개월 정도 현장 실습을 마치고, 1942년 10월 일본 육군 사관 학교 57기에 3학년으로 편입했으며, 1944년 04월 육군 사관 학교를 졸업했다. 1944년 12월 만주군 보병 제8단 육군 소위(少尉)로 임관하였다. 1945년 07월 10일에 만주군 중위(中尉)로 승진함과 동시에 만주(滿洲) 동북부 열하성(熱河省)의 만주군 보병 제8사단에 배속되었으며, 그들의 토벌 대상은 팔로군(八路軍)이었다. 독립군 투사들이 주로 팔로군(八路軍)에 가담했는데, 박정희가 팔로군(八路軍) 토벌에 참여한 것이다. 독립군(獨立軍)을 토벌한 것이다.

 

★ 박정희(朴正熙)는 빨갱이 공산주의자였다. 공산당(共産黨)의 남한 조직인 남로당(南勞黨)의 한국군 조직책이었다. 여수. 순천 14연대 사건에 대해 공산주의자(共産主義者)를 색출하는 숙군(肅軍) 작업에 박정희가 간첩 활동의 핵심 역할을 했던 것이 들통 났고, 1948년 11월 11일 체포되었다. 1945년 이후 남로당(南勞黨)에 입당하여 공산당(共産黨)의 한국군 하부 조직책으로 간첩 활동의 핵심 역할을 해 왔다. 그는 그의 형 박상희에게서 사상적으로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그의 형 박상희는 1946년 10월 01일 공산당(共産黨) 좌익(左翼) 시위를 하다가 경찰의 총격에 의해 사망하였다. 박정희(朴正熙)는 간첩 활동의 핵심 역할 죄목으로 무기 징역형을 선고받았는데, 그의 동지들 명단을 넘겨주는 댓가로 간신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는 1949년 01월 백선엽 장군의 배려로 다시 예편되어 육군 정보국에서 비공식 문관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1948년 박정희, 그는 원조 종북(從北)이었다.

 

 1948 11 11, 공산주의 남로당(남로당) 빨갱이에 연루되어서 검찰로부터 사형 구형을 언도받았고, 법원으로부터 무기징역 선고를 받은 사람이 있는데, 그가 바로 박정희(朴正熙)이다. 1948 11 11일 당시, 그는 육군 소령, 보직은 육사 1중대장이었다. 당시 군()은 좌익 분자를 색출했는데, 박정희가 연루된 것이다. 남로당 군 총책인 이재복을 수사하다가 박정희가 남로당 당원임을 알게 되었다. 이재복은 박정희 형인 박상희씨 친구였다. 박정희는 이재복에게 포섭됐다. 숙군(肅軍) 당시 실무 책임자로 조사 과정에서 박정희가 쓴 '자술서'를 직접 읽어본 김안일 특무과장은 "박정희는 '대구 10.1사건'으로 형 박상희가 우익에 피살되자, 그에 대한 복수심과 형 친구 이재복의 권유로 남로당에 가입한 것 같다"고 증언한 바 있다. 또한, 춘천 8연대 시절 박정희의 직속 상사였던 김점곤 장군도 "박정희가 체포된 후 그의 자술서를 봤더니, 이재복을 통해 입당했다고 되어 있었다"고 증언한 바 있다.

 

 박정희는 누구인가? 일제(日帝) 식민지 때에 일본 '황군 장교'였고, 1948년 좌익이 한국 사회를 지배하자, 남로당에 가입했다. 하지만, 숙군(肅軍) 대상에 올라 처형당할 처지가 되자, 동료들을 밀고했다. 당연히 그는 자기 목숨을 건졌다. 박정희는 대한민국 전복 '반란 기도죄' 1심서 무기징역, 2심서 징역 15년에 형집행정지를 받은 '빨갱이'였다. 그는 1950년 한국전쟁으로 군인 부족 사태가 발생하자, 구사일생하여 다시 군인으로 복귀되었다. 그리고, 1961 05 16 군사반란을 일으켰고, 불법적으로 정권을 탈취했다. 그 후, 18년 동안 대한민국을 통치했다. 1972년에는 유신 쿠데타를 일으켰고, 체육관에서 대통령이 되었다. 그리고, 긴급조치를 난발하여 시민들의 자유를 빼앗았다. 그는 지독히 자신의 이익을 위해 권력을 지향한 사람이다. 박정희는 분명 일본 황군 장교로 조국을 팔았고, 남로당 당원으로서 동료를 팔았다. 또한, 권력을 잡기 위해 민주주의를 유린했다. 우리는 민주주의적인 양심으로서 그를용납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