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 (한국)

■ 하늘에서 대한 조국의 독립을 꿈꾼 한국 청년들

마도러스 2020. 12. 7. 02:09

 

■ 하늘에서 대한 조국의 독립을 꿈꾼 한국 청년들

 

 국립항공박물관에서 한국 항공 개척의 역사 발자취를 찾았다.

 

 국립항공박물관은 임시정부의 한인 비행학교 설립 100주년을 기리기 위해서 2020 07 05일 개관했다. 대한민국의 하늘을 열었던 임시정부 항공 독립 운동가들의 사진, 유품 등과 그 안에 깃든 나라 사랑까지 사진첩 열어 보듯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곳이다. 국립항공박물관 1층에선 신화 속 하늘의 이야기부터 세계 항공의 발전 역사까지 살펴볼 수 있다. 또한, 대한민국 항공 역사를 이끌어온 사람과 사건에 대해 세세히 전시되어 있다. 중국. 소련. 미국. 일본에서 비행기 조종술을 배우거나 공군에 입대하여 조국 독립을 향한 꿈을 이루려 했던 많은 청년들의 행적이 담겨 있다. 1903년 라이트 형제가 비행기를 만든 이후, 비행기는 전쟁 승패에 큰 영향을 주는 주요 무기로 많은 나라의 주목을 받았다. 1919년 설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 역시 일제(日帝)에 대적하기 위해 적은 수로도 큰 효과를 볼 수 있는 비행대 창설을 결정하였다. 임시정부는 중국의 운남육군항공학교에 청년 4명을 보내어 조종사를 양성하는 한편, 비행기 구매 자금을 모으기 위해 군무총장 노백린을 미국으로 파견시켰다.

 

 1920 01 15일 노백린 군무총장은 미국에서 안창호 등을 중심으로 결성된 '대한민국 국민회'을 방문했다가 레드우드(Redwood) 비행학교에서 조종술을 배우고 있는 청년혈성당원 6을 만났다. 1920 02 05일 노백린은 그 6명의 청년과 기념사진을 찍은 후, 사진을 상해 임시정부로 보내며, 임시정부와 긴급히 상의한 끝에 미국에 비행학교를 설립하기로 했다. 비행학교 운영에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지만, 다행히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쌀농사를 짓는 거부(巨富) 김종림이라는 한인 청년의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운영되었다. 장녀의 이름을 '코리아'라고 지을 정도로 조국을 그리워했던 김종림은 활주로를 설치하기 쉬운 비행장 부지와 훈련기를 구매해주고, 훈련 과정에 필요한 운영자금 100억원을 지원하였다.

 

 1920 02 대한민국 임시정부 한인 비행학교 '윌로우스(Willows) 비행 학교' 최초로 설립되었다. 비행학교 훈련 교관으로는 청년 혈성 당원에게 비행술을 가르치던 미국인 '프랭크 브라이언트'가 합류하여 힘을 보탰다. 당시 미국에서도 비행기는 보기 힘든 것이라 나라도 없는 '코리아' 청년들이 비행학교를 설립한다는 것은 그 지역에서 매우 놀라운 소식이었다. 지역신문인 '윌로우스 데일리 신문' 1921 02 19일에 그 소식이 실리기도 했다. 독립신문 1921 04 27일자에도 '대한이 처음으로 가지는 비행기 6'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그러나, 1921년 가을, 한인 비행학교를 세운 지 1년 만에 유례없는 대홍수가 일어나 추수를 앞둔 농가에 큰 타격이 가해졌고, 윌로우스 비행 학교는 자금난으로 인해 문을 닫게 되었다.

 

 1940년 임시정부에서 광복군(光復軍)이 조직되었고, 1945 03월 처음으로 광복군(光復軍) 내 군무부는 '한국 광복군 비행대' 편성과 작전을 언급하였다. 1945 03 30일 처음으로 '공군'을 명시하였다. 하지만, 미군 전략정보처 OSS와 함께 광복군을 국내로 진입시키려던 '독수리 작전' '냅코작전' 1945 08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인해 실현되지 못했다.

 

★ ​국립항공박물관은 대한민국 항공 독립운동가의 업적을 모아놓은 장소이다. 한쪽에는 대한민국 항공 독립운동가들의 이름이 새겨진 서랍들이 비밀처럼 꽂혀 있다. 서랍을 열어 보면, 하늘에서 독립을 꿈꾸며 날고자 했던 독립운동가들의 이름과 그들의 행적이 적혀 있다. 이곳 국립항공박물관에서는 한 편의 영화를 보듯 대한민국 항공 독립운동가들의 활약상을 머릿속에 아로새길 수 있다. 우리나라 항공 독립운동가들과 윌로우스(Willows) 비행학교 학생들의 뜨거웠던 독립정신이 담겨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기록에 남지 않아 업적을 확인할 수 없는 무명의 항공독립운동가들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