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열전

■ 제2차 세계대전 때, 유럽을 평정했던 한국 군인

마도러스 2021. 1. 27. 05:21

 

■ 제2차 세계대전 때, 유럽을 평정했던 한국 군인

 

 정세균 총리, '세계 한인의 날' 맞아  김영옥(金永玉) 대령 추모

 

2020 10 05 세계 한인의 날을 맞아 정세균 국무총리가 한국계 미국인 전쟁 영웅 김영옥(1919-2005) 전 미() 육군 대령의 업적을 기려 눈길을 끈다. 김영옥(金永玉) 대령은 국적은 미국인이지만, 일찌감치 미국으로 이민한 한국인 부모 사이에 태어나 혈통만큼은 ‘100% 한국인이다. 정세균 총리는 2020 10 05일 사회 관계망 서비스(SNS) 세계 한인의 날 기념사를 올렸다. ‘세계 한인의 날 750만 재외 동포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한민족의 자긍심을 높이기 위해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7년 처음 제정했다. 원래 국내에서 성대한 기념식을 가져왔으나, 2020년에는 코로나19 바이러스 감염증 여파로 재외 동포 대표들이 한국에 모여서 하는 기념식은 생략됐다.

 

정세균 총리는 기념사에서 미국 캘리포니아 연방 고속도로에는 김영옥 대령 기념 고속도로라 불리는 구간이 있다. 2차 세계대전과 1950 6·25 한국 전쟁에 참전한 전쟁 영웅  김영옥 대령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도로명으로 명명된 것이라고 소개했다. 이어 김영옥 대령은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한국계 미국 이민 1세대이며, 재외 동포 여러분의 귀감이 되고 있다. 지금도 지구촌 곳곳에서 제2의 김영옥, 3의 김영옥으로 활약하고 계실 재외 동포 여러분을 떠올리며, 오늘 세계 한인의 날에 특별히 여러분을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김영옥(1919-2005) 대령은 () 육군 장교 2차 세계대전 1950 6·25 한국전쟁에서 나란히 커다란 전공을 세운 영웅 중의 영웅이다. 2차 대전 당시 이탈리아(Italy) 프랑스(France) 전선에서 복무한 그는 특히 미국 육군 마크 클라크(Mark Clark) 장군 휘하 제5군 소속으로 1944 06월 독일군 점령 하에 있던 이탈이아 로마 해방에 혁혁한 공로를 세웠다. 훗날 클라크 장군은 내 휘하에 있던 50만 군인 중 최고의 군인이라고 김여옥 대령을 극찬했다.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잠시 군()을 떠났던 김영옥 대령은 1950년 한국에서 전쟁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듣고, 육군에 복귀했다. 한국인 부모 밑에서 자랐지만, 평생 미국인으로 살아온 그에게 한반도에서 일어난 전쟁은 남 일처럼 느껴질 수도 있었는데, 그는 부모의 나라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참전을 결심했다. 당시만 해도 미군에는 인종차별 관행이 남아 있었으나, 김영옥 대령은 뛰어난 전술·전략만으로 백인들을 이끄는 미군 최초 유색인종 대대장이 됐다.

 

1953년 정전 협정 체결 후, 그는 미군 군사 고문단 일원으로 한국에 남았고, 한국군 현대화에 힘썼다. 이런 보직은 진급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결국 김영옥 대령도 장군 진급을 못한 채, 1972년 대령을 끝으로 전역했다. 이후 한미 연합회(KAC), 한미 박물관(KAM) 등 단체에서 활동하며, 한미 동맹을 굳건히 하는 일에 앞장섰다. 2005년 김영옥 대령은 타계했다. 그리고, 13년이 지난 2018, 그의 고향인 미국 캘리포니아주는 주내 고속도로 일부 구간에 김영옥 도로 라는 이름을 붙이기로 결정했다. 미국에 한인의 성명을 딴 고속도로가 생긴 것은 처음 있는 일이라 미국 내의 한인들이 큰 자부심을 느꼈다.

 

 

■ 훈장 거부한 전쟁 영웅김영옥(金永玉)을 아십니까?

 

 그는 한국. 유럽. 미국에서 훈장 받은 유일한 군인이었다.

 

세상엔 수많은 영웅이 있다. 특히 치열한 전투 속에선 영웅이 더 많이 탄생하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영웅은 많지 않다. 부풀려진 전공에 도취해 높은 자리에 앉고, 권력을 휘둘렀던 인물들이 더 흔하다. 그런데, 김영옥(金永玉)은 좀 달랐다. 2차 세계대전과 6·25전쟁에 참전했고, 한국. 미국. 유럽에서 모두 훈장을 받은 유일한 인물이다. 전투에선 누구보다 용맹했지만, 권력을 쥐기보다 사회봉사에 앞장섰던 휴머니스트. () 김영옥(1919-2005) 대령 진정한 전쟁 영웅이었다.

 

 김영옥(金永玉), 이탈리아 피사의 사탑에 처음 오른 연합군으로 기록

 

2021 01 24일 김영옥 평화센터와 일대기 아름다운 영웅, 김영옥 책에 따르면, 김영옥은 독립운동가 김순권씨의 아들로, 1919 01 29 미국(America) 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났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병사로 입대했다가 장교가 됐지만, 그가 배치된 곳은 일본계 미국인으로 구성된 100보병대대였다. 태평양 하와이 진주만 공습을 당한 미군은 이들을 일본놈이라고 공공연하게 멸시하고 조롱했지만, 김영옥은 개의치 않았다. 심지어 일본계 부대원들도 그를 탐탁치 않게 여겼지만, “우리는 같은 미국인으로, 같은 목표를 위해 싸운다고 감쌌다. 1943, 100대대는 유럽을 나치 독일로부터 해방하기 위해 이탈리아에 상륙했다. 독일군은 이탈리아(Italy) 중남부 지역에 방어선인 구스타프(Gustav) 라인을 치고 있었다. 연합군은 적에 대한 정보가 없었기 때문에 포로가 절실했다. 대대 작전 참모인 김영옥 중위는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경계가 느슨한 아침에 적진을 돌파해 포로를 잡아오겠다고 나섰다. 실제로 부대원 1명만 데리고, 갈대밭을 기어가 독일군 2명을 생포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탈리아 주둔군 사령관 마크 클라크(Mark Clark) 중장은 그의 초인적인 성과와 낮은 계급에 놀랐다고 한다. 그래서, 특별 무공훈장 수여식에서 부관의 대위 계급장을 떼어낸 후, 김영옥에게 전달했고, 직접 진급을 지시했다. 그는 이탈리아 로마 및 피사 해방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피사 대성당에 있는 피사의 사탑에 처음 오른 연합군으로 기록되기도 했다. 이어 프랑스로 건너가 브뤼에르(Bruyere), 비퐁텐느(Biffontaine) 지역을 해방시켰다. 비퐁텐느 마을 성당 동판(銅版)에는 지금도 김영옥 대위를 칭송하는 문구가 있다. 동판에는 “100대대 영웅들 중 1명인 김영옥 대위, 이 성당 문 앞 왼쪽에서 부상했으나, 치넨(Chinen. 의무병 이름)과 함께 성공적으로 탈출했다고 적혀 있다. 그는 기관총탄 3발을 맞았고, 사경을 헤매다 항생제 처치로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고, 미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이탈리아. 프랑스 등지에서 수많은 공적을 쌓았다.

 

박갑룡 송원대 교수가 쓴 휴머니스트 전쟁 영웅 김영옥 대령의 리더십 연구 논문에 따르면, 100대대 부대원들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리더십을 잊지 못해 그를 따랐다. 직접 수류탄을 던지고, 총을 쏘며 달리는 등 늘 선봉에 섰기 때문이다. 나베 다카시게는 그는 항상 전선에 있었고, 선봉에 있었다. 그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김영옥 평화센터 이환준 사무국장은 일본계 미국인들이 훗날 그의 휠체어를 끌며 존중하고 따랐다. 그의 인생은 말 그대로 겸손. 헌신. 용기였다고 설명했다. 그의 활약은 세계 2차 대전 노르망디 상륙 작전 때의 연합군 활약을 다룬 드라마 밴드 오브 브라더스’(Band of Brothers)에 등장하는 실존 인물 리처드 윈터스(Richard Winters) 예비역 소령을 떠올리게 한다.

 

그는 이런 공로로 이탈리아(Italy)에서 동성 무공 훈장과 최고 훈장인 십자 무공 훈장을 받았고, 프랑스(France)에서 십자 무공 훈장과 최고 훈장인 레종 도뇌르(Légion d'Honneur) 훈장을 받았다. 한국군은 물론 미군 중에서도 이렇게 많은 훈장을 받은 이는 없었다. 그는 강력한 포병 화력을 바탕으로 한 전술을 자주 사용했고, 미군 전술 교본 변화에도 크게 공헌했다.

 

 1950년 한국 전쟁에 참전, 휴전선을 60 밀어올리는 결정적인 역할

 

 더 놀라운 사실은 1950 6·25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부모님의 나라를 구하겠다!’ 라며 예비역 대위로 자원 입대했다는 것이다. 그는 정보 수집 업무를 맡으며 한국인 유격대를 조직했다. 1951 05월 중공군 2차 춘계 공세 때는 구만산 전투. 탑골 전투. 금병산 전투에 참전함으로써 사기가 떨어진 부대원을 독려하여 승리로 이끌었다. 그리고, 북상한 유엔군 부대 중에 가장 빠른 진격으로 캔자스선’ (Kansas line. 38도 인근 전술선)에 도달했다고 한다. 그가 이끈 부대는 휴전선을 60 위로 밀어올리는 데도 매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훈장은 받을 만큼 받았다!” 라며 훈장 거부했던 군인이었다.

 

진격이 너무 빠른 나머지, 미군의 오폭을 받고 부상했지만, 일본 오키나와에서 치료받았고, 다시 전선으로 돌아왔다. 이런 공로로 미국(America)에서 동성 무공 훈장, 은성 무공 훈장 등을 받았고, 한국. 유럽에서 받은 훈장까지 합하면 주요 무공 훈장만 19개나 됐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공적을 뽐내지 않았다. 1950 6·25 한국 전쟁 당시 특별 무공 훈장을 주려는 연대장에게 훈장은 받을 만큼 받았다. 부하들에게 주라!” 라며 거부했다. 그의 일대기 책을 쓰려고, 그를 취재하면서 무공훈장을 몇 개나 받았는지 물어보자, “잊어버리고, 세어보지도 못했다, 자동차 주차 창고 구석 종이 상자에 넣어둔 은성 무공 훈장을 꺼내 보여줄 정도였다.

 

그는 수많은 전쟁 고아들을 도운 휴머니스트’(humanist)이기도 했다. 1950년 처음 도착한 부산역에서 1,000명이나 되는 남루한 차림의 아이들을 만났다. 이에 그는 미군 장교들에게 나는 한국인 2세이다. 여기 굶주린 아이들이 우리만 보고 있다. 우리는 미() 육군 장교이다. 한두끼쯤 안 먹어도 굶어죽지 않는다, 전투 식량을 나눠주도록 했다. 전투 중에도 장병 1인당 50센트씩을 모아 경천애인사라는 고아원에 전달했다. 유엔군 중에 특정 고아원에 지원금을 송금했던 부대는 김영옥의 부대가 유일했다고 한다.

 

 미국 LA 한인(韓人) 동포를 돕는데 여생을 바쳤다.

 

1972년 대령으로 전역한 그는 정치권의 러브콜을 뿌리치고, 미국 로스앤젤레스(LA)에서 한인(韓人) 동포를 돕는데 여생을 바쳤다. 미국 최대 소수 인종 비영리 보건 기관인 한인 건강 정보 센터 한미 연합회를 설립했다. 일본계 미국인을 설득해서 미국 캘리포니아주 의회 위안부 결의를 도왔고, 미군의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 조사 위원회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는 늘 나는 100% 한국인이자 미국인이라고 했다. 그는 우리가 그렇게 원했던 참군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