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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최초의 여류 비행사 권기옥(權基玉) 선생

마도러스 2020. 12. 8. 08:11

 

■ 조선 최초의 여류 비행사 권기옥(權基玉) 선생

 

 "나는 독립운동을 할 수 있었을까?" 라는 물음 앞에서, 우리는 독립운동의 길로 뛰어들었을 것이라고 대답하겠지만, 실제로 그 상황에 처하게 된다면, 선뜻 나서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일제(日帝)의 핍박에도 굴하지 않고, 꿋꿋이 독립의 길을 걸었던 수많은 선열들 덕분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으며, 독립 투사들 중에 최초의 여류 비행사인 권기옥(權基玉) 선생이 있다.  권기옥(權基玉) 선생 1901년 평안남도에서 태어났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노름을 좋아하는 아버지로 인해 남의 집에 신세를 질 만큼 가난해졌다. 선생은 11살에 은단 공장에 취직하여 집안의 살림을 도왔다. 선생은 어려운 상황에 굴하지 않고, 숭현 소학교에서 학업을 이어갔다. 선생은 졸업 후, 숭의 여학교에 편입하였다. 숭의 여학교는 1938년 신사(神社) 참배를 반대하여 자진 폐교한 바 있는 민족의식이 투철했던 학교이다.

 

 권기옥(權基玉) 선생은 여학생들의 항일 비밀 여성 단체인 송죽회(松竹會)에 가입하여 독립을 향한 첫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선생은 송죽회와 함께 3.1운동에 사용할 태극기를 만들었고, 박현숙을 통해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었던 신홍식(申洪植)으로부터 지휘를 받아 1919 3 1일 경성부의 만세 시위와 동시에 평양에서 만세 시위를 일으키는 데 동참했다가 잠시 유치장에 구금되었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 정부와 연계하여 군자금을 모금하는 일에 참가했는데, 평양 지역 청년 조직인 평양청년회의 김재덕과 연결된 것이 드러나 다시 체포되어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이때 임득삼, 김정직, 김순일 등을 통해 임시정부와 연락을 취했다. 1920년 봄 감방에서 출소한 후, 브라스 밴드단을 만들어서 평안도와 경상도 지방을 순회하며 민중 계몽 운동과 독립 운동의 연락 활동을 했다. 독립단원들이 폭탄을 제조하도록 숭현 소학교 석탄 창고를 은신처로 제공하여 1920 08 03일 평안남도 경찰부 청사 폭탄 투척에 사용하게 하였다. 1920 09월 미국 국회의원 동양시찰단의 한국 방문을 앞두고, 대대적인 시위 행동을 일으킬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공채를 팔아 독립자금을 모으고 지원하는 데 힘썼다. 선생은 활동 중에 일제(日帝)에 붙잡혀 가혹한 고문을 겪었다. 거꾸로 매달려 물을 먹어 수십 번을 졸도하는 등,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고통을 겪어야 했다. 하지만, 선생은 결코 입을 열지 않았고, 이를 본 일본의 다나카 형사는 이 여자는 지독하여 도무지 말을 않는다. 검찰에서 단단히 다루길 바란다.” 라는 말을 심문조서에 남겼다. 결국, 선생은 확실한 증거가 없음에도 실형을 선고받았다. 암담한 상황에서도 선생의 독립 의지는 꺾이지 않고 더욱 강해졌으며, 선생은 이후 독립을 향해 더 담대한 발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선생은 출옥 후,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일제의 감시망은 점점 심해졌다. 권기옥이 참여한 일련의 사건이 들통나면서 검거 선풍이 불었다.

 

 1920년 권기옥은 체포 직전 겨우 빠져나와 조만식이 몰래 보내준 여비로 중국 멸치배를 얻어 타고, 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갔다. 선생은 멸치잡이 배에 숨어서 풍랑을 해치며, 생사를 알 수 없는 망명길에 올랐다. 1920 11월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인 손정도의 집에 머물렀다. 그리고, 김규식의 배우자 김순애(金淳愛)가 중국어와 영어를 터득할 수 있도록 항주의 홍도 여학교를 소개해 주었다. 1921년 서양 선교사가 경영하는 항주의 홍도 여학교 중학과에 입학한 후, 1923 06월 졸업하였다. 졸업 후, 상하이로 돌아와서 인성학교 교사로 5개월간 재직하였다. 권기옥은 이 기간 동안 비행사가 되기 위하여 영어를 습득하려는 노력을 계속하였다. 권기옥 선생의 꿈은 비행사였다. 16살 어린 시절, 1917 05월 미국인 아트 스미스의 곡예비행을 보았고, 비행사가 되어 일본으로 날아가 일왕의 궁을 폭파시키리라는 다짐을 하였다.

 

 1923년 임시정부는 육군 항공대 창설과 비행사 양성을 구상하고, 비행기 확보와 아울러 비행사 확보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이에 권기옥은 임시정부 요인인 이시영의 추천서와 중국인 혁명가 방성도(方聲濤), 운남성장 겸 독군 탕자오(唐繼堯)의 비행사 교육 추천서를 받았다. 중국의 군벌들이 세운 4개의 비행학교 중 보정항공학교와 남원항공학교에서는 권기옥이 여자라는 이유로 입학을 거절했고, 손문이 설립한 광저우 광둥 항공학교에는 아직 비행기가 한 대도 없었다. 1923 12월 권기옥은 추천서를 들고, 윈난성(雲南省) 성장인 당계요와 직접적인 담판을 지었다. 조선의 독립운동에 호의적인 군벌인 당계요 윈난성 성장은 차라리 비행사가 되겠다고 이역만리를 찾아온 조선인의 용기에 탄복하여 전격적으로 입학을 허가했다. 드디어, 1923 12 중국 운남 육군 항공학교에 입학했다. 한국인 청년 3명과 함께 운남 육군항공학교 1기생으로 입학한 것이다. 권기옥은 훈련비행 9시간 여만에 차라리 단독 비행도 허가될 만큼 우수한 학생이었다. 선생은 혹독한 교육 과정을 견딘 끝에, 1925 02월 운남 육군 항공학교의 첫 졸업생이 되었다. 비행 탑승 적성 검사에 합격했다. 1925년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 비행사이며, ‘동양 최초의 여성 비행사가 되었다. 조선 여성으로서 선생이 어린 시절의 꿈을 이룬 것이다. 일본 영사관은 그녀를 암살하기 위하여 청부 살인업자를 보내기도 했다. 비행사가 되어 1925 05월 상하이로 돌아왔다. 상해로 돌아온 권기옥은 임정에 조선총독부를 폭파할 테니 비행기를 사달라고 말하기도 했다. 임시정부의 재정 상황이 열악하여 항공대 창설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였다.

 

 한국 임시정부의 사정을 정확히 알게 된 권기옥은 1925년 가을에 광동성(廣東省)의 중화민국 광저우 국민혁명 정부에서 머물렀다. 그 뒤, 1926년 봄, 의열단의 배후 실력자인 손두환의 소개로 북경(北京)에 있는 개혁성향 군벌 풍옥상군의 항공대에 들어갔다. 1926 04, 권기옥은 동로군 항공대의 제2비행원으로 임명되었다. 그 무렵, 권기옥은 남원 항공학교 교장 겸 동로군 항공대 대장인 서왈보의 소개로 독립운동가인 유동렬 장군과 이상정(李相定) 선생을 만나게 된다. 이상정(李相定)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로 유명한 민족시인 이상화의 형이다. 1927년 봄, 국민혁명군이 공군을 창설하자, 권기옥은 상하이(上海)로 가서 중국 공군 비행원으로 임명받았다. 운남 항공학교 전() 교장 유패천(劉沛泉)의 소개로 상하이로 가서 장제스(張介石) 국민혁명군 항공사령부 소속 비행사로 합류한 것이다.

 

 1927 04 난징(南京) 장제스(蔣介石) 국민정부 수립 이후에는 난징(南京)으로 이동하여 국민정부 항공서(1935년 이후 항공위원회로 개칭) 1대 소속 부비항원(副飛航員)으로 활동하였다. 1928 01월에는 난징(南京)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으나 중국인의 주선으로 상하이 일본 영사관에서 취조를 받은 후 풀려났다. 이 무렵, 중외일보(1927.8.28)에 따르면, 권기옥은 다른 재중 조선인 비행가들과 함께 중국혁명전선의 한국인 비행가로 불렸다. 권기옥의 비행 시간은 총 7,000시간이었다. 중국 난징(南京)에 머무르면서 권기옥과 이상정은 김원봉을 비롯하여 의열단과 관련을 맺었고, 조선민족혁명당원들과 교류하였다. 일제 첩보 자료(사상휘보 4, 1935.09)에 따르면, 권기옥은 난징(南京) 국민정부 항공서 비행사이자 의열단 여자부 연락원으로 활동하였다. 1928 02 29 이상정과 결혼하였으며, 1928 05 31일 이상정(李相定) 선생과 함께 톈진으로 건너갔다. 권기옥은 계속적인 비행 연습을 위해 중국 비행대에 들어갔지만, 군벌 간의 경쟁으로 피난을 가거나 군이 해산되면서 한군데 오래 머물지 못했다. 장가구(張家口). 내몽골. 베이징(北京) 등으로 거처를 옮겨 다녔다.

 

 중화민국 공군에서 소위를 거쳐 중위에까지 올랐다가 공군을 개편할 때 상위(대위)가 되었다. 1931년 만주를 기습 점령한 일본이 1932 상하이 전투를 일으키자, 권기옥은 비행기를 몰고나가 일본군에게 기총소사를 했다. 상하이 전투에서 활약한 공로로 권기옥은 무공훈장을 받는다. 1935년 당시 항공위원회 부위원장이던 쑹메이링이 비행기가 무서워서 공군에 자원하지 않는 중국 청년들을 독려하기 위해 비행사 권기옥에게 선전비행을 부탁하였고, 권기옥을 그 비행을 마치고, 일본 폭격을 마음먹었으나, 선전비행 출발 당일 북경의 대학생 시위로 정국이 불안해지자 계획 자체가 취소된다. 1936년 하반기 권기옥과 이상정은 일본 밀정이라는 모함을 받아 체포 수감되었다. 그리고, 8개월간의 옥고를 치른 뒤, 출옥하였다.

 

 일본군이 중일 전쟁(1937)을 일으켜 중국 본토를 침략하자, 권기옥 선생은 1937 11월 이상정과 함께 난징(南京)을 떠나 1938 03 충칭(重京)에 도착하였다. 민간인 신분으로 국민정부의 육군 참모학교 교관으로 활동하며, 영어와 일본어, 일본군 식별법과 성격 등을 강의했다. 그리고, 라디오 방송(일본어)을 듣고 내용을 기록하여 군에 제출하는 정보 수집 업무를 수행하였다. 1939년 임시정부가 충칭(重京)으로 오자, 1943년 김순애 등과 함께 권기옥은 좌우로 분열되어 있던 부인들을 설득하여 임시정부 산하의 여성 조직인 대한애국부인회를 재건하고 사교부장으로 활동하였고, 여성들의 독립운동 참여를 독려하는 등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이 무렵, 임국영(林國英)이라는 가명으로 활동했다. 권기옥 선생은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애국의 혼을 잃지 않고 독립운동에 평생을 투신하였다. 1943년 여름, 권기옥은 중국 공군에서 활동하던 최용덕, 손기종 비행사 등과 함께 한국 비행대 편성과 작전계획을 구상했다. 1945 03월에 한국 임시정부 군무부가 임시의정원에 제출한 한국 광복군 건군 및 작전 계획  한국광복군 비행대의 편성과 작전이 그 결실이었다. 미국과 중국에서 비행기를 지원받아서 한국인 비행사들이 직접 전투에 참여한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다. 1945 08 15, 일본이 예상보다 일찍 패망하여 계획은 실행되지 않았다.

 

 해방 후, 남편 이상정은 1947 10월 어머니의 사망으로 먼저 귀국하였는데, 1947 11월 뇌출혈로 급사하였다. 권기옥은 1949년에 귀국하였다. 권기옥은 1950-1955년 국방위원회 전문위원을 역임하였고, 한국 공군 창설의 산파 역할을 했다. 공군의 어머니로 불리기도 했다. 정계에도 입문하였으나, 1956년 신익희의 사망과 함께 더 이상 정치를 꿈꾸지 않았다. 올바른 역사기록에 대한 신념으로 권기옥은 1957년부터 1972년까지 한국연감을 발행했다. 1966년에는 대한민국 최초의 유일한 여성 출판인으로 언론에 소개되기도 했다. 1975년에는 대한민국의 모든 젊은이가 내 자식이고, 극일(克日)을 하는 젊은이들을 키워내고 싶다는 소망으로 전 재산을 서울대, 한국항공대 등 장학 사업에 기탁했다. 1966-1977년 한중문화협회 부회장, 재향군인회 명예회원 및 재향군인회부인회 고문을 역임하였다. 1968년 대통령 표창, 1977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수여되었다. 1988 04 19 87세로 별세하자,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2003년 국가보훈처가 08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꿈을 가져야 한다. 꿈이 없으면, 죽은 자와 다를 것이 없다. 내가 지금 열댓 살이라면 우주비행사를 꿈꿀 것이다. 어느 나라든 젊은이들이 꿈이 있고 패기가 있으면 그 나라는 희망이 있다. 감히 다른 나라가 넘볼 수 없다.” 한국 최초, 동양 최초 여성 비행사이자, 최전방에서 일본과 싸워온 군인이었던 권기옥(權基玉) 선생이 남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