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宗敎) 개혁

■ 번개(霹靂)와 프랭클린의 피뢰침(避雷針) 개발

마도러스 2020. 12. 28. 00:56

■ 번개(霹靂)와 프랭클린의 피뢰침(避雷針) 개발 

  

● 종교적 심성과 과학적 지식의 차이

  

벤자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1706-1790)은 18세기 미국 문화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신문의 발행인, 편집인이었고 펜실베이니아 대학의 모태가 된 학교를 설립했으며, 미국 철학협회의 창립자이기도 했다. 그리고, 1776년의 미국 독립선언서 기초위원으로 서명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러나, 프랭클린은 과학기술자로서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예를 들어, 번개가 전기의 방전이라는 사실을 밝혀내고 피뢰침을 발명한 것도 그였다.

 

1747년, 필라델피아에 있던 미국 철학협회에 한 통의 편지가 날아왔다. 그 편지에는 전기 실험에 대한 소식도 들어 있었다. 벤자민 프랭클린(미국.1706-1790)은 편지를 보고 흥미를 느껴 스스로 몇 가지 실험을 했으며, 다른 실험의 아이디어도 구상해서 그 내용을 다시 런던에 보냈다.

 

그의 편지는 유럽에서 높은 평판을 얻었으며, 프랑스어로도 번역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번역을 하던 프랑스의 “달리바르라”라는 과학자가 편지 내용에 흥미를 느껴 직접 프랭클린이 구상한 실험을 해보기로 결심했다. 번개가 전기라는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 구름에서 번개를 지상으로 끌어내리는 실험이었다.

 

1752년 봄, “달리바르(프랑스)”는 늙은 퇴역 군인을 한 명 고용해 외딴 오두막집에 높이 솟은 쇠막대를 단 의자를 설치한 다음, 날씨가 나빠지기를 기다렸다. 의자와 바닥 사이는 유리병으로 절연했다. 두어 달 후인 5월 10일, 마침내 벼락이 쇠막대에 떨어졌다. 실험의 관찰과 기록을 맡았던 승려가 황급히 오두막으로 달려가자 마을 사람들은 군인이 벼락에 맞아 죽었을 것으로 생각하고 우르르 몰려갔다. 그러나, 오두막 안에서 군인과 승려는 놋쇠철사를 들고 쇠막대에 접근시키며 한창 실험을 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불꽃이 사방으로 튀었고 승려는 팔에 불꽃을 맞아 흉터가 나기도 했다. 이 실험은 커다란 화제가 되어 곧 프랑스 전역에 퍼졌고, 마침내 파리에서 국왕이 지켜보는 가운데 실험이 재연되기까지 했다.

 

그러나, 미국의 프랭클린은 자신의 편지가 유럽에서 커다란 흥분을 불러일으킨 줄은 까맣게 모른 채, 독자적으로 실험에 착수했다. 그는 연을 만들어 띄워서 번개를 유도해냈다. 당시 그는 실험이 실패할 경우 세간의 웃음거리가 될 것을 우려하여 20대 초반인 아들만 데리고 조용히 진행시켰다. 1752년 6월의 일이었으며, 실험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번개 전기방전이라는 사실이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이다.

 

어린 시절 연날리기를 무척 좋아했던 프랭클린은 연 꼭대기에 길이 30cm 정도의 쇠붙이를 달고, 아래 쪽에는 명주 리본과 쇠붙이의 자물쇠를 연결해서 비 오는 날 실험을 하였다. 이 실험을 통해 벼락을 잡아 땅 속으로 흘러 들어가게 하는 “피뢰침”을 만들었다. 이 때가 1752년의 일이었다.

 

번개가 일어나고, 천둥치는 과정이 모두 1초도 안 되는 무척 짧은 순간이지만, 빛이 먼저 보이고 소리가 나중에 들리는 것은 바로 속도의 차이 때문이다. 은 1초 동안에 약 30만 km를 달려가지만, 소리는 1초에 약 340km밖에 통과하지 못한다. 빛이 소리보다 약882배나 더 빠르게 달리므로 천둥 소리가 번갯불을 따라 갈 수가 없는 것이다.

 

프랭클린은 자신이 입증한 사실을 바탕으로 1752년 피뢰침의 제품으로 발전시켰는데, 이 발상은 1753년에 발생한 비극적인 사건 때문에 곧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다. 즉, 러시아의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같은 실험을 하던 “리히만”이라는 교수가 벼락에 맞아 즉사했던 것이다. 사실 먼저 같은 실험을 했던 프랑스의 군인과 승려, 그리고 프랭클린은 무척이나 운이 좋았기 때문에 생명을 보전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프랭클린이 발명한 피뢰침은 널리 보급되었지만, 당시 미국과 영국은 사이가 아주 나빴고, 영국 국왕은 미국 「반역자들」의 지도자인 프랭클린을 몹시 미워했다. 그래서, 피뢰침도 프랭클린이 권장하는 대로 뾰족한 것을 쓰지 않고 뭉툭하게 생긴 것을 쓰도록 했다. 영국의 궁전이나 정부의 화약고 등에는 온통 뭉툭한 모양의 피뢰침이 달렸다. 영국 국왕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왕립학회 회장으로 하여금 뭉툭한 피뢰침이 더 안전하다는 성명을 발표하도록 압력을 넣었다. 그러나 당시 왕립학회 회장인 “존 프링글”은 이를 거부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자연의 법칙은 폐하도 거스를 수 없습니다.”

 

한편, 바다 건너 프랭클린은 그 얘기를 전해 듣고 이렇게 말했다. “왕이 어떤 종류의 피뢰침이든 아예 안 썼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왕 같은 인간은 그냥 벼락에 맞아 죽는 편이 낫기 때문이다.”

 

프랭클린이 피뢰침을 만들기 전까지는 벼락 때문에 귀중한 생명을 잃거나 집이 파괴되는 일이 많았엇다. 그러나 피뢰침을 발명한 뒤로는 높은 빌딩이나 건물, 비행기, 선박, 자동차 따위에 설치해 벼락의 공포로부터 완전히 벗어났다.

 

벤자민 프랭클린은 발명가 . 정치가 . 외교관 . 문학가이자, 미국 독립 선언 기초위원 등으로 폭 넓은 활동을 폈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미국 사람들은 그의 무덤 앞에 다음과 같은 글을 담은 묘비를 세워 주었다.

 

“벤자민 프랭클린, 그는 하늘에게서 번개를 빼앗았고, 폭군에게서 매를 빼앗았다.”

 

● 종교적 심성 과학적 지식을 무시했을 때에는 매우 위험하다. 1745년 성 마르코 성당의 종탑이 벼락을 맞아 대파되었다. 얼마 뒤, 벤저민 프랭클린이 피뢰침을 발명하여 벼락을 막을 수 있는 길이 열렸으나, 성직자들은 종탑에 피뢰침을 설치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때만 해도 천둥번개를 하느님의 소리, 하느님의 무기로 보는 경향이 강했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무기에 감히 방패를 들이대는 일은 상상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1761년과 62년 연이어 두 번 씩이나 벼락에 맞은 뒤, 1766년에야 피뢰침이 세워졌고, 성 마르코 성당의 종탑은 벼락으로부터 해방되었다. 벤저민 프랭클린이 피뢰침을 발명하여 벼락을 막을 수 있는 길이 열렸으나 성직자들은 종탑에 피뢰침을 설치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러나, 과학적 지식이 인간의 모든 것을 충족시켜 주리라는 과학자들의 오만한 믿음은 더욱 위험하다. 18세기 뉴튼(Newton. 1642∼1727)의 과학은 이성의 힘으로 세상 모든 것을 이해하려는 사조를 불러일으켰다. 그런데,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뉴튼의 물리학”은 “낡은 것”이 되고 새로운 양자 물리학이 등장하였다. 양자 물리학이 ‘손에 잡히지 않는’ 실체를 모델로서 다루게 되었고, 본질적으로 우리가 본질적으로 모든 것을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는 불확정성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서로 배타적인 것으로 보이는 입자성과 파동성이 함께 동원되어야만 빛과 물질의 성질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는 상호 보완적 관계를 인정하게 되었다. 사물의 현상을 기술하는데, 이전의 과학적 지식이 통하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과학적 지식을 가진 자는 오만한 믿음을 항상 경계해야 한다. 결국, “종교가 자만심을 가지면 안 되고, 과학이 오만함을 가져서는 안 된다.” 라는 역사적 교훈을 우리는 우리들이 존재하는 그 날까지 누누히 두고두고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 중세 때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가 종교 개혁의 기치를 올렸을 때도 표적은 가톨릭 시스템이었다교황부터 추기경주교사제평신도로 쭉 내려오는 상명하복식 수직 구조에 대한 반발이 무척 컸다당시에는 성경도 라틴어 성경만 있었다미사도 라틴어로 진행했다평신도들은 성경을 읽어도 뜻을 알 수 없었고미사 때 읊는 라틴어의 의미도 알 수 없었다이 때문에 신앙 생활을 전적으로 가톨릭 사제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가톨릭 특유의 중앙 집권 체제에서 벗어날 수 없는 구조였다마르틴 루터의 종교 개혁은 이런 구조를 허물었다평신도가 사제를 통해서 신을 만나는 방식을 거부했다대신 어떠한 중간자도 없이 나와 하나님이 직접 소통하고 대면하는 ‘11의 관계를 지향했다이런 지향으로 인해 개신교에는 개별 교회주의 성향이 강하다강력한 중앙 집권적 시스템을 구축하기가 본질적으로 힘든 측면이 있다그래서개신교는 기본적으로 중앙 집권적 체제가 아니다.

  

● 20세기 최악의 감염병으로 꼽히는 스페인 독감이 유럽에 창궐했을 때유난히 사망자가 많이 발생한 스페인의 소도시가 있었다이슬람과 기독교 세력의 접점인 서부 요새 도시 사모라(Zamora)이다. 1918년 10월 기준 이 도시의 독감 사망률은 10.1%로 같은 시기 스페인 전체 사망률(3.8%) 보다 훨씬 높았다감염이 확산되는 중에 이 도시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가톨릭 주교가 행정 당국의 집회 금지에도 불구하고 신의 자비를 호소하는 집단 미사를 강행했기 때문이다당시 사모라(Zamora)의 가톨릭 교회는 스페인 독감을 악마라 부르며, “우리의 원죄와 하느님을 향한 감사가 모자란 결과라고 했다매일 미사에 모인 신자들은 그 때문에 독감이 더 빨리 퍼지는 줄도 모르고신의 의지로 이 고통을 끝내게 해달라며, ‘역병의 시대를 위하여’ 라는 고대 기도문을 외웠다안타깝지만이런 종교적 무지는 20세기만의 일이 아니다코로나19 바이러스는 2019년 12월 중국에서 시작되었다그리고전세계로 확산되었다미국 내의 코로나19 주요 확산지 중 하나인 뉴욕주에서는 맨해튼 인근 소도시의 한 유대교 회당이 집단 감염의 시작으로 지목되고 있다말레이시아 확진자의 60% 이상은 쿠알라룸푸르의 이슬람 사원 집회 참석자인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 세계 보건 기구(WHO)가 2020년 03월 12일 코로나19에 대해 세계적 대유행(pandemic)을 선언했다그 후, 2020년 04전염병 경고 단계 중 최고 단계 상태에서 코로나19은 중국의 인접 국가를 넘어 유럽 전역 그리고 미국과 남미까지 대유행이 시작되었다. WHO의 코로나19 세계적 대유행 선언은 1968년 100만명 이상의 사망자를 발생했던 홍콩 독감과 2009년 신종 플루에 이어서 3번째이다. 20세기 들어 가장 큰 세계적 대유행 질환은 100년전 3.1운동 직전인 1918년 창궐했던 스페인 독감이라고 할 수 있다전 세계적으로 적게는 5천만명 많게는 1억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보인다지금 인구로 환산해보면, 2억에서 4억명이 독감으로 죽은 셈이다.

   

★ 2018년 스페인 독감은 2009년 돼지로 비롯된 신종 플루와 기본 형질이 비슷하다언제든지 변종이 일어나서 다시 창궐할 수 있다실제로 스페인 독감은 1918년에서 1919년까지 3번에 걸쳐서 창궐했다나라를 잃은 조선(朝鮮)에도 스페인 독감은 번져서 1918년 무오년 09월부터 1919년 기미년 01월까지 전국에서 700만명의 환자와 14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역병이나 역질에 관한 기록이 200여건 이상 나온다10만명 이상 죽은 경우가 6차례나 된다끊임없이 발생하는 전염병이 인구를 줄이는 가장 큰 요인이었다.

   

★ 역사상 가장 큰 사망자를 낸 전염병은 단연코 페스트(pest)라고 할 수 있다. 1346년 발생해서 1353년까지 유럽 전역에 퍼졌다쥐벼룩에 의해 옮겨지는 페스트(pest)는 치사율이 50-80%에 달했다페스트는 유럽 전역을 휩쓸었고유럽 인구의 1/3을 앗아간 후에야 멈추었다놀라운 일은 페스트가 물러간 후, 15세기에 르네상스(Renaissance) 문예 부흥이 일어난 것이다인구가 줄어드는 바람에 식량에 여유가 생겼고이것은 르네상스(Renaissance) 로 이어진 것이다.

 

★ 영국(英國법원은 예수 부활은 거짓이었다!” 라고 공식 판정했다고 1982년 02월 20일 동아일보가 보도했다법정 판결을 지켜보던 신부수녀목사들은 법정 방청석에서 옷을 찢고 통곡을 하였으며일부 기독교인들이 목을 매고 자살(自殺)하는 등의 소동이 벌어졌다교회가 문을 닫는 등의 소란이 영국 전역에서 확대되어 영국(英國정부에서는 이러한 혼란이 지속되고 전 세계로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 판결문의 공개 및 해외 유출 금지를 시행했고언론 보도를 통제하는 조치를 취하기도 하였다재판 과정을 지켜본 영국 기독교인들의 약 80%가 타종교로 개종(改宗)을 하였으며유럽과 미국 등에서도 수많은 교회가 문을 닫는 등의 소동이 이어졌다. 1982년 처음 책이 나와 세계적인 화제가 되었지만한국에서는 일부 언론에서 보도를 하였고재판과 판결 이후의 상황에 대해서는 보도가 없었다그래서인지 기독교가 급격히 퇴락하던 그 당시의 세계적 추세와 달리 한국(韓國)의 기독교는 엉뚱하게 급성장하는 이변을 낳았다세계 50대 교회 중에서 23가 한국에 자리잡고 있을 정도이다무지(無知)의 소산이다서양 사람들이 자기들 스스로 예수가 은퇴했다Jesus's retired.”라고 하며서양의 젊은 사람들은 교회에 가지 않는다교회가 우리나라의 절간과 같이 한산하다그런데우리나라 사람들은 서양 역사를 잘 모르고서양의 문화 흐름에 어둡다그래서세계 10대 교회가 거의 한국에 있을 만큼 한국은 기독교가 번창하고 있다그러나교회 권위는 이미 바닥으로 떨어져 있다.

 

★ 기독교(基督敎)의 유통 기한은 2,000년이고유교(儒敎)의 유통 기한은 2,500년이며불교(佛敎)의 유통 기한은 3,000년이다기존 종교(宗敎)의 유통 기한은 이미 끝났다. 2,000년대를 맞이하면서 한국 기독교(基督敎교회의 교세는 급속히 퇴보하고 있다. 1년에 교인이 평균 약 50만 명씩 감소하고 있는데도 교단은 이미 120개 교단 이상으로 갈라지고 있다천하 만물에는 범사에 유통 기한이 있고모든 목적은 그것이 이루어지는 때가 있다날 때가 있고죽을 때가 있으며심을 때가 있고거둘 때가 있다한국 교회가 사회로부터 신뢰를 회복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 같다기독교의 허황장세(虛荒長勢)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이미 신뢰를 잃었고종교(宗敎타락 풍조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지탄을 받고 있다그 어떤 변명이나 달콤한 언변으로도 이미 실추된 신뢰를 회복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기독교(基督敎)가 세상 타락을 걱정하는 시대는 이미 끝났고거꾸로 세상 사람들이 기독교 타락을 걱정하는 시대가 되었다사회적으로 잘못된 퇴폐 종교(宗敎)는 영혼을 갉아 먹는 해충(pests)과 같다박멸되어야 할 사회적 기생충(parasite)이다실제로 일부 종교는 마치 모기나 바퀴 벌레처럼 우리 사회에서 박멸해야 할 해충(pests)처럼 여겨지고 있다마치신도들을 현금 지급기처럼 취급하기 때문이다. “누가 더 하나님을 사랑하는가헌금을 비교해봐라” 라는 구호도 있다종교 권력의 부패가 너무나 치졸하고 야비하다세계 최대의 경제 부국인 미국에서 정신과 치료약()이 가장 많이 팔리고 있고유럽 인구의 30%가 정신 질환을 앓고 있다고 한다이제, 21세기는 자유 영혼 시대이다자유 영혼의 목적지는 온갖 속박으로부터의 해방되는 것이며달콤하고 안락한 마음의 평화를 얻는 것이다.

 

■ 성탄절 대면 예배, 코로나 집단 감염 논란

 

 2020 12, 코로나19 감염증 대유행으로 서울 수도권에는 5인 이상 집함 금지 명령까지 내려진 상황이었다. 하지만, 기독교 한 교회에서는 2020 12 25 성탄절 전후 모임을 가졌다. 이 교회에서는 코로나19 집단 감염이 발생하여 5일후인 2020 12 30일 확진자가 40명이 넘었다. 서울 중랑구 OO 교회의 일이다. 이 교회에서 2020 12 27 6명이 처음으로 확진 판정 받았고, 28 14명이 추가 발생한 이후, 30 15명이 추가 확진되어 41명으로 늘었다.

 

 교회 관계자와 접촉자를 포함 59명에 대해서도 추가 검사를 실시한 결과, 최초 확진자를 제외하고, 양성 19, 음성 3명이 나왔다. 나머지는 검사가 진행 중이다. 역학조사 결과, 해당 교회는 2020 12 24일과 25일 신도 30여명이 소모임을 가진 것으로 파악됐다. 모임에서는 다과까지 함께 먹었던 것으로 조사됐다. 사실상 방역 수칙 위반이다. 방역 당국은 다과를 함께 먹는 과정에서 감염이 급격하게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서울시는 중랑구 보건소와 역학조사 및 접촉자 조사를 실시 중이고, 해당 현장에는 긴급방역을 실시했다. 서울 중랑구 관계자는 대면 모임을 갖는 등 방역 지침을 위반한 사실이 확인되어 감염병 예방법 위반으로 고발 조치했다. 2020 12 30일부터 집합 금지 명령을 내리고, 과태료도 부과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서울 중랑구 능력 교회"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