뺏긴 역사찾자

■ 고조선 후예, 훈 제국 세워, 유럽 민족 대이동

마도러스 2020. 10. 18. 04:57

■ 고조선 후예, 훈 제국 세워, 유럽 민족 대이동

 

고조선(古朝鮮) 문명은 세계 첫 5대 문명 중 하나이다.

 

고조선(古朝鮮, BC 2,333-238) 문명은 한국 문명의 기원일 뿐 아니라, 세계 최초 5대 문명의 하나이다. 고조선 국가가 서기전 108년 해체될 때, 고조선 서변 국경을 지키던 기마 민족 일부는 중앙 아시아로 이동해 새로운 역사를 만들었다. 다시 그중의 일부는 유럽에 진출하여 새 국가를 건설하고 고조선 언어와 문명을 전파했다. 고조선 문명의 후예인 훈족(Huns, 중국 호칭 흉노족)4세기 후반에 유럽에 들어가서 거대한 훈 제국을 세우고, 유럽 민족 대이동을 일으키며 결국 거대한 서로마 제국을 붕괴시켰다면, 아마 대부분 놀라고 믿지 않을 것이다.

훈족은 고조선(古朝鮮) 서쪽 살던 유목 기마족 산융

 

우선, 훈족이 고조선 문명의 후예인가부터 물을 것이다. 훈족은 고조선 연방 제국의 서변에 거주하던 산융(山戎)’이라는 유목 기마족인데, 서방을 방위하던 후국족이 그들이었다. ‘은 군사 집단의 뜻이다. 당시 그들은 자신을 반드시 훈(Hun)이라고 불렀다. 고조선(古朝鮮, BC 2,333-238)은 훈 족장에게 두만’(만 명 사령의 뜻)의 직책을 주었다. ‘두만은 총사령관의 고조선 말이었다. 훈의 두만 성명은 단자(檀柘)였다. 성을 ()’으로 쓴 것은 고조선 왕족 계열의 정체성을 취한 것이다. 훈족 두만의 군대는 기병 부대였다. 모두 큰 활과 창을 썼으며, 모든 기병이 말 달리며, 활을 쏘는 기사법(騎射法)의 달인으로서 막강한 군대였다. 두만과 아틸라(Attila) 칸을 포함하여 모든 훈족의 종교는 7세기 아르메니아 사가 모오제에 의하면, 탱그리(Tangri) (quan) 신을 조상신으로 모셨다. 즉 단군 신앙이었다. 전쟁 전에는 소의 어깨뼈로 점을 치는 예언 점술사(占術師)의 말을 일단 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 나라가 고조선과 친했던 상() 나라를 멸망시킨 후인 BC 771년 훈이 주()를 공격하여 수도 호경(鎬京)을 점령했다. ()나라는 훈에 패배하여 동쪽으로 천도하는데, 이후부터 동주(東周) 시대가 시작되고, 조정은 약화되어 군웅이 할거하였다. BC 664년에 동주(東周)의 제() 황공(桓公)이 진(). (). (). (). () 등과 연합군을 편성하여 고조선(古朝鮮)을 공격해서 조().() 전쟁이 일어났다. 산융(). 고죽. 불령지. 불도하가 고조선(古朝鮮) 연합군을 편성하여 주() 연합군을 격퇴하였다. ‘이 이 전쟁 때에 고조선 연합군의 주력이었는데, 훈이 고조선 제후국이었음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이다.

 

고조선(古朝鮮)은 훈 족장에게 두만직책을 줬다.

 

고조선(古朝鮮) 멸망 후, 두만의 아들 모돈(冒頓, 모돌)BC 3세기에 훈족의 독립을 선언했고, ‘탱그리(撑犁) 고도단우(孤塗單于)’라는 호칭의 황제에 올랐다. 훈족 황제 호칭을 단우(單于)’라 쓰고, 중국과 한국에서는 선우라고 읽는데, 원래는 단우’(單于)라는 고조선 훈어이다. ‘==이고 하늘의 뜻이며, ‘·황제의 뜻이다. ‘단우천왕(天王)’ ‘천제(天帝)’의 뜻이다. 모돈은 자기가 단군 조선의 계승자임을 주창한 것이었다.

고조선(古朝鮮) 연방 제국의 서변에서 고조선을 지키는 역할을 해오던 막강한 유목 기마 민족 산융은 위만 조선 멸망(BC 108) , 한나라 무제(武帝)가 이끄는 새 기병 부대의 총공격을 받고, 패배하여 몽골 고원으로 후퇴하였다. BC 57년경에는 왕위 계승 문제로 권력 투쟁이 일어나서 흉노는 호한야(呼韓邪) 단우의 동흉노와 질지(郅支) 단우의 서흉노로 분열되었다. 두 흉노는 전쟁을 하여서 서흉노가 패배하였다.

 

동흉노는 중국에서 후한(後漢)이 수립된 후, 다시 남북으로 분열되어 북흉노는 AD 72년 후한의 공격을 받고, 서방으로 이동하여 몽골 고원을 떠났다. 남흉노도 ’()족 장군들이 AD 349년 정변을 일으켜서 정권을 잡았고, 흉노족을 대대적으로 살해하기 시작했으므로 서방 이동을 감행하게 되었다.

유럽 대륙으로 건너간 고조선(古朝鮮) 문명

 

흉노족은 서방으로 이동하여 카스피해 북쪽 볼가강과 카마강이 합류하는 지역의 초원 지대에서 상당 기간 정착해서 유목 생활을 하면서 힘을 배양했다. 흉노족은 한파가 장기화되어 목초지가 메마르게 되자, AD 375년경 볼가강을 건너서, 동유럽 판노니아 평원에 살고 있던 게르만족인 동()고트(Goths)족을 공격하여 항복을 받고, 신민으로 삼았다.

 

(흉노)족의 동아시아식 경기병(輕騎兵) 부대, 강력한 활, 질풍노도 같은 기동성,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달려드는 기습 돌격, 위장 후퇴로 적의 튼튼한 대오를 분산시킨 후, 전격적 급반전 역공의 기마 전술 등을 유럽 민족들은 감당하지 못하고 연속 패하였다. 훈족은 카르파티아 분지(판노니아 평원)를 정복하여 이곳을 자기의 정착지로 삼고 훈족의 땅’(The Land of Huns, Hungary)이라고 칭하였다. ‘가리(gary)’는 흉노어로 의 뜻이었다. ‘가리는 현대 몽골어에서도 의 뜻이다.

 

훈족은 우랄. 알프스 산맥에 대제국 건설했다.

 

훈족은 이어서 서(西)고트(Goths)족을 공격하여 내쫓았다. 정착지를 빼앗긴 서(西)고트(Goths)족은 AD 378년 로마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하여 서로마 영토로 이주해서 자치권을 획득했다가, 410년에 4일간 로마를 약탈하고, 이베리아 반도로 이동 정착하였다. 프랑크족은 갈리아 (지금의 프랑스) 지방의 북부에, 부르군드족은 갈리아 지방의 남부에 이동 정착하였다. 랑고바르드족은 이탈리아 북부로 남하 이동하였다. 라인강 유역에 거주하던 반달(Vandal)족은 이베리아 반도를 통과하여 지금의 아프리카 튀니시아 지방에 정착해서, 455년 로마시를 습격 약탈하기도 하였다.

게르만족. 색슨족 등의 유럽의 민족 대이동을 일으켰다.

 

유트족과 색슨족은 바다를 건너 브리타니아섬에 들어가 선주민 켈트족을 한쪽으로 밀어내고 각각 소왕국을 세웠다. 수에비족은 이베리아 반도를 통과하여 지금의 포르투갈에 수에비 왕국을 세웠다. 훈족의 카르파티아 분지 (판노니아 평원) 점령과 정착을 계기로 게르만인을 비롯한 모든 유럽 민족이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 옮겨 다니면서 민족 대이동이 일어났다. 그들은 민족 대이동 중에 각처에서 약탈을 자행했는데, 이것이 마치 훈족이 행한 것처럼 전해졌다. 이 시기 민족 대이동이 현재의 유럽 각 민족의 정착이 되었다.

아틸라(Attila) 칸의 외모는 영락없는 동아시아인이었다.

(Hun, 흉노)족은 중부 유럽에 훈 제국을 세웠는데, 아틸라(Attila) 칸 때에는 그 영역이 동쪽은 우랄 산맥과 카스피해, 서쪽은 알프스 산맥, 북쪽은 발트해, 남쪽으로 다뉴브강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아틸라(Attila)의 외모에 대해서는 그를 몇 미터 앞에서 본 동로마 역사가 프리스쿠스(Priscus)의 기록이 가장 정확할 것이다. 프리스쿠스는 그는 키가 작고, 어깨가 넓었으며, 머리는 매우 컸고, 눈은 작았다. 수염이 성기게 나 있고, 머리털은 흰 머리가 섞여 있었다. 코는 납작하였고, 피부색은 엷은 갈색이었다. 출신 족에 의한 특징이 현저하였다고 하였다. 아틸라(Attila)의 외모는, 서양 초상 그림과는 전혀 달리 전형적인 동아시아인이었다. 아틸라(Attila)와 그의 정치를 분석적으로 연구한 엣셰(Katalin Escher)와 레베딘스키(Lebedensky)에 의하면, 아틸라(Attila)는 언제나 검소하고, 솔직했으며, 매우 겸손하고 관대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황금을 전혀 탐하지 않았으며, 거두어들인 황금을 모두 통치 자금에 쓰거나 부하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고조선(古朝鮮) 연방을 서변에서 지키던 소수의 훈(산융)족이 을 동력으로 하여 유럽에 들어가서 AD 4~5세기 서··동유럽을 포괄하면서 동·서 로마 제국에 맞서는 거대한 훈 제국’(Hun‘s Empire)을 건설한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족은 동아시아에 있을 때도 자기를 ’(Hun)족이라고 했다. ‘따뜻한 사람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몽골어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중국에서는 다른 민족에게 나쁜 뜻 한자를 붙여 작명하는 악습으로 을 비하하여 흉노’(匈奴)라고 주로 칭했는데, ‘흉측한 노예라는 뜻이다. 사마천의 사기(史記)에는 뒤에 흉노’(匈奴)라는 호칭을 썼지만, 훈육(葷粥)과 훈육(薰育)으로도 나온다. 맹자(孟子)에는 훈죽(獯鬻)으로 나온다. 여기서 훈(Hun), , 등 여러 글자로 표기한 것은 흉노족이 자기를 훈(Hun)으로 호칭한 것을 동일 음차(音借) 표기한 것이고, , , 등은 비하하는 의미를 붙인 꼬리표기이다. 비칭 꼬리 표기를 떼어버리면, 흉노족이 곧 훈(Hun)족임을 알 수 있게 된다. 

 

■ 우리 배달(倍達) 민족의 역사는 9,200년이다.

 

우리 배달 민족의 환국(桓國, BC 7,199-3,897), 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 고조선(古朝鮮, BC 2,333-238) 문화는 중국의 (. 재위BC 2,357-2,258), (. 재위BC 2,255-2,208), (, BC 2,205-1,766), (, BC 1,600-1,046), (, BC 1,046-771) 문화의 뿌리이다. 우리 배달(倍達) 민족 문화가 중국 문화의 뿌리이다. 우리 민족의 역사가 환국(桓國, BC 7,199-3,897), 배달국(倍達, BC 3,897-2,333), 고조선(古朝鮮, BC 2,333-238). 부여.옥저.동예.낙랑국. 마한.변한.진한. 고구려.백제.신라로 이어져서 무려 9,200이나 된다. 환국(桓國, BC 7,199-3,897)의 장자국(長子國) 배달국(倍達國)이었고, 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의 장자국(長子國) 고조선(古朝鮮, BC 2,333-238)이었음을 비추어 볼 때, 우리 배달(倍達)민족과 한국이 세계 4대 문명의 정통성을 이어 받은 민족이며 나라임을 알 수 있다.

 

'신시(神市) 개천경(開天經)' 기록에 의하면, 환국(桓國)의 말엽에 환웅(桓雄)이 있었다. 그는 홍익인간(弘益人間), 재세이화(在世理化), 광명이세(光明理世)의 뜻을 간직하고 있었다. 환웅(桓雄)은 동방 땅 백두산(白頭山)에 문명 개척단 3,000명과 함께 배달국(倍達, BC 3,897-2,333)을 건설하였다. 배달국(倍達, BC 3,897-2,333) 신시 배달[神市 백두산, 1-13대 환웅] 청구 배달[靑丘 산동성.태산(泰山), 14-18대 환웅] 시대로 나누어진다. 배달국(倍達)의 환웅(桓雄)이 북만주와 대진국(발해) 연안의 땅에 뛰어난 석공예와 질공예를 남겼는데, 이것을 배달(倍達, BC 3,897-2,333) 환웅(桓雄) '홍산(紅山) 문화'라고 한다.

 

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 홍산(紅山) 문화는 1920년대 프랑스 에밀 리쌍(Emile Licent)이 요서 지방 츠펑 (적봉赤峰) 지역에서 처음 발굴 시작하여 1922년부터 1924년 사이에 신석기 유적지 22곳을 발견하였고, 요서 지방 홍산(紅山) 문화의 소하서 지역 유적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신석기 문화는 최고 8,50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들 유적은 '인류 최고(最古) 신석기 문화'로 규정되고 있다. 1930년대 중국 철학자 양계초의 아들 양사영이 홍산(紅山) 유적지를 조사한 이래, 많은 학자들이 연구에 뛰어 들었다. 그 후, 중국 정부에서 대대적으로 발굴하였는데, 1980년대에 홍산(紅山) 문화의 대표적인 유적지인 우하량 유적이 발굴되어 전세계가 깜짝 놀랐다. 이 곳에서 나오는 유물들은 중국의 황하 문명(BC 3,000-2,500) 보다 2-3천년 앞 서 있었고, 유적과 유물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지역의 문명은 이미 국가 단계의 구비 조건을 모두 갖춘 5의 문명이었기 때문이다.

 

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 홍산(紅山) 문화의 유적과 유물들은 세계 문명의 발상지라고 꼽히는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인더스. 황하 문명 보다 훨씬 앞 선 문명 형태였기 때문이다. 예를들면, 홍산 문화의 소하서 지역 유적들은 무려 8,5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결론적으로 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 홍산(紅山) 유적지 발굴은 세계 문명사를 다시 쓰게 하는 엄청난 사건이다. 최근에도 중국은 동북(東北) 공정의 일환으로 이 곳을 계속 발굴하고 있다. 지중해 문명 (이집트 문명, 에게 문명, 그리스 로마 문명)이 서양 문명에 자양분을 공급했듯이, 동이족(東夷族)이 발해 연안에서 창조한 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 홍산(紅山) 문화는 중국은 물론 만주. 한반도. 일본의 고대 문명을 일궈주었다.

 

현재, 중국은 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 홍산(紅山) 문화요하(遼河) 문명이라고 하여 자기네 역사 유적이라고 우기고 있지만, 그 유적지의 위치와 문명 양식 등을 보면, 동이족(東夷族) 배달(倍達)의 문화 양식임에는 어쩔 수가 없다. 중국이 만주의 홍산(紅山) 유적지 문화를 자기네 것이라고 우기는 것은 마치 송곳을 주머니 속에 넣고 감추는 것과 같다. 결국 밖으로 드러나게 마련이다. 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 신시 배달(神市 백두산, 1-13대 환웅) 청구 배달(靑丘 산동성.태산(泰山), 14-18대 환웅)로 나누어진다. 배달국(倍達國)의 환웅(桓雄)이 북만주와 대진국(발해) 연안의 땅에 뛰어난 석공예와 질공예를 남겼는데, 이것을 배달(倍達) 환웅(桓雄) '홍산(紅山) 문화'라고 하는 것이다.

 

환국(桓國, BC 7,199-3,897)의 신교(神敎) 문화는 고대 문화의 원형이고, 그 후, 배달국(倍達國)으로 이어졌으며, 환국과 배달국의 문화는 세계 4대 문명의 뿌리가 되었다. 환국(桓國)12개 나라 가운데, 수밀이국 우루국은 그동안 서양에서 최초의 문명족으로 알려져 있던 나라 이름이고, BC 3,500년 전의 고대 메소포타미아(수메르) 문명을 일으킨 나라이다. 최근, 120여 년 동안의 고고학 발굴 결과, 중동의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BC 3,500년 경에 오늘의 서양 문명의 뿌리인 수메르(Sumer) 문명이 있었고, 이 문명을 건설한 수메르 민족은 동방에서 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수메르 문명은 다시 이집트 문명에게 영향을 주었고, 또한 고대 희랍 문화에 영향을 미쳤으며, 로마 제국을 거쳐 오늘날 서양 문명이 나온 것이다. 인더스 문명 또한 북방 문명에서 기원했다고 하며, 배달국(倍達國)의 문화가 유입되어 인더스강 유역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근래에 만주에서 동북 공정의 일환으로 요하(遼河) 문명유적을 발굴하고 있는데, 요하(遼河) 문명은 배달(倍達) 문명의 일부이다. '황하 문명' 보다 앞선 유적들이 무수히 쏟아져 나왔다. 중국 당국이 발칵 뒤집혔다. 중국의 황하 문명(BC 3,000-2,500)은 황하강 유역에서 발생했는데, 이것은 북만주와 산동 반도 유역의 배달국(倍達國, BC 3,898-2,333) 문명의 영향을 받아 생겨난 것이다. 배달(倍達 BC 3,898-2,333)의 홍산 문화는 메소포타미아 문명(BC 3,500-2,600). 황하 문명(BC 3,000-2,500). 인더스 문명(BC 2,500년경). 이집트 문명(BC 3,100년경) 보다 앞선 것이며, 세계 4대 문명에게 영향을 준 것이라는 증거와 유적들이 최근 속속 발굴되고 있다. 한민족의 배달(倍達) 문명이 중국 민족의 황하 문명 보다 빨랐고, 중국의 황하 문명은 한민족 배달(倍達) 문명을 받아서 생긴 것이라는 역사적 사실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우리나라 배달(倍達) 민족이 천제(天祭) 제사(祭祀) 풍습을 중국 한족(漢族)에게 전해줬다. 배달국(倍達國) 말엽 및 고조선(古朝鮮) 초기에 중국에서 나라를 창업한 사람들 중에서, () 임금(나라의 시조). () 임금(나라의 시조). 문왕(나라의 시조). 무왕(왕조 개창). 강태공(병법의 시조, 나라)도 역시 우리 동이족(東夷族)이었다. 또한, 중국의 건국(建國) 시조(始祖)삼황오제(三皇五帝)는 전부 우리 동이족(東夷族)이었다. 삼황(三皇) 태호 복희(太昊伏羲). 염제 신농(炎帝神農). 황제 헌원(黃帝軒轅)을 말하고, 오제(五帝) 소호 금천. 전욱 고양. 제곡 고신. () 임금. () 임금을 말한다. 그들 모두 배달(倍達)민족이었다. 중국의 건국 시조의 8명 중에 우리 민족이 8명으로 전부를 차지한다.

 

중국은 예로부터 우리나라를 청구(靑丘)라고 했는데, 배달국(倍達國, BC 3,898-2,333) 청구 배달(靑丘, 14-18대 환웅)을 일컫는 말이며, 청구 배달의 문화가 '홍산(紅山) 문화'이다. 그 다음 나라에 이르러, 고조선(古朝鮮, BC 2,333-238)'단군(檀君) 신화' 중에는 호랑이와 곰이 나오는데, 실제는 호족(.호랑이)웅족(.)을 배달(倍達) 동이족(東夷族)이 교화해서 건국한 것을 신화 형태로 기록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