뺏긴 역사찾자

■ 카자흐스탄의 단군 주화를 아시나요?

마도러스 2020. 10. 14. 01:44

 

 

 

■ 카자흐스탄의 단군 주화를 아시나요?

 

단군전(檀君錢) 주화(鑄貨)는 카자흐스탄 내의 고려인들을 위한 주화이다. 그런데, 현지인은 단군과 탱그리, 3개의 조선과 3개의 주스, 케레이와 겨례의 상관 관계, 아사달과 아스타나의 관계에 대해 명확히 알고 있었다.

 

'단군전'(檀君錢)이란 동전을 아시나요? 단군전(檀君錢)2016년 카자흐스탄 중앙 은행에서 발행된 기념 주화이다. 동전 뒷면에는 단향속 나무 아래 앉아있는 전설의 단군(檀君)과 곰, 호랑이 이미지, 그리고 한국어로 된 비문이 새겨져 있다. 2016년 카자흐스탄 정부가 고려인들을 위해 발행한 단군전 동전 기념 주화이다. 그런데, 왜 카자흐스탄에서 단군전 동전을 발행했을까?

 

만든 배경을 알기 위해서는 우리나라의 아픈 역사를 알아야 한다. 193708월 러시아는 스탈린의 결정에 따라 러시아에 살던 카레이스키(한국인, 고려인)를 강제로 중앙 아시아와 카자흐스탄 영토로 추방한다. 소비에트 연방의 정치 지도자들은 카레이스키(한국인, 고려인)들을 스파이로 비난했고, 러시아 지역에 거주하던 이들 17만여 명을 중앙 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켰다. 이 기간부터 카자흐스탄에 있는 고려인 디아스포라(diaspora, 집단 추방)의 역사가 시작된다. 카레이스키들은 카자흐스탄 모든 지역에 배치됐으며, 그들에게 가해진 모욕의 괴로움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새로운 장소에 잘 정착했고 열심히 살아갔다.

 

이 때, 고려인들은 농사 방법 등을 원주민들에게 알려주기도 했다. 당시 대규모 기아와 스탈린주의자의 억압으로 같이 고통받고 있던 카자흐스탄 주민들은 고려인 피난민들에게 이해와 친절함으로 대해주고, 빵과 쉼터를 함께 나누어 주었다. 그런데, 카자흐스탄 정부는 고려인을 포함한 외국인 거주자들에게 자국 언어를 쓰지 못하게 했다. 1938년에는 모든 한국 교육 기관이 이때 폐쇄가 되고, 한국어로 된 책의 출판이 모두 중단되었다. 그동안 고려인들은 러시아로부터 6,500km 눈물의 길을 걸어와서 풀 한 포기 없는 땅에서 고생하며 정착하게 되었다. 카자흐스탄 정부는 이러한 애증의 아픈 역사를 기억에 남기기 위하여 고려인들에게 단군전(檀君錢) 동전을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단군 신화는 일제 식민 사학자들이 만든 내용이다.

 

이태룡 박사, ‘이것이 진실이다책을 출간했다.

 

2020년은 단군(檀君)께서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이념으로 나라를 연 지 4,347주년이 되는 해이자, 광복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2019년 고조선부터 경술국치까지 의병의 역사를 한 줄에 꿰어 정리한 <한국의병사>(·)를 펴냈던 이태룡(60) 박사가 단군과 관련한 내용을 정리해서 2020<이것이 진실이다>(광문각)라는 제목으로 책을 출간했다. 20201003일 개천절을 앞두고 나온 이 책에서 이 박사는 "'기자 조선'은 조선 유학자들이 조작한 것이고, '단군 신화'는 일제 식민사학자와 그들 앞잡이들이 만든 내용"이라고 밝혀 놓았다.

 

이태룡 박사는 "단군 신화라는 해괴한 용어는 <고려사>, <조선왕조실록>은 물론, <삼국사절요> <동국통감> 등 관찬사서, 그리고 수많은 유학자들의 문집에 단 한 번도 나온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는 지금까지 알고 있던 <삼국유사> 중간본(1512)의 내용은 매우 왜곡·축소된 것이라 했다. 저자는 <세종실록 지리지>(1454)에 나오는 단군의 건국사화(建國史話) 내용을 소개해 놓았다. "단군고기(檀君古記)에 이르기를, 상제(上帝) 환인(桓因)이 서자(庶子)가 있으니, 이름이 웅()인데, 세상에 내려가서 사람이 되고자 하여 천부인(天符印) 3개를 받아 가지고 태백산(太白山) 신단수(神檀樹) 아래에 강림하였으니, 이가 곧 단웅천왕(檀雄天王)이 되었다. (환인의) 손녀(孫女)로 하여금 약()을 마시고 인신(人身)이 되게 하여, 단수(檀樹)의 신()과 더불어 혼인해서 아들을 낳으니, 이름이 단군(檀君)이다. 나라를 세우고 이름을 조선(朝鮮)이라 하니, 조선, 시라(尸羅), 고례(高禮), ·북 옥저(南北沃沮), ·북 부여(東北扶餘), ()와 맥()이 모두 단군의 다스린 (지역이) 되었다.(후략). (檀君古記云, 上帝桓因有庶子, 名雄, 意欲下化人間, 受天三印, 降太白山神檀樹下, 是爲檀雄天王. 令孫女飮藥成人身, 與檀樹神婚而生男, 名檀君. 立國號曰朝鮮. 朝鮮, 尸羅, 高禮, 南北沃沮, 東北扶餘, 濊與貊, 皆檀君之理.)."

 

이태룡 박사는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단군의 건국사화가 <단군고기>라고 기록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것을 일제강점기인 1920년에 '단군신화'라는 해괴한 이름으로 둔갑시켰고, 그 이름으로 300여 논저가 나왔다"고 했다. 그는 <단군고기>'단군신화'로 둔갑하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책에 설명해 놓았다. "1894년 도쿄 제국대학의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 교수가 <단군고(檀君考)>에서, '<삼국유사>에 나온 단군사적(檀君史籍)은 한국 불교의 설화(說話)에 근거하여 가공(架空)의 선담(仙譚)'이라 하였고, 단군과 단군이 세운 조선의 건국사화(建國史話)'설화에 바탕을 둔 불교 이야기'로 조작하였으니, 단군사적을 첫 단계에서 '단군설화(檀君說話)'로 만들었으며, 이어 케이오 의숙(慶應義塾) 출신 나카 미치요(那珂通世)<삼국유사>에 나온 내용을 두고, '승도(僧徒)의 망설(妄說)을 역사상의 사실로 삼은 것'이라고 하여 사화를 허구(虛構)로 만들었고, 이어 1897<조선고사고(朝鮮古史考)>라는 논문에서 '단군왕검은 불교 승도의 망설이요, 날조된 신화(神話)'라고 하였으니, 단군사적을 이른바 '단군신화(檀君神話)'로 만들었다."

 

이태룡 박사는 "일제 식민사학자들의 한국사 왜곡에 이어 19161월에는 조선총독부 산하 중추원에 '조선반도사편찬위원회'가 발족되었다""이는 일제 식민사학자 개인 차원이 아닌, 일제가 정부 차원에서 일본 민족의 우위성을 고취하고 역사교육을 통해 한국민으로 하여금 민족의식을 배제하고, 열등의식을 심기 위하여 설립하였다"고 설명했다. 그는 "일제는 미우라 히로유키(三浦周行), 이마니시 류(今西龍) 등 일본인 식민사학자들과 어윤적·유맹·이능화·정만조 등 부왜인(附倭人)들을 참여시켜 우리 역사를 왜곡·말살시키는 기초작업에 들어갔다. 1922년에는 이를 '조선사편찬위원회'로 확대 개편하였고, 1925년에는 '조선사편수회'를 조직하여 권중현·박영효·이완용·이진호 등 매국노들을 참여시켰다. 2년 뒤에는 일제 식민사학자들과 신석호·이병도·최남선 등 많은 부왜인들을 동원하여 식민사관에 입각한 본격적인 조선사 편찬 작업을 하였다"고 했다.

 

이태룡 박사는 "이 같은 과정에서 이마니시 류는 1921<단군고(檀君考)>라는 논문에서 단군의 건국사화를 신화로 다시 조작하였는데, 이는 20여 년 전에 나카 미치요가 만든 '단군신화'를 논리적으로 체계화한 것으로 우리나라 역사를 왜곡하는 밑바탕이 되었고, 1937년에는 3524000쪽에 이르는 방대한 <조선사>를 편찬하기에 이르렀다"고 주장하였다.

 

이태룡 박사는 "<세종실록 지리지>에 실린 <단군고기>에는 천제 환인(桓因)의 아들 환웅(桓雄)이 태백산 신단수(神檀樹) 아래에 강림하여 홍익인간의 이념으로 개국의 터전을 닦고, 그 후손 단군이 나라를 세웠다고 하였다""배달겨레는 <단군고기>의 내용을 국조신앙(國祖信仰)처럼 여겨 천손국가의 구성원이라는 자긍심으로 수천 년 동안 살아왔다"고 주장했다. 그는 "특히 <단군고기><세종실록 지리지>에 실었다는 것은 당시 실록 편찬자들로부터 역사서로 인정받았음을 방증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 책을 저술하면서, 우리나라 역사서를 바탕으로 중국과 일본의 사서 수십 권을 참고했고, 원문을 포함해 600여 개의 주석을 달아 놓았다. 역사에 관심이 많은 역사학도뿐만 아니라 일반인에게도 흥밋거리가 될만한 책으로 보인다.

 

 

■ 우리 배달(倍達) 민족의 역사는 9,200년이다.

 

우리 배달 민족의 환국(桓國, BC 7,199-3,897), 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 고조선(古朝鮮, BC 2,333-238) 문화는 중국의 (. 재위BC 2,357-2,258), (. 재위BC 2,255-2,208), (, BC 2,205-1,766), (, BC 1,600-1,046), (, BC 1,046-771) 문화의 뿌리이다. 우리 배달(倍達) 민족 문화가 중국 문화의 뿌리이다. 우리 민족의 역사가 환국(桓國, BC 7,199-3,897), 배달국(倍達, BC 3,897-2,333), 고조선(古朝鮮, BC 2,333-238). 부여.옥저.동예.낙랑국. 마한.변한.진한. 고구려.백제.신라로 이어져서 무려 9,200이나 된다. 환국(桓國, BC 7,199-3,897)의 장자국(長子國) 배달국(倍達國)이었고, 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의 장자국(長子國) 고조선(古朝鮮, BC 2,333-238)이었음을 비추어 볼 때, 우리 배달(倍達)민족과 한국이 세계 4대 문명의 정통성을 이어 받은 민족이며 나라임을 알 수 있다.

 

'신시(神市) 개천경(開天經)' 기록에 의하면, 환국(桓國)의 말엽에 환웅(桓雄)이 있었다. 그는 홍익인간(弘益人間), 재세이화(在世理化), 광명이세(光明理世)의 뜻을 간직하고 있었다. 환웅(桓雄)은 동방 땅 백두산(白頭山)에 문명 개척단 3,000명과 함께 배달국(倍達, BC 3,897-2,333)을 건설하였다. 배달국(倍達, BC 3,897-2,333) 신시 배달[神市 백두산, 1-13대 환웅] 청구 배달[靑丘 산동성.태산(泰山), 14-18대 환웅] 시대로 나누어진다. 배달국(倍達)의 환웅(桓雄)이 북만주와 대진국(발해) 연안의 땅에 뛰어난 석공예와 질공예를 남겼는데, 이것을 배달(倍達, BC 3,897-2,333) 환웅(桓雄) '홍산(紅山) 문화'라고 한다.

 

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 홍산(紅山) 문화는 1920년대 프랑스 에밀 리쌍(Emile Licent)이 요서 지방 츠펑 (적봉赤峰) 지역에서 처음 발굴 시작하여 1922년부터 1924년 사이에 신석기 유적지 22곳을 발견하였고, 요서 지방 홍산(紅山) 문화의 소하서 지역 유적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신석기 문화는 최고 8,50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들 유적은 '인류 최고(最古) 신석기 문화'로 규정되고 있다. 1930년대 중국 철학자 양계초의 아들 양사영이 홍산(紅山) 유적지를 조사한 이래, 많은 학자들이 연구에 뛰어 들었다. 그 후, 중국 정부에서 대대적으로 발굴하였는데, 1980년대에 홍산(紅山) 문화의 대표적인 유적지인 우하량 유적이 발굴되어 전세계가 깜짝 놀랐다. 이 곳에서 나오는 유물들은 중국의 황하 문명(BC 3,000-2,500) 보다 2-3천년 앞 서 있었고, 유적과 유물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지역의 문명은 이미 국가 단계의 구비 조건을 모두 갖춘 5의 문명이었기 때문이다.

 

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 홍산(紅山) 문화의 유적과 유물들은 세계 문명의 발상지라고 꼽히는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인더스. 황하 문명 보다 훨씬 앞 선 문명 형태였기 때문이다. 예를들면, 홍산 문화의 소하서 지역 유적들은 무려 8,5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결론적으로 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 홍산(紅山) 유적지 발굴은 세계 문명사를 다시 쓰게 하는 엄청난 사건이다. 최근에도 중국은 동북(東北) 공정의 일환으로 이 곳을 계속 발굴하고 있다. 지중해 문명 (이집트 문명, 에게 문명, 그리스 로마 문명)이 서양 문명에 자양분을 공급했듯이, 동이족(東夷族)이 발해 연안에서 창조한 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 홍산(紅山) 문화는 중국은 물론 만주. 한반도. 일본의 고대 문명을 일궈주었다.

 

현재, 중국은 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 홍산(紅山) 문화요하(遼河) 문명이라고 하여 자기네 역사 유적이라고 우기고 있지만, 그 유적지의 위치와 문명 양식 등을 보면, 동이족(東夷族) 배달(倍達)의 문화 양식임에는 어쩔 수가 없다. 중국이 만주의 홍산(紅山) 유적지 문화를 자기네 것이라고 우기는 것은 마치 송곳을 주머니 속에 넣고 감추는 것과 같다. 결국 밖으로 드러나게 마련이다. 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 신시 배달(神市 백두산, 1-13대 환웅) 청구 배달(靑丘 산동성.태산(泰山), 14-18대 환웅)로 나누어진다. 배달국(倍達國)의 환웅(桓雄)이 북만주와 대진국(발해) 연안의 땅에 뛰어난 석공예와 질공예를 남겼는데, 이것을 배달(倍達) 환웅(桓雄) '홍산(紅山) 문화'라고 하는 것이다.

 

환국(桓國, BC 7,199-3,897)의 신교(神敎) 문화는 고대 문화의 원형이고, 그 후, 배달국(倍達國)으로 이어졌으며, 환국과 배달국의 문화는 세계 4대 문명의 뿌리가 되었다. 환국(桓國)12개 나라 가운데, 수밀이국 우루국은 그동안 서양에서 최초의 문명족으로 알려져 있던 나라 이름이고, BC 3,500년 전의 고대 메소포타미아(수메르) 문명을 일으킨 나라이다. 최근, 120여 년 동안의 고고학 발굴 결과, 중동의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BC 3,500년 경에 오늘의 서양 문명의 뿌리인 수메르(Sumer) 문명이 있었고, 이 문명을 건설한 수메르 민족은 동방에서 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수메르 문명은 다시 이집트 문명에게 영향을 주었고, 또한 고대 희랍 문화에 영향을 미쳤으며, 로마 제국을 거쳐 오늘날 서양 문명이 나온 것이다. 인더스 문명 또한 북방 문명에서 기원했다고 하며, 배달국(倍達國)의 문화가 유입되어 인더스강 유역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근래에 만주에서 동북 공정의 일환으로 요하(遼河) 문명유적을 발굴하고 있는데, 요하(遼河) 문명은 배달(倍達) 문명의 일부이다. '황하 문명' 보다 앞선 유적들이 무수히 쏟아져 나왔다. 중국 당국이 발칵 뒤집혔다. 중국의 황하 문명(BC 3,000-2,500)은 황하강 유역에서 발생했는데, 이것은 북만주와 산동 반도 유역의 배달국(倍達國, BC 3,898-2,333) 문명의 영향을 받아 생겨난 것이다. 배달(倍達 BC 3,898-2,333)의 홍산 문화는 메소포타미아 문명(BC 3,500-2,600). 황하 문명(BC 3,000-2,500). 인더스 문명(BC 2,500년경). 이집트 문명(BC 3,100년경) 보다 앞선 것이며, 세계 4대 문명에게 영향을 준 것이라는 증거와 유적들이 최근 속속 발굴되고 있다. 한민족의 배달(倍達) 문명이 중국 민족의 황하 문명 보다 빨랐고, 중국의 황하 문명은 한민족 배달(倍達) 문명을 받아서 생긴 것이라는 역사적 사실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우리나라 배달(倍達) 민족이 천제(天祭) 제사(祭祀) 풍습을 중국 한족(漢族)에게 전해줬다. 배달국(倍達國) 말엽 및 고조선(古朝鮮) 초기에 중국에서 나라를 창업한 사람들 중에서, () 임금(나라의 시조). () 임금(나라의 시조). 문왕(나라의 시조). 무왕(왕조 개창). 강태공(병법의 시조, 나라)도 역시 우리 동이족(東夷族)이었다. 또한, 중국의 건국(建國) 시조(始祖)삼황오제(三皇五帝)는 전부 우리 동이족(東夷族)이었다. 삼황(三皇) 태호 복희(太昊伏羲). 염제 신농(炎帝神農). 황제 헌원(黃帝軒轅)을 말하고, 오제(五帝) 소호 금천. 전욱 고양. 제곡 고신. () 임금. () 임금을 말한다. 그들 모두 배달(倍達)민족이었다. 중국의 건국 시조의 8명 중에 우리 민족이 8명으로 전부를 차지한다.

 

중국은 예로부터 우리나라를 청구(靑丘)라고 했는데, 배달국(倍達國, BC 3,898-2,333) 청구 배달(靑丘, 14-18대 환웅)을 일컫는 말이며, 청구 배달의 문화가 '홍산(紅山) 문화'이다. 그 다음 나라에 이르러, 고조선(古朝鮮, BC 2,333-238)'단군(檀君) 신화' 중에는 호랑이와 곰이 나오는데, 실제는 호족(.호랑이)웅족(.)을 배달(倍達) 동이족(東夷族)이 교화해서 건국한 것을 신화 형태로 기록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