뺏긴 역사찾자

■ 아리랑(我理朗) 노래, 깨어나라 그대여!

마도러스 2020. 3. 16. 22:43


아리랑(我理朗) 노래, 깨어나라 그대여!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래, 아리랑(我理朗)

 

200305월 해외의 유명한 작곡가들로 구성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곡 선정 대회'에서 아리랑(我理朗)82%의 압도적인 지지를 얻어 1위로 선정되었다고 AP통신이 보도했다. 놀랍게도 그 대회에는 국내의 작곡가들이 한사람도 참가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거기서 아리랑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곡으로 뽑힌 것이다. 한편, 2012.12.05일 아리랑(我理朗)은 유네스코(UNESCO)의 인류 무형 유산으로 등재됐다. 한민족(韓民族)의 전통 민요인 아리랑(我理朗) 노래는 우리 민족의 애환(哀歡)민족 정서(情緖)가 담긴 노래이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10),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10),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10), 십 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10).

 

()참된 나를 의미하고, ()이치를 깨닫다라는 뜻이며, ()즐겁다는 뜻이다. 그래서, 아리랑(我理朗)참된 나를 깨닫게 되는 즐거움이라는 뜻이다.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진정한 나를 깨닫기 위해 깨달음의 언덕을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 리도 못 가서 발병난다.” 나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자는 얼마 못 가서 고통을 받는다. 진리를 외면하고, 오욕락(五欲樂)을 쫓아 생활하는 자는 그 과보로 얼마 못 가서 고통에 빠진다.

 

아리(我理)’란 말은 참된 나를 깨닫다’ ‘깨어나다’ ‘부활하다라는 뜻이다. 한강의 원래 이름이 아리수()’이다. 즉 다시 깨어나는 강물 그리고 다시 부활하는 강물이다. 그래서 한강(漢江)의 기적(奇跡)이 일어났다. ‘()’낭군(郎君)’ ‘사람’ ‘그대라는 뜻이다. 그래서, ‘아리랑(我理朗)’참된 나를 깨달어라!’ ‘깨어나라 그대여!’. ‘부활하라 그대여!’ 라는 뜻이다. 한편, ‘쓰리랑아리랑의 뜻과 같은 의미로 쓰이고 있다. ‘아라리요!’깨어나라!’. ‘부활하라!’ 라는 뜻이다. ‘아리랑(我理朗) 고개깨어나는 고개. 부활하는 고개라는 뜻이다. ‘십리는 결코 멀지 않은 십리(十里) 길을 의미한다.

 

아리랑(我理朗) 노래를 부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국 항공대 우실하 교수는 중국(中國) 심양 대학에 교환 교수로 갔다가 돌아오면서 만주(滿洲) 아무르강(흑룡강) 상류 쪽에 거주하는 소수 민족인 에벵키(Ewenki)족의 어휘 사전을 구해왔다. 그 사전에는 뜻밖에도 아리랑’. ‘쓰리랑’. ‘아리’. ‘아라리등의 어휘가 있었다. 에벵키(Ewenki)족은 고조선(古朝鮮 BCE 2,333-238) 단군(檀君) 역사와도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민족이다. 우실하 교수가 가져온 사전은 내몽고(內蒙古)에 거주하는 그들의 일파의 어휘를 정리한 것이다. 그 어휘 사전을 보면, 아리(Ari), 아라(Ara) 등의 어휘에는 부활하다’. ‘다시 깨어나다등의 의미가 있다고 적혀 있다. 아리랑(Alirang)참다’. ‘인내하다’. ‘맞이하다등의 뜻이라고 했고, ‘쓰리랑잠에서 깨어나다’. ‘. 마취 등에서 깨어나다등의 의미라고 적혀 있다. 한편, 몽골에서 '아리'성스럽다’ ‘깨끗하다라는 뜻으로도 쓰이기도 한다. '아리 아리랑'할 때의 '아리(Ari)'의 뜻은 부활하다’. ‘깨어나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고구려(高句麗 BCE 37-AD 668)의 역사가 끊어진 지 1천 오백년이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백제. 신라. 가야. 일본. 그리고 만주의 여진. 몽골. 거란 등을 포괄하는 고대 아시아 대륙의 중심 국가였다. 그리고 문화적으로도 고대 동북아 국가들과 민족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으니, 비록 그들의 역사는 끊어졌으나, 아직도 우리 가슴에 바람 앞에 등불처럼 남아 있다.

 

1990년 세계적인 몽골인(蒙古人) 학자 한촐라 대만(Taiwan) 교수는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어머니의 나라에 왔습니다." 라고 하여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몽고족(內蒙族)이 남긴 한 기록에는 몽골 제국(1,206-1,368)의 여시조(女始祖)인 알랑고아(Alan-Go'a)는 아들 5명을 낳았고, 그 중 3명은 달빛과 동침하여 낳았다. 그리고, 그들은 몽골인의 씨족이 되었다. 그런데, 몽골인(蒙古人)들은 알랑고아(Alan-Go'a)의 아버지가 바로 고구려(高句麗 BCE 37-AD 668) 후예라고 밝히고 있다. 환단고기(桓檀古記) 책에 고조선(古朝鮮) 4대 오사구 단군(烏斯丘 BCE2137년 즉위)은 동생 오사달을 몽고리(蒙古里 내몽골 지역)의 칸(Khan 지배자)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옛날 몽고 제국은 유라시아 대륙을 지배할 때에도 자신들의 조상 뿌리 나라인 고려(高麗 918-1,392)는 독립국으로 인정해 주었다. 지금의 몽골인들은 마두금(馬頭琴)으로 아리랑(我理朗)과 비슷한 곡을 연주한다. 고조선(古朝鮮 BCE 2,333-238). 고구려(BCE 37-AD 668)의 아리랑 노래가 이웃 민족인 몽고족(內蒙族)에게 전해졌다면, 그들에게 아리랑의 선율이 남아있다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 될 것이다. 그런데, 몽고족(內蒙族). 만주 일대 그리고 한반도의 수많은 민족들이 아리랑(我理朗) 혹은 아리랑과 비슷한 노래를 왜 부르는 것일까?

 

나라와 민족을 위한 충절(忠節)의 노래, 아리랑!

 

고려(高麗) 말엽에 조선(朝鮮) 창업을 반대한 고려 충신 72()이 황해도 개성 송악산 아래 두문동(杜門洞)에 숨어 지내다가 그 중 전오륜을 비롯한 7명이 강원도 정선(旌善)으로 은거지를 옮기고 고려(高麗) 왕조에 대한 충절(忠節)을 맹세하여 여생을 산나물을 뜯어 먹고 살았다. 1392년 그들은 고려 왕조에 대한 흠모와 두고 온 가족 및 고향에 대한 그리운 심정을 정선 아리랑을 통해 노래했다. “눈이 오려나, 비가 오려나, 억수 장마 지려나! 만수산(송악산) 검은 구름이 막 모여든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나를 넘겨주소.”

 

정선 아리랑은 고려(高麗) 말엽에 고려(高麗)가 망하고, 조선(朝鮮)이 성립되던 왕조 교체기에 개성(開京)의 송악산(만수산) 두문동(杜門洞)에서 강원도 정선(旌善)으로 은거지를 옮긴 후, 1392년 만들어졌다. 두문동(杜門洞)은 고려(高麗)가 멸망하자 고려의 신하 72명이 조선(朝鮮) 태조 이성계의 회유에 굴복하지 않고 충절(忠節)과 지조(志操)를 지키며 모여 살던 곳이다. 두문불출(杜門不出)이란 말이 여기에서 유래되었다. 고려(高麗)가 망하고 조선(朝鮮)이 새로 개국하였지만, 개성(開京) 송악산 두문동(杜門洞)에서 충절(忠節)과 지조(志操)를 지키며 살았다. 그리고, 그들은 아리랑(我理朗)’ 노래를 불렀다. 두문동(杜門洞) 72()의 충절(忠節)과 지조(志操)의 외침이었다. ‘깨어나라 그대여!’. ‘부활하라 그대여!’

 

아리(我理)’란 말은 참된 나를 깨닫다’ ‘깨어나다’ ‘부활하다라는 뜻이다. ‘아라리(我羅理)’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했는데 비단처럼 아름답게 참된 나를 깨달어라!라는 뜻이다. '아라리(我羅理)가 났네'비단처럼 아름답게 깨닫게 되었네라는 뜻으로 이해 할 수 있다. ‘정선 아리랑은 충절(忠節)과 지조(志操)를 지키며 살고자 했던 두문동(杜門洞) 72()들의 고귀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참된 나를 깨달어라!’ ‘깨어나라 그대여!’. ‘부활하라 그대여!’ 아리랑은 단순한 민요나 유행가가 아니라 기울어 가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던 충신(忠臣)들의 삶과 죽음의 서사시(敍事詩)였던 것이다. 고려(高麗) 개성(開京)의 송악산 두문동(杜門洞)에서 강원도 정선(旌善)으로 은거지를 옮긴 후, ‘정선 아리랑노래가 울려 퍼지기 시작하자, 전국적으로 온갖 형태의 참요(讖謠)들이 이에 화답하며 창화(唱和)하였다. 그 이후, 아리랑(我理朗)은 국난(國難)을 여러차례 극복하면서 한민족의 혼()이고 민요(民謠)의 정수가 되었다. 또한, ‘아리랑(我理朗)’은 외면당하고 압박당하는 사람들의 자존심을 회복하고자 했던 사람들의 자존적 표현과 충절(忠節)의 외침을 대변하는 노래가 되었다.

 

조선(朝鮮) 시대의 상류층들은 아리랑을 외면하였기 때문에 아리랑의 개념에 대한 사상적 기반이 무너지고 영양 공급이 끊겼으며, 하층민과 서민들에 의한 한()풀이 형식의 단순한 민요(民謠)로 취급되었다. 하지만, 민간에서만 조심스럽게 불리던 아리랑(我理朗)’19261001일 나운규 감독의 영화 아리랑(我理朗)’을 공연하게 됨으로써 조선의 노래로 공인되었다. 일제(日帝)의 억압과 차별에 억눌렸던 한국 민족의 잠재적(潛在的)인 민족애(民族愛)를 표현함으로써 아리랑(我理朗)’ 노래는 우리 민족의 상징적 노래로 성장하게 된다. 특히 나운규 감독이 만든 무성(無聲) 영화 '아리랑'(1926)의 개봉은 전국에 일본 제국주의(帝國主義)에 대한 항거(抗拒) 정신을 실은 '아리랑' 노래가 유행하게 되는 촉발제가 되었다.

 

또한, 일제(日帝) 시대에 의병 활동, 독립 운동 및 10193.1 운동 등을 계기로 아리랑(我理朗)이 크게 부흥되는 현상이 일어났다. 일제(日帝)는 조선인들이 일본군의 총부리 앞에서도 아리랑을 부르며, 나라와 민족에 대한 충절(忠節) 의지를 굽히지 않는 것을 보고 아리랑을 금지시키고, 아리랑 노래를 수거하여 없앴다. 아리랑(我理朗)은 고려(高麗) 말엽에 두문동(杜門洞) 72()들이 기울어 가는 그들의 국운(國運) 다시 회복하고자 충절(忠節)의 외침에 의해 출발하였기 때문에 일제(日帝) 시대에 나라를 잃고 온갖 억압과 설움 속에서 살아야 했던 식민지 민중들에게 민족적 독립(獨立) 의지를 불태우는 촉발제가 되기도 하였다.

 

역사적 원상(原傷)을 풀어나가는 특유의 언어, 아리랑(我理朗)

 

정선 아리랑(강원도), 진도 아리랑(전라도), 밀양 아리랑(경상도)을 묶어서 전통 아리랑이라고 한다. 하지만, 경기 아리랑은 특정인의 창의적인 윤색을 거쳐 인위적으로 변이되었다는 뜻에서 신민요 아리랑으로 분류함으로써 전통 아리랑과 구별한다. 나운규 감독의 영화 아리랑(1926)’에서 비롯되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경기 아리랑은 신민요 아리랑이 잇따라 발생할 수 있는 동기 구실을 다한 것으로 생각된다. 신민요 아리랑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대중 가요화한 아리랑이며, 전통 아리랑에서 산업 사회의 대중 노래로서 살아남게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된 것이다. 결국, 아리랑(我理朗)은 전통 민요 신민요 대중 가요 같은 길을 걸어갔다. 1930년대 이후, 숱한 신민요 아리랑이 잇따라 창작되었을 때, 경기 아리랑은 본조 아리랑으로도 호칭되었거니와 그것은 경기 아리랑이 신민요 아리랑의 본류라는 뜻이다. 그 후, ‘종두 아리랑은 천연두 예방 주사를 널리 보급시키기 창작되었고, ‘한글 아리랑은 문명 퇴치 교육의 보급을 위하여 각기 창안된 것이다.

 

참된 나를 깨달어라!깨어나라! 그대여! 부활(復活)하라! 그대여! ‘독립군 아리랑은 독립군의 사기 고취를 위하여 특정한 목적을 위하여 창작된 것이다. 이들은 민요의 텃밭인 민간 밖으로 벗어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아리랑(我理朗)의 기원을 민족적 차원에서 살펴보면, 역사적 원상(原傷) 의식의 표현이다. 아리랑을 푸념이나 넋두리라고 부를 수 있을 때, 그것은 아리랑이 역사적 원상(原傷)을 풀어나가는 특유의 언어이다. 서러움. 애달픔. 원한을 말하게 되면, 아리랑이 지닌 역사적 원상(原傷)이 불러일으킬 감정 및 정조를 지적하는 것이 되고, 애원성이라고 하게 되면 역사성 원상(原傷)에 대해 아리랑이 지닌 소리로서의 애절함을 지적하게 되는 것이다. 아리랑(我理朗)은 삶을 달래고 애간장을 삭이면서 풀어내는 소리이며, 원한과 아픔을 풀어내는 넋두리나 푸념이기도 하다. 아리랑(我理朗)은 체념의 하소연이며, 강한 삶의 의지의 표현이었다. 익살 떨기의 넉살 부림이기도 하였다.

 

한민족(韓民族)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노래, 아리랑(我理朗)

 

가수 조용필(趙容弼)꿈의 아리랑’(2003)이라는 노래에서 아리랑 고개는 희망의 고개라고 노래했다. 아리랑 노래는 우리의 애국가(愛國歌)처럼 부르는 노래이다. '아리랑(我理朗)' 노래에는 한민족(韓民族)의 혼()이 스며있다. 아리랑에 숨겨져 있는 충절(忠節)과 지조(志操)의 정신을 가슴에 새겨야 하며, 조상의 위대한 문화적 유산을 잘 계승해 나가야 한다. 200012월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 평화상 수상식에서 조수미가 부른 노래가 바로 아리랑노래이다. 2002년부터 세계 구전(口傳) 무형 유산의 보존 및 전승을 지원하기 위해 유네스코(UNESCO)에 신설된 상()의 이름이 바로 아리랑 상‘(Arirang prize)이니, 이미 아리랑은 세계적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1991년 일본 지바(千葉)에서 개최된 세계 탁구 대회에서 아리랑이 남북 단일팀 단가(團歌)가 되어 남북 화합과 협력의 상징으로 자리 매김된 후, 2000년 시드니(Sydney) 올림픽을 비롯한 각종 국제 스포츠 대회에서 한반도(韓半島) ()와 아리랑 노래가 통일 한국의 상징으로 기능하고 있다. 이것은 남북한 양쪽과 세계 127개국에 흩어진 한민족(韓民族)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노래는 아리랑(我理朗)’ 이상의 것이 없다. '아리랑(我理朗)' 노래는 201206월 유네스코(UNESCO)에 세계 문화 유산으로 등재를 신청했고, 무형 유산 위원회 산하 심사 보조 기구(Subsidiary body)로부터 201211등재 권고판정을 받았으며, 프랑스 파리 유네스코 본부에서 개최된 제7차 무형 유산 위원회에서 20121205일 최종 등재되었다. 문화재청은 아리랑에 대해서 특정 아리랑이 아니라 후렴구가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로 끝나는 모든 형태의 아리랑(我理朗) 노래를 등재 신청했으며, 지역별로 독특한 아리랑이 존재한다는 점, 처한 환경이나 기분에 따라 즉흥적으로 지어 부를 수 있다는 점, 지역과 세대를 초월해 광범위하게 전승된다는 점 등을 강조했다.

 

아리랑(我理朗) 노래, 깨어나라 부활하라 그대여!

 

'아리랑(我理朗)'은 다양한 사회적 맥락 속에서 지속적으로 재창조되며, 공동체 정체성의 징표이자, 사회적 단결을 제고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아리랑의 유네스코(UNESCO) 세계 문화 유산 등재로 무형 유산 전반의 가시성이 향상되고, 대화 증진, 문화 다양성 및 인간 창의성에 대한 존중 제고 등이 이루어질 것이다. 실제로 아리랑(我理朗)은 다른 세계 무형 유산과 달리 국내뿐만 아니라 중국. 만주. 몽골. 카자흐스탄의 해외 동포가 만든 아리랑까지 다양한 지역에서 포괄적으로 전승되고 있다. 아리랑(我理朗)과 관련된 노래는 아리랑 목동(박단마), 영암 아리랑(하춘화), 쓰리랑(유지나), 꿈의 아리랑(조용필), 강원도 아리랑(강원도), 경기 아리랑(경기도), 진도 아리랑(전라도), 밀양 아리랑(경상도), 정선 아리랑(강원도) 등이 있다.

 

참된 나를 깨달어라!깨어나라! 그대여! 부활(復活)하라! 그대여! 이제 세계의 대운(大運)이 새로운 문명을 예고하고 있다. 기존의 낡은 인류 문명은 크게 뜯어 고쳐져야 한다. 세계가 새로운 문명을 향한 새로운 운()으로 들어가는 신호탄이 울리고 있다. 세계 문명의 중심에 한국(韓國)이 있다. 지구촌의 세계는 정치와 경제 등 모든 분야가 개혁의 대운(大運)으로 돌입하고 있다. 한반도(韓半島)로 큰 운수가 몰려오고 있다. 세상 문명이 밝게 투영되어 드러나는 시간대로 돌입한다. 한국(韓國)은 반드시 세계를 놀라게 할 것이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을 더욱 크게 놀라게 할 것이다. 인류에게 가장 큰 꿈과 희망을 던져 주는 새로운 문명이 나온다. 한국의 비약적인 성장에 세상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그러나, 그것은 변죽만 울린 것이고, 앞으로 정말 온 천지(天地) 세상 사람들이 크게 놀라는 일이 벌어질 것이다. [글 작성: 진단검사의학과 전문의. 최병문]



★ 우리 배달(倍達) 민족의 역사는 9,200년이다.


★ 우리 배달 민족의 환국(桓國,BC 7,199-3,897), 배달국(倍達國,BC 3,897-2,333). 고조선(古朝鮮,BC 2,333-238) 문화는 중국의 (堯.재위BC 2,357-2,258), (舜.재위BC 2,255-2,208), (夏,BC 2,205-1,766), (殷,BC 1,600-1,046), (周,BC 1,046-771) 문화의 뿌리이다. 우리 배달(倍達) 민족 문화가 중국 문화의 뿌리이다. 우리 민족의 역사가 환국(桓國,BC 7,199-3,897), 배달국(倍達,BC 3,897-2,333), 고조선(古朝鮮,BC 2,333-238). 부여.옥저.동예.낙랑국. 마한.변한.진한. 고구려.백제.신라로 이어져서 무려 9,200년이나 된다. 


 '신시(神市) 개천경(開天經)' 기록에 의하면, 환국(桓國)의 말엽에 환웅(桓雄)이 있었다. 그는 홍익인간(弘益人間), 재세이화(在世理化), 광명이세(光明理世)의 뜻을 간직하고 있었다. 환웅(桓雄)은 동방 땅 백두산(白頭山)에 문명 개척단 3,000명과 함께 배달국(倍達,BC 3,897-2,333)을 건설하였다. 배달국(倍達,BC 3,897-2,333년)은 신시 배달(神市 백두산, 1-13대 환웅)과 청구 배달(靑丘 산동성.태산(泰山), 14대-18대 환웅)로 나누어진다. 배달국(倍達)의 환웅(桓雄)이 북만주와 대진국(발해) 연안의 땅에 뛰어난 석공예와 질공예를 남겼는데, 이것을 배달(倍達) 환웅(桓雄)의 '홍산(紅山) 문화'라고 한다.


배달국(倍達國,BC 3,897-2,333)의 홍산(紅山) 문화는 1920년대 프랑스 에밀 리쌍이 처음 발굴을 시작하였고, 1930년대 중국 철학자 양계초의 아들 양사영이 홍산(紅山) 유적지를 조사한 이래 많은 학자들이 연구에 뛰어 들었다. 그 후, 중국 정부에서 대대적으로 발굴하였는데, 1980년대에 홍산(紅山) 문화의 대표적인 유적지인 우하량 유적이 발굴되어 전세계가 깜짝 놀랐다. 이 곳에서 나오는 유물들은 중국의 황하 문명 보다 2-3천년 앞 서 있었고, 유적과 유물들을 자세히 살펴 보면 그 지역의 문명은 이미 국가 단계의 구비 조건을 모두 갖춘 문명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 배달국(倍達國,BC 3,897-2,333)의 홍산(紅山) 문화의 유적과 유물들은 세계 문명의 발상지라고 꼽히는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인더스. 황하 문명 보다 훨씬 앞 선 문명 형태였기 때문이다. 예를들면, 홍산 문화의 소하서 지역 유적들은 무려 8,5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결론적으로 배달국(倍達國,BC 3,897-2,333) 홍산(紅山) 유적지 발굴은 세계 문명사를 다시 쓰게 하는 엄청난 사건이다. 최근에도 중국은 동북(東北) 공정의 일환으로 이 곳을 계속 발굴하고 있다.


현재, 중국은 홍산(紅山) 문화를 ‘요하(遼河) 문명’이라고 하여 자기네 역사 유적이라고 우기고 있지만 그 유적지의 위치와 문명 양식 등을 보면 동이족(東夷族) 배달(倍達)의 문화 양식임에는 어쩔 수가 없다. 중국이 만주의 홍산(紅山) 유적지 문화를 자기네 것이라고 우기는 것은 마치 송곳을 주머니 속에 넣고 감추는 것과 같다. 결국 밖으로 드러나게 마련이다.


배달국(倍達國,BC 3,897-2,333년)은 신시 배달(神市백두산,1-13대 환웅)과 청구 배달(靑丘산동성.태산(泰山),14대-18대 환웅)로 나누어진다. 배달국(倍達國)의 환웅(桓雄)이 북만주와 대진국(발해) 연안의 땅에 뛰어난 석공예와 질공예를 남겼는데, 이것을 배달(倍達) 환웅(桓雄)의 '홍산(紅山) 문화'라고 한다.


환국(桓國)의 신교(神敎) 문화는 고대 문화의 원형이고, 배달국(倍達國)으로 이어졌으며, 환국과 배달국의 문화는 세계 4대 문명의 뿌리가 되었다. 환국(桓國)의 12개 나라 가운데, 수밀이국과 우루국은 그동안 서양에서 최초의 문명족으로 알려져 있던 나라 이름이고, B.C 3,500년 전의 고대 메소포타미아(수메르) 문명을 일으킨 나라이다.


최근 120여 년 동안의 고고학 발굴 결과, 중동의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B.C 3,500년 경에 오늘의 서양 문명의 뿌리인 수메르(Sumer) 문명이 있었고, 이 문명을 건설한 수메르 민족은 동방에서 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수메르 문명은 다시 이집트 문명에게 영향을 주었고, 또한 고대 희랍 문화에 영향을 미쳤으며 로마제국을 거쳐 오늘날 서양 문명이 나온 것이다. 인더스 문명 또한 북방문명에서 기원했다고 하며, 배달국(倍達國)의 문화가 유입되어 인더스강 유역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중국의 황하 문명은 B.C3,000-2,500년경에 황하강 유역에서 발생했는데, 이것은 북만주와 산동반도 유역의 배달국(倍達國, B.C3,898-2,333) 문명의 영향을 받아 생겨난 것이다. 근래에 만주에서 동북 공정의 일환으로 ‘요하(遼河) 문명’ 유적을 발굴하고 있는데, 요하(遼河) 문명은 배달(倍達) 문명의 일부이다. '황하 문명' 보다 앞선 유적들이 무수히 쏟아져 나왔다. 중국 당국이 발칵 뒤집혔다.


배달(倍達 BCE 3,898-2,333)의 홍산 문화는 메소포타미아 문명(BCE 3,500-2,600년). 황하 문명(BCE 3,000-2,500년). 인더스 문명(BCE 2,500년경). 이집트 문명(BCE 3,100년경) 보다 앞선 것이며, 세계 4대 문명에게 영향을 준 것이라는 증거와 유적들이 최근 속속 발굴되고 있다.


'한민족의 배달(倍達) 문명이 중국 민족의 황하 문명보다 빨랐고, 중국의 황하 문명은 한민족 배달(倍達) 문명을 받아서 생긴 것이다.' 라는 역사적 사실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우리 민족의 역사가 환국(桓國,BC 7,199-3,897), 배달국(倍達國,BC 3,897-2,333), 고조선(古朝鮮,BC 2,333-238). 부여.옥저.동예.낙랑국.마한.변한.진한. 고구려.백제.신라로 이어져서 무려 9,200년이나 된다.


환국(桓國)의 장자국(長子國)이 배달국(倍達國)이었고, 배달국(倍達國)의 장자국(長子國)이 고조선(古朝鮮)이었음을 비추어 볼 때, 우리 배달(倍達)민족과 한국이 세계 4대 문명의 정통성을 이어 받은 민족이며 나라임을 알 수 있다.


★ 우리 배달(倍達)민족이 천제(天祭) 및 제사(祭祀) 풍습을 중국 한(漢) 민족에게 전해줬다. 배달국(倍達國) 말엽 및 고조선(古朝鮮) 초기에 중국에서 나라를 창업한 사람들 중에서, 임금(하夏나라의 시조). 임금(은殷나라의 시조). 문왕(주周나라의 시조). 무왕(주周왕조 개창). 강태공(병법의 시조, 제齊나라)도 역시 우리 동이족(東夷族)이었다. 또한, 중국의 건국(建國) 시조(始祖)인 삼황오제(三皇五帝)는 전부 우리 동이족(東夷族)이었다. 삼황(三皇)은 태호복희(太昊伏羲). 염제신농(炎帝神農). 황제헌원(黃帝軒轅)을 말하고, 오제(五帝)는 소호금천전욱고양제곡고신. 요(堯)임금(舜)임금을 말한다. 그들 모두 배달(倍達)민족이었다. 중국의 건국 시조의 8명 중에 우리 민족이 8명으로 전부를 차지한다.


★ 중국은 예로부터 우리나라를 청구(靑丘)라고 했는데, 청구 배달(靑丘,14대-18대 환웅)을 일컫는 말이며, 청구 배달의 문화가 '홍산 문화 (紅山文化)'이다. 그 다음 나라에 이르러, 고조선의 '단군(檀君) 신화' 중에는 호랑이와 곰이 나오는데, 실제는 호족(虎.호랑이)과 웅족(熊.곰)을 배달(倍達) 동이족(東夷族)이 교화해서 건국한 것을 신화 형태로 기록한 것이다. 고대 사회의 사람들은 '신화의 형태'로 이야기해야 알아듣는 그런 시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