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한국 전쟁

백선엽 셀프 영웅화, 자신의 공적 미화

마도러스 2020. 8. 20. 00:52

■ 백선엽 셀프 영웅화, 자신의 공적 미화

 

백선엽, 죽기 전까지 군사 편찬 연구소 종신 자문 위원장 꿰찼다.

 

[한겨레신문] 군사(軍史) 편찬 연구소 서상문 전() 책임연구원은 백선엽씨가 사망 전까지 군사편찬연구소 자문위원장이라는 자리를 활용해서 자신을 영웅화했다고 비판했다. “백선엽 장군은 사망 전까지 군사편찬연구소 자문위원장이라는 자리를 활용해서 자신을 영웅화했습니다. 공적인 자리를 이용해 교묘하게 과오를 감추고 공적을 미화한 것입니다.”

 

20200805일 서울 은평구 자택에서 만난 서상문(62) 박사는 고() 백선엽 예비역 육군 대장의 한국 전쟁(1950-1953) 공적이 스스로에 의해 부풀려졌다고 증언했다. 서상문 박사는 국방부 군사(軍史) 편찬 연구소에서 약 13년간 연구원으로 일하며, 백선엽 장군이 종신 자문 위원장 자격으로 한국 전쟁과 관련한 자신의 공적을 미화하고, 소속 연구자들이 백선엽 장군의 이야기를 비판 없이 기록하는 과정을 지켜본 인물이다. 박경석 예비역 준장 등 참전 장성들 사이에서 백선엽의 셀프 영웅화에 대한 비판이 나온 적은 있지만, ‘셀프 영웅화산실로 지목된 군사 편찬 연구소 관련자가 백선엽 비판에 나선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군사(軍史) 편찬 연구소, 폐쇄적 분위기에 비판적 질문 못해

 

서상문 박사는 백선엽 영웅담이 확대 재생산된 데에는 역사적 사실을 균형 있게 기록하는 역할을 망각한 군사 편찬 연구소 책임이 크다고 지적했다. 그는 연구원들이 백선엽 장군에 대해 비판적인 질문을 할 수 없는 폐쇄적 분위기였고, 결과적으로 균형 잡힌 사실이 기록되지 않아 편향된 이야기들이 대중에게 전파된 결과를 낳았다. 전직 연구원으로서 부끄럽다. 지금이라도 연구소가 백선엽 장군과 한국 전쟁 당시 역사적 사실을 균형 있게 다루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상문 박사는 사실상 백선엽씨의 말이 역사적 사료였다고 지적했다. 그는 자문 위원장인 백선엽 장군은 독립군을 탄압한 자신의 간도 특설대 활동이나 전쟁 초기 제1사단장으로서 실책은 전혀 말하지 않았고, 공적인 다부동 전투와 평양 입성 전투만을 과장했다. 내막을 살펴보면, 다부동 전투는 미() 공군 공습과 2개 연대 병력 등의 전폭적인 지원이 방어 성공의 결정적 요소였고, 인근 영천 전투나 낙동강 서부 지역의 마산 전투 등도 중요한 전투였는데, 다부동 전투만 지나치게 미화됐다고 했다. 서상문 박사는 한국 전쟁 때, 백선엽 장군 혼자서 대한민국을 구한 것처럼 기록하거나 떠받드는 것은 명백한 역사 왜곡이라며 평양 입성 전투와 관련해서도 사실상 북한군 주력 부대가 모두 빠져나간 뒤, 무혈 입성이라서 과대 포장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했다.

 

실제로, 군사 편찬 연구소가 2005년에 발간한 한국 전쟁사 2북한의 전면 남침과 초기 방어 전투를 보면, 전쟁 발생 전날 밤, 장교 구락부 파티 내용과 전방이 북한군에 밀리는 상황이 열악한 국군의 상황 때문이라고 뭉뚱그려 언급됐을 뿐, 당시 제1사단장으로서 백선엽 장군의 책임 등은 구체적으로 서술되지 않았다. 반면, 5편인 낙동강 전선 방어 작전부분에선 백선엽 장군이 이끄는 제1사단의 행적을 중심으로 다부동 전투가 서술되는데, 백선엽 장군의 회의 사진과 독사진, 사단 사령부로 사용된 동명 초등학교에 세워진 백선엽 전적비사진도 실리는 등 그의 업적에 집중해서 서술되어 있다. 이와 관련해 군사 편찬 연구소 관계자는 한국 전쟁에 대한 연구라서 백선엽 장군의 이전 과오까진 서술할 수 없었다. 전체적 관점으로 사실을 서술한 것이지 특정 사건이나 개인을 미화하려는 의도는 아니었다고 말했다.

 

서상문 박사는 전쟁 발생 초기 백선엽 장군의 과오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개성. 문산. 파주 등지가 주요 방어 지역인 백선엽 제1사단장이 한 일은 후방으로 후퇴하면서 패잔병을 모으는 일뿐이었다는 지적이 있고, 육군 본부 장교 구락부 낙성 기념 축하 파티에 참석하여 부대 복귀가 늦었다는 의혹과 전방이 속수무책으로 뚫려 서울이 조기에 점령당한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지적이다.

 

<한겨레> 취재 결과, 백선엽 장군은 병상에 누운 상태에서도 자문 위원장직을 유지했다. 공직에서 은퇴한 뒤, 30여년간 이어진 종신직이었다. 연구소 관계자는 “202006월 한국 전쟁 70주년 행사 때문에 자문 위원장직 유지가 불가피했다고 설명했다. 국방부는 백선엽 장군에게 연구소 내 사무실과 접견실, 관용 차량, 중령급 개인 비서, 활동비 등을 제공했다. 차량은 필요하면 배차해서 이용했고, 활동비는 업무량에 따라 월 200만원 한도로 지급했다는 것이 연구소 쪽의 설명이다. 백선엽 장군은 건강이 악화하기 전까지 매일 사무실에 출근해 자문에 응하고, 외부 인사들을 만난 것으로 전해졌다.

 

서상문 박사는 백선엽씨가 죽기 전에라도 친일 활동을 사과했어야 한다고 했다. 그는 백선엽 장군은 이이제이(以夷制夷)를 내세운 일본의 책략에 빠져든 것이라는 변명으로 간도특설대 활동을 합리화했다한 평생 국가의 녹을 먹은 사람이 죽기 전까지 치명적인 잘못을 사과하지 않은 것은 명백한 범죄라고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