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한국 전쟁

인류 역사상 유례 없는 3일 전쟁, 한국 전쟁

마도러스 2020. 5. 20. 23:42

■ 인류 역사상 유례 없는 3일 전쟁, 한국 전쟁

 

아동방(我東方) 3일 전쟁은 있어도, 동적강(銅赤江)은 못 넘으리라” (증산도 道典 5:406). 동적강(銅赤江)은 예로부터 서울 동작동(銅雀洞) 국립묘지 앞을 흐르는 강(반포천)을 말한다. 동작(銅雀)이란 말은 동재기라는 옛말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유래했다. 동작동 국립묘지로 넘어 오는 동적강(銅赤江) 강변 연안 일대에 검붉은 구릿빛 돌들이 많이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19500625일 발발한 한국전쟁(1950-1953)3일만에 남한 수도 서울이 함락된 3일 전쟁이었다. 19500625, 새벽 4시경, 북한군은 7개 보병사단, 1개 기갑여단 및 특수 부대를 포함, 10만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기습 남침하였다.1950626, 유엔 안보리에서 북한군의 침공 중지를 결의하였다. 1950627, 트루먼(Truman) 미국 대통령은 극동군 사령관 맥아더(MacArthur) 장군의 지휘하에 있는 미국의 극동 해군과 공군에게 한국으로 향하도록 명령하였다. 1950627, 북한군이 미아리 고개까지 삽시간에 쳐들어왔고, 육군 본부는 수원으로 후퇴하였다. 이승만 대통령북진 통일론을 주장했었다. 하지만, 허황성세(虛荒聲勢)에 불과했다. 그의 북진 통일론은 실제로 전투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북한 위협으로부터 국민들의 동요를 막고 반공(反共) 정신과 안보 의지를 다잡고자 하는 목적에 불과했다. 1950신성모 국방장관'이승만의 북진 통일론에 편승해서 명령만 내리면, 점심은 평양에서 먹고,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겠다!' 라고 했다. 국민들은 꼼짝없이 그들의 주댕이 국방을 믿었다. 하지만, 그들은 허풍장이었고 거짓말쟁이었다.

 

19500625, 국민 전체의 안위를 책임지고 있었던 이승만 대통령은 새벽부터 전쟁 발발의 소식을 듣고 곧바로 서울을 버리고 도망가기 시작했다. 19500626일 아침 8신성모 국방장관은 라디오 방송에 나와 국군이 인민군을 물리치고 북진 중에 있다라는 라고 거짓 선전을 해서 서울 시민을 속였다. 19500627일 새벽, 비상 국무회의가 열렸지만, 이승만은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열차편으로 이미 몰래 서울을 빠져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장관. 국회의원. 육군 본부에게 통보하지 않고, 대전(大田)으로 도망갔다. 대전에 도착하자마자 이승만은 곧 특별 담화를 녹음했다. ‘서울 시민은 안심하십시오. 남침을 감행한 북한 괴뢰군은 용감한 국군의 반격으로 38선 너머로 쫓겨나고 있으며 국군은 38선을 굳세게 지키고 있습니다. 국군을 믿고 자리를 지키십시오. 우리 국군이 용감하게 적을 물리치고 있습니다. 국민과 공무원은 정부 발표를 믿고 동요하지 마십시오. 대통령인 나 역시 서울을 떠나지 않고, 국민과 함께 서울을 지키고 있습니다.” 하지만,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그 방송은 서울 방송국이 아닌 대전 방송국에서 행해졌다. 대전(大田)에서 녹화된 라다오 방송은 0627일 밤 9시부터 서울 중앙 방송국에서 전파를 타고 전국민에게 전달되었다. 0628일 새벽 230분 이승만은 아무 예고도 없이 하나 밖에 없던 한강 다리를 폭파했다. 수많은 시민들이 다리 위에 있었음에도 사전 통보나 어떤 통제도 없었다. 다리 위의 50대 이상의 차량이 물에 빠지고, 그 다리를 건너가던 시민 500여명이 폭사(爆死)당했다. 군사 전략적으로 볼 때도 이것은 터무니없는 실수였다. 서부 전선에 배치되었던 우리 국군이 퇴로를 차단당하고 희생된 것이다. 0628일 서울은 북한 괴뢰군에게 함락되어 지옥 같은 세월을 보내야 했다. 19500701, 이승만은 대전(大田)에서 또다시 도망갈 때도 목포(木浦)로 이동한 후, 부산(釜山)으로 배를 타고 갔다. 경부가도(京釜街道)가 이미 위험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이승만은 서울 시민을 서울에 가두어놓고 자기 혼자만 살 생각을 했다. 그리고, 나중에 서울 수복을 했을 때 서울에 남아 고생한 뭇 시민들은 북한 괴뢰군에 부역(賦役)했다고 고문(拷問)해서 죽이고, 연좌제(緣坐制)로 묶어 놓았다.

 

19500628, 북한 인민군은 대낮에 서울에 진입하였다. 결국, 한국 전쟁(1950-1953)3일만에 남한 수도 서울이 함락3일 전쟁이었다. 19500628, 국제 연합(UN)은 즉각 국제 연합군 파병을 결정하였다. 그 후, 가장 먼저 도착한 미군(美軍)은 예상치 못한 연이은 참패를 거듭했다. 미군의 신경질적인 대응은 다른 곳에서의 엄청난 비극을 초래했다. 결국, 한국 전쟁은 전투원 보다 민간인의 사상자가 전투원 보다 더 높은 인류 역사상 유례가 없는 최악의 전쟁이 되었다. 19500801, 북한군의 계속되는 공세에 밀려 후퇴하던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 전선을 최후의 교두보로 설정하였다. 일단 모든 전력을 낙동강 이남으로 후퇴시켜 전열을 정비하고 이 지역에 모든 전력을 집중하여 북한군의 공세를 저지하기로 결정하였다. 19500915일 감행한 인천 상륙 작전은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성공함으로써 북한군은 완전히 붕괴되었고, 전세는 반전되어 국군과 유엔군은 반격과 추격을 감행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중국의 중공군은 또 다른 변수로 작용하고 있었다.

 

한국전쟁(1950-1953)중공군 30만 대군이 인해전술(人海戰術)을 펼치며 참여한 것이 19501102일 공식 확인되었다. 한국군과 UN 연합군은 압록강 국경선 신의주에서 다시 남쪽으로 후퇴를 거듭하였다. 중공군 30만 대군의 공세에 밀려 추락하듯이 남쪽으로 후퇴하던 국군과 유엔군은 19510104서울을 포기하고 1.4 후퇴하여 남쪽으로 피난하였다. 거침없이 공격하던 중공군은 남으로 진출할수록 병참선이 길어지고, 그 병참선이 유엔 공군의 공격을 받으면서 전투력이 약화되었다. 더 중요한 요인은 1951년부터 전쟁 중에 갑자기 중공군에게서 수천 명의 괴질병(怪疾病) 환자가 발생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UN군도 마찬가지로 괴질병(怪疾病)이 발생했다. UN군 중 32백여 명의 군인이 목숨을 잃었다. 중공군 병영 내에 갑자기 괴질병이 돌아 한강 이남을 넘어오지 못했다. 괴질병이 한강 북쪽의 한탄강(漢灘江) 유역에서 유행했기 때문이다. 그 괴질병(怪疾病)이 바로 한탄 바이러스(Hantaan virus)에 의한 유행성 출혈열이다. 피해가 심했던 나머지 UN군과 중공군 모두 이 유행성 출혈열을 상대방이 만든 생물학 무기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중공군은 갑자기 10여만 명의 전사자를 내면서 19510315일 본격적으로 퇴각했다. 한국 전쟁에서 가장 위험했던 순간은 이렇게 뜻밖의 괴질병(怪疾病) 유행 사건으로 해결되었다. 19510314, 유엔군과 국군은 전선을 북으로 밀어올려 다시 수도 서울을 탈환하게 되었다. 그리고 여세를 몰아 38선까지 진격한 후, 재차 북진하여 휴전 협상에 돌입하였다.

 

한국 전쟁은 최초의 이념 전쟁이었다. 과거의 전쟁들은 제국주의에 의한 식민지 쟁탈전이나, 한 국가의 이익을 위해 다른 나라의 영토를 빼앗으려는 것에 불과한 초라한 전쟁이었다. 한국 전쟁은 자본주의 이념을 위하여 혹은 공산주의 이념을 위하여 싸우는 대국적인 전쟁이었다. 그리고, 한국 전쟁은 1950625일 북한의 기습 공격이라는 것에 과도하게 초점을 맞추어서는 안 된다. 여기에는 특히 혁명과 반혁명, 자본주의공산주의 이념 갈등의 점진적 고조 등이 들어 있는 것이다. 한국 전쟁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진영의 최초의 교전이었고, 한국 전쟁에 의해 세계적인 냉전 구조가 완성되었다. 특히, 한국 전쟁은 2차 대전의 종결 이후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세계적 차원의 냉전 구조를 더욱 명확하게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고, 미국 중심의 자본주의 진영과 소련 중심의 공산주의 진영간의 대립을 가속화시켰다. 미국의 지원을 받는 자본주의 체제로서의 남한과 소련의 지원을 받는 사회주의 체제로서의 북한은 국제적으로 자본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대결하는 냉전 구조의 표본이 되었다. 한국 전쟁에 의해 사회주의 진영과 자본주의 진영의 긴장이 더욱 강화되었고 고착화되었다. 미국은 사회주의권의 확산을 막고 미국 중심의 시장 경제권을 확고히 하고자 반공(反共)의 기틀을 적극적으로 강화시켜 나갔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새롭게 태동된 세계 질서의 중심은 한반도의 3.8으로 집중되고 있었다. 미국과 소련 그리고 중국과 일본은 세계 4대 강국이 되어 남한과 북한의 3.8선을 중심으로 포진(布陣)하게 되었다. 한반도의 3.8선은 미국과 소련을 대신하여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이념의 세력이 서로 대립하여 싸우는 싸움터였다. 한국 전쟁(1950-1953)으로 인해서 북한의 경우, 43만여 발의 폭탄이 투하된 평양(平壤)은 전쟁 후 건물이 단 두 채밖에 남아있지 않았으며, 산업 기반은 거의 초토화되었다. 그 이후, 북한은 미군의 폭격과 공습을 가장 무서워 했다. 1973년에 개통된 평양 지하철 승강장이 지하 100m-150m에 있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한국 전쟁은 사망과 실종 부상을 포함해서 600만명(남한 200, 북한 300, 중국군과 유엔군 100)의 인명 피해를 내었다. 당시 남북한 총인구 3천만명 중 대략 7명당 1명 꼴로 죽거나 다쳤다. 이렇게 많은 인명 피해를 내었던 것은 한편으로 미국의 공습 때문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념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이념 전쟁이었기에 서로에게 잔혹할 수 있었고 쌍방의 잔혹성에 대해서 비난할 뿐 자신들의 비인도적 행위에 대해서는 반성하지 않았다. 몇 차례에 걸친 전황의 반전과 2년여에 걸친 휴전 회담의 장기화도 인명의 피해를 키웠던 중요 원인이 되었다. 남한의 경우, 개전 이후 15개월 동안의 재산 손실액은 20억 달러로 1949년도 남한의 국민 총생산액을 능가하는 것이었다. 한국 전쟁은 일본이 후방 보급 기지의 역할을 하게 하여 경제적 호황을 누릴 수 있게 하였고, 이는 일본 경제를 회생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역사(歷史)는 반복된다!” 어제와 오늘을 알면, 내일이 보인다. 언제 어디서나 비슷한 일이 일어날 수 있다. 역사는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호흡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