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무장 지대에 지하 만리 장성 존재
● 백마 고지 전투 보다 많은 사상자를 낸 실패한 전투
강원도 철원군 오성산에는 삼각 고지와 저격 능선(해발 538m)이 있다. 중공군은 이 삼각 고지와 저격 능선을 합해 ‘상감령(上甘領)’이라 했다. 1952년 10월 유엔군은 강원도 철원군 오성산의 전초 기지라 할 수 있는 상감령(上甘領) 점령 작전을 펼쳤다. 삼각 고지는 미 제7사단이 맡았고, 저격 능선은 한국군 제2사단이 주로 공격했다. ‘삼각 고지’와 ‘저격 능선’은 요충지 중의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당시 제임스 밴플리트 미8군 사령관은 “적의 생명줄인 철원. 평강. 김화의 ‘철의 삼각 지대(Iron Triangle Zone)’를 반드시 차지해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철의 삼각 지대’의 왼쪽 어깨가 ‘백마 고지’라면, 오른쪽 꼭짓점은 바로 오성산 일대였다.
강원도 철원군의 비무장 지대 이북의 오성산 지역엔 지금도 6만명의 병력이 숨을 수 있는 이른바 지하 만리 장성이 구축돼있다고 한다. 당시 공산군측은 “상감령을 잃게 되면 오성산이 직접 위협을 받으며, 유엔군은 높은 지형에서 아래를 바라보게 되어 중공군이 평강 평원에서 버티기 힘들다”면서 상감령 사수 작전을 펼쳤다.
1952년 10월 14일, 마침내 유엔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이 전투는 무려 42일간이나 치열한 공방전을 펼쳤다. 중국군 자료에 따르면, 이 과정에서 유엔군은 3개 사단 넘는 6만 병력과 300여문 화포, 200여대의 탱크, 3000여대의 항공기를 투입했고, 포탄 190만발, 폭탄 5000여발을 쏟아 부었다. 중국군 역시 3개 사단(4만 명)과 산포와 야포 유탄포 133문, 로켓포 24문, 고사포 47문, 박격포 292문이 35만발의 포탄을 발사했다.
이 전투로 상감령 산봉우리는 2m나 낮아졌고, 융단 폭격으로 1m가 넘는 흙먼지가 쌓였다고 한다. 전투 결과, 중국군 자료로는 3만 7000여 명(중국군 1만 1529명, 유엔군 2만 5498명), 한국군 자료로는 2만 명(중국군 1만 4815명, 유엔군 4683명), 유엔군 자료로는 2만 8000명(중국군 1만 9000명, 유엔군 9000명) 등이 손실을 입었다.
한국군 전사(戰史)에서도 “심지어 백마 고지 전투에서도 이렇게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지 않았으며, 단일 전투에서도 이렇게 많은 인명 피해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 상관도 부하도 누구인지 모르고 달려든 상감령 전투
이 치열한 전투의 승리자는 어느 편이었을까? 한마디로 말하면, 유엔군의 작전 실패였다. 40일이 넘는 작전 결과, 유엔군은 목표인 삼각 고지를 빼앗는데 실패하고, 저격 능선의 일부인 A고지와 돌바위 고지를 점령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물론, 저격 능선 전투로만 한정한다면, 유엔군의 승리로 평가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전반적으로는 ‘실패한 전투’라는 평이 지배적이다. 유엔군 작전은 겨우 저격 능선 일부만 확보하는데 그치고만 실패한 작전이었다. 반면 중국군은 “상감령 전투는 전쟁 막바지 대공세였던 금성 전투와 함께 중국 지원군이 조선 전쟁에서 거둔 최대의 승리였다”고 자화자찬했다.
그렇다면 왜 유엔군은 실패했는가? 우선 유엔군은 맨처음 작전을 펼칠 때만 해도 낙관론을 펴고 있었다. 삼각 고지와 저격 능선에 미군과 한국군 1개 대대씩만 투입한다 해도 단 5일간의 작전 기간에 약 200명의 인명 손실만으로도 승리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그러나, 그 예상은 여지없이 깨졌다. 40여 일간 엄청난 피해를 입고도 삼각 고지 확보에 실패하고, 저격 능선 일부만 확보하는데 그쳤기 때문이다. 특히 유엔군이 고전하자 미국내 여론도 급격히 악화됐다.
미 7사단이 맡은 삼각 고지에서 미군 2,000여 명이 전사하거나 부상하자, 미국 언론들은 “한국 전선에서 미군이 명분 없는 싸움에 쓰러져 가고 있다”고 연일 보도했다. 급기야 미군은 삼각 고지 전투를 한국군 2사단에게 인계한다. 한국군 내부에서도 “우리가 미군의 희생양이냐?” 라는 반발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한국군의 경우, 손실된 병력을 아무 것도 모르는 신병들로 채운 상태였다. 신병들은 소속 부대마저 모르고 전투에 투입됐고, 일선 지휘관들도 자기 부하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전투를 벌였다.
● 거대 폭탄으로도 지하 땅굴을 소탕하는 것은 불가능
그러나, 상감령 (삼각 고지 + 저격 능선) 전투의 실패 요인은 따로 있었다. 중국군과 북한군이 1년 가까이 오성산 일대의 고지에 구축해 놓은 지하 땅굴 때문이었다. 중국군은 서해안부터 동해안까지 모든 전선에 250-287km에 폭 20~30킬로미터의 지하 갱도를 구축했었다. 이 지하 갱도를 중국은 ‘지하 만리 장성’이라 했다. 지하 땅굴의 위력은 엄청났다.
저격 능선 전투를 지휘한 당시 정일권 한국군 제2사단장은 이렇게 말했다. “작은 구멍에 지나지 않은 동굴 입구에 들어가면, 안의 통로는 사통팔달이었다. 중공군의 반격 속도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빨라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바로 동굴 진지에 숨어 있다가 다시 나온 것이었다.”
당시 중국군 제45사단은 오성산 일대에 총연장 8.8㎞의 갱도 306개와 참호 160개, 교통호 53㎞, 그리고 대전차호 4개를 구축해놓고 있었다. 게다가 참호 2400개와 노루방책 2.6㎞, 철조망 2.3㎞, 동굴 양식 창고 61개, 동굴 탄약 창고 65개, 갱도와 연결된 엄폐식 취사장 140개, 각급 지휘소 및 관측소 204개를 건설했다.
투항한 한국군으로부터 유엔군의 공격 첩보를 입수한 중국군은 저격 능선의 하단에서 상단까지 수직으로 연결한 폭 2m, 깊이 1.5m의 교통호를 20m 간격으로 뚫었다. 8부 능선 좌우로 연결된 교통호를 따라 8-10m 간격으로 폭격과 포격에 견딜 수 있는 엄체호를 구축했다. 능선 북단에 100-150명을 수용하는 대피호를 쌓기도 했다.
오죽하면 미군 군사 전문가들은 “설령 원자 폭탄을 사용했다 해도 저격 능선과 오성산의 공산 부대를 모두 소탕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혀를 내둘렀다. “포격전이 한창일 때, F-80 제트 전투 폭격기 편대가 나타나 공산군 진지에 일제히 네이팜탄을 투하했다. 활활 타올라 가는 화염 그리고 푸른 하늘 높이 뭉클 솟아오르는 소형 원자운 같은 버섯형 흑연을 보면서 공산군 진지 아래 장병들은 전부 불타 없어졌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30분이 지나자 공산군 진지에서 박격포가 날아왔다.”
● 지하에 땅굴을 파서 지하 만리 장성을 구축하라!
오성산의 지하 갱도는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았다. 중공군은 한국 전쟁 당시 1951년 08월부터 38선의 모든 전선에 이른바 지하 만리 장성을 뚫어놓았다. 중공군은 한국 전쟁이 교착 상태로 빠졌던 1951년 08월쯤부터 방어 진지를 난공불락의 요새로 만들기 시작했다. 2차 대전의 마지노선이나 독일의 서부 방벽을 능가하는 견고한 진지였다. 화력의 열세를 극복하려 고지의 후사면을 이용하여 땅굴과 참호를 파고, 모든 병력을 수용할 수 있는 지하 요새를 구축한 것이다.
이는 쌍방이 협상을 통해 전쟁을 더 이상 확대시키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우면서 전선이 교착화한 데 따른 것이다. 왜냐면, 항일 전쟁과 국공 내전을 치르고 1949년 중공(중화 인민 공화국)을 출범시킨 신생국으로서는 경제 발전과 한국 전쟁을 동시에 치를 여력이 없었다. 따라서, 전쟁을 확대할 수 없었던 것이다. 유엔군은 우세한 화력과 포병 탱크 등을 내세워 1개 진지에 수 만 발의 포탄을 쏟아 부었다. 장비가 낙후돼있는 상황에서 전선 수호는 중공군의 최고 덕목이 되었다.
그러던 중, 1951년 06월 중순, 중국군 제47 군단 제140 사단은 유엔군의 맹폭격을 방어할 이른바 ‘고양이 귀’ 모양의 동굴을 대량으로 만들었다. 땅굴 교통호 내부에 각기 1명당 두개씩 1m 넓이, 지상에서의 깊이 2-3m의 동굴을 만든 것이다. 1개 중대 혹은 1대 대대의 진지는 유엔군 1,000-2,000발 포탄 포격과 미군기 10대의 소형 폭탄의 폭격을 견딜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만든 동굴의 효용성이 중국군 사령부는 크게 고무되었고, “거점은 반드시 갱도식으로 확보하고, 적의 유탄포와 포탄의 공격을 견디도록 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 전법은 곧 효과를 입증했는데, 경기도 연천군 마량산 고지에서 빛났다. 1951년 10월 04일-07일 사이 영국 군대의 영연방 사단은 매일 1-2만 발의 포탄을 퍼부었지만, 진지는 흔들림이 없었다. 중공군은 영국군의 21차례 공격을 모두 격퇴하고, 모두 700여명을 살상했다.”
● 중국군의 갱도 작전 때문에 유엔군은 고전했다.
급기야 중국군은 1951년 10월 21일 “주요 진지는 반드시 갱도식으로 하되 깊이는 5m 이상으로 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이로써 서부 전선 경기도 예성강 하구에서 북한강 동쪽의 강원도 양구군 문등리까지 38선의 모든 전선에 걸쳐 8개 중국군 군단과 북한군 3개 군단을 투입하여 이른바 갱도식 방어 진지 구축 작전을 펼쳤다. “석탄이 없으면 나무를 땠고, 흙을 운반할 도구가 없으면, 손수레를 만들었다. 비밀 유지를 위해 낮에는 흙을 동굴 입구로 운반했고, 야간에 산기슭으로 옮겨 동이 틀 때까지 위장하면서 공사를 계속했다.” 결국 공산군측은 1952년 말까지 한반도 38선을 횡으로 가로지르는 250㎞ 길이의 모든 전선에 20-30㎞의 두꺼운 땅굴 방어선을 갖추고, 땅굴을 거점으로 한 거점식 진지 방어 체계, 즉 지하 갱도를 구축했다. 그들의 표현대로 ‘난공불락의 지하 만리 장성’을 건설한 것이다.
한반도 38선 중부 전선 250㎞ 거리에 중국군이 파놓은 갱도는 7,789개 통로, 길이 198.7㎞, 엄체호 75만 2900개, 노천 및 엄폐식 참호 길이 3420㎞, 북한군이 판 갱도는 1,730개 통로, 길이 88.3㎞, 각종 엄체호 3만 1700개, 참호 길이 263㎞가 되었다. 이외에도 중국군과 북한군이 구축한 폭탄 대피소, 지휘소, 관측소, 엄폐부, 토치카 등은 중국군 8만 5000여개, 북한군 1만 6000여개였다.
이렇게 구축된 지하 만리 장성의 제원을 계산하면, 총 갱도수 9,519개, 갱도 길이 287㎞, 엄체호 78만 4600개, 엄체호 총 길이 3683㎞, 그리고 각종 시설물 10만 1500개이다. 지하 만리 장성의 총연장만 해도 4,000km에 육박하는 철옹성인 것이다. 이것은 제2차 세계대전 때에 프랑스가 구축한 마지노선이나 독일의 서부 방벽을 능가할 만큼의 진지를 지상이 아닌 지하에 건설한 셈이다. 공산군의 방어 진지는 공중 및 야포 공격에도 견딜 수 있을 만큼 매우 견고하게 설계되었다.
● 한반도 38선 중부 전선에 형성된 개미집 같은 지하 땅굴
당시 마오쩌둥(毛澤東) 중국 주석은 “어떤 사단도 3개월의 식량을 보관할 지하 창고가 있었으며, 지하 강당도 있어 생활은 대단히 좋았다”고 자랑했다. 공산군이 구축한 지하 요새는 고지 정상으로부터 깊이가 2m나 되는 여러 갈래의 교통호가 반사면을 따라 보급소나 취사장으로 보이는 동굴로 통하고 있었다. 공중에서 보면, 서해안에서 동해안까지 모든 전선에 걸쳐 폭 20-30㎞의 커다란 개미집이 형성되어 있는 것 같았다.
마오쩌둥(毛澤東) 주석은 1952년 08월 “해답은 땅굴을 파는 것이다, 2층으로 굴을 파면 상대가 공격해올 경우, 우린 1층으로 지하도로 들어간다. 상대가 위층을 점령해도 아래층은 우리에게 속해있다”고 큰소리쳤다. 그것은 허풍이 아니었다. 국군 5사단이 강원도 양구군 가칠봉을 점령했을 때는 공산군이 진지 내에서 1개 소대가 동시에 집결하여 식사를 할 수 있을 만큼의 식당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중국군이 수행한 지하 만리 장성의 개념은 전쟁 후 북한군에게 고스란히 전수됐다. 이후 북한군 전투교리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 결과, 북한군 역시 이 갱도 작전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고, 남한을 공포로 몰아넣은 땅굴 작전 역시 이 갱도 작전의 하나라는 것이다.
중국은 지하 만리 장성이 가장 위력을 발휘한 전투가 바로 ‘상감령 전투’였다고 자랑하고 있다. 유엔군은 갱도 위쪽에 구멍을 파고 폭약을 이용하여 폭파를 시도했다. 갱도 입구에 폭탄. 폭약통. 수류탄. 유황탄. 가스탄을 투척하거나 화염 발사기를 사용했다. 이로 인해 갱도 내부의 공기가 극도로 오염됐으며, 초연. 독가스. 피비린내. 대소변 냄새. 땀 냄새 등이 갱도내부에 가득해 호흡이 극도로 곤란해질 정도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군의 갱도 작전은 위력을 발했다. 중국측은 “갱도를 핵심으로 견고한 방어 전략을 펼쳐 1만 1000여명의 희생으로 유엔군 2만 5000여명을 살상시켰고, 항공기 274대를 격추시켰다”고 자랑했다.
물론 갱도의 부작용도 있었다. 하루 종일 등잔불을 켜야 했기에 등불용 콩기름이 1개 군에서 월평균 10만근이나 소요됐다. 식수 부족으로 혀가 갈라지고, 코피가 터지는가 하면, 야맹증 환자가 급증하기도 했다. 중국군은 솔잎을 1시간쯤 삶아 1주일간 마시거나 개구리 알을 넣고 끓인 뒤 하루 2-3차례에 걸쳐 2일 동안 마시는 현지 주민의 민간 요법을 이용하여 환자를 치료했다고 한다.
중국의 ‘상감령 전투’ 전황은 종군 기자들에 의해 시시각각으로 중국 대륙에 전해졌다. 중국인들은 한반도 중부 전선에서 분투하고 있는 지원군의 승전 소식에 열광했다. 중국이 파견한 위문 단원들은 상감령 전역의 갱도를 찾아 대륙에서 보낸 대량의 위문품과 위문 편지를 중국군에게 전달했다.
또한 1950년대에 바로 이 ‘상감령 정신’이 중국 대륙을 풍미했다. ‘상감령 정신’이란 곧 “어려움을 극복하고 조국과 인민의 승리를 위해 봉헌하는 불요불굴의 의지 그리고 일치단결로 용감하고 완강하게 전투에 임해 끝까지 승리를 쟁취하겠다.”는 정신을 뜻했다.
1956년에는 영화 ‘상감령’이 중국 내에서 개봉됐으며, 영화 마지막에 나오는 노래 ‘나의 조국(我的祖國)’은 중국인들의 심금을 울렸다고 한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 리허설 때 가장 먼저 울려 퍼진 곡이 바로 상감령의 주제가인 ‘나의 조국’이었다. “승냥이와 이리가 침략해 오면(若是那豺狼來了),엽총으로 맞이할 것이네(迎接的有獵槍).” 노래 가사에 나오는 ‘승냥이와 이리(豺狼)’는 곧 미군을 지칭하는 것이다.
● 비무장 지대는 소중한 유네스코 세계 유산이다.
중요한 것은 지금도 비무장 지대 일대에는 중공군이 구축한 지하 만리 장성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도 상감령 전투가 벌어졌던 강원도 철원군 오성산 일대에는 6만명의 병력이 숨을 수 있는 지하 만리 장성이 있다고 한다.
지금 이 순간, 왜 패배한 전투의 상처를 굳이 들춰보고 있는 것일까? 중국군이 무모한 인해전술만으로 한국 전쟁에 임했다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꼽고 싶다. 왜곡된 전쟁사를 바로잡는 것이야말로 오히려 우리 군의 교리 발전 뿐 아니라 교육 훈련에도 도움이 된다. 패배한 전투에서 배우는 반면교사의 정신도 중요한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 비무장 지대 안에는 한국 전쟁 당시 중국군과 북한군이 구축한 요새가 지하에 묻혀있다는 사실이다. 한반도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총연장 250-287㎞, 폭 20-30㎞, 그리고 참호와 교통호까지 계산한다면 총연장은 4,000㎞에 이른다. 단순 계산으로만 보더라도 5,000-7,000㎢에 달한다. 중국식 표현대로 ‘지하 만리 장성’이라고 해도 좋다. 남북한과 유엔 16개국, 그리고 중국 등 19개국 젊은이들의 피가 서려있는 곳이기도 하다.
비무장 지대 일원은 자연 유산이나 문화 유산으로서도 충분한 가치가 있는 유산이라 할 수 있다. 하나의 거대한 전쟁 유산으로 규정지을 수 있다. 중국이 구축한 거대한 지하 장성과 전쟁 이후 쌍방이 설치한 콘크리트 벙커 등 각종 군사 시설은 하나의 거대한 단일 요새이며, 대표적인 전쟁 유적이라 할 수 있다.
비무장 지대 일원은 19개국 젊은이들의 피와 추억이 서린 곳이며, 전쟁 후에도 동서 냉전의 상징으로 남을 것이다. 평화를 갈구하는 인류에게 다시는 이 같은 전쟁을 치러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안겨주는 평화 기원의 유산으로 남아야 한다. 그리고,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서 충분한 자격을 갖췄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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