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한국 전쟁

비무장 지대에 지하 만리 장성 존재

마도러스 2019. 5. 31. 04:49


■ 비무장 지대에 지하 만리 장성 존재

 

● 백마 고지 전투 보다 많은 사상자를 낸 실패한 전투

 

강원도 철원군 오성산에는 삼각 고지와 저격 능선(해발 538m)이 있다중공군은 이 삼각 고지와 저격 능선을 합해 상감령(上甘領)’이라 했다. 1952년 10월 유엔군은 강원도 철원군 오성산의 전초 기지라 할 수 있는 상감령(上甘領점령 작전을 펼쳤다삼각 고지는 미 제7사단이 맡았고저격 능선은 한국군 제2사단이 주로 공격했다. ‘삼각 고지와 저격 능선은 요충지 중의 요충지였기 때문이다당시 제임스 밴플리트 미8군 사령관은 적의 생명줄인 철원평강김화의 철의 삼각 지대(Iron Triangle Zone)’를 반드시 차지해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철의 삼각 지대의 왼쪽 어깨가 백마 고지라면오른쪽 꼭짓점은 바로 오성산 일대였다.

 

강원도 철원군의 비무장 지대 이북의 오성산 지역엔 지금도 6만명의 병력이 숨을 수 있는 이른바 지하 만리 장성이 구축돼있다고 한다당시 공산군측은 상감령을 잃게 되면 오성산이 직접 위협을 받으며유엔군은 높은 지형에서 아래를 바라보게 되어 중공군이 평강 평원에서 버티기 힘들다면서 상감령 사수 작전을 펼쳤다.

 

1952년 10월 14마침내 유엔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이 전투는 무려 42일간이나 치열한 공방전을 펼쳤다중국군 자료에 따르면이 과정에서 유엔군은 3개 사단 넘는 6만 병력과 300여문 화포, 200여대의 탱크, 3000여대의 항공기를 투입했고포탄 190만발폭탄 5000여발을 쏟아 부었다중국군 역시 3개 사단(4만 명)과 산포와 야포 유탄포 133로켓포 24고사포 47박격포 292문이 35만발의 포탄을 발사했다.

 

이 전투로 상감령 산봉우리는 2m나 낮아졌고융단 폭격으로 1m가 넘는 흙먼지가 쌓였다고 한다전투 결과중국군 자료로는 3만 7000여 명(중국군 1만 1529유엔군 2만 5498), 한국군 자료로는 2만 명(중국군 1만 4815유엔군 4683), 유엔군 자료로는 2만 8000(중국군 1만 9000유엔군 9000등이 손실을 입었다.

 

한국군 전사(戰史)에서도 심지어 백마 고지 전투에서도 이렇게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지 않았으며단일 전투에서도 이렇게 많은 인명 피해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 상관도 부하도 누구인지 모르고 달려든 상감령 전투

 

이 치열한 전투의 승리자는 어느 편이었을까한마디로 말하면유엔군의 작전 실패였다. 40일이 넘는 작전 결과유엔군은 목표인 삼각 고지를 빼앗는데 실패하고저격 능선의 일부인 A고지와 돌바위 고지를 점령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물론저격 능선 전투로만 한정한다면유엔군의 승리로 평가할 수도 있겠다그러나 전반적으로는 실패한 전투라는 평이 지배적이다유엔군 작전은 겨우 저격 능선 일부만 확보하는데 그치고만 실패한 작전이었다반면 중국군은 상감령 전투는 전쟁 막바지 대공세였던 금성 전투와 함께 중국 지원군이 조선 전쟁에서 거둔 최대의 승리였다고 자화자찬했다.

 

그렇다면 왜 유엔군은 실패했는가우선 유엔군은 맨처음 작전을 펼칠 때만 해도 낙관론을 펴고 있었다삼각 고지와 저격 능선에 미군과 한국군 1개 대대씩만 투입한다 해도 단 5일간의 작전 기간에 약 200명의 인명 손실만으로도 승리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그러나그 예상은 여지없이 깨졌다. 40여 일간 엄청난 피해를 입고도 삼각 고지 확보에 실패하고저격 능선 일부만 확보하는데 그쳤기 때문이다특히 유엔군이 고전하자 미국내 여론도 급격히 악화됐다.

 

미 7사단이 맡은 삼각 고지에서 미군 2,000여 명이 전사하거나 부상하자미국 언론들은 한국 전선에서 미군이 명분 없는 싸움에 쓰러져 가고 있다고 연일 보도했다급기야 미군은 삼각 고지 전투를 한국군 2사단에게 인계한다한국군 내부에서도 우리가 미군의 희생양이냐?” 라는 반발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한국군의 경우손실된 병력을 아무 것도 모르는 신병들로 채운 상태였다신병들은 소속 부대마저 모르고 전투에 투입됐고일선 지휘관들도 자기 부하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전투를 벌였다.

 

● 거대 폭탄으로도 지하 땅굴을 소탕하는 것은 불가능

 

그러나상감령 (삼각 고지 저격 능선전투의 실패 요인은 따로 있었다중국군과 북한군이 1년 가까이 오성산 일대의 고지에 구축해 놓은 지하 땅굴 때문이었다중국군은 서해안부터 동해안까지 모든 전선에 250-287km에 폭 20~30킬로미터의 지하 갱도를 구축했었다이 지하 갱도를 중국은 지하 만리 장성이라 했다지하 땅굴의 위력은 엄청났다.

 

저격 능선 전투를 지휘한 당시 정일권 한국군 제2사단장은 이렇게 말했다. “작은 구멍에 지나지 않은 동굴 입구에 들어가면안의 통로는 사통팔달이었다중공군의 반격 속도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빨라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바로 동굴 진지에 숨어 있다가 다시 나온 것이었다.”

 

당시 중국군 제45사단은 오성산 일대에 총연장 8.8의 갱도 306개와 참호 160교통호 53그리고 대전차호 4개를 구축해놓고 있었다게다가 참호 2400개와 노루방책 2.6철조망 2.3동굴 양식 창고 61동굴 탄약 창고 65갱도와 연결된 엄폐식 취사장 140각급 지휘소 및 관측소 204개를 건설했다.

 

투항한 한국군으로부터 유엔군의 공격 첩보를 입수한 중국군은 저격 능선의 하단에서 상단까지 수직으로 연결한 폭 2m, 깊이 1.5m의 교통호를 20m 간격으로 뚫었다. 8부 능선 좌우로 연결된 교통호를 따라 8-10m 간격으로 폭격과 포격에 견딜 수 있는 엄체호를 구축했다능선 북단에 100-150명을 수용하는 대피호를 쌓기도 했다.

 

오죽하면 미군 군사 전문가들은 설령 원자 폭탄을 사용했다 해도 저격 능선과 오성산의 공산 부대를 모두 소탕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혀를 내둘렀다. “포격전이 한창일 때, F-80 제트 전투 폭격기 편대가 나타나 공산군 진지에 일제히 네이팜탄을 투하했다활활 타올라 가는 화염 그리고 푸른 하늘 높이 뭉클 솟아오르는 소형 원자운 같은 버섯형 흑연을 보면서 공산군 진지 아래 장병들은 전부 불타 없어졌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러나, 30분이 지나자 공산군 진지에서 박격포가 날아왔다.”


● 지하에 땅굴을 파서 지하 만리 장성을 구축하라!

 

오성산의 지하 갱도는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았다중공군은 한국 전쟁 당시 1951년 08월부터 38선의 모든 전선에 이른바 지하 만리 장성을 뚫어놓았다중공군은 한국 전쟁이 교착 상태로 빠졌던 1951년 08월쯤부터 방어 진지를 난공불락의 요새로 만들기 시작했다. 2차 대전의 마지노선이나 독일의 서부 방벽을 능가하는 견고한 진지였다화력의 열세를 극복하려 고지의 후사면을 이용하여 땅굴과 참호를 파고모든 병력을 수용할 수 있는 지하 요새를 구축한 것이다.

 

이는 쌍방이 협상을 통해 전쟁을 더 이상 확대시키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우면서 전선이 교착화한 데 따른 것이다왜냐면항일 전쟁과 국공 내전을 치르고 1949년 중공(중화 인민 공화국)을 출범시킨 신생국으로서는 경제 발전과 한국 전쟁을 동시에 치를 여력이 없었다따라서전쟁을 확대할 수 없었던 것이다유엔군은 우세한 화력과 포병 탱크 등을 내세워 1개 진지에 수 만 발의 포탄을 쏟아 부었다장비가 낙후돼있는 상황에서 전선 수호는 중공군의 최고 덕목이 되었다.

 

그러던 중, 1951년 06월 중순중국군 제47 군단 제140 사단은 유엔군의 맹폭격을 방어할 이른바 고양이 귀’ 모양의 동굴을 대량으로 만들었다땅굴 교통호 내부에 각기 1명당 두개씩 1m 넓이지상에서의 깊이 2-3m의 동굴을 만든 것이다. 1개 중대 혹은 1대 대대의 진지는 유엔군 1,000-2,000발 포탄 포격과 미군기 10대의 소형 폭탄의 폭격을 견딜 수 있게 되었다이렇게 만든 동굴의 효용성이 중국군 사령부는 크게 고무되었고, “거점은 반드시 갱도식으로 확보하고적의 유탄포와 포탄의 공격을 견디도록 하라는 명령을 내린다이 전법은 곧 효과를 입증했는데경기도 연천군 마량산 고지에서 빛났다. 1951년 10월 04-07일 사이 영국 군대의 영연방 사단은 매일 1-2만 발의 포탄을 퍼부었지만진지는 흔들림이 없었다중공군은 영국군의 21차례 공격을 모두 격퇴하고모두 700여명을 살상했다.”

 

● 중국군의 갱도 작전 때문에 유엔군은 고전했다.

 

급기야 중국군은 1951년 10월 21일 주요 진지는 반드시 갱도식으로 하되 깊이는 5m 이상으로 하라는 지시를 내린다이로써 서부 전선 경기도 예성강 하구에서 북한강 동쪽의 강원도 양구군 문등리까지 38선의 모든 전선에 걸쳐 8개 중국군 군단과 북한군 3개 군단을 투입하여 이른바 갱도식 방어 진지 구축 작전을 펼쳤다. “석탄이 없으면 나무를 땠고흙을 운반할 도구가 없으면손수레를 만들었다비밀 유지를 위해 낮에는 흙을 동굴 입구로 운반했고야간에 산기슭으로 옮겨 동이 틀 때까지 위장하면서 공사를 계속했다.” 결국 공산군측은 1952년 말까지 한반도 38선을 횡으로 가로지르는 250㎞ 길이의 모든 전선에 20-30의 두꺼운 땅굴 방어선을 갖추고땅굴을 거점으로 한 거점식 진지 방어 체계즉 지하 갱도를 구축했다그들의 표현대로 난공불락의 지하 만리 장성을 건설한 것이다.

 

한반도 38선 중부 전선 250㎞ 거리에 중국군이 파놓은 갱도는 7,789개 통로길이 198.7엄체호 75만 2900노천 및 엄폐식 참호 길이 3420북한군이 판 갱도는 1,730개 통로길이 88.3각종 엄체호 3만 1700참호 길이 263가 되었다이외에도 중국군과 북한군이 구축한 폭탄 대피소지휘소관측소엄폐부토치카 등은 중국군 8만 5000여개북한군 1만 6000여개였다.

 

이렇게 구축된 지하 만리 장성의 제원을 계산하면총 갱도수 9,519갱도 길이 287엄체호 78만 4600엄체호 총 길이 3683그리고 각종 시설물 10만 1500개이다지하 만리 장성의 총연장만 해도 4,000km에 육박하는 철옹성인 것이다이것은 제2차 세계대전 때에 프랑스가 구축한 마지노선이나 독일의 서부 방벽을 능가할 만큼의 진지를 지상이 아닌 지하에 건설한 셈이다공산군의 방어 진지는 공중 및 야포 공격에도 견딜 수 있을 만큼 매우 견고하게 설계되었다.

 

● 한반도 38선 중부 전선에 형성된 개미집 같은 지하 땅굴

 

당시 마오쩌둥(毛澤東중국 주석은 어떤 사단도 3개월의 식량을 보관할 지하 창고가 있었으며지하 강당도 있어 생활은 대단히 좋았다고 자랑했다공산군이 구축한 지하 요새는 고지 정상으로부터 깊이가 2m나 되는 여러 갈래의 교통호가 반사면을 따라 보급소나 취사장으로 보이는 동굴로 통하고 있었다공중에서 보면서해안에서 동해안까지 모든 전선에 걸쳐 폭 20-30의 커다란 개미집이 형성되어 있는 것 같았다.

 

마오쩌둥(毛澤東주석은 1952년 08월 해답은 땅굴을 파는 것이다, 2층으로 굴을 파면 상대가 공격해올 경우우린 1층으로 지하도로 들어간다상대가 위층을 점령해도 아래층은 우리에게 속해있다고 큰소리쳤다그것은 허풍이 아니었다국군 5사단이 강원도 양구군 가칠봉을 점령했을 때는 공산군이 진지 내에서 1개 소대가 동시에 집결하여 식사를 할 수 있을 만큼의 식당까지 마련되어 있었다중국군이 수행한 지하 만리 장성의 개념은 전쟁 후 북한군에게 고스란히 전수됐다이후 북한군 전투교리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그 결과북한군 역시 이 갱도 작전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고남한을 공포로 몰아넣은 땅굴 작전 역시 이 갱도 작전의 하나라는 것이다.

 

중국은 지하 만리 장성이 가장 위력을 발휘한 전투가 바로 상감령 전투였다고 자랑하고 있다유엔군은 갱도 위쪽에 구멍을 파고 폭약을 이용하여 폭파를 시도했다갱도 입구에 폭탄폭약통수류탄유황탄가스탄을 투척하거나 화염 발사기를 사용했다이로 인해 갱도 내부의 공기가 극도로 오염됐으며초연독가스피비린내대소변 냄새땀 냄새 등이 갱도내부에 가득해 호흡이 극도로 곤란해질 정도였다.

 

하지만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군의 갱도 작전은 위력을 발했다중국측은 갱도를 핵심으로 견고한 방어 전략을 펼쳐 1만 1000여명의 희생으로 유엔군 2만 5000여명을 살상시켰고항공기 274대를 격추시켰다고 자랑했다.

 

물론 갱도의 부작용도 있었다하루 종일 등잔불을 켜야 했기에 등불용 콩기름이 1개 군에서 월평균 10만근이나 소요됐다식수 부족으로 혀가 갈라지고코피가 터지는가 하면야맹증 환자가 급증하기도 했다중국군은 솔잎을 1시간쯤 삶아 1주일간 마시거나 개구리 알을 넣고 끓인 뒤 하루 2-3차례에 걸쳐 2일 동안 마시는 현지 주민의 민간 요법을 이용하여 환자를 치료했다고 한다.

 

중국의 상감령 전투’ 전황은 종군 기자들에 의해 시시각각으로 중국 대륙에 전해졌다중국인들은 한반도 중부 전선에서 분투하고 있는 지원군의 승전 소식에 열광했다중국이 파견한 위문 단원들은 상감령 전역의 갱도를 찾아 대륙에서 보낸 대량의 위문품과 위문 편지를 중국군에게 전달했다.

 

또한 1950년대에 바로 이 상감령 정신이 중국 대륙을 풍미했다. ‘상감령 정신이란 곧 어려움을 극복하고 조국과 인민의 승리를 위해 봉헌하는 불요불굴의 의지 그리고 일치단결로 용감하고 완강하게 전투에 임해 끝까지 승리를 쟁취하겠다.”는 정신을 뜻했다.

 

1956년에는 영화 상감령이 중국 내에서 개봉됐으며영화 마지막에 나오는 노래 나의 조국(我的祖國)’은 중국인들의 심금을 울렸다고 한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 리허설 때 가장 먼저 울려 퍼진 곡이 바로 상감령의 주제가인 나의 조국이었다. “승냥이와 이리가 침략해 오면(若是那豺狼來了)엽총으로 맞이할 것이네(迎接的有獵槍).” 노래 가사에 나오는 승냥이와 이리(豺狼)’는 곧 미군을 지칭하는 것이다.

 

● 비무장 지대는 소중한 유네스코 세계 유산이다.

 

중요한 것은 지금도 비무장 지대 일대에는 중공군이 구축한 지하 만리 장성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지금도 상감령 전투가 벌어졌던 강원도 철원군 오성산 일대에는 6만명의 병력이 숨을 수 있는 지하 만리 장성이 있다고 한다.


지금 이 순간왜 패배한 전투의 상처를 굳이 들춰보고 있는 것일까중국군이 무모한 인해전술만으로 한국 전쟁에 임했다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꼽고 싶다왜곡된 전쟁사를 바로잡는 것이야말로 오히려 우리 군의 교리 발전 뿐 아니라 교육 훈련에도 도움이 된다패배한 전투에서 배우는 반면교사의 정신도 중요한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비무장 지대 안에는 한국 전쟁 당시 중국군과 북한군이 구축한 요새가 지하에 묻혀있다는 사실이다한반도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총연장 250-287폭 20-30그리고 참호와 교통호까지 계산한다면 총연장은 4,000에 이른다단순 계산으로만 보더라도 5,000-7,000에 달한다중국식 표현대로 지하 만리 장성이라고 해도 좋다남북한과 유엔 16개국그리고 중국 등 19개국 젊은이들의 피가 서려있는 곳이기도 하다.

 

비무장 지대 일원은 자연 유산이나 문화 유산으로서도 충분한 가치가 있는 유산이라 할 수 있다하나의 거대한 전쟁 유산으로 규정지을 수 있다중국이 구축한 거대한 지하 장성과 전쟁 이후 쌍방이 설치한 콘크리트 벙커 등 각종 군사 시설은 하나의 거대한 단일 요새이며대표적인 전쟁 유적이라 할 수 있다.

 

비무장 지대 일원은 19개국 젊은이들의 피와 추억이 서린 곳이며전쟁 후에도 동서 냉전의 상징으로 남을 것이다평화를 갈구하는 인류에게 다시는 이 같은 전쟁을 치러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안겨주는 평화 기원의 유산으로 남아야 한다그리고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서 충분한 자격을 갖췄다고 할 수 있다.